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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마 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12 / [위선자에 대한 책망;막12:38-40,눅11:37-52,20:45-47] 그때에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산다. 그들은 기도할 때 이마나 팔에 매다는 성구함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거룩하게 꾸민다. 6) 그리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만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만을 찾는다. 7) 길에 나서면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랍비'라거나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 8)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라지 말라. 하나님만이 너희의 랍비이시고 너희는 모두가 형제이기 때문이다. 9) 또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 그렇게 불러야 할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려서도 안 된다.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중에 가장 낮아져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인정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그것들을 지속해서 누리며 열매를 따 먹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인간군상의 모델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1-2) 본 단락에서 여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앉은 자리를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원래 모세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며 백성들을 겸손히 섬겨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존경과 섬김 받기 좋아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위선에 위선을 더하는 것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3-7)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것은 다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즉 삶은 따라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언행 불일치의 예들을 보면 그들은 율법의 무거운 짐들을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하고, 그 짐을 힘껏 나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마 11:28).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성별 된 자로 돋보이고 싶어 말씀의 경문 상자를 크게 만들어 차고, 옷 술도 길게 만들어 늘어뜨리고 다니기 좋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제공받는 것,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8-12)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랍비라, 아버지라 칭함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계와 모순을 지닌 불완전한 존재로서 모두가 형제일 뿐이지 선생이나 아버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분만이 한 분 아버지이시오, 영원한 랍비 곧 선생이며, 영원한 지도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적용: 우리가 살아서 죽을 때까지 알게 모르게 자신 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크고 작은 위선과 사욕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온전히 몰아낼 수 있을까요?
정상에 올라서 인기 있는 존재가 되면 그 인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예전보다 더 노력해야 합니다. 정상은 발 디딜 곳이 적기에 거기서는 불안해서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평지에 집을 짓고 살지 정상에 집을 짓고 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한 채 믿음 없이 사는 사람들은 정상의 매력과 인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질주하다가 어느 순간에 똑 부러지는 인생이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고 있습니다. 그 비참한 최후를 우리는 알기에 현재 비록 초라한 모습이라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설 교 >
섬기는 사람들
마 23:11-12 / 박봉수 목사
동물의 왕국을 들여다보면 이 동물의 왕국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들이 있습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고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힌다는 원칙입니다. 그리고 강한 자라도 병들고 약해지면 도태된다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슴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한 걸음 빨라야 살아남고, 사자는 가장 느린 사슴보다 한 걸음 빨라야 살아남는다. 오늘도 이런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저 동물의 왕국에서 쉴 새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는 어떻습니다. 인간 사회 안에도 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소풍을 가거나 수련회 가면 즐겨하던 게임 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원 주변을 돌게 합니다. 가운데 의자를 원 주변을 돌고 있는 사람의 숫자보다 적게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다가 진행하는 사람이 호루라기를 불면 먼저 가서 앉는 사람은 살아남고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물러나는 게임입니다. 의자를 한 개씩 치우면서 마지막 남는 사람을 가리는 게임입니다. 그 의자를 차지하려고 원 주변을 돌면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밀쳐 내기도하고 남보다 한 걸음 빨리 뛰려고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모두가 경쟁자고 모두가 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이 이렇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남보다 한 걸음 빨리 가려고 조기교육이다, 영재학원이다, 영어학원이다, 놀 틈이 없습니다. 직장인들은 몇 자리 안 되는 그 윗자리를 향해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달리고 또 달립니다. 모두가 남보다 한 발 빨리 가려고, 남보다 높이 오르려고, 남보다 많이 가지려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뛰고 또 뜁니다.
그러다 보니 너나 모두 경쟁 상대이고, 네 성공은 곧 내 실패라고 느끼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쟁의 긴장 속에서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고, 때론 경쟁에서 도태되어 큰 상처로 마음 아파하고, 때론 언제 밀려날 지 몰라 불안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성공하는 비결', '영어를 정복하는 길', '재테크의 성공사례', 뭐 이런 것들입니다. 남보다 빨리 높아지고, 남보다 빨리 출세하고, 남보다 많이 가질 수 있는 비결 같은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낮아지라, 남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그 어느 속에서도 주님을 우리에게 남보다 성공해라, 남보다 출세해라, 남보다 부자가 되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남보다 낮아지고, 남을 섬기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하고는 전혀 다른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말씀입니다.
아마도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원 세상 물정 몰라서 그렇지 이렇게 치열한 경쟁 시대에 남보다 높아지면 높아져야지 낮아지라고? 너나 없이 팔 걷어 부치고 경쟁하는 마당에 남의 밑에 들어가서 그를 섬기라고? 망하고 굶어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주님은 왜 낮아지라! 섬기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이 세상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먼저 에덴 동산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산, 인간이 타락하기 전, 사탄이 지배하기 전 에덴 동산에는 약육강식이 없었습니다. 적자생존도 없었습니다. 치열한 경쟁도, 싸움도, 다툼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서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경쟁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로가 경쟁하고, 서로가 싸우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탄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서로 경쟁하고 서로 다투는 일들이 도처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 65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환상 가운데 보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
바로 약육강식, 적자생존, 경쟁, 싸움 다툼 이런 것들이 없는 나라 그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 안에는 이런 샬롬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이 세상은 경쟁과 다툼으로 가득 차 있지만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양보하는 일들만 가득 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경쟁하고, 서로 높은 자리에서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싶어하는 이 세상 풍조를 물리치고 서로 높이고, 서로 섬겨주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소개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섬기라, 낮아지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의 제자라면 우리가 사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양식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그 하나가 겸손이고, 다른 하나가 섬김입니다.
겸손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간단히 말하면 자기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말씀 속에는 주님께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를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높아질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평도 담겨져 있습니다.
창조 당시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자로 계시고, 인간은 청지기로 있고, 그리고 모든 만물은 그 아래 돌봄을 받는 3층 구조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서 이외는 인정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같은 인간끼리 서열을 정하고 높고 낮음의 구조를 만들고자 해왔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차별을 만들어 높고 낮음을 정하고자 했습니다. 힘있고 없는 사람들 사이에 계급을 정해서 높고 낮음을 정하고자 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높고 낮음을 정하고자 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높고 낮음을 정하고자 했습니다.
이 높고 낮음의 인위적인 구조 속에서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려왔고,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려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높아지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고, 언제나 높아지려는 다툼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같은 인간 사이에 높고 낮음을 인정치 않으셨습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청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그 청원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라"
하나님께서는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이런 질서, 이런 구조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뒤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3층 구조를 깨려고 무척이나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바벨탑을 세워 하나님 자리까지 오르려 했습니다. 같은 인간 사이에 통치제도를 세워 높고 낮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뒤에 사탄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 4장에 보면 사탄의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세 번째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는 자기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 뒤에는 모든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 주겠다는 유혹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 높은 자리로 올라가도록 부축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가서 높은 자리에 올라 호령해보고, 통치해 보고, 권력을 휘둘러보고자 비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은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높아지려 하지 말고 낮아지려 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어쩔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서 남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낮추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구조,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만들어진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바로 지키고자 함입니다.
20세기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슈바이쳐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파리에 내려서 시상식 장소인 덴마크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 때 슈바이쳐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같은 기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기자들은 슈바이처는 특등실에 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식 박사 학위가 3개이고, 명예 박사학위가 20개이고, 영국 황실로부터 백작의 칭호를 받은 귀족입니다. 또 노벨 평화상의 막대한 상금도 받을 분이었습니다. 당연히 특등실에 타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1등석을 뒤져도 없습니다. 2등석에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등칸에 갔습니다. 거기 슈바이처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과 얽혀서 그들을 진맥하고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십니까? 그 때 슈바이쳐가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제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필요로 한 곳을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슈바이쳐는 결코 높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곳을 찾아 자기를 필요로 한 사람 곁으로 가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슈바이쳐가 낮아지려고 해서 정말 낮아졌습니까? 오히려 그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다면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토록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사람 그를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경멸합니다.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사람 그를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존경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썼습니다. 빌 2:1-5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섬김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야 할 아름다운 삶의 양식 또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사람들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정말 다양합니다. 특히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어떻게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나?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심지어 저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느껴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양하고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입니다. 자기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이기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자기 우선 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고, 자기 중심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오기 위해서 차를 몰고 우리 교회 앞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좌우에 차들이 눈 속에 파 묻혀서 주차되어있었습니다. 길은 빙판 길이었습니다. 골목길에 차를 피할 곳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까지 거의 2/3정도 왔습니다. 저 위쪽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은 양보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미 골목길을 거의 다 통과해 왔고, 그 사람은 이제 막 골목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뒤로 조금만 후진하면 우리 교회 마당으로 피할 수 있었지만 저는 저 큰 길가까지 후진으로 비켜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사람이 양보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전조등을 끄고 조금 기다렸습니다. 그 때 그 사람도 전조등을 끄고 팔 장을 끼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양보할 수 없으니 당신이 물러서시오 하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내려서 따지고 싶지만, 전후 사정을 다 말하고 교회 마당으로 양보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눈감고 버티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가는 한 바탕 싸움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나긴 빙판 골목길을 후진하면서 뒤로 양보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양보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합니다.
섬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우선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무엇인가 행동하는 것 이것이 섬김입니다.
미국의 대학가의 한 교회가 다른 교회와 달리 청년부가 크게 부흥한다고 해서 찾아가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그 교회에 청년부가 크게 부흥하게 된 동기가 된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교회는 전형적인 장로교회로 주일이면 모두가 정장차림이었고, 거의 정해진 자기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전통적인 교회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가 막 시작됐는데 대학생 한 사람이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그것도 맨발로 들어섰습니다. 기웃 기웃거리다가 자리를 찾지 못해서 중앙 통로 맨 앞 카페트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들 언짢은 표정으로 그 학생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누르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교회 장로님이 정장 차림으로 중앙 통로를 걸어서 그 학생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를 주시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장로님은 그 학생 옆에 카페트 위에 자리를 잡고 철썩 주저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 옆에서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그 예배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이 교회는 청년을 이해하는 교회라고 소문이 나서 청년부가 놀랍게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사는 사람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진정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섬김을 알고 섬김을 실천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막 10:4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우리도 주님처럼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1년에 한번씩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교회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님들이 화장실 청소도 하십니다.
한 장로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십 년 교회를 다녔지만 처음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이번처럼 크게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실천할 때 우리를 위해 허리춤에 수건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발을 씻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없는 교회
마 23:8-12 / 박은호 목사
여러분,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저도 지난 화요일 오후7시 경에 출발해서 다음날 새벽 5시 경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는데, 고속도로에 눈이 펑펑 쏟아져 10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그리 힘들지 않게 즐거운 귀향길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설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인상 깊었던 일은 없으셨는지요? 저는, 이번 설 명절을 보내면서 "우리 집안 밥상풍속도"가 어떤가에 말없는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해보았습니다. 저희 집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예수 믿기 시작한 흔히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지만, 제가 자라면서 받았던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왠지 모르게 전통적인 유교적인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고향에서 뒷동산 뛰어다니며 성장했는데, 그 때 당시 저희 집은 대가족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장남이셨기에 대학재학 중에 일찍 결혼하셨고, 결혼하신 작은아버지와 그 외의 삼촌들, 저와 함께 성장하는 막내고모님과도 함께 살았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온 가족이 사랑방에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또 다른 기억은, 가족 식사 시간인데 특히 아침, 저녁 시간에는 온 가족이 함께 사랑방에 모여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방에 보이지 않는 두 분이 계셨는데 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입니다. 두 분은, 식사 시간에도 방에 계시지 않고 늘 부엌에 계셨고, 가끔 엄마 찾아서 부엌에 나가보면 부뚜막에 걸터앉아서 어린 눈에 보기에도 무엇인가 쫒기는 듯한 모습으로 급하게 바가지에 담긴 밥을 드시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왜 엄마는 부뚜막에서 밥 드세요?"하고 여쭈면, "응, 엄마는 할 일이 많아서 여기서 밥 먹는 거란다"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그렇게 받는 맏며느리이셨지만, 이상하게도 사랑방 식탁에는 어머니의 밥그릇과 자리가 없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니 부뚜막에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종종 본 것보다, 더 많이 보고 자란 것은 사랑방 식탁에서 식사하는 방안 풍경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겸상해서 드시고, 또 다른 상에는 어른들과 고모들 저는 장손의 특권을 누리면서 할아버지 상, 아버지 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참 좋은 가정이었지만, 그래도 식사 시간 밥상과 사랑방에 흐르는 분위기는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와 장남이신 저희 아버지를 중심으로 유교적인 질서와 예의범절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보이지 않는 서열의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밥상이었습니다. 한 동안 그것을 오래 잊어버렸는데, 이번 설에 아버지 집에 모인 형제들과 가족들이 함께 먹는 아침밥상을 받으면서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유심히 식구들의 동태를 살펴보았는데,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우리 집안과 우리 가정의 제일 어른이신 아버지께서 밥상 자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의식적으로 자리 잘 챙기지 않는 편이라서 아무데나 앉아서 밥 먹으려고 했고, 사위들과 동생들, 조카들, 제수 씨, 제 아내, 어머니 모두가 한 상에 각자 밥 먹기 좋은 자리에 앉아서 자유롭게 즐거운 식사를 했습니다. 저는, 이번 설 명절 우리 집 식탁풍속도를 지켜보면서 서열의식 때문에 자리 신경 쓰지 않고, 아무런 긴장 없이, 가족들이 사랑스럽고 귀해서, 한 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그 자리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혼자말로 {야, 참 좋다. 그래 우리 집 밥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구나.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이지…}하면서 혼자 소리쳤습니다.
우리 집 밥상의 變化의 中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상(狀)"에 대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 狀"에 대한 變化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유교적 서열의식과 예의범절의 중심자리를 차지하던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아버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의 아버지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른이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아버지가 계시는 겁니다. 새로운 어른이 계시는 것이지요. 아침 먹고, 가정예배 드린 후 아버지 모시고 목욕탕에 갔는데, 저와 동생이 아버지 목욕하시는 것 보살펴 드리고 등도 밀어드렸습니다. 이번 설을 보내면서 아버지 연세가 벌써 칠순이 가까우시지만, 늙어 가시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우리 아버지 참 좋다, 너무 귀한 어른이시지} 하는 감사와 더불어 {아버지는 우리 가정의 福의 根源이신 분이야}하는 마음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마가복음 10, 29-30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좀 유심히 관찰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버린 모든 것들을 지금 이 세상에서도 되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집도, 형제도, 자매도, 어머니도, 자녀도, 토지도 되찾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버린 것들 중에 되찾을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되찾는다고 말씀하신 것 중에, 빠진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되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첫 번 쓴, 저자 마가는 매우 치밀한 저자입니다. 용어 선택 하나하나부터, 문장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매우 치밀하고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젊은 복음서 저자입니다. 그런 저자 마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가 되찾게 될 복을 열거하면서, 다른 것들은 버렸다할지라도 다사 찾게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백 배나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를 버린 것에 대해서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말은 다시 받게 될 명목에서 빼버렸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라는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것이 결코 우연이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마가를 통한 매우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Jesus Christ)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복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가정과 교회공동체에는 "아버지들"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복음 중 하나는, "부정적(否定的)인 아버지 상(狀)"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拒否)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拒否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지배구조의 상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지배의식"입니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지배의식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 "宗敎·社會的인 아버지"의 의미는 "지배하는 힘"을 상징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면, 지배자요, 우두머리요, 힘의 상징입니다. 그 아버지 상(狀)을 버리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인 새로운 가정이 이루어지고, 세속적인 사회구조와 다른 새로운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배의식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가정이 세워지고, 진정한 교회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인, 공생애 마지막 주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면서, 마지막 유언 같은 예수님이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인 福音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또한 너희는 땅에 있는 누구를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 8-12)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지배의식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고, 명예를 얻고, 남을 다스리는 자리에 서고, 지배하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는 그 아버지 상(狀)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 복음을 전하면서 당시 초대교회 안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지배의식의 상징인 아버지 상에 대하여 비상(非常)하게 날카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자들에게, "아버지"나 "랍비"라는 칭호뿐만 아니라, "지도자"라는 직능적인 호칭마저 부르지 못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 꿇고 질문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선한 선생(랍비)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말을 걸자마자, 예수님을 향해 부른 그 호칭 때문에, 그가 무안할 정도로 예리한 표현으로 그의 호칭의 의미를 바로 잡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 18). 여기서,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는 그 의도 속에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중심을 간파하신 이유 때문입니다(마 19, 16-17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우리 예수님은, 그냥 설렁설렁 대충 대충 사람 눈 속이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고, 언제나 그 中心과 意圖가 무엇인가를 보시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단 한 순간도 그냥 대충 넘어가시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 랍비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시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부하신 랍비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당시 랍비들에게 통속적으로 적용되고 있던 관례에 대한 부정(否定)입니다.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철저하게 섬김을 받는 섬김의 대상자였습니다. 제자들은 랍비들의 몸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랍비를 예수님이 거부하신 겁니다.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섬기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자", "다스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랍비이셨지만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고, 제자들을 지배하고 제자들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자기 발을 씻기도록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닦아 주시면서 만찬 시중을 드시는 분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있느냐? 섬김을 받는 자로 있느냐? 지배하는 자로 있느냐? 다스리는 자로 있느냐? 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민하셨고, 철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분기점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그 어느 누구도 저와 여러분을 다스릴 자가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섬기는 자로 서 있을 뿐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섬김의 대상이어야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의 의미는, 내가 무슨 봉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무슨 봉사를 한다는 것 때문에, 내가 섬기는 자로 공동체 안에 서 있는 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섬김은, 봉사하는 자가 되라는 봉사명령이 아닙니다. 무슨 사역을 하는 자가 되라는 사역명령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의 의미는, "世俗的인 아버지 狀"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지배의식"을 철저하게 내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남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명령하고, 군림하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바로 그 마음, 그 자세, 그 가치관, 그 傳統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수많은 使役이 있고 奉事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수많은 봉사자들과 사역하는 자들 중에는 형제를 섬기는 자도 있지만, 그 섬김의 기회를 도리어 형제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아버지의 자리"로 바꾸어 버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물론 우리 교회 여러 사역부서가 다 좋은 섬김의 사역이 되기를 기대하지만, 특별히 제 마음에 두고 기대하면서 눈여겨보는 사역팀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봉사부서들이 조직되기 전에, 교역자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아니라 거의 자생적으로 조직된 "이웃사랑모임"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지금은 "이웃사랑모임"이 앞장서서 교회 주변에 있는 쪽방봉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웃사랑모임은 조직중심의 사역팀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냥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름 그대로 하나의 "모임"일뿐입니다. 지금 약 50여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저는 "이웃사랑모임"이 처음 시작할 때의 그 마음과 정신으로 계속해서 끝까지 사역하는 부서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주변 쪽방봉사를 위해서 "이웃사랑모임"이 만들어 질 때, 30여명이 처음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또 어떻게 일할까? 서로 간단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는데, 제가 그 때 첫모임을 할 때 참석했습니다. 첫 모임에서 논의되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임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가칭 "이웃사랑모임"이라고 부르면서 모였습니다. 그 때, 어느 교우 한 분이 이 일이 잘 되려면, "이웃사랑선교회"라는 비중 있는 이름을 내걸고, 회장도 뽑고 조직을 잘 해야 일이 잘 진행될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의견을 제시한 분에게는 조금 죄송스러웠지만, 그 案에 대해서 다소 반대하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웃사랑선교회라고 하는 것보다, 그냥 지금까지 가칭으로 불렀지만 그저 소박하게 "이웃사랑모임"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느냐고 처음 모임에서 "제 고집"을 좀 부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부르고 싶은 취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을 보면, 무슨 무슨 "선교회"라는 조직은 참 많습니다. 그 모임마다 거기에는 무슨 무슨 선교회 "회장"이 있고, 총무 서기 회계 등의 조직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實狀)을 가만히 보면, 선교를 위한 모임이기보다는 또 하나의 인위적인 조직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는 집단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더러는 몇 몇 사람들의 낯을 세우기 위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 선교회들과 구별되는 뜻에서 그저 소박하게 어려운 이웃을 섬기려는 뜻을 가진 자들의 "모임"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 취지 설명을 듣고 모인 분들이 그 뜻을 받아들이셔서 "이웃사랑모임" 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웃사랑모임"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웃사랑모임에는 어느 모임이나 회(會)의 우두머리격인 "會長"이 없습니다. 그저 이웃사랑모임 회원들의 사역을 도와주고 심부름 역할을 하는 "執事총무"밖에 없습니다. 회장도 없이 그저 총무가 일하는 "모임" 정도에 불과한 사역팀이지만, 저는 "이웃사랑모임"에 會長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가 추구해야할 모든 사역의 방향(方向)과 정신(精神)이라고 생각합니다. 금년부터 우리 교회에도 아직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제직회가 조직이 되었고, 각 부서에 부장도 세우고, 또 앞으로 조직될 사역팀들마다 책임자들도 세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무슨 봉사를 하느냐? 무슨 사역을 하느냐? 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또 내가 무슨 봉사를 하고 사역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문제는,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奉事를 하면서, 使役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남과 구별되는 지위나 신분이나 자리를 찾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나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앉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형제에 대하여, 공동체에 대하여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많은 교회나 가정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그 사람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 사람의 나라"일 뿐입니다.
우리가 목사로 부름을 받았든, 장로로 부름을 받았든, 집사와 권사로 부름을 받았든, 이웃사랑모임으로 부름을 받았든, 주차봉사위원으로 부름을 받았든, 찬양대원으로 부름을 받았든, 교사로 부름을 받았든, 그 무슨 일에 무슨 직임으로 부름을 받았든, 우리는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섬기는 자일뿐입니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다스리는 자로 군림하는, 자로, 지배하는 자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 분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있는 그 곳이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경영하시는 일터이든, 형제에 대하여 다스리는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고, 섬기는 자로 대할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에서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멘.
일만 스승과 한 분 아버지
마 23:1-12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말씀에서 일만 스승과 한 분 아버지 그렇게 제목을 삼았다. 사실은 마23:9에 보면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아비라 하지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했다. 고전4:15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할렐루야!
오늘 이 본문에서 스승이라는 그것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 아비라 하는것에 좀 뜻을 두었다. 좀 이상한 강조가 되겠지만 9절 말씀에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날 낳은 그분을 아버지라 하지말라.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참 아버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문제를 꼬집어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백한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그 다음에 자라오는 과정에서 많은 스승이 필요하다. 또 선배도 필요하고 가르침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를 낳은 분은 한분이시다. 아버지는 많지 않다. 만약에 아버지가 많다면 그건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표면적으로 아버지가 많다고 해도 나를 낳은 아버지는 한분뿐이다. 둘 셋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하면 생명의 귀중성을 말한다. 그리고 생명안에 모든 것이 감추어져있다. 이것은 백번 천번 강조를 해도 부족하다 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되겠다.
마16:26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랬다. 목숨안에 생명안에 다 들어있다. 사람이 생명받아서 이땅에 태어나는 동시에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 나온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다. 그래서 늘 강조하는 말이지만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깨닫는 때에 비로서 그가 신앙으로 고백한 것이 여호와 이레(창22:14) 그랬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믿는 것이 좋다. 그런정도가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 그 생명잡고 그 언약속에 섰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보장이 된다. 그 약속이다. 이것을 누리고 산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의 기쁨을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찬양돌린다 그럴때에 뭐 찬양하고 영광돌린다고 손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날때에 아이가 아~ 기분나빠 사는 것이 괴롭다. 이러면 괜히 옆에 듣는 부모는 굉장히 괴롭다. 그렇다.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아이가 정말 좋다. 사는게 즐겁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러면 그냥 옆에 있는 부모가 그게 기쁨이 된다. 여러분들이 이땅에서 예수그리스도 생명을 누리고 찬양하는거 기뻐하는거 감사하는거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뭐 여러분이 하나님 기뻐한다고 하나님찬양그러고 자기는 다 죽어가면서 이 말을 오늘 조금 알아들어야 한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진짜 받았느냐?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다음에 그 생명을 받았다면 생명의 가치를 누려야 한다. 생명의 기쁨을 우리가 누려야 한다. 왜냐 생명은 반드시 기쁨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따라서 오는 진실한 증거들이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구원이라할때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다(롬10:10). 우리가 이 사실이 바로 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오늘 아버지 특별히 하나님을 여기에다가 아버지를 포인트를 두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생명이다. 여러분과 제가 오직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다. 이래서 성경에 행4:12에 보면 이 생명을 여러방면으로 여러 가지 수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했다. 천하인간에게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적이 없다. 그런데 바로 천하인간에게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적이 없다고 그랬는데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은 다른 이름이 너무 강조되어있고 다른 방법이 너무 강조가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안에서도 이제는 예수그리스도말고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교회말고도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이렇게 나온 것이 많이 말을 들었는데 다원론이라는 것이 나와있다. 그것이 교회에서 그것도 신학자들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나도 모르게 오직 그리스도밖에 뿐이다. 예수그리스도 말하자면 교회와서 어떤 이들이 하는 말처럼 지겹도록 송현교회라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뿐이다. 듣기 싫어못가겠다. 그게 복이다. 듣고 싶어도 말안해주는게 오늘날의 시대인데 그게 복이다. 정말 예수그리스도 안들을 수 없어 앉았다하면 듣는다. 교회뿐 아니라 구역예배 두세명이 모였다고 하면 다락방을 비롯해서 일주일 내내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만 다른 것 없다. 다른걸로는 안된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충만하게 되고 그뿐아니라 그 그리스도 이름을 통해서 그리스도 이름이 임하는 장소마다 흑암세력이 깨어져 버린다. 보이지 않게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이 축복과 역사의 자리에 앉았다. 그게 복중에 복이다. 어찌하다가 그 자리에 앉았는가? 내가 원해서 앉은게 아니다. 이걸 가지고 은혜라고 한다. 송현교회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날마다 들을 수 있는 교회에 앉았다는 자체가 축복중에 축복이요 은혜중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축복과 역사는 다른 이름으로는 없다. 그런데 다른 이름으로 할 수 없다하면 그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어떻게 듣느냐? 너무 상식적이요 너무 많이 들었는데 이걸 소홀히 하고 그냥 보통으로 넘긴다. 요1:12에 문제나 사건이나 일이 생겼을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해결해 주시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이다. 전도한다 뭘한다 이거 다 내어놓고 말하자면 여러분에게 이 축복과 은혜를 허락해주시고 그 축복과 은혜가 지속적으로 허락될 뿐만 아니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방법은 딱한가지이다. 그게 뭔가하면 성경에 약속하고도 약속한 마28:16~20까지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난중에 있는 사람이 있느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그리스도 그 분 이름 부를때마다 그 분 이름 부른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예수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내 마음에 모시는 순간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방법으로 모든 문제 해결하겠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그래서 이 사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내안에 오셔야 한다. 이것은 신비중에 신비라고 늘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역사는 보통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해서 이 축복의 역사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했다고 강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축복의 역사를 여러분들은 크고 복된 역사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가치를 여기에다가 두셨다. 그리고 이일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희생정도가 아니다. 그래서 캐냐에 갔던 이야기를 했다. 마샤이족을 만나보니 소똥집에서 얼마나 고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연기를 피워서 눈이 빨갛게 있는데 나는 원래부터 사람들이 눈이 빨간줄 알았는데 연기를 밤새도록 맞으니까 빠져나가면 추우니깐 낮에는 찌는 듯이 덮고 저녁에는 반대로 춥다. 불을 피워놓는데 불을 피워놓는 일들이 문화시설이 안되어서 움박을 만들어놓고 복판에다가 그냥 불을 피운다. 불을 피워놓고는 연기가 나가게 되는데 연기가 나가면 뜨거운 것이 나가버리니까 이것을 못 나가도록 막아놓았다. 그속에서 잠을 잔다. 생각을 해보라. 눈이 얼마나 연기에 씌여서 눈이 따가운데도 할 수 없다. 막아놓고 있기 때문에 하루밤만 자고나도 눈이 빨갛다. 그걸 매일 밤 자고 나니까 그 속에서 아이들을 일주일만 보냈다가 훈련시키고 왔다. 그러면 생각도 마음도 완전 바꾸어져서 아침마다 일어나서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한국태어난 것이 진짜 감사합니다. 이럴 것이다. 일주일은 너무 길어서 죽을 것 같고 이틀만 갔다와도 도저히 여기는 건디기 힘들다. 할 수 없고 잘 수 없다. 들어갈 수 없다. 그것도 움막이나 큰것도 아니고 조그만한 곳에서 그렇게 산다. 우리 하나님이 하늘보좌 비워놓고 어디에 오셨는가? 이 땅에 마샤이족 움막보다도 더 이상한곳에 더 이상한 여러분의 어디에 그것도 여러분과 함께 자도 더러운데 여러분의 심정속에 온갖 더럽고 추한 것이 다 들어있는 심보속에 들어오셨다. 이것은 말을 표현해서 말하는데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속에 오셔서 계신다는 사실자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못견디실 것이다.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가치를 하나님 계신 그곳에 다 두고 계신다. 그때부터 그곳에서 모든 흑암과 저주의 세력을 완전히 해결하셨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 자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이 내안에 오시는 순간 그 자체가 나와 내 주변이 바꾸어지길 시작하는 것이다.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걸가지고 우리는 신앙이라한다. 이 축복의 사실이 나오는 것을 증거라고 한다. 이건 뭘 우리가 뭘 입으로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 사실부터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뭘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확인하라. 지금 예수그리스도 내 안에 오시옵소서. 그리고 나와 여러분의 모든 죄악, 본질로 타고난 원죄, 바로 원죄라는 것은 사단의 역사속에 내가 원치않는데도 나를 잡고 있는 흑암의 세력을 완전히 해결하신 그분이 다른 이름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이다. 다른 방법으로 뭘 하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여러분과 제안에 오시기 위해서 오늘도 문을 두드리고 계신,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신 마음열기만 하면 들어오시는 예수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 모셨다하면 그때부터 나와 상관없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 이축복의 역사를 믿고 조용히 고백하면 그리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이걸 믿는것이라한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약속을 잡고 현장에서 사건과 일들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고백하게 될 때에 순간순간 그에게 사람의 생각과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다. 이 사실이 조용히 믿음으로 붙잡혀 져야 한다. 이걸 어떤 인간 방법과 수단과 생각으로 절대로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모든 모습들을 잘 알고 이 역사와 사건을 잘 알고 사단은 역사속에서 오직 한가지 이것 모르도록 하는 역사가 사단의 역사이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 종교생활 한다 자꾸 그렇게 말하는 배경속에서 오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이부분이다. 십일조를 열심히 내어도 예수그리스도 이것 모르게 하는 십일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말하는데로 종교생활이다. 그리고 그 생활속에서 열심을 내는 만큼 다른 결과가 나온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지말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축복받을 수 있는 길이요 축복받을 수 있는 행위인데도 사단은 축복을 못받고 저주로 임하도록 그리스도만 놓치도록 만들어놓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계속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신앙생활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믿고 자꾸 고생하게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한분 예수님만 붙들고 그 언약속에 섰다고 하면 그때부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자꾸 자기가 할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꾸 자기가 할려고 하는데 자기가 할려고 한다는 것에서 이 말하면 좀 문제가 될 것 같지만 진짜 지서방이 문제이다.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속에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고난을 받았던 배경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엇을 위해서 세웠는가하면 메시야를 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웠다. 메시야를 이 땅에 증거하기 위해서 세우셨다. 그런데 그로 통해서 이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바로 깨닫고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델로 세웠는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셨다. 영육간의 축복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돈은 많이 벌고 뭔가 하기는 열심히 했는데 뭘 못하는가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수난받는 백성이 되었다. 고난받는 백성이 되었다. 류목사님의 메시지속에서 이스라엘백성이 고난받는 고난의 역사를 워싱톤에 한복판에다가 그들의 역사를 쭉 고난받던 것을 박물관에다가 만들어논 것을 저도 가서 봤다. 그것을 한번 둘러보고 난 후에 우리는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다. 우리 고난받은 것은 받은것도 아니다. 입으로 표현하기에 힘들정도이다. 엄청난 한마디로 역사속에서 세계사속에서 받은 것을 알 것이다. 한꺼번에 가스실에 오백만 육백만 들어갔다.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만약에 그랬다면 싹쓸이 했을 것이다. 인종이 다 멸할것인데 전세계에 한번만 한 것이 아니다. 지속해서 이스라엘이 구박을 받았다. 그런 배경속에 딱 한가지 이해가 이거 이해가 전세계적으로 안되는데 이해가 안되는 배경이 무엇인가하면 왜 그럼 그렇게 되었느냐? 복주시고자 약속을 했는데 약속의 조건이 메시야이다. 언약이다. 그런데 이걸 이스라엘이 죽어도 못깨달았다. 아무리 말해도 못깨달았다. 하나님이 이 역사위해서 선지자를 보냈고 당신의 아들을 직접 보냈지만 죽여버렸다. 지금까지도 못깨닫고 있다.
지금도 얼마나 고생하는 족속이냐? 벌써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지금도 잊어지지가 않는다. 이스라엘을 들어갔다가 마침 다른 나라로 가는데 성지순례때에 바로 사일전인가 오일전인가 폭탄테러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는 사람을 얼마나 철저히 검색을 하는데 여자분들 화장품까지 다 열어서 찍어서 냄새맡고 입에 맛까지 보고 이러니까 짐은 다 실었는데 사람이 탈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출발해버렸다. 그다음 뒤에가서 짐을 찾아보니 짐도 없고 세계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안왔다. 그 짐을 거기다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근사한 양복도 새거 하나넣고 이렇게해서 갔는데 그 양복 입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 그전에 몇일간 다니는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몇일간 다니는 사이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돌맹이가 날아오고 아랍족속들에게 날아오는데 위태하기가 짝이없었다. 얼마 전에도 폭탄테러 때문에 죽고 도저히 거기에 있는 동안에 한시도 마음이 놓여지지 않았다.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건 군대이다. 여자들까지 총들고 돌아다닌다. 남자 총매고 다니는건 덜한데 여자들이 총들고 돌아다니니까 진짜 불안했다.
그처럼 불안스러운 지금도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에 딱 하나 메시야 아직도 안믿는다. 하나님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돌로 쳐서 죽여버렸다. 아니 십자가에서 죽였다. 아직도 메시야 기다리고 있다. 신기하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왜 여러분이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도 아직도 다른 것은 잘 믿으면서 다른 것은 잘 하면서 왜 예수그리스도 안되느냐? 참 이상한 것은 예수그리스도 입이 닳도록 외치는데도 잘안된다. 또 한주간 지나고 그 다음주간에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 또 얼굴이 예수그리스도 얼굴이 아니라 희미하다. 안된다는 나부터 또 안된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왜그런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본격적으로 그렇게 못하도록 하는 악착같이 못하도록 하는 존재가 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인가? 창세기 3장의 사단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하나 참생명가지기를 예수그리스도 바로 깨닫기를 그런데 반대로 사단의 소원은 오직하나 예수그리스도 참 생명모르도록 여기에 인간들이 다 속고 있고 사람들이 다 속고 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어서 사단의 거짓말을 잘 믿도록 되어있다. 희락이가 어디갔다오더니만 갑자기 욕을 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가르친것도 아닌데 안배워도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른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여러분 설교말씀을 듣고 문꼬리 잡고 나가면 잊어버리는데 다른 이상한 소리 들으면 기억할려고 안했는데도 얼마나 기억을 잘하고 집에오면 부부끼리 속닥거리고 그런다. 말을 할 것도 없는데도 그건 기억을 잘하고 말하고 토시까지 안잊어버리고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사단의 유혹이다. 사단의 역사이다. 오직 한가지 모르게 하는 그 사단의 소원에 막 걸려있다. 그래서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서도 평생을 사단심부름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표현하기가 그런데 옛날 어른들처럼 뭐가 빠지도록 사단심부름을 하게 된다. 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살아간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는 흑암의 세력 사단의 세력 꺽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이러면 도저히 안믿는다. 가르쳐주고 입에 넣어줘도 안믿는다. 뻔히 아는 것 같은데도 안된다. 한마디만 하면 될것인데 주예수그리스도! 여러분 밤에 잠자다가 꿈에 이상한 것이 덮친다. 나는 꿈에 이상한 것이 덮치다가 덮치는데 나도 모르게 주예수그리스도 한마디만 했더니만 예수그리스도 갈 것도 없다. 주여! 한마디만 해도 달아나 버린다. 꿈에 오는 것이 약간 힘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조금만 믿어도 엄청난 영적인 역사가 나오는데도 그것이 가르침을 받고 듣고 배우고 그래도 잘 안된다. 왜그러냐? 흑암의 세력이 배경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자꾸 유혹하고 있다. 오직 이것이 사단의 소원이다. 여러분과 저도 모르게 사단의 소원을 아무리 안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가정들에게서 가족들 속에서 교회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시행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뭐가 나오는가하면 사단의 소원은 시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것에 붙잡히는 순간에 저주와 재앙과 개인적으로는 실패와 사업과 직장의 어려움과 고통과 괴로움, 돈은 매일 버는데 하는데로 안된다. 여러분 한번두번 사업하다가 안되거든 어쩌다가 안될 수 있다 싶지만 늘 하는말인데 진짜 계속해서 사업이 안되거든 다른 것 붙잡고 돈 구하러 다니지 말고 한번 하나님앞에 서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고 했는데 죽어라고 안믿는다. 이걸 때를 써서 한다고 하면 진짜 이를 악물고 때를 쓸 필요가 있는데 때를 써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속에 보면 성경에서 이 축복과 역사를 창3:15에 주셨다. 그러나 돌아서서 인간이라는 대표가 하나님앞에 이 축복과 역사를 받았지만 돌아서서 이 일을 모르고 또 다른짓을 한다. 그것이 가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를 세상에 문학에서 표현하기를 가인의 후예라고 한다. 저주의 후예요 저주의 족속들이다. 그것이 맞다. 틀린 것이 아니다. 나는 가인의 후예라. 이것이 진짜 맞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약속되었고 주었지만 돌아서서 아니다. 왜 사단의 역사속에 붙잡혔기 때문에 그렇다. 딱 거기에 붙잡혀서 이것을 모르게 한다. 차라리 요즘 아벨의 후예라고 하던지 셋의 후예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느냐? 가인의 후예라서 그렇다. 사단에게 속아서 사는 사람들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그뿐 아니다. 역사속에서 구약에 계속해서 내려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종교라는 것이 왜 그리 무서운가? 왜 그리 자꾸 종교종교라고 하고 자꾸 말씀하느냐? 나쁜 것이 아니다. 종교생활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잘 하는데 예를 들어본다면 경건생활 바리새인들 얼마나 철저하다. 기도라고 할때에 밤먹듯이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우리가 하는 정시기도는 그들과 비교가 안된다. 무시기도 그들과 비교가 안된다. 시장에 갔다하면 손들고 기도한다. 여러분 부끄러워서 손들고 기도해 보았는가? 그런 사람들은 부끄럽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여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철저하다. 십일조, 조농사까지 해서 알갱이까지 세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건 잘 안한다고 한다. 철저하게 한다. 십일조 철저하게 하고 기도철저하게 하고 주일성수 철저하게 하고 철저하게 하는데도 철저하게 망했다. 한가지 딱 누군가? 예수그리스도! 베드로가 고기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가서 뱃사공에게 당신도 예수를 아느냐고 할때에 모른다고 했다.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를 모른다는 것이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것인지 안그러면 반대로 으름장을 놓는다고 모른다고 하는것인지, 철저하게 복음을 모른다. 복음을 부정한다. 철저하게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했는가하면 말세에 마지막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돌아온다고 했다. 왜그런가하면 죽을 고생을 하다가 돌아오게 되어있다. 여러분과 제게 예수그리스도 믿고 신앙생활하는 도중에 진짜 바로 못하고 사실적으로 복음을 붙잡지 못하면 고생하도록 공식이 되어있다. 그런데 고생하면 복음바로 못잡았구나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수단과 방법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저주의 바탕이요 체질이 되어있다. 정말 내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하나님앞에 복음을 바로 못 붙잡았구나 이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늘 말하는데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렐루야! 소용없다. 아멘해도 소용없다. 문제생기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가 아니라 너희는 먼저 돈과 방법과 수단을 이건 아무리 가르쳐도 안되는 배경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의 배경이다.
그래서 이 사단의 배경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한분 예수그리스도 뿐이라고 했다. 한분 예수그리스도 뿐이다. 다른 길이 없다. 그래서 사건과 일이 생기면 조용히 주예수그리스도 지금 내 안에 오시옵소서. 내마음에 오시옵소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조용히 고백해보라. 진실로 고백해보라. 나는 할 수 없는 줄압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바로 그 축복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이 내 모습, 내 모든 사건과 일에 오셔서 주님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조용히 좀 늦는 것 같아도 좀 기다려보라. 수단쓰고 방법쓰기 전에 그리고 내 사건과 일들속에서 문제생기고 부족한 문제, 사건생겼거든 원망하지 말라. 다시 말한다. 돌아다니면서 돈 빌리지 말라. 너무 예수믿는 사람, 굶으면 좀 굶어보라. 그렇잖아도 그 시기에는 금식기도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구지 먹을 것이 없는데 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굶지! 굶는 것 얼마나 쉬운데 할일이 만사가 없다. 나는 금식기도해보니까 세상 심심하더라. 여러분 먹을 필요없으면 진짜 심심하다. 저는 금식기도속에서 뭘 느끼는가하면 진짜 이래서 어떻게 사느냐? 사는 의미와 의욕이 없다. 여러분 바쁘다. 벌어먹고 돌아다닌다. 그것이 힘들고 바쁜것인줄 알지만 그것이 없으면 벌써 힘들어서 죽는다. 아무런 삶의 의미가 없다. 세상의 기쁨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한 이틀은 먹는 일에 매달려서 먹고싶어서 세상가는줄 모르는데 한 여흘쯤 정도 굶어보라. 진짜 시간가는줄 모르고 밤안먹으면 밤에 잠도 잘 안온다. 제가 왜 이 말씀하는가하면 여러분 예수그리스도, 사실적으로 회복이 안되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난과 고통, 방법 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되어진 배경이 누가 붙잡고 있는가? 흑암의 세력이 붙잡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붙잡힌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뭐가 나오는가? 저주와 재앙이 나오도록 되어있다. 거기에 나오는 방법들은 각가지 방법들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표현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이 사실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또 다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붙잡으라고 했다. 왜 예수그리스도 붙잡는 순간에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이 있는곳마다 흑암의 세력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물러가게 되니까 그래서 정신이 좀 이상하다. 밤에 잠이 잘 안온다고 하면 그러면 열심히 고상한 메시지를 많이 들을려고 하지말고 예수그리스도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복잡하게 할 것이 없다. 이걸 계속해서 기도하라. 예수그리스도 안오시거든 빨리 오시라고 재촉하시고 여러분 그러면 성령으로 여러분에게 역사하시게 되어있다. 딱 한가지 이거 모르게 하는 것 흑암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 땅에 인간과 정사를 잡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이고 있다. 여기에 다 속았다. 그러면서도 멍청하게 예수믿는 사람들이 다 속고 있고 그러면서 실컷 속고 저주속에 있으면서도 웃으면서 있고 이걸 가지고 종교라고 한다.
그래서 종교생활하는 사람들 뭔가 욕해서 욕하는 것이 아니다. 이일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했는가? 화있을 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오늘 안읽었지만 마지막 13절에 보면 화있을진저 서시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게 못하는 자들이로다. 너무 열받혀서 이 독사의 새끼들아! 예수님 점잖은 일에 얼마나 열받히면 그러했겠는가? 저도 그 욕이 요즘은 잘안나오는데 하기는 예전에 제가 해병대에서 근무할 때에 얼마나 습관이 되었든지 누가 서울에서 물었다. 얼마나 욕하시는데요 하기에 두시간은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놀라했다. 진짜이다. 그런데 조금 신앙생활한다고 목사가 되니까 이제는 욕하기가 힘들고 잘 안나온다. 예수님 입에서 이런 쌍욕이 나왔을때에 너무 화가 났을 것이다. 왜그런가하면 너무 억울한 것이 이 일이다. 주의 종들에게 축복과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축복과 은혜로 가득하게 하나님의 약속가지고 세워주셨는데 그 한마디 입벌리는게 안되었다. 사단에게 속아서 그거 믿으라고 하는데 못믿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했는데 너희는 먼저 돈부터 찾고 있다. 이상하게 이렇게 된다. 오늘 설교들어도 이상하게 돌아가면서 벌써 사단이 문꼬리를 잡는 순간에 또다시 돌리는 사단의 역사이다. 예수그리스도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시고 멀리 복잡하게 볼 것 없다. 주여 지금 오시옵소서.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시고 나와 같이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를 친히 체휼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믿습니다. 오시옵소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약속하신 바대로 성취된다. 이일을 성경은 구체적으로 약속하셨다.
이 일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혹시 매일 듣는 것 같은가? 지난주일에 듣고 또 듣고 매번 들어도 괜찮다. 들어도 들어도 부족한 것이 이 말씀이다. 시몬이라는 주상성자가 중세시기에 그때당시에는 경건주의였다. 땅에서 높이 30자높이에다가 그다음에 앉을자리는 자기만 앉을 자리를 해서 거기서 밑에서 밥주면 얻어먹고 안그러면 굶고 햇빛을 째면서 사람들 모이면 강연해주고 그렇게 기도하고 눈만뜨면 기도하고 말씀보고 그랬던 시절이 중세시절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무릎꿇고 기도했던지 기록에 나와있다. 무릎이 낙타발처럼 되었다.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간다. 옛날에 한참 신비주의 할때에 바위위에서 그냥 무릎꿇고 비벼되니까 이것이 나중에 딱딱해졌다. 그 다음 또 그런 정도인가? 한참 신나면 반 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딱딱해지는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경건주의로 또 반뛰던지 날아다니던지 해도 그리스도 잊어버리면 재앙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이런 역사를 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것이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어렵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사단의 역사이다. 왜그런가? 그리스도 하나만 모르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들을때에 한마디만 알아들어도 실현이 안된다.
결론을 맺는다. 이일을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서 잠깐만 하라. 많이 못해도 하루에 한번도 좋다. 정시기도 하라. 그다음에 내가 사는 모든 생각속에서 걱정이 온다면 그리스도로 바꾸라. 내가 모든 생각속에서 오는 생각마다 그리스도로 바꾸라. 큰일이구나라는 일이 있으면 큰일은 무슨 큰일인가? 그리스도, 아이구 이문제 그리스도! 이사건 그리스도! 아들 그리스도! 며느리 그리스도! 아무게 그리스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과 저를 이땅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실 증인으로 세워주실 것이다. 증거주실 것이다. 이 한주간 이 축복의 역사가 날마다 체험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위선의 모습
마 23:1-12 / 박덕기 목사(송정중앙교회)
어제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서 네 가정이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주례를 하고 예식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교우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애경사 때 부조를 하는 것은 큰일을 치루는 가정에 상부상조를 하기 위함인데,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값비싼 결혼 음식을 먹게 해서 결국 상인들의 배만 불리는 셈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가 김정일씨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유교의 허례허식 체면 문화의 폐해를 지적한 글입니다. 그 글에 보면 중국과 일본이 모두 유교를 버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례를 들면, 중국에는 공산주의 정권 수립 후 봉건적 습관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던 상가에서, 곡해주는 업종인 ‘효자업’이 다시 부활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인데, 작은 돈만 받고도 곡령자(哭靈者.賣哭業)들이 슬픈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고객들이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 밤 SBS 8시 뉴스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명품 대여점이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7백만 원 하는 명품 가방은 7-8만 원이면 2-3일 동안 빌릴 수가 있고, 1500만원 하는 밍크코트는 15만원이면 며칠 동안 빌릴 수가 있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의 혼례식 용품 대여점들에서는 웨딩드레스나 비디오카메라 같은 물품뿐 아니라, 하객까지도 빌려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친척이 적은 신랑신부들은, 결혼식 때 옷을 잘 차려 입은 남녀를 혼례식용품 대여점에서 빌려, 부유한 삼촌이나 숙모 또는 사촌으로 행세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객들에게 훌륭한 가문으로 보이기 위함인데, 삼촌은 일당 1-2만 4천원이면 구할 수 있으며, 숙모 임대료는 이보다 약간 더 비싸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허례허식, 또는 외식과 가장하는 습성은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은 모양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거짓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 특히 위선을 지적하고,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본받지 말도록 교훈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적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2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원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칠 때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모세의 위치와 권위가 지닌 상징성에 초점을 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준 인물로서, 그 능력이나 역할로 보아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를 능가할 인물은 없었고,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랍비, 즉 선생이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입만 열면 나의 스승은 누구고, 그 스승의 스승은 누고이고 하면서, 계속 거슬려 올라가 결국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모세의 정통 후계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모세와 연결시키며 스스로를 높이는 데 열심이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로서의 책임 있는 삶이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실제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의 행동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높은 자리만 탐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믿음과 경건은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책망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는 좋아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의무와 책임은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히려 지위와 직분이 높아지면 특권이 많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지위와 직분에는 그에 따른 행동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동길 교수의 칼럼에 ‘큰 일 작은 일’이란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대개 큰 일 맡기를 좋아하고, 작은 일 맡기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아동들까지도 학교에서 하는 연극의 주역을 맡으라면 싱글벙글 좋아하지만, 한두 마디밖에 하지 않은 역을 하라고 하면 심술을 부리고 안 좋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렇게 허영에 들뜬 것인지, 혹은 우리 교육이 잘못 되어서 그런지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우리 사회에 평화가 없는 최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저마다 큰일만을 하겠다고 날뛰는 데 있다고 봅니다. 덮어 놓고 큰 것을 택하는 것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천성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면사무소의 서기나 했으면 꼭 알맞을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보리밭의 김이나 맸으면 꼭 적당할 인물이 큰 기업체의 사장이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영국의 평론가 존 러스킨도 사람이 지닌 이러한 약점을 지적하면서 “선장이 되기를 갈망하는 자가, 반드시 유능하여 그의 책임 하에 그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무턱대고 선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아무개는 선장이라고 불리고 싶어서 야단들이다”고 꼬집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교회의 직분을 감투나 계급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장로나 집사나 권사가 되려면 거기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그러한 책임과 의무는 관심 밖이고, 그저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직분을 맡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직분에는 거기에 알맞은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중직 자들은 예배 생활, 기도 생활, 전도 생활, 헌금 생활, 헌신과 봉사 등 모든 신앙생활과 언행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 곧 높은 자리만 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며 표리부동한 자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것도,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준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에서 교계 지도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한국의 초대 기독교는 사회 변화는 물론, 교육 의료 문화 복지 경제 등 모든 분야의 발전 주역이었으며, 사회통합의 주체였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도도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사회시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사회 전반의 목소리는 냉소적이고 냉혹하다. 우리 사회에 기여한 한국 교회의 공로에 비해, 그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성장 둔화의 1차적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진실하시니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도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삼상 12:24에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고, 시51:6에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진실한 목사였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되고, 그리고 진실한 나의 종이여”라는 최종적인 선언을 듣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 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진실한 목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장로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집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신자였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인간이었었다.”라는 말을 듣도록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힘쓸 수 잇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 얼마나 진실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하고, 꼭 성공하고, 꼭 건강하고, 꼭 장수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꼭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외식입니다.
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경문’이라 신 6:8에 따라 만든 양피지 조각으로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옷술’이란 민 15:38-41절에 근거하여, 옷단 귀에 술을 붙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방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이면 팔에 경문을 차고 길게 옷술을 늘어뜨린 특유의 검은 가운을 입고 자랑스럽게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에는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경문을 차는 것과 옷술을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문이나 옷술 자체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기에,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경문이나 옷술이 의미하는 본질 자체를 망각하고, 이를 오히려 자기들을 과시하는 자랑거리로 변질시키고 만 그들의 정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식(外飾)하는 자(hypocrite)란 단어의 본래 뜻은 ‘연극배우’입니다. 고대 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할 때면 배우들은 오랫동안 연기할 대상들을 표현하기 위해 분장 대신에 가면을 쓰곤 했습니다. 배우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누구라도 생존하는 사람과 생활을 보고 있다고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었던 풍경은, 청중에게 즐거움과 감명을 주고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 본인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연극(show) 배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외식하는 연극배우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누구인가 알아맞히어 보십시오. <그는 기독교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전능자의 축복과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이 자신의 새로운 정부의 정신적 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가득 찬 아주 신중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각종 신문, 특히 기독교계의 신문에 종교적인 글들을 실었습니다. 그는 너덜해진 성경을 보이며 그 곳에서 자신의 모든 힘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그는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요 살인마인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종교적인 박사였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실제는 전혀 없었던 외식과 거짓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심한 위선자란,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너무 많다고 하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사업하는 곳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그렇다고 사업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회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어도, 그 사람은 은둔자로 살겠다고 마음먹지는 않습니다. 지옥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곳에 가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그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위선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분은 지금 이 시간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식을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거짓과 허위는 설 곳이 없게 되고, 우리의 참된 모습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위선자입니다.
3. 명예욕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만일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를 보신다면,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계의 대규모 집회 광고입니다. 그러한 광고를 보면 그 대표자 명단에 명예 고문, 고문, 자문 위원, 총재, 명예 총재, 대표 총재, 사무총장, 대표 총무, 등 수 많은 대표자들이 있어서 누가 진정한 그 집회의 지도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이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너도 나도 높은 자리에 연연하고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기 원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목사들이 이러한 면에서도 먼저 회개할 것이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낮고 천하다고 싫어하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가리켜 “내가 높이 들릴 것이다”라고 하셨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회당과 잔치의 상석이 진정한 상석이 아니고, 가장 낮고 천하며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최고의 상석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높은 자리만 탐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바람대로 실제 높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날 위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마 위에서 깃발을 날리며 총독으로 위세를 떨쳤던 빌라도 역시, 여론을 의식해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줌으로써 비겁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셔서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치욕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만물의 찬양 받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안을 떠서 과연 어느 자리가 진정한 상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의 상석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십자가로 향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던 자들이 가슴을 치며 후회할 때,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책망을 보면서, 이를 단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만을 향한 책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매서운 책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었던 언행 불일치. 외식, 교만과 명예욕 같은 위선을 버리고,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 진실한 인격, 겸손한 언행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한 분이신 그 분
마 23:1-12 / 지성래 목사
마태복음은 28장 분량이다. 그 중에서 23장은 예수의 교훈 중에서 가장 강도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삼 년이 넘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다양한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치려 하였으나 바리새인, 서기관, 대 제사장 등은 도대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려 하질 않았다. 저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저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 가려고 음모를 계속하여 꾸미고 있었다. 예수께서 며칠 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아시면서 작심하시고 저들에게 제발 “나의 전하는 말을 들으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3장이다. 회개를 촉구하신 내용이다. “화 있을진저”라는 내용이 13절부터 자세하게 반복된다. 단단히 화가 나신 예수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오죽하면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의 심판을 선포하셨겠는가.
유대인들 중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으스대려 한 이들이 바리새인들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따로 말하지만 사실은 서기관 직은 거의 다가 바리새인들이었다.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 자들이었다. 2절의 ‘모세의 자리’란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이 앉던 의자를 말한다. 이처럼 저들은 어딜 가나 남을 가르치는 지도자 행세를 하였다. ‘서기관’이란 직분은 선지자 에스라 이후에 생겨난 자리인데 저들은 유대인들을 교육하고 재판하는 겸직하는 막강한 지위를 누렸다. 때문에 저들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고 그래서 모세의 권위를 대행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저들이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순종하는 것보다는 기득권 세력으로서 “어떻게 하면 차지한 명예와 권력을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만 늘 관심이 많았다.
오늘 읽은 내용의 앞 부분에는 그러한 저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예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심각한 현실인다. 누가 나에게 “너는 네 아비 행동은 제발 닮지 말아라.” 이렇게 말한다면 저주에 가까운 말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 즉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지적 받았다. 겉으로 그럴싸하게 행동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보이는 데만 관심이 많았다.
저들은 경문의 띠를 넓게 하고 옷술을 길게 해서 입고 다녔다. 남들에게 보이려는 의도였다. 경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까만 소가죽을 외쪽 팔둑에 칭칭 감고 다니기도 하고 사각 상자에 담아서 이마에 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런 전통은 오늘 날까지 이어진다. 테피린(Tefillin)이라고 한다. ‘지킨다. 보존한다’는 뜻의 ‘필랏소’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출애굽기 13장 1-16절, 신명기 6장 4-9절, 신명기 11장 13-21절을 그 경문에 새겨 외팔에 감거나 상자 안에 담아서 이마에 매고 다녔다. 세월이 지나면서 남들에게 잘 보이게 하려고 경문의 줄을 점점 넓게 하기도 하였다. 옷 술도 점점 크고 길게 늘어트렸다. 흰색과 청색 실로 직조한 옷 술은 신명기 15장 37-41절에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겉으로 드러난 모양만 이어온 모습을 지적한 것이다.
서기관인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윗자리에 앉기를 즐겼다. 회당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다. 남들에게 문안받고 남들이 자기를 선생이라고 지도자라고 즉‘랍비’라고 불러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한 저들에게 제발 깨달으라고 가르치신 교훈이 8절 이하에 계속된다.
한 분이신 선생
예수는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신 선생이시다. 예수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는 말씀으로 남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서로 다 같이 형제 자매의 삶을 살아가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을 유일하신 선생으로 표현하셨을까. 맞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라는 말씀은 예수는 이 땅에 스스로 선생되길 원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한 분이신 아들이시다. 한 분으로 오셔서 길과 진리와 영생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유일한 선생이시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도 각 분야에 선생이 있다. 각 분야가 그러하다. 음악, 미술, 도예, 서예, 건축 등 모든 분야가 다 그러하다. 그러하다 보니 그 어떤 분야의 최고의 선생에게서 사사 받기를 원한다.
예수 당시에 스스로 랍비라 칭함 받고 남들 위에서 구별 받으며 선생 대접 받으려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많았다. 넘쳐 났다. 저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경고하시고 교훈 하신 것이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아라. 너희 선생은 한 분이시다. 너희는 다 형제다” 물론 예수 자신이 이런 가르침을 교훈하시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스스로 자신이 그 유일하신 선생임을 천명하는 자리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오래도록 동양에서는 공자(孔子, BC 551-479, 노나라), 맹자(孟子, BC 371-289, 추나라)를 능가하는 이들이 없다고 여겼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동서양에 남들이 인정하는 선생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사상, 철학, 신념, 종교적인 영향을 미치리만큼의 큰 역할을 한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 며칠 후에 돌아가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심각한 교훈이 말씀을 주목하여 보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즉 “너희 선생은 나 하나 뿐이요”라는 말씀이시다.
그렇다. 진정으로 예수를 선생 삼고, 스승 삼고, 랍비 삼고 그 분에게서 배워 보라. 그 분을 따라 보라. 그분을 나의 주로 모시고 살아보라.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를 스승 삼고 예수를 선생 삼고 예수를 따라 살아 온 이 성령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어져 온 것이다.
몇 해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필리핀의 박 누가( -2018. 8. 26) 의사가 그런 주인공이다. 그는 외과 의사요 선교사로 30년을 필리핀 오지 마을 50여곳을 누비며 살았다. 직접 버스 운전을 배워서 버스가 오지를 찾아 다니는 이동식 병원이요 수술실이었다. 과거에 평범한 의대생이었던 박 선교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였다. 1989년부터 필리핀에서 의료 선교를 펼쳤다. 그는 1992년 췌장암 초기 단계에서 수술을 받은 뒤 위암 말기, 간경화, 당뇨 판정을 연이어 받았다. 마실 물이 부족하고 무더운 필리핀에서 물 대신 탄산음료를 주로 마신 것이 원인이기도 하였다. 2016년에는 위암까지 재발했다. 그런 몸으로 끝까지 현지인들을 돌보다가 이년 전에 주님 품에 안겼다.
필리핀의 열악한 의료 현실을 목격한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팔 등지를 돌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현지인들과 굶주린 아픈 이들을 찾아 진료하고 치료하고 수술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2016년에 극장에서 상영된 다큐 영화 <아픈 만큼 사랑한다>의 주인공이다. 2012년에 KBS 인간 극장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그는 필리핀의 오지를 찾아 다니는 버스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장거리 이동은 물론 장시간 치료와 수술을 이어간 뒤 밀려오는 피로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낙후된 의료상황으로 고통받는 현지인들의 불쌍하고 참담한 삶이었다. 소외되고 아픈 이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고 싶다는 박 선교사의 고백은 그를 가짜 선생이 아닌 진짜 선생, 진짜 예수 쟁이로 살다가 주님 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각 사람이 입의 말로만 남들에게 가르치려 드는 선생이 아니라 삶으로 예수의 교훈을 이 땅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그 한 분이신 선생의 고귀한 사랑을 내가 살아가는 현장에서 이어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한 분이신 아버지.
예수의 교훈은 9절에 이렇게 이어진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으로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의 더 큰 의미는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맞다.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다. 우상 숭배자들이 주장하는 잡신 중의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은 은금을 녹여 부어 만들과 돌과 나무를 다듬고 깎아 만든 우상이 아니란 말이다.
출애굽기 4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광야로 이끌어 내시는 목적을 가르쳐 주셨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고 하셨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받을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이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인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의 한 분이신 아버지”시란 말이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광야로 이끌어 내서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제사드리는 민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출애굽하게 하려 하신다고 하였다.
맞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살아가야만한다. 제사가 예배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새벽 5시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나. 찬송하고 성경 말씀 묵상하고 감사 기도 드리고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고 이런 일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이란 말이다.
우리나라는 TV이만 켜면 막장 드라마 혹은 채널마다 먹빵 방송으로 도배를 한다. 채널마다 먹는 방송, 음식 만들고, 맛집 찾아 다니고, 먹는 것에 걸신 들린 사람들처럼 먹는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물론 먹어야 산다. 그러나 사람이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지 않나.
광야 40년을 출애굽한 백성들이 아침에는 매일 만나로 살아갔다. 고기 타령하면 하나님은 강한 바람으로 매추라기 떼를 광야에 떨어지게 해서 단백질을 공급받게 하셨다. 먹을거리로 하면 애굽이 훨씬 나았다. 애굽에는 노예였지만 먹을 것이 넘쳐 났다. 그러면 배 부른 돼지의 운명으로 마칠 것인가. 배 고픈 철학자로 살 것인가.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저들의 영혼육을 책임지시는 생명의 공급자이시며 사랑의 아버지이신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인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
그런 중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붙잡혀 살아 간 인생이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드브라, 사무엘, 다윗, 히스기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에스더,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느헤미야가 아닌가.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이렇게 기도한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용인시 기흥구에 가면 같은 로또 가게에서 19번 1등 당첨되었다고 해서 교통 체층 때문에 도시가 나서서 그 가게 앞 길을 넓히는 도로 확장 공사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몰려 가고 쏠려 간다.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세상의 것에만 너무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늘 아버지를 한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법을 깨달으라고 경고하신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였다. 그는 다윗의 고조모가 되었다. 모압의 남편 잃고 시어머니 나오미 따라서 이스라엘 베들레헴 마을에 들어가 살던 룻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기를 원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를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던 베들레헴 소년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길이 빛나는 다윗 왕으로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가 시편에서 만나는 다윗의 모습은 존경스럽고 아름답지 않나. 다윗은 육신의 아버지 이새의 사랑도 받았으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이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다.
우리는 찬양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찬양을 부르자.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경배합니다.
아버지 채워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한 분이신 지도자.
이어지는 10절 말씀에 보면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큰 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다. 그는 낮아지고 낮추심으로 영원히 경배받으시는 왕 중 왕이시며 선지자 중 선지자시며 제사장 중의 대 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는 존경 받는 왕이시며, 선지자시며 단번 희생 제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 분이 스스로 말씀하셨다. “너희의 지도자인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 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1960년대 미국에서 쌍벽을 이루던 헐리우드의 두 여배우가 있었다. 한 사람은 유명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662)이고 또 다른 한사람은 에반스 콜린(Evans Colin)이다.
두 여배우는 얼굴은 물론 외모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1960년대의 쌍벽을 이루며 관능미를 자랑하는 헐리우드의 육체파 여배우 였다.
두 여 배우는 당대(當代)에 박수와 갈채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돈 방석에 앉아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릴린 먼로의 매혹적인 미(美)의 괴력은 그녀가 몸을 흔들며 춤을 추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 당대의 젊은 남성들의 심장을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매혹적이고 환상적이라고 언론들이 부추겨 댔다.
그녀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 부터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백악관의 대통령 앞에서 요염한 모습으로 “Happy Birthday to You” 를 불렀다는 뉴스도 전해졌다. 그 날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본 케네디 대통령은 너무나 황홀하고 행복해서 해서는 않될 말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제 내가 대통령을 그만 두어도 여한이 없다.”얼마나 아름답고 행복 했으면 미국의 대통령을 그만두어도 좋다고 말했겠나.
그녀는 세상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와 인기를 한 몸에 누렸고 돈방석에 앉아
부귀영화를 한몸에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도 불륜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마릴린 몬로는 그 외도 수많은 남자와 복잡한 남자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신문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마릴린 몬로는 허무와 갈증과 공허함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끝내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는 뉴스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37살 때의 사건이다.
그런데 마릴린 몬로에 못지않게 할리우드에서 많은 인기와 명예를 누리던 또 다른 여배우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반스 콜린이었다. 마릴린 먼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미녀 중 미녀였다.
그러나 에반스 콜린은 인기를 누리던 어느 날 갑자기 배우직을 청산하고 화려한 할리우드 은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에반스 콜린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여러분! 저는 지금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그 깊은 사랑에서 헤어날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할리우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청중들은 환호성을 쳤고, 언론들은 연일 뉴스 거리로 큰 화제가 되었다. 콜린 에반스가 사랑하는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 고 외쳤다. 당시 기자들이 몰려와서 그녀에게 물었던 질문은,“누구와 그런 깊은 사랑에 빠졌는냐? 는 것이였다.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에반스 콜린은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나를 선택하신 그분에게 내가 지고 있는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지금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에 입학까지 했습니다.”
이후에 에반스 콜린은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와 결혼 하였다.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 선교사(宣敎師)로 파송 받아 우간다 험지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성실히 수행했다. 7년간 아프리카 선교를 끝내고 안식년 차 잠시 고국 미국에 왔던 에반스 콜린에게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물었다.
“에반스 콜린! 할리우드의 영광과 명예인기를 포기하고 험지인 우간다 선교사로 떠난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습니까? 정말 행복합니까?”
에반스 콜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후회(後悔)라니요! 목사님! 무슨 후회입니까? 내가 선택한 선교사의 자리는 나에게 과분하기도 하지만 나는, 영국 여왕의 자리나 미국의 대통령의 자리와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귀중하고 너무도 보람된 자리였습니다.”
그렇다. 예수 그 분이 나의 한 분이신 선생으로, 랍비로, 지도자라 깨달아지고 영접되는 순간 나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부활 복음의 권세이다. 복음은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모세의 자리, 윗 자리, 높은 자리만 부러워 하지 말고 낮은 곳에서 섬기며 살아갈 때에 진정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 딸의 신분을 흡족히 누리게 될 것이다.
본받을 만한 성도
마태복음 23:1-12 /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 링컨은 “어린애를 잘 인도하는 단 한 가지 길이 있다. 그것은 그대가 몸소 그 길로 가는 것이다” 라며 모범과 모본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해마다 미국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링컨을 꼽는 것은 그가 몸소 그가 인도하고자 하는 그 길로 가며 본받을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전체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지적하고 책망하신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그들이 마땅히 그 길로 가며 본을 보여 주여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며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하듯 교훈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새겨듣게 될 교훈을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자성하는 마음으로 되새기곤 하였습니다.
1.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자리에 앉는다' 는 것은 ‘어떤 사람의 권위를 계승한다’ 는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그들이 모세의 권위를 계승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의 자리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본받을 말한 성도가 되려면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 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고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예수님은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님을 떠났습니다.(마 22:15~2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그들의 자리와 권위를 선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키라” 하심으로 그들의 자리와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하심으로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자리와 권위는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본받을 만한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를 끝낼 무렵, 미합중국이라는 신생공화국은 아직 분열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1804)이 대표하는 연방주의자들과 이에 맞서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의 반연방주의자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가 재출마 의사가 전혀 없는 워싱턴에게 “각하, 각하께서 물러나시면 미국은 망합니다” 라며 3선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은 3선 출마를 금하는 헌법상의 규제가 없었지만 단호히 “No”를 외치며 “이 사람아, 이 역사에는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없는 법이야” 라며 거부했다고 합니다. (김동길, 나이 듦이 고맙다)
조지 워싱턴,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했던 그는 다른 사람의 신권과 인권과 직권도 존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물러나면 미국이 망할 것이라고 염려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예롭게 은퇴하였으며 평화롭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미합중국의 민주주의가 든든히 세워져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미국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본받을 만한 지도자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 : 21에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할뿐 행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받은 권능을 행하였을지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만 모래위에 그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헤로운 사람과 같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 7:24,25,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함으로써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되며 천국에 들어가기로 합당한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고 말씀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은 말만하고 말한 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환언하면 그들은 설교한대로, 가르친 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였을 뿐 하나님께 보이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는 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외모를 보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외식과 위선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함으로 교만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되려면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동상이몽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주님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여 분히 여겼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를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마 2:20~18)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면서 무리와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고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며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도 말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반복하여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23:11~12) 하심으로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과 섬김으로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할 때 우리는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미국 소설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 1907~1977)의 이야기입니다. <남태평양 이야기>, <하와이>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는 린든 존슨(Lyndon Johnson)대통령이 120여명의 학자들을 위해 마련한 백악관 만찬회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반드시 참석하고 싶은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며 대통령의 초대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소생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고등학교 때의 훌륭한 여선생님이 한분 계신데, 그 어른을 위해서 베풀어질 만찬회에서 제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기로 약속한지 사흘 후에 백악관 모임에 참석하라는 귀하의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소생이 백악관 만찬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해서 섭섭히 여기시지는 않으리라고 믿지마는 그 고등학교 여선생님은 아마 크게 상심하실 것입니다” (김동길, 나이 듦이 고맙다)
제임스 미치너,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했던 그는 그의 선생님을 행복하게 해드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편지를 받은 대통령에게도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일화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아무리 상황에 달라지고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의 신실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 14~15에 예수님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릎 꿇고 앉아서, 또는 쭈그리고 앉아서 남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랍비라, 아버지라, 지도자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겸손히 섬기는 사람은 다만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을 기뻐하며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과 섬김으로 언행과 태도에 신실함으로써 본받을 만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앤 그레이엄 로츠는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모습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사람들이다” 라고 했습니다. 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11:1) 고 하였습니다.
본받을 만한 성도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자리와 권위에 충실하고, 자신의 언행과 태도에 신실함으로서 본받을 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