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희 (2005년 11월 1일 화요일)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김병희 전 인하공대 학장의 회고록에서 전재한 것이다.
(5) 5.16혁명(革命) [1961. 5. 16]
1961년 5월 16일의 이른 새벽, 박 정희(朴 正熙) 장군 지휘 하에 일단의 군인(軍人)들이 한강(漢江)다리를 건너와서 정권(政權)을 장악(掌握)하는 일대(一大) 정변(政變)이 일어났다. 그것을 나는 애국(愛國) 군인(軍人)들이 스러져 가는 이 나라를 바로잡은 구국적(救國的) 쾌거(快擧)요, 충성(忠誠) 어린 군인들의 결사적(決死的) 의거(義擧)로 본다.
그것을 그후로 혁명(革命)이라 해오다가 근자에 와서 김 영삼(金 泳三) 씨가 정권을 잡자 쿠데타(coup d'Etat)로 규정했는데, 이 말이 폭력적(暴力的) 정권(政權) 탈취를 뜻하고 박 장군 일단을 폭력단체로 본다면, 그 표현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당시의 정치정세(政治情勢)에 조금 언급해둘 필요를 느낀다. 이 승만을 하야(下野)시킨 학생들은 의기충천(意氣衝天)하여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으니, 그들 덕택으로 정권(政權)을 얻은 장 면(張 勉) 정권은 그들을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그 학생들은 어떻게 보면 폭력배(暴力輩)요, 어떻게 보면 위대한 정치가(政治家)들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건 그러한 외관 상의 문제를 가지고 크게 문제 삼을 바는 아니겠고, 안 보이는 곳에 중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조종하는 배후 세력인데, 그들이 일본의 조총련(朝總聯)을 경유하여 북조선(北朝鮮) 정권(政權)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니 어찌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국운(國運)을 좌우하는 문제였으니, 바야흐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꼴이었다. 그 학생들은 판문점(板問店)으로 간다고 했다. 김 일성 정권과 정치협상(政治協商)을 해서 남북통일(南北統一)을 시도한다는 것이었지만, 협상이 무슨 협상인가, 대한민국을 고스란히 공산당(共産黨) 놈들에게 가져다 바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능한 장 면(張 勉) 정권(政權)은 보고만 있었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그후의 일이지만 월남(越南)의 사이공 정권(政權)이 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던 전야(前夜)의 광경이 전파(電波)를 타고 와서 내 귀에 들려올 때 그 하나하나의 정황(政況)이 어쩌면 그렇게도 5.16 전야의 우리의 사정과도 닮았던가? 나는 5.16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운명(運命)도 저 월남(越南)처럼 되었으리라고 보여지기에 그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큰 전율(戰慄)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5.16혁명을 오늘에 와서도 적극 지지하는 한 사람이지만, 그 당시도 물론 지지했었다. 그것은 나의 정치적(政治的) 소신(所信)이었다. 절대로 박 정희(朴 正熙) 군이 나의 둘도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 아님은 물론이다.
나는 5월 16일 그 날 일찍이 이학부장실(理學部長室)로 출근(出勤)했다. 교수회의(敎授會議)를 소집(召集)한 것도 아니었는데 교수들이 모두 내 방에 몰려왔다. 문학부(文學部)와 법정대(法政大) 그리고 공대(工大)에서도 몇 사람이 왔다. [문리과대학장도 법정대학장도 공과대학장도 모두 궐석이던 시기였는지라 구심점이 없는 타(他) 학부 타 대학 교수들까지 이학부장실로 몰려온 것 같았다.]
무엇을 토의(討議)하는 것은 아니었고, 라디오 한 대를 앞에 놓고 급변(急變)하는 정치정세(政治情勢)에 관한 보도(報導)와 5 분 간격으로 발표하는 미8군사령부(美八軍司令部)의 성명(聲明) 등에 귀를 기울였다.
미군(美軍) 사령부(司令部)에서는 궐기한 군인들의 행동을 불법(不法) 난동(亂動)으로 규정하고 즉각 원대로 복귀하라고 했다. 내 방에 모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최고 지성인(知性人)들은 모두가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표정에서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과 박(朴) 장군(將軍)에게 동정적(同情的)이고 또 그 성공을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오후 늦게 그 날도 2부대학으로 가서, 먼저 내가 맡은 전기공학과(電氣工學科) 4 학년의 "응용수학(應用數學)"을 강의(講義)하려고 교실로 갔더니 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길로 나는 을지로(乙支路) 7가의 우체국(郵遞局)으로 가서 박 정희(朴 正熙) 장군(將軍) 앞으로 장문의 격려(激勵) 전보를 쳤다.
미8군의 태도를 보아 성공할 확률이 50%도 안돼 보이는 박(朴) 군의 의거(義擧)가 실패하여 그를 비롯한 애국군인(愛國軍人)들이 군법회의(軍法會議)에 회부되면 그때는 나도 함께 잡혀갈 각오를 하고.
(6) 박 장군과의 해후상봉(邂逅相逢)
5.16혁명 후 내가 최고회의(最高會議)에 나가기 전에 박 정희 군과 나는 여러 번을 만났는데, 처음으로 만난 것은 김 영기 은사님의 회갑연(回甲宴) 때였다. 장소가 종로(鐘路)네거리에서 광화문(光化門) 쪽으로 100 m 정도 떨어진 노변(路邊) 빌딩의 3 층이었는데, 그 식장에서 예식의 진행을 돕고 있던 나에게 박(朴) 장군이 온다는 사전 연락이 왔는지라, 나는 아래층에 있는 그 빌딩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다.
호위병(護衛兵)도 없이 지프차에서 내린 박 군은 나를 보자마자 내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비틀었다. 얼마나 세게 당기고 비틀었던지 나는 아프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그는 손을 놓아주질 않았기에 3층 식장(式場)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귀를 잡고 잡힌 채 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그것은 그가 가장 반가운 친구를 만났을 때 하는 깊은 우정(友情)의 표현이었다.
또 한번 만난 것은 혁명 주체(主體) 세력이 반도(半島)호텔*1에서 서울 장안(長安)의 명사(名士)들을 초청한 칵텔 파티에서였다. 민심(民心)의 수습(收拾)과 혁명 이념(理念)을 일반인에게 주지(周知)시킬 목적이었던 그 모임에 문리대학장(文理大學長)이던 나에게도 초청장(招請狀)이 날아왔었다. 장안(長安)에서 각층(各層) 각계(各界)의 고명(高名)한 분들이 약 300 명 정도 모인 것 같았다.
나는 그 날 정해진 시각에 그 장소에 나가보았더니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안 보여 한쪽 구석에서 콜라 한잔을 들고 서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요란(擾亂)한 박수(拍手)소리가 들리고, 입구(入口) 쪽에서 사복(私服)한 박(朴) 의장(議長)이 10여 명의 군복(軍服)차림의 최고위원(最高委員)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박 장군은 잠깐 자기를 환호(歡呼)하는 박수에 응답하는 거수경례(擧手敬禮)를 하고는 그 자리에 모인 면면을 살펴보았다.
박 의장의 눈에 내가 보이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수행원(隨行員)도 모두 뒤따랐다. 무슨 일인가 하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視線)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공보실(公報室) 사진반(寫眞班)의 플래시(flash)가 터졌다. 내 앞까지 온 박 의장은 나와 악수(握手)를 나눈 다음, 수행원(隨行員)들을 뒤돌아보며, "나의 대구사범(大邱師範) 동기인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님이시다. 한 사람씩 인사 드려!"라고 했다. 제일 먼저 "이 석제(李 錫濟)*2올시다." 하고는 한 장성이 군모를 벗어 들고 90 도가 넘게 허리를 굽혔다.
모든 수행원들과의 인사가 끝나자 박 의장은 나에게 말했다. "병희야, 나를 좀 도와 줘." 그래서 나는 "수학(數學)하는 내가 뭘 도울 일이 있겠나." 했더니, 그는 또 그 말을 받아 "지금 대학생들 문제가 제일 골치 아프다. 어쩌면 좋겠노?" 하고 묻는 것이었다.
다시 본 인간(人間) 박 정희(朴 正熙)
의장실(議長室)에 무상출입(無常出入)하게 된 나는 30년 지기(知己)였건만 인간(人間) 박 정희의 새로운 편모(片貌)를 보게 되었다. 내가 의장실(議長室)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의 첫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장식물(裝飾物)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특별한 기물(器物)도 없었다. 마치 야전사령관(野戰司令官)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가 앉는 의자(倚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손님용 나무 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품(最高品)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膳物)로 받은 미국제(美國製) "바이스로이"를 피웠는데, 그것도 저것도 아닌 "아리랑"을 그가 피우는 것을 보고 놀랐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 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그날 식단(食單)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 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받았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執權者)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感銘)을 받았다.
박 의장의 애국심(愛國心)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는 당시 장충단(奬忠壇) 공원(公園)에 있는 의장(議長) 공관(公館)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에 국민학교 6학년인 장녀(長女) 근혜(槿惠) 양을 운전병(運轉兵)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박(朴) 의장(議長)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車)가 니(네) 차냐, 그 차가 아버지 차냐?" 하고 힐책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네)가 감히 등교용(登校用)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오른다. 박물(博物) 시간에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보아가며 크고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를 박(朴) 군이 차지했었다*1.
그는 일찍 경북(慶北) 선산군(善山郡) 구미보통학교(龜尾普通學校)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首席)들 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大邱師範)의 9 : 1이라는 입시경쟁(入試競爭)을 돌파한 엘리트였고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라는 평점(評點)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頭腦)는 비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질타(叱咤)하는 작전계획이라면 저 미국 육사 출신의 엘리트들조차 우리 박(朴)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기에 스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강도강작전(漢江渡江作戰)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정희(正熙)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大邱師範)에 입학해서 본관(本館) 2층이었던 1년 2조(組)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던 "희(熙)"를 우리 둘은 공유(共有)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兄弟)와도 같은 친근감(親近感)을 느꼈었다.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義憤)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다.
어느 날은 박물교실(博物敎室)의 뒤뜰에서 대구(大邱) 출신 S 군과 약골(弱骨)인 주 재정(朱 宰晶) 군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는 주(朱) 군을 단숨에 때려 눕혀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麥酒甁)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박(朴) 군만이 뛰어들어 그 S를 때려눕히고 주(朱) 군을 구출했었다.
그 용기와 그 지모(智謀)와 그 애국심 등이 박 군의 그날[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그에게 넘겨진 대한민국에는 GNP 83 불(弗)의 헐벗은 백성들이 사월남풍(四月南風)에 대맥(大麥, 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悲運)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同胞)들의 굶주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 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長壽煙)이나 희연(囍煙)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回想)하면, 그 "아리랑"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人間) 박 정희(朴 正熙)!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어찌 나의 이 추모(追慕)의 정(情)을 알이오. 오늘에 와서 그를 비방(誹謗)하는 일부 인사(人士)들도 있지만, 진정 그를 아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나는 그 당시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만사에 청렴결백(淸廉潔白)했던 그를 보았지만,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후일의 가족을 위해 어느 구석 진, 이를테면 MBC 재단 같은 곳에 그들의 생활비 정도는 나올 무엇인가는 마련해 두었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 세상에 그처럼 결백한 집권자(執權者)가 또 어디 있었을까, 있을까?
첫댓글 너무 감동적이군요....... 역시 박대통령님이십니다.
더욱진한 향수와 청빈낙도의 위대한 지도자께서 생각이 납니다. 존경하옵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은 후세 역사가 길이 평가할겁니다.........
blog.chosun.com/gimbyngh 더 궁금한 내용은 김병희박사님의 블로그에서 질문을 나눠보세요. 좌파들의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 폄하하는 글들을 많이 봅니다. 그분께 질문해보세요. 진짜 좌파를 했는지...고령에도 불구 하고 블로그를 하고 계십니다. 오래된 타자기 뜯었다 고쳤다도 하시고...^^
박정희대통령시절에는 데모다 뭐다 해서 몰랐는데,,,이후로 박정희대통령 만한분이 한분도 없었습니다. 그시대때 대모니 뭐니 하다 죽은사람들 몇사람 됩니다. 그것은 민주화로 발전하는 과정의 희생양이었지만 요즘은 굶주리고 좌절해서 자살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개죽음 입니다.
노무현 김대중은 지들 측근 1%와 노사모 좌파들총 5%만 비리와 부패로 먹여살려주고 95%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했죠 근데 웃긴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희생 당한 사람들이 몇프로나 될까요? 모두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를 따르고 나라를 바꾸었죠 아무도 원망안해요 그 원망하면서 생 난리치는 인간들이 주로 운동권출신들인데 이 사람들한테 정말 문제가 없었을까 싶더군요 경부고속도로죽어라 반대한 인간들 부터 보세요 결과적으로 어떤지
박정히 대통령은 초인이시죠 이런 걸출한 영웅이 안나오고 이상한 뱀같은 인간에게 돌아가시고 부터 국운이 영 .....다음 정권에서나 기대해야 할 듯 하니다 노무현이 싼 똥 이명박이 정리하는게 아니라 벽에 발르고 댕기는것 같아요 ㅉ
박정희대통령의 샘물경제론과 박헌영의 항아리경제론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감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것을 판단을 못하는 좌빠들이 설쳐대고 있고 작은좌파들때문에 큰좌파들이 제데로 부각되지 않아서 더큰 오늘날의 현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