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신고 어려운 성범죄 피해자, 10대 미혼모, 외국인 노동자
연간 100여명 베이비박스 맡겨져…이용자 상담률 98%"
10년간 베이비박스 유기 혐의 재판 실형은 1건 무죄 1건도
"친모 바로 떠나지 않고 상담 거쳐" 정식 보호 위탁
경찰 수사·처벌 어려움…부정적 인식으로 범죄화 위험성도
주사랑공동체교회 베이비박스. 김정록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국내 1호 베이비박스가 있는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에 가기는 쉽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길가에서 내리면 가파른 오르막을 적어도 10여 분은 걸어야 한다. 무더위 아래 땀을 한 바가지 쏟고 나서야 베이비박스에 닿을 수 있었다.
"당신이 이 아이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주세요."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꾸며진 베이비박스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었다. 닫혀 있는 베이비박스 문을 당겨 열면 아이를 놓일 수 있는 담요와 CCTV가 비치돼 있다.
누군가 박스를 열면 벨이 울리고, 주사랑공동체 직원들은 곧바로 CCTV를 확인한다. 한 직원이 안에서 아이를 받는 동안 다른 직원은 밖으로 달려 나와 아이를 맡긴 사람과 상담한다. 베이비박스 이용자 상담률은 98%에 이른다. 매년 아이 100여 명이 이 베이비박스에 맡겨진다.
주사랑공동체교회 베이비룸. 김정록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주사랑공동체 양창수 후원홍보부과장은 "이곳에 온 어머니들은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분들이다. 성범죄 피해자일 수 있고, 외도일 수 있고, 10대 미혼모일 수 있고, 외국인 노동자일 수 있다"고 말했다.
베이비박스 아기 '무죄'…"상담받고 정식으로 보호 위탁"
최근 출생 미신고 영아 사건이 논란이 일면서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간 친모를 대상으로도 경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둔 경우까지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베이비박스 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경우 대부분 유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정작 실형으로 이어진 경우는 1건에 그쳤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유기했다면 원칙적으로 형법상 유기죄와 영아유기죄를 적용할 수 있다. 친모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놓고 갔다면 유기죄가 성립한다. 다만 아이를 유기했지만 정상을 참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유기죄보다 처벌이 가벼운 영아유기죄가 적용된다.
가정불화를 겪던 A씨는 2016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A씨는 2020년 초 코로나19가 유행하자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성매매를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원하지 않게 임신했다.
가족과 연락이 두절됐고 친부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던 A씨는 같은 해 11월 서울 서초구의 한 고시텔에서 혼자 아기를 출산했다. A씨는 아기를 수건과 담요로 싸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 맞은편에 놓인 고무로 만들어진 원형 통 위에 올려두고 왔다.
하지만 당시 최저기온이 3.2도까지 떨어진 추운 날씨에 아기는 사망했다.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주사랑공동체교회 베이비박스. 김정록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해 7월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영아유기와 관련해 무죄 판결이 확정되기도 했다. 친모가 2018년 7월과 2021년 4월 각각 영아 1명씩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에 두고 온 사건이었다.
재판부는 친모가 아기를 '유기'한 것이 아니라 '맡긴'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교회에 아기를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이 항상 상주한 점, 친모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당자와 상담을 거친 점" 등을 무죄 판단의 근거로 활용했다.
이 사건 변호인 연취현 변호사는 "상담을 받고 아이를 정식으로 보호를 위탁한 것으로 보고 영아 유기로 볼 수 없다고 보고 무죄 판단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출생 미신고 영아 상당수 베이비박스…경찰 수사도 고민
이 때문에 출생 미신고 영아 사건들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도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에서 협조 요청 또는 수사 의뢰된 출생 미신고 영아 상당수가 베이비박스에 신생아를 놓고 간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울경찰청은 전날 출생 미신고 영아 사건 38건에 대해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 24건에 대해 법리 판단을 놓고 고심 중이다.
우선 경찰은 정부와 지자체에서 통보받은 사례 중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경우,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유기죄나 영아유기죄 등 혐의를 선별해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유기 과정에서 베이비박스 설치 기관과 상담했으면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경찰청은 접수된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 24건을 전수 조사해 베이비박스 설치 기관과 상담한 사실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주사랑공동체교회. 김정록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만 베이비박스 유기 사건과 관련해 마냥 처벌만 하기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 수사로 베이비박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해질수록 자칫 불법 입양이나 영아 살해 등 극단적 범죄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창수 과장은 "출생 미신고 2천여 건 중에 900여 명이 베이비박스라고 한다. 그럼 그 900여 명 생명이 베이비박스 덕분에 보호되고 살 수 있던 것"이라며 "시설에 있든 입양이 됐든 생명을 살린 것이다. 그렇게 아이를 살리려고 왔던 어머님이 죄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베이비박스가 없었다면) 그 900여 명 중 1~2명이라도 범죄의 대상이 됐을지 어떻게 알겠나"라고 강조했다.
연취현 변호사는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까지 전부 어머니를 불러서 경찰이 조사하는 것은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라며 "이미 가정을 이뤘고 다른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평온한 가정을 깰 수 있다"며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