영: 어느 나라에서 오셨수?
나: 한번 맞춰 보시지요.
영: 중국? 일본?
나: 노
영: 필리핀? 홍콩?
나:@@!
#장면 2. 2002년 3월 말 런던의 한 레스토랑
주영 캐나다 위원회(High Commission)로 자리를 옮긴 캐나다 친구와
저녁식사를 했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 친구 옆에 서 있었는데,
매니저쯤으로 보이는 앉아있던 사람이 일본어로 내게 인사를 해왔다.
매: 아리가또
나: 어~ 난 일본인이 아닙니다.
매: 그럼 중국인입니까?
나: 아니, 한국인입니다.
매: 아! 코리안! 하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나: 한국에 대해 아나요?
매: 6월에 월드컵하는 나라 아닙니까?
나: 네. 맞습니다. (속으로) 음.. 뭘 좀 아는군.
#장면 3. 2002년 6월 13일 수요일 밤.
런던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선배와 건축을 공부하는 후배의 ‘주도’로
정통 ‘재즈-바’란 곳을 처음 가봤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공간은 매캐한 담배연기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맨 앞의 작은 무대에서 울려 나오는 재즈 밴드의 연주솜씨만큼은 놀랍게도 일류급이었다. 여기서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그곳에 함께 머물며 잔을 마주칠 수 있을 동안만 유효할 한없이 허무한 ‘만남’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긴 구렛나루를 기른 히피처럼 보이는 한 놈이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니?”
나: 알아맞춰 보렴.(이건 내가 자주 쓰는 대답이다.)
히피: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한국!
나: 오! 단번에 맞춘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어떻게 알았니?
히피: 음. 그냥, 월드컵인지라..
그 못생긴 히피 옆에 앉아있던 아주 이쁘게 생긴 여자가 ‘화답’을 했다.
“나, 한국팀 축구하는 거 봤다!”
알고 보니, 그녀는 파리에서 왔고, 히피는 호주에서 온 베이스 기타 연주자란다. 이렇게 국적이 서로 다른 세 명은 한동안 축구를 소재로 떠들어 댔다. 옆을 지나가던 다른 친구가(독일인이었다.) 자기는 한국이 ‘세컨 라운드’(16강 진출을 의미)에 올라가는데 ‘돈’을 걸었다고 말을 걸어왔다.
(이름이 토마스라는 그 놈은 지금쯤 아주 신이 나 있을 것이다.)
#장면 4. 2002년 6월 15일 저녁
브래드포드 대학 바로 앞에 있는 ‘잭슨’이란 이름의 편의점 계산대 앞에 줄(Queue)을 서 있었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이 그날 있었던 잉글랜드의 16강 진출에 흥분해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파키스탄係의 한 청년이 불쑥 한국인 아니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어제 한국과 포르투갈과의 경기를 봤다며 정말 한국팀이 잘 싸우더라며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이 16강에 오른 것은 정말 기쁘지만, 왠지 포르투갈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미국을 완전히 이기고 포루트갈과 같이 16강에 올랐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멕시코 친구는 자기들이 미국을 끝장낼 테니 ‘염려말라’는 김빠지는 말을 해왔지만, 피구의 멋진 플레이를 더 볼 수 없게 된 것도 아쉬운데, 얄미운(?) 미국이 ‘漁父之利’로16강에 오르기까지 했으니..(그런데, 오늘 8강까지 가고 말았군요.)
영국에서 최근 새롭게 느끼게 되는 한국의 위상을 볼 수 있는 사례였습니다.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만나는 어떤 서구인도 저를 한국인으로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학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지 않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지요.
갑자기 한국인과 일본인을 식별할 수 있는 유럽인들의 변별력이 높아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동안 영국인이나 유럽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 인지도가 낮았던 것이 월드컵 경기를 통해 나타난 놀라운 한국팀의 경기력이 이곳에 있는 많은 외국인들의 인식에 한국이란 나라를 인상 깊게 각인 시켰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아무리 노벨상을 받아도, 또는 세계 과학발전이나 평화에 이바지 한다 해도 한 국가의 인지도와 대중성을 단번에 이만큼 올릴 수 있는 길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한국팀의 월드컵 선전은 단순히 축구경기의 승패이상을 영국 땅에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1만 3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이 아득한 땅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한국경기를 보는 소회는 남다릅니다. 체력강화에 역점을 뒀다는 히딩크 감독의 전략을 읽으며 ‘체력은 국력이다’란 초등학교 시절 자주 들었던 표어는 ‘국력은 체력으로 말해진다’로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중 어떤 11명을 구성해 놓은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인식에 한국이란 나라를 긍정적으로 뚜렷이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인지 싶습니다.
이제까지 극동의 한 아시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듯 한데, 월드컵을 통해 전세계의 중심국가 중 하나로 급부상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외국에서 즐기는 월드컵이 주는 또다른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 전세계가 하나로 묶이는 ‘세계화’는 실상 ‘경제’보다는 ‘매스 미디어’의힘에 의해 그 실체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