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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진저 1
마 23:13-26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13-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가로막고 서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14) ㄱ) 과부들의 집에 가서 그 가산을 몽땅 삼켜 버리고도 길거리에 나가서는 남에게 거룩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이 위선자들아! (ㄱ. 어떤 사본에는 14절이 없다) 15) 그렇다.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16)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는 화를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정해 놓은 규칙에 `하나님의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다니 17) 이 눈멀고 어리석은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황금이냐? 그렇지 않으면 황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또 너희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다니 19) 이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중하냐? 제물이냐, 그렇지 않으면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너희가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뿐만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21) 또 너희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뿐만 아니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가 아니냐? 22) 그리고 너희가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가 아니냐? 23)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25)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천국 문의 열쇠를 맡은 자들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3-1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베끼고, 가르치는 일을 독점하였습니다. 또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막아선 눈먼 인도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개종자 곧 교인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한 사람을 찾으면 더 악한 지옥 자식, 곧 아마도 더 악독한 위선자, 율법주의자를 만든다고 진노하십니다.
눈 먼 인도자여, 어리석은 맹인들이여(16-22)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눈먼 인도자로 부르시는 그 이유는 먼저 오랜 전통을 따라서 여전히 맹세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맹세에 대해서 산상수훈에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가르치셨습니다. 다음은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래도 좋지만,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금과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과 제단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중요함을 모르는 우매한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 그랬다면 물질을 탐하는 데서 비롯된 궤변으로 속이는 가르침이라는 것도 드러내신 것입니다.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3-26)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시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겉으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실제로는 본래 율법의 정신인 정의, 긍휼, 믿음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들을 질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위선으로 잔과 대접의 겉처럼 그들의 겉모습은 깨끗해 보이나 그들의 내면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막 7:21).
적용: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들이 무엇인지 서로 세세하게 나누어 보세요.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내면에 가득한 것이 무엇인지 기록해 보세요.
적절한 고난의 기간이 지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성도의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 세상을 주관하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높은 자를 낮추실 수 있고 낮은 자를 높이실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을 겸손하게 붙잡으면 어느 때라도 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는 사람이 마지막 때의 주인공이 됩니다.
< 설 교 >
거짓 신앙에 대한 7가지 화
마 23:13-33 / 이종윤 목사
사람들은 산의 정상에 오르려면 여러 개의 길이 있듯이 신앙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가르침을 거절하고 대항하며 죽이려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경고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1. 천국 시민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남을 동정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선적(3절-가르친 대로 살지 않음)이었고, 무관심(4절-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움)했으며, 교만(5절-행한 바를 남에게 보이고자 했음)했습니다.
2. 예수님의 교훈과 대치되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중요한 인물로 추앙 받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7번 화 있을진저 말씀하십니다.
① 구원의 문에 들어가려는 이들을 괴롭히는 이(13)
천국 문에 앉아 자기도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들로 오늘날 잘못된 신학자, 목사, 지도자가 바로 이와 같은 자입니다.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② 타락한 신자 만드는 이(15)
남을 악으로 끌어들여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로 공산주의자들을 돕고자 하는 이들이 이와 같은 이들입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③ 기회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16-22)
예수님은 율법의 의미와 결과가 아니라 윤리적, 사회적 관행을 따라 결정하는 소위 결의론적 사상을 저주하십니다. 오늘날도 여론몰이 등으로 죄를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④ 실제로 중요한 것을 부인하는 자(23-24)
율법정신보다 자구에 매어 있는 이들로 작은 것은 지키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부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결여된 개인 사회국가에 화가 있습니다.
⑤ 외식하는 자(25-26)
겉만 깨끗하면 속이야 어떻든 상관치 않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같은 외식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⑥ 속이 악한 자(27-28)
외식자의 속이 더러운 것은 자연적 결론입니다. 교회직분과 자리를 차지하고 의무와 규례를 행하나 속에는 아직 악이 있는 사람에게 화가 있습니다.
⑦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살해한자(29-30)
창세기의 아벨로부터 역대하 24:21의 스가랴를 죽인 일까지 피흘린 값을 받게 됩니다. 오늘도 교회나 사회에서 의인을 죽이는 악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이들 화 받을 자들에게 노를 발하시며 말씀하시지 않고 눈물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는 많은 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위해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나 혼자 의인처럼 비판하고 저주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거짓 신앙을 가졌던 바리새인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겸손히 무릎을 꿇으며,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화 대신에 복이 있으려면
마 23:13-36 / 최영기 목사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에 대하여 위선자의 표본처럼 매도하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바리새인 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바리새인이 되어서 바리새인과 같은 언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향하여 "화가 있다"라고 7번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이 경고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화가 있다"라는 말 대신에 "복이 있다"라는 말을 듣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화가 있다”라는 말 대신에 “복이 있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Ⅰ. 나와 다른 신앙 스타일을 관용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조했고 놀랐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자신들만 구원 받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이 구원 받을 기회를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저와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끔 막을 위험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 특히 새로 믿는 분들이 새로운 은혜를 체험할 기회를 막을 수는 있습니다.
남침례회는 전도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는 좋은 교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중시하다 보니까 20세기에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성령 운동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방언을 했다고 하면 선교사도 파송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분들에게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나에게 대적하지 않으면 나와 같이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막 9:40). 확실한 이단이 아닌 이상 나와 다른 신앙 스타일을 가진 사람의 집회에 참석하거나 그가 쓴 책을 읽는 것을 금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끼칠 수 없는 은혜를 끼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Ⅱ. 자신의 신앙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남의 신앙 스타일에 관대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면 이방인들을 개종 시키는 데에 열심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주기적으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전도열이 뜨거운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전도는 자신들의 신앙과 신앙 스타일을 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종자가 더 극렬 분자가 되듯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은 바리새인 자신보다 더 열렬한 바리새인들이 되어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비슷한 실수를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신앙을 얻게 된 사람을 훈련시킨다는 명목 하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좋은 점도 배우지만 나쁜 점까지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을 지나치게 고 강도로 훈련시키는 것을 불안해 합니다. 어떤 기독교 단체에서는 제자를 만든다는 좋은 의도에서이겠지만 새로 믿게 된 사람의 자신을 영적인 부모라고 부르도록 하고 생활 전체에 간섭을 합니다. 이것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의 clone을 만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같은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도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고 꼭 자신의 삶을 답습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의 결점과 약점까지 답습할 때에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이것이 반복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점점 축적되어 자신보다 더 악한 제자를 키워내는 바리새인처럼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Ⅲ.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16-22절에서 예수님은 당시 서원하는 습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왜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는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제단 위의 제물을 놓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것들이 중요한 이슈였던 것을 문헌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율법학자들은 좋은 의도에서 구속력이 있고 없는 맹세를 분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구 맹세를 하니까 이런 것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맹세를 하고도 지키지 않을 수 있는 구멍을 찾는 데에 이런 규칙들이 쓰였습니다. 이러한 허점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이러한 규정에 능통한 율법학자였을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피아에 기생하는 변호사들이 법률의 맹점을 찾아내서 자기의 고객이 법망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묘한 시스템을 예수님은 한 마디로 무너뜨리십니다.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없고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구속력이 있다고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제단이 있기 때문에 제물이 있는 것이지 제물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19절) 예를 들어서 돈을 꿀 때에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제물 살 돈으로 갚은 수가 있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다 식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무엇을 갖고 맹세를 하든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맹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다 지켜야지 그렇게 따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20-22절). 여기에 관해서는 예수님은 이미 답을 주셨습니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고 믿을만한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마 5:34, 57).
그러므로 성도들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 문서화 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정식 계약서를 쓰고서도 허점을 이용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 중의 하나는 휴스턴 한인들이 다 구원 얻는 것입니다. 다 구원 얻은 결과로 술집과 도박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약서 없이도 돈을 빌려주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안 믿는 사람들조차도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계약서가 필요 없어”라는 말이 들을 때를 꿈꿉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지나친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물건을 배달할 때에도 여유를 두고 배달 일자를 잡습니다. 그래서 약속보다 일찍 배달하는 수가 많습니다. 중국 음식점에 주문을 하고 재촉을 하면 밀가루를 쳐서 국수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지금 배달 떠났다고 말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지킬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나친 약속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약속을 하고 못 지키는 수가 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무슨 부탁을 받든지 간에 얼른 답을 않습니다.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선뜻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기도 하지만 섭섭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킨 약속은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빈번해져서 신뢰가 없어지면 목회는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이렇게 하나님처럼 약속하면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Ⅳ. 믿음 생활의 성공 잣대를 사랑과 섬김에 둔다
예수님은 23절에서 십일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반드시 할 필요가 없을 텐 데도 들에서 캔 나물에서도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것에는 철저하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 등을 소홀히 한 것을 나무라셨습니다. 이것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부정해질까 봐 포도주에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면서 낙타를 삼키는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유머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에 사용하는 잣대가 얼마자 모임 참석에 충실하느냐,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느냐, 얼마나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느냐 입니다. 사회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가정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등은 따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분들이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섬기려 오셨기 때문에 섬겨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이 믿음 생활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잊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성경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 영적 체험이 얼마나 많으냐가 신앙 생활을 기준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랑하는 삶을 살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이 없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하고, 체험이 많아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사랑과 섬김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자신의 상태에 관하여 착각을 하고 있지 않는가 살펴보고 신앙 생활을 조정할 수 있기 바립니다.
Ⅴ. 속 사람에 집중한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경건의 모습은 있었지만 내적인 경건의 모습이 부족하였습니다(25절).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아무리 술 담배 하지 아니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이 미움과 분노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그 사람은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에 집중하지를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실 까 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을 의식하면 외적인 경건을 추구하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 내면을 살피기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은 고백하고 회개하며 정결함을 받으면 참된 경건을 이룰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안을 먼저 깨끗케 하면 밖도 깨끗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화를 내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합시다. 이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화를 내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화를 내지 않으려 하지 말고 화를 내게 만드는 마음속의 분노의 원인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여야 합니다. 겉을 아무리 단장하여야 속이 깨끗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속을 깨끗이 할 때에 겉도 깨끗해집니다. 인간의 노력은 겉만 깨끗하게 만듭니다. 속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속은 어린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딱지를 갖고 놀던 것이 사업체를 갖고 놀게 되어 스케일이 커졌고 속의 감정을 구렁이처럼 감추는 기술이 늘었다 뿐입니다. 노인이 되어 망령이 들어 어린애처럼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속은 항상 어린이였지만 감추고 살다가 노인이 되니까 감추는 것이 힘이 들어 속이 있는 모습 그대로 노출되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 노력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속을 깨끗하게 하시고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엡 3:1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속 사람이 나날이 새로워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4:16). 속사람이 변화하기 때문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고집 세어지고, 욕심 많아지고, 편견이 깊어지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겉 모습은 무너져도 점점 더 우아한 사람, 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서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결과로 겉 사람도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Ⅵ. 삶의 이중성을 인정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과 접촉을 하게 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민 19:11). 그런데 오래 동안 관리하지 않은 무덤은 자취가 희미해져서 타지에서 온 사람은 지나다가 모르는 새에 접촉을 할 수가 있습니다. 몸이 부정해져서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무덤에 회칠을 해서 눈에 뜨이도록 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을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여전히 죽은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27절). 이것에 비유하여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위선자는 영어로 hypocrite입니다. hypocrite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hypocretes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hypocretes는 탈을 쓴 배우라는 뜻입니다. 연극을 할 때에 배우는 배역에 해당하는 가면을 쓰고 나왔습니다. 우리 나라 고유의 탈춤을 출 때에 배역에 해당하는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선자는 진짜 얼굴과 보이는 얼굴이 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떤 분은 위선자가 되기 않기 위하여 생각과 느낌을 여과 없이 표현합니다. 남과 같이 있을 때에도 혼자 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을 한다고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 사람은 예의와 위선을 혼동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무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 옷도 안 입고 나체로 길을 활보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삶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시작은 우리의 삶에 위선자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부인할 때에 문제가 생기고 진정한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지난 주에 말씀 드렸지만 가능하면 겉의 모습과 속의 모습이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또 이웃이 자신에 대하여 과대 평가하는 것 같으면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슬쩍슬쩍 보여서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아니하도록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직한 마음과 태도를 갖고 살 때에 성령님께서는 매일 매일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하여서 위선자가 되는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Ⅶ. 악인 입장에 자신을 놓는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대부분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래새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핍박 받았던 하나님의 종이나 일군을 존중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으면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이 종이나 일군을 핍박하던 과거의 선조와 다름없음을 지적하시고 호되게 나무라십니다(29절, 34절). 그 증거로 자신을 잡아 죽이려 하고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사실을 들고 계십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흥부 놀부의 얘기를 아실 줄로 압니다. 흥부와 놀부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 흥부는 가난하지만 착했고 형 놀부는 부자이면서 못되었습니다. 동생 흥부가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고쳐주었더니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는데 이것을 심었더니 박에서 돈에서 쌀에 생활 필수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형 놀부가 이 말을 듣고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다음에 고쳐주었더니 역시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는데 이것을 심었더니 똥이 나오고 나중에는 나한이 나와서 혼을 내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동화를 듣고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 양심이 있고 그랬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잘 되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을 때에 통쾌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을 흥부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을 놀부와 동일시했다면 이것은 통쾌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입니다. 콩쥐 팥쥐 얘기를 들어도 자신을 못된 팥쥐가 아니라 억울하게 핍박받는 콩쥐와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콩쥐가 핍박 받는 장면을 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놀부일 수도 있고 팥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웃과의 갈등이 생기면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입장이 옳고 상대방은 억지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악인의 위치에 놓아 보아야 합니다.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이 항상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가해자기 아닌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입장과 의견이 항상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상대방의 의견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상대방의 입장이 더 정당하고 자신의 입장이 부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자시 성찰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을 보기 위하여서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을 살펴 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시 26:2).
우리는 우리가 다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아 그들의 삶을 교훈 삼아 "너희들에게 화가 있다" 대신에 "너희들에게 복이 있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것이 크뇨
마 23:16-23 / 박지온 목사
본문에서 어느것이 크뇨라고 했다. 19절에 보면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즉, 우선순위가 어느것이냐라는 말씀이다. 뭔가 믿음의 본질이 뭐냐 그것이 오늘 이해해야 할 부분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있다. 우리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마치 우뢰를 치듯이 천둥번개를 치듯이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그러면서 사정없이 힐난하고 책망하고 나무라는 부분이 저주와 죽음을 선언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부분이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화있다는 배경이 앞의 부분이 안되었다고 하시면서 마23:1부터 쭉 나오는 부분이 나와있다. 그중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게 말씀했다. 다시 말해서 금요일날 전도학교시간에도 그 다음에 지금 오늘까지 쭉 메시지속에서 흐르고 있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렇게 말씀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요 본질이다. 그러니까 뭔 말인가하면 우리가 믿는다하면 뭘믿는가?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역사속에 내가 구체적으로 인도받는 길은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내 생활과 삶에 체험되는 만큼 우리는 어디서는가하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인도하신다는 주권위에 서는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확인될 수록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것을 보는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예수님이 내게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체험될 수록 내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의 사실이 자리잡고 뿌리내리게 된다. 그러면 이것이 되어질 수록 믿음이라 한다. 우리가 믿는 것이 이 부분이 무너지면 신앙이 있다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부터 무너진다. 자기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여기서 무너지고 이것이 무너질때에 불신앙이 찾아오고 그럴때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
저는 늘 계속해서 말씀드리면서 이 말씀을 아마 메시지속에서 계속 밑바탕을 깔고 계속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런데도 이게 안된다. 듣고 나가면 또 잊어버리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수단에 빠진다. 실컷 듣고 문꼬리 잡고 나가면 하나님은 간곳이 없고 내가 앞서버리고 자기주장이 앞서고 자기를 강조한다. 그래서 이렇게 만드는 배경이 있다.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미혹하는 배경은 창3장이요 사단의 역사이다.
여러분들이 뭔가 원치않게 자꾸 그렇게 빠지고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사단의 역사때문이다. 왜냐? 사단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 사실을 누리면 하나님의 주권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믿고 믿어지게 되는 이렇게 되면 사단이 설자리가 없기에 그러니까 집중해서 사단이 공격하는 것이 그리스도 모르게 하고 그리스도를 모르게 하면서 자기중심으로 살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속에 못살도록 이걸 못믿도록 집중공격한다. 그러니까 무너진다. 결국은 바리새인이 화있을진저라고 선언받게 되는 배경이 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받고 주권이라하니까 마음이 마비가 되어서 주권이라는 말에 대해서 별로 감각이 없다.
그래서 지난번에 설명을 했다. 다시 설명하고 싶은 것은 주권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주권속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실제 감각하고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것이 엄청난 구원을 받았지만 이것이 주권속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가 구체적으로 받아놓고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까 구원의 은혜는 엄청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는가? 진짜인가? 진짜이냐고 다짐하니 아무소리도 안한다. 또 진짜인가 물으면 아무말도 안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정~말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잘 안된다. 왜그런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날 눈떠보니 송현교회에 앉아있고, 어느날 눈떠보니 송현교회에서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하고 저게 무슨 말인가 잘모르면서 앉아있고 또 계속듣고 하는 사람은 어느날 아!~ 그말이구나 그렇게 앉아있다보니까 이게 뭔가 감각이 안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다. 엄청난 선물로 받았기에 적은거 받으면 감사한데 너무 큰거 받으니까 감사할 마음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너무 엄청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러니까 꼴깍 넘어가고 깜짝 넘어가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고 생각만 할 수록 기분좋다다 아니라 찬송부르고 이렇게해야 되는 사람들이 안되는 배경이 여기에 대한 감각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는 배경을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설명을 했다. 뭐냐? 이 사실이 내게 체험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 체험이 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또 옛날로 돌아간다고 한다. 옛날에 뭔가 이상하게 몸이 뜨겁다던가 어느날 갑자기 깜빡 넘어가서 꽃이피고 새가 우는 세계를 봤다던가 그래만 되어도 넘어간다. 진짜 좋다. 너무좋아서 또 그 세계를 볼려고 넘어갈려고 몸부림친다. 매일 넘어가다가 이상하게 빠지고 이게 신비주의다. 자꾸 이것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약간 보기만 봐도 좋으니까 자꾸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만 봐도 좋은 그것이 여러분과
이것이 좋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체험하게 되는 배경이 뭔가하면 우리가 체험하게 될때에 그것이 말씀으로 체험되어야 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이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라했다.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체험하느냐? 예수님이 내게 그리스도시다. 그것이 현장에서 삶에서 실제로 이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순간마다 너무 감사하게 된다.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될 때에 영접하는 순간에 얼마나 평안한가? 그
런데 오래전부터 모태부터 예수믿은 사람은 감각없고 평안을 모른다. 그러나 중간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성령이 내안에 오는 사실이 확 깨닫는 순간에 너무 평안이 오니 그러면 그들은 쉽다. 조그마한 문제, 약간만 불안해도 예수그리스도 내 안에 오시옵소서. 자연적으로 기도가 나간다. 그리고 그 평안함을 나의 마음을 다시 깨닫게 되고 체험하도록 모든 방향을 맞춘다. 한번만 체험해도 실제 조금만 체험해도 저절로 그리 돌아간다. 이것이 체험이 안되니까 모태로부터 믿다가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 오다보니 송현교회에 왔고 그것도 잘믿은 것도 아닌데 한달에 한번씩 교회오고 어쩌다가 한번씩 송현교회에 왔다. 이게 잘안된다. 그래서 여러분 계속해서 하는 말씀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일할 수 없다. 이 일에 조금만 체험이 되면 조금만 체험이 되게 되면 구체적으로 달라지게 된다.
제가 일본에 신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힘든 생활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성도들이 전부 미녀요 잘생겼다. 또 일본남자와 결혼도 하고 이러니까 이 은혜속에 들어오니 너무 좋아서 자기 남편들도 강제로 끌고 온다. 심지어는 보니깐 싸워서 이사람들은 전도하는것도 강제로 끌고 온다. 그래가지고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그다음에 전도하러 종일 뛰어다니고 남편들이 처음에는 말리다가 부인이 변하니까 옛날에는 안그러다가 뭔가 교회들어가서 기도하더니만 성격과 생각이 변하니까 남편들도 철야도 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딸아이가 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은 그들과 같이 뛰어다닐려니 너무 힘들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어릴때부터 받으니까 멍청하게 해서 큰 축복속에 들어오니 어느날 감사하다 기쁘다 이걸 잘 모른다. 예수그리스도 아버지가 목사고 어머니가 사모니까 온통 주변이 예수그리스도이니까 온통 큰 은혜니까 잘 모르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헌신을 잘 이해를 못한다. 그리고 또 우리 신목사님이 오셔서 보통 섰다하면 1시간 30분 하는데 그런데 우리교회 어쩌다가 헌신예배할때에 그러는줄 알았는데 본교회에서는 1시간 30분, 2시간이다. 그 메시지를 아멘하면서 듣고 너무 은혜로 듣는다. 너무 은혜속에 있는 사람은 은혜받는데 갈급함이 없는 사람은 지루해진다. 그런데 아멘하고 한다. 제가 설명을 했다. 애야 니가 이거하나 이해해라 그분들은 여기에 오는 것이 좋으니까 여기와서 메시지듣고 여기에 와서 헌신하고 여기에 와서 전도하고 다니니까 여기가 바로 천당이라 천국이다. 너무 좋다. 그러니까 시간가는줄을 모르는 것이고 너무 감사하니까 그리고 그 감사를 이 말씀을 통해서 삶에 생활에 체험되니까 그게 추구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어쩌다가 이곳에 왔는가? 와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구원받았다. 감사한다. 그걸로 끝나고는 신앙생활이 안된다. 예수그리스도다. 모든 문제해결자라는 사실이 내 삶에 조금만 체험되면 그때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된다. 그 체험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사실이 체험되는 순간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운동이다. 그때부터 내가 예수그리스도 부르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더라 성령이 역사하더라 이것을 한번만 체험하기만 하면 그때에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하면 아멘이 나오고 힘이 나온다. 들려지는 순간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성경이 뭐라고 말씀했는가하면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오늘 취급을 해 놓았다. 16절에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그리고 17절에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사정없이 비꼬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저주이다.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이것은 뭘 배경으로 하는가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백성들이 제사드릴때에 금과 제물을 가지고 오면 제물로 맹세한다 하면 쉽게 말해서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 그 이야기이다. 제물이 많은가 적은가 양을 말하는것이고 그 다음에 제물을 드리는 단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제물을 드리는 성전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쓴다. 이걸 조금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특별히 제사장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에 뭘 많이 가지고 오고 그 많이 가지고 온 것을 기준으로 많이 드렸으니 많이 맹세한다 이런배경이다. 많이 가져와서 많이 드리고 그러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걸로 맹세하면 효과가 있다. 쉽게 말하면 돈 많이 내라 그러면 역사한다. 그런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경은 말했다. 오늘 뭐라고 말했는가? 제단에 올린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어느것이 더 크냐? 어느것이 우선이냐? 여러분 오늘 이걸 조금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십일조를 많이 드렸다. 그것이냐? 그 십일조를 거룩히 하고 그 십일조를 드릴 수 있도록 십일조 드리는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선이냐? 그 배경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면에서 십일조를 내면 부자된다. 복받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복이 된다. 이 말이다. 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말해서 나와 내인생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속에 서는 사실이 우선이 안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문제들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위기 때 일수록 어려운 때 일수록 이 우선순위가 바로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기를 마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여러분과 저의 모든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를 바라볼때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사건과 일과 문제가 생길때에 적든크든 뭐냐? 하나님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여야 한다.
저는 저의 과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조그만한 일을 당할때에는 성내고 화내고 보통보면 두부부가 잘 싸우는데 큰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우리가 뭘하는가 하나님이 하신다. 이게 와서 차라리 큰 일이 생기고 큰 것을 잘못하면 용서하는데 적은 것 하면 당신이 왜 이랬냐? 싸운다. 큰일생기면 왜 이렇냐!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이루셨다. 큰 일생기면 아무말도 안한다. 큰 일생기면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적은일로는 싸운다.
여러분 위기를 당할 때일수록 먼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구나 이것이 나를 무너지게 하지 않은 신앙의 근거이다. 내용이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뭐가 있는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구나 !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이것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날마다 누리는 것이 예수그리스도 붙잡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체험되는 것이 바로 기도요 삶이다. 예수그리스도 모든문제해결자라는 것이 체험 될수록 우리가 어디에 서는가? 하나님이 내 모든 일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구나. 이 자리에 서는 배경이다. 이 배경이 되어지게 되면 그 다음의 문제는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여러분 뭔가 돈이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되고 굶으면 굶으라는 이야기가 다른게 아니다. 가만히 굶어라. 굶으면 죽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는가? 위기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정말 어려울때에 굶으라는 것은 가만히 있고 그냥 굶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일수록 굶어도 좋다. 누구를 바라보느냐? 굶는 사건과 일속에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이 신앙속에 배경이 되어야 굶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목사님 굶으라더니 왜 굶으라 하느냐? 제가 조금 이걸 인용해서 저는 교회 교인들이 뭔가 이 돈을 빌리고 빌리지 않았다하고 손해보고 떼이고 이런 사람이 많이 있다. 여럿이 있다. 정말 기도하고 하라. 뭔가하면 나는 내게 와서 누가 돈을 얼마 빌려줬는데 안주더라. 언제 빌리고 어떻게 했는데 그 사람나쁘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전에 돈을 빌려서 안주는 사람이나, 돈을 빌려줘서 못받아 망한 사람이나 내한테는 둘다에게 좋은소리 안한다. 둘다 영적인 문제이다. 뭐하려고 망할때에 빌려주었는가? 뭔가 영적문제이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야 한다. 빌려줄때에도 기도하고 하라. 그리고 기도하고 마음에 열려지지 않으면 빌려주지 말라. 축복받을 때에 빌려주라. 안그러면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는가하면 빌려주고 떼였다고하면 그때일수록 떼이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뭔가? 그때일수록 내 영적문제가 뭔가 발견하라. 그리고 그럴때일수록 굶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 여러분 오죽하면 하나님이 굶겨가면서 하나님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가? 얼마나 강팍하면 그런가? 뭔가 하나님의 이 엄청난 배경을 우리가 믿고 우선해서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되어야 뭐가되는가?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체험이 되게 된다.
모세가 정말 위기때에 모세가 외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를때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위기때일수록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런 일 당한 줄을 모르시겠느냐? 배경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향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가만히 서서보라. 그말이 뭔가? 위기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 이 역사를 이 사건속에서 어떤계획을 가지고 역사하는가를 사건을 통해서 보라는 말이다. 이것이 안되고 문제와 사건이 생기면 딱 떠오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튿날 또 행동한다. 그러면 틀림없이 망한다. 그렇게 안되면 하나님 이렇게 했는데 왜 안되냐? 어저께 계시를 주었는데 안했는가? 계시를 주기는 뭘주는가? 그때 계시를 준 것은 마귀계시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니 홀랑 망했다. 그 꼴이다.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이것이다. 성령은 여러분들의 어떤 욕구를 따라 그걸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과 뜻이 믿음이 되어야 그 믿음의 배경을 가지고 내 마음과 생각을 이끌어 갈 수 있는때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생각은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데 성령인도해주옵소서.
그때 역사하는 것은 무슨역사인가? 사단의 역사이다. 잘 이해해야 한다. 자기 생각대로 말씀과 방향은 전혀 다른데 나를 인도해 주옵소서. 뭐가 말씀과 전혀 다른데 겉으로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점이 잘 이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어렵고 힘든 문제일수록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내 모든 인생을 지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렇게 하시는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땅에 오셨다. 예수그리스도! 내 마음에 모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내인생을 맡으시고 인도하시고 나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때에 마음과 생각과 결정이 축복과 연결되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도받는다.
여러분 역사속에 잘 알아야 한다. 개인개인속에 가정속에 망하는때가 있다. 반드시 이해하라. 역사속에 망할때는 교회가 안될때에 교회가 복음을 떠날때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포로되고 어려움 당하고 고통당할때에 반드시 교회가 복음떠날때에 언약 떠날때에 그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저주가 나왔다. 회복될때에 흩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는 순간에 전부 또 회복이 된다. 이것이 교회사의 반복이였다. 여러분 우리개인이 망하고 우리개인이 어렵고 힘들때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살필 수 있다. 살펴야 한다. 그러나 딱 한가지 보기 바란다. 망하는 내게 망하게 하는 흑암에 붙잡혀 있다. 복음이 희미해져 있고 하나님의 인도가 희미해져 있고 언약이 약화되어있을때에 이때에 누가 역사하느냐? 들어오는 것이 흑암의 세력이다. 예수그리스도 그러면 홀랑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근본 내 생각과 마음이 바꾸어지는 속에서 축복과 역사로 쫙 인도되어간다. 이것이 안될때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고 하면 근본 생각과 마음이 계속해서 망하는쪽으로 그 결과가 그렇게 열매맺어
개인이나 가정이 망하게 될 때에 단 한가지이다. 언약이 약화될때이다. 내 개인이 그 다음에 내 가정이 교회의 모든 사건과 일들 속에서 한가지 붙잡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약화되었구나! 그말이 무슨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속에서 나를 지금 이끌어 가시는 이믿음이 희미해지고 이 믿음이 흐려졌구나 그러면 누가 들어오는가? 그 믿음이 희미해지는 순간에 사단의 역사가 들어오고 이때부터 실패한다. 이때부터 우리가 가장 무서워해야할 문제이다. 사단은 이것을 모르도록 계속해서 공격한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그런가 하다가 문꼬리잡고 나가면 잊어버리고 문제생기면 내가 또 왜 이럴까? 엉뚱한 곳에 가서 본질적으로 우선이 되어야 할 문제는 안살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엉뚱한 것을 붙잡고 있다. 화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아 실컷 노력하고 실컷 애쓰고 실컷 봉사해도 엉뚱한 것 붙잡고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져야 하는가?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앞에 선 우리의 삶이냐? 먼저 우리가 삶을 어떻게 해야 한다. 필요하다. 먼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필요하다. 그보다도 먼저 하나님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시간에 예수그리스도 그 약속붙잡고 적고 큰 일이 닥칠때에 "지금 나는 하나님앞에 서있다". 꼭 기억하라. 지금 하나님앞에 서있다. 판단과 생각과 모든 결정이 지금 나는 하나님앞에 있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체적인 그 역사속에 인도받는 주권적인 사실이 내게 승인되는 정도가 아니고 믿고 그 믿음이 완전히 붙들려 지고 이 사실이 굳어지고 뿌리내리는 만큼 평안과 안식이 온다.
말씀을 맺는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묵상하라. 어제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가정예배에 장단점이 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우리집에서는 나를 공격하는 시간중에 하나다. 이건 주의하라는 말은 늘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 여러분 남편과 가정예배드릴때에 좋은 기회다. 그때 바가지를 끌는다. 그것은 조심해야 될 문제이다. 그런데 이게 하루이틀에 고쳐지는게 아니라 오랜시간 포럼을 하면서 고쳐져야 한다. 그렇게 자꾸 되면 내가 저거 들을려고 하나 그렇게 된다. 그러다가 이제 또 드리고 드리고 하는 중에 요즘은 또 달라졌다. 어제는 제가 내 설교에 은혜받았다는 그 말이 아니다. 그게 힘이 되긴 한다. 내 아내가 내 설교에 은혜받았다고 하면 힘이 된다. 그런데 그게 그렇다보니 말하는게 아니라 뭔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구 이 일도 이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속에 인도되어가는구나 이걸 묵상을 하루에 몇 번만 했는데 굉장히 편해지더라고 했다. 그것이 기도이다. 기도라고 할때에 뭘 내어놓으십시오. 내어놓으십시오. 그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전해 믿지도 않고 자기 욕심대로 오늘 말씀한 것처럼 오늘 본문말씀속에서 말씀한 것처럼 누구든지 자기만 높이고 자기주장하고 자기주장이 들어지기를 애를 쓰는 이런 사람들한테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안된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적고 큰일을 당할때에 한두번만 묵상해도 평안이 온다. 하루안에 문제와 사건이 생길때마다 지금도 하나님앞에 있구나! 지금도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이 사건속에 어떻게 해돌라고 하지말고 여러분이 머리를 팽팽돌려서 이건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러지 말고 던저버리고 그러지 말고 하나님 이 사건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해 돌라고 맡기고 조용히 기도해 보라라. 그다음에이것이 이어지면 사건생길때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뭘 깨닫게 하려 하십니까? 어떻게 인도하실려고 합니까? 조금만 인도받게 되면 하나님 보시고 인도해주신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때에 뭐가오는가? 축복과 승리와 성공으로 인도되게 되어있다. 이 축복의 역사가 너무 확실한데도 죽어도 안된다. 왜 그런가? 누구의 배경인가? 사단이 가만히 안둔다. 거의 알고 있는데도 "은혜받자!" 그러므로 은혜받아야 한다. 내 힘으로 되는게 아니라 은혜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앞에 담대히 나갈찌니라 은혜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조금만 믿어도 하나님앞에 기도가 나오게 되고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조금만 그 사실을 묵상하고 인도받는 순간에 평안이 온다. 평안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 다는 것이고 평안이 왔다는 것은 축복과 은혜가 약속된 것이다. 평안이 왔다 당장 뭔가 재수가 좋아서 완전히 바꾸어진다. 그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이 평안이 왔다. 내 인격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진다. 빌
새삼스럽게 말씀드린다. 어려울때일수록 힘들때일수록 설치지 말기 바란다. 내게 어려움과 힘든일이 당하거든 조용히 아니 24시간 왜냐하니까 그때는 잠도 잘 안오니까 생각나는데로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앞에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 이 일로 통해서 내게 무엇으로 인도하시겠습니까?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조금만 기도하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모든문제 해결자이구나 체험되게 되어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아버지여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주의 종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예수그리스도 모든문제해결자라는 사실이 나와 내 생활과 사건속에서 구체적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의 종들이 기도하게 하시고 간구하게 하시고 주님의 역사와 축복의 역사로 인도하시며 축복해주셔서 하나님이 이시기에 주님의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인도받는 사실적인 역사를 감사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종교가 타락하면
마 23:16-22 / 이정선 목사
인류의 역사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만, 인류의 역사는 타락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 인류는 타락을 반복하며 타락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 평안 - 타락 - 징계 - 고통 속에 부르짖음 -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의 반복이었습니다.
우리가 타락이라고 하면 도덕적인 면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인간의 모든 영역이 타락합니다. 물론 타락이라는 것이 도덕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도덕성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타락이라는 단어 자체의 뜻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기준에서 떨어지는 것인데, 그 결과는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입니다.
정치가 타락하면 어떻게 됩니까?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가 타락하면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대가 됩니다. 타락한 정치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음모와 부패입니다. 정의나 원칙 같은 가치는 설 자리를 잃게 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추악하고 비열한 진흙탕 개싸움이 전개됩니다.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할 국민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독재정치와 공포정치가 뒤따르게 됩니다. 결과는 국민들의 고통이지요. 엊그제 보도에 보니까 무기징역 선교를 받고 15년 감옥에 있다가 모범수로 나온 사람이 39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일이 있더군요. 이게 다 정치가 타락해서 국민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경제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미국의 월스트리트는 금융시장의 중심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월스트리트에서 데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1%에 맞선 99%라는 것이 캐치프레이즈입니다. 그 데모는 세계 각국으로 퍼져서 전세계의 금융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1%가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99%를 쥐어짠 것이 오늘날 경제가 타락한 모습입니다.
경제활동이라는 것은 생산활동을 의미합니다.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합당한 댓가를 취하는 것이 경제의 기본입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것이 경제활동이고, 기술자가 고장난 자동차를 고치는 것이 경제활동입니다. 돈이나 토지나 기술, 또는 노동력 등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금융업이라는 것은 경제활동에서 사용되는 돈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돈을 관리하는 일 자체는 생산활동이 되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재화의 교환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자체가 생산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융업이라는 것이 가장 큰 경제활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에다 투자를 하게 돼요. 그러다 망한 나라가 아이슬란드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얼음으로 덮인 땅입니다. 인구도 30만 밖에 되지 않고, 경제활동을 할 만한 게 없어요. 그런데 돈을 끌어들여서 금융업으로 크게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생산활동은 전혀 없는데 경제규모만 엄청 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사를 짓거나 양을 키우거나 또는 공장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없는데, 남의 돈을 빌려다가 돈장사를 해서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대여섯 번째로 높은 호황을 누렸습니다. 돈장사의 특징은 위험이 높을수록 수익도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높은 수익을 즐기다가 결국에는 쫄딱 망했습니다.
전 세계를 경제위기에 빠뜨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라는 것도 경제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이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립니다. 집값이 두 배로 올랐기 때문에 은행에서는 마구 돈을 빌려줍니다. 그러면 이 채권을 다른 금융회사에게 팝니다. 신용평가회사에서는 이 채권의 신용을 높게 책정해줍니다. 그러니 웃돈을 받고 팔 수 있습니다. 은행들이 여기에다 막대한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면서 규모가 한없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동산 거품이 꺼져서 집값이 폭락하고 금리가 올라갑니다. 그러면 돈 빌린 사람들은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을 은행에 뺏깁니다. 은행에서도 집 뺏어봐야 빌려준 돈 회수가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아래에서 무너지니 저 위까지 와장창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대한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진 거라고는 집 한 채뿐인 서민들은 전 재산인 집을 잃어버렸지만, 돈장사를 했던 금융업에서는 그동안 엄청난 호황을 누리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도산을 했다고 자기들이 책임을 집니까? 정부에 지원요청을 하는 거지요. 그렇게 지원요청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엄청난 보너스를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99%의 피를 빨아서 1%의 배를 채운 것이지요. 이익은 자기가 챙기고 고통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문이 타락하면 어떻게 됩니까? 학문도 타락하는 걸까요? 몇 년 전에 있었던 황우석 박사 사건이 대표적이겠지요. 국가과학자 1호로 지정되었고,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였던 분이 연구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줄기세포 연구에
학문에 있어서 희대의 사기사건이라면 도슨의 필트타운맨 사건일 것입니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후 진화론 진영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유인원과 인간 사이의 중간고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12년에 영국에서 도슨이라는 사람이 50만년 전 인류의 두개골과 턱뼈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필트타운이라는 곳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필트타운맨이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독일의 네안데르탈맨이나 프랑스의 크로마뇽맨의 두개골은 8만 년 내지 4만 년 전의 것으로서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말해집니다. 그런데 50만 년 전의 화석이 발견되었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유인원과 인간의 중간고리로서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제시되었습니다. 세계가 들끓었습니다. 몇 년 후에 도슨은 죽었지만, 영국 정부에서는 도슨의 동료들에게 그 업적을 인정해서 기사작위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조사를 해보니 도슨이 발견했다는 두개골은 중세시대 사람의 것이었고 턱뼈는 오랑우탄의 것이었습니다. 도슨은 이것들을 화학약품에 담가서 마치 아주 오래 전의 뼈처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빨에는 줄로 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학문이란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라고 정의됩니다. 그런데 거짓으로 진실을 탐구할 수 있습니까? 학문이 타락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논문을 대씬 써 주는 아르바이트가 성행한다고 합니다. 이름 있는 교수들은 연구는 다 조교들에게 시키고 자기 이름으로 연구발표를 합니다. 목사님들은 미국에 가서 돈으로 산 가짜 박사학위를 자랑스럽게 주보에다 냅니다. 미국에 있는 소규모 신학교들은 한국 목사들에게 박사학위를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합니다. 학문은 없고 학위는 넘쳐납니다. 학문이 그렇게 타락하는군요. 진실을 탐구한다는 학문이 타락하면 사람들은 모두 사기를 당합니다.
예술도 타락할까요? 요즘 유행하는 노래들을 들어보면 노래 같지도 않습니다. 옛날의 노래들은 심금을 울리는 정취가 있는데, 요즘 노래들은 시끄럽기만 하고 정서에도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거야 장르가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도덕적 가치를 논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헤비메탈 같은 장르는 그야말로 사탄적인 음악입니다. 노골적으로 사탄을 숭배하는 음악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음란한 내용이나 탈선을 부추기는 내용의 노래들이 나와서 청소년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음악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음악이 타락하게 되면 그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타락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의료계도 타락합니다. 약을 잘못 쓰면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지는데,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료계가 타락하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종교가 타락한 것을 우리에게 일러 줍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얼마나 타락해버린 종교의 모습입니까?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성전에 있는 금이 훨씬 더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 아닙니까? 만약에 성전에 금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종교 자체가 없어졌겠지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그야말로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성전의 금이나 제물에 의해 그들의 행동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종교의 본질은 사라지고 물질만능 사상에 물들었다는 뜻입니다. 종교는 그저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성전이 필요한 것은 금을 얻기 위한 것이고, 제사가 중요한 것은 제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종교의 타종교가 타락하고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타락한 종교를 향해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눈 먼 인도자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입니까?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종교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탄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이사야 선지자도 그렇게 외쳤습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사 9:16).
정치가 타락하면 국민들이 억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경제가 타락하면 사람들의 삶이 궁핍해질 것입니다. 문화가 타락하면 사람들의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의료계가 타락하면 사람들의 건강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런데 종교가 타락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타락한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퀴 없는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페달을 밟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만큼 종교의 타락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타락을 우리가 막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의 타락을 막아야 합니다. 다른 분야가 타락하면 우리가 좀 고생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종교가 타락하면 우리의 영혼이 죽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이 타락할 때 종교가 그것들을 바로잡고 개혁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종교가 타락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종류의 타락을 개혁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의 개혁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세의 기독교는 깊은 밤중과도 같이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종교의 힘이 막강했고, 그 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종교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종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성전의 금은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중세의 기독교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기독교는 거의 미신의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무지와 맹신이 신자들의 삶을 지배했고, 얼토당토 않는 것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부패와 권력다툼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감추어지고 잘못된 교리와 사상이 무지한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개혁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입니다. 종교개혁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것과 같이 면죄부 판매입니다. 면죄부는 그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돈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신자들이나 교회에도 아주 편리하고 유용했습니다. 신자들은 불확실한 죄의 용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보증서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고, 교회에서는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침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의 판매가 과도하게 시행되었고, 이것이 개혁에 불을 붙였던 것입니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것을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봅니다. 그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가 개혁의 깃발을 들었고, 프랑스 사람 칼빈은 스위스의 제네바로 망명을 가서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을 일으켰고,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교회와 결별하면서 영국교회는 앵글리칸 교회로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청교도라고 불리우는 신자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개혁에 가담하게 되지요. 유럽의 종교개혁은 그렇게 여러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그중에서도 제네바에서 활동했던 칼빈의 신학사상을 계승한 그룹을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이 개혁신학은 네덜란드에서 꽃을 피웠고,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로 정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 신학을 개혁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내세우는 표어 하나는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The church reformed and always to be reformed)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부패하고 타락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늘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왕하 18:3-4). 요시야도 대대적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입니다(왕하 23:5-8). 끊임없는 개혁만이 교회를 성결하고 거룩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바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개혁되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여 뭐라고 책망하실까요? 개혁에는 큰 희생이 따르기도 합니다. 어지간한 각오를 가지고는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 가톨릭에서는 성직자들의 결혼이 금지되었는지 아십니까? 중세시대에 고위 성직자들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했습니다. 그 지위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막으려고 아예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해버렸습니다. 결혼의 금지가 목적이 아닌 거지요. 제가 소속된 한국의 합동 교단에서는 총회 임원선거를 할 때 제비뽑기로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금권선거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극약처방으로 제비뽑기 선거를 도입한 것입니다. 성경적인 제도라는 명분으로 도입하기는 했지만, 오늘날 제비뽑기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개혁을 위해서는 더 큰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냥 돈 쓰지 않고 임원선거를 하도록 개혁이 되면 얼마나 좋아요? 결혼 금지하지 않고 자식이 있어도 주교 자리나 대형교회를 물려주지 않도록 개혁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개혁자의 사명을 가지고 교회를 향해서 외치고 개혁에 뛰어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할 개혁은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부터 개혁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개혁되면 그 다음에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안에 부끄러운 모습들이 많고 잘못된 부분들이 많은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고치시고 새롭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모두 그 개혁의 부분이 되어서 개혁에 동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성이 당신을 구원할 것인가?
마 23:23-28 / 이정선 목사
현재 활동하고 있는 물리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스티븐 호킹 박사일 것입니다. 뇌성마비로 신체활동이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블랙홀에 대한 연구로 우주의 신비를 풀어낸 천재 물리학자라는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티븐 호킹 박사가 며칠 전 70세 생일 기념 인터뷰에서, 여자야말로 완전한 미스터리(Women. They are a complete mystery.)라는 말을 했더군요. 우주의 신비를 풀었다는 사람도 여자의 신비는 좀처럼 풀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자만 미스터리겠습니까? 여자가 좀 더 난해할 뿐, 여자나 남자나 인간 자체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나도 인간이에요. 그런데 인간인 내가 봐도 나라는 인간을 알 수가 없어요. 내가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나도 모르는 나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 심리의 그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는 성격, 성품, 기질, 의식과 무의식, 인간상실, 인격 장애 등 여러 개념과 용어가 동원되어 설명이 시도되지만, 근본적인 해답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자기 자신도 알 수 없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다 보니까 온갖 오해와 갈등이 생겨나는데, 그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미스터리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진실하고 단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두꺼운 가면을 쓴 것처럼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거나 상대방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이 아무리 복잡하고 불가사의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나는 나를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늘 정직하고 진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은 그 현란하고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신공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종 예수 믿는 사람들, 특히 교계의 지도자라고 하는 분들의 행동을 보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믿음에 합당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예수께서 책망하시며 지적하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미스터리입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박하나 회향 같은 식물은 향료가 되는 허브입니다. 이런 것은 대량으로 재배하지 않습니다. 그거 다 수확해 봐야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십일조라고 해야 한 줌이나 될까요?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십일조도 빠짐없이 계산해서 드렸습니다. 그만큼 십일조 드리는 데는 철저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율법에서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면 목숨이라도 걸었습니다. 좁쌀 열 알을 얻었다면 한 알이라도 반드시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속임수나 주저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무조건적인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이 얼마나 기특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신뢰를 한순간에 쓸어버립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좁쌀 하나라도 십일조를 바칠 만큼 율법에 철저했던 그들이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해가 돼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찮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단 말입니까? 모조품 귀걸이는 보석 상자에 소중히 간직하면서 다이아몬드 반지는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분석해 본다면, 첫째로 하나님께 충실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무지하게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충실하면서 하나님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것인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아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려면 이 사람들이 철저하게 무지했다거나 혹은 교활했다거나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요?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지 못해서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소홀히 했을 뿐이었습니다. 혹은 이 사람들은 완전히 사기꾼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하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비열한 인간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교묘하게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과연 둘 중에 어느 쪽이었을까요?
물론 어느 쪽이라고 해도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둘 사이의 차이점이라면 진정성을 들 수 있겠지요. 의도적으로 교활하게 하나님을 자신의 출세와 이익의 도구로 삼는 행위는 너무 악해서 굳이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잘못하고 실수했어도 악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비난하고 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잖아요? 좋은 의도로 선한 일을 하려다가 일이 잘못 되는 바람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진정성 아닙니까?
그러나 진정성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16:25). 자기는 아무리 옳다고 생각해서 소신을 가지고 했을지라도, 그것이 사실은 옳은 일이 아니라 악한 일이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진정성이 있었으니까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 자기가 믿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면 가치 있는 희생이지만, 옳은 일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옳지 않은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 되었다면 그것처럼 미련하고 무의미한 일도 없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맡기셨는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은 평생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그런 율법의 전문가들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것을 내버리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관대한 평가입니다. Sorry, excuse me.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크나큰 범죄입니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끼친 해악이 크면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뿐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 속에서 악한 일을 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말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해서 그랬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며칠 전에 김근태 씨가 죽었습니다. 독재정권 아래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받은 고문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래도 그분은 그 일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몸이 부서지는 것을 참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잡아다가 고문했던 사람도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사람도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했고, 그런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한 사람도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했단 말이에요. 둘 다 억지로 하거나 마음에 없는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진정성을 가지고 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둘 다 옳을 수는 없지
김근태 씨를 고문했던 이근안 경감이 정권이 바뀌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자수해서 감옥에도 갔다 왔는데, 얼마 전에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애국하는 일이었고,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그때는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믿어도 악한 일은 악한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성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못 됩니다. 오히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대도라고 이름을 날렸던 조세형 씨도 감옥에 갔다 와서 목사가 되었어요. 그랬다가 다시 도둑질을 해가지고 또 감옥에 갔지요. 왜 아주 악랄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목사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목사로서 속된 말로 대단히 쪽팔립니다. 그런 흉악범이 회개하고 신부가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가톨릭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성직자가 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목사로 안수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꼭 목사가 되어야 지난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요즘 인터넷에서는 이근안 씨에게 목사 안수를 준 교단에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름도 없는 군소교단이라서 저도 그게 어떤 교단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심지어는 이근안 목사 안수 취소 서명운동도 벌어지고 있어요.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분이었던 이기풍 목사님도 평양 시장바닥을 주름잡던 깡패였고, 기독교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러 로마 제국 구석구석을 누볐던 바울 사도 역시 원래는 교회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포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도 회개하여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한 것보다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회개해서 신실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는 것만큼 바람직한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도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평양 시장바닥의 깡패출신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주도와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서 사역을 하다가, 칠순의 노구에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받아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면서도 옛날 예수를 핍박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불렀어요.
그러면 고문기술자나 대도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신실한 사역자가 되었습니까? 과거에 자기들이 악랄했던 정도만큼 신실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되었나요? 사실은 그렇게 되었다는 표시로 목사가 되기는 했는데,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해 도둑질을 한다거나, 지금도 전에 고문을 저질렀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하는 것을 보면 회개라는 단어가 무색해집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된 것은 악독했던 자신이 회개해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빙자한 욕망의 추구일 뿐이지요. 필립 얀시는 이런 종류의 행동을 은혜 남용(grace abuse)이라고 했습니다. 유다서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유 1:4) 행위라고 정죄합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야말로 미스터리인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이 얼마나 큰 미스터리입니까? 예수님은 이 미스터리를 외식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십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몇 줌 되지도 않는 허브의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것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모양입니다. 하나님께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은 속모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태를 예수님은 잔과 대접의 겉은 부지런히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에 비유하십니다.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씻는 이유는 그 안에 먹을 것을 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겉만 깨끗이 씻고 안은 더럽고 지저분하게 놔둔다면, 이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예요. 이 현상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단어가 외식입니다. 그리고 외식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겉모양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고 속모양은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성마저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릇의 겉이라도 열심히 씻는 것을 보고 진정성이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겉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속만 깨끗하면 되지 겉은 더러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겉모양에 신경 많이 쓰고 살아야 합니다. 겉모양이 뭡니까?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희생해서 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나를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게 통하는 줄 알고 사는 사람도 있고, 통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미스터리이고 모두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가 정의와 긍휼과 믿음에서 나온 것이 되도록, 안과 밖 모두 깨끗한 그릇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전한 성도가 되라
마 23: / 박덕기 목사
마 23장은 고난주간의 셋째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받지 말라고 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켜 표리부동한 자라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것도,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외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경문’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 조각을 말하며, ‘옷술’이란 옷단 귀에 술을 붙여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방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을,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명예욕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대접과 높임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팔화를 선포하셨다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들어가려는 자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여, 조상들의 유전을 율법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정신에서 떠난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며, 자기들도 말씀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유대교로의 개종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얻은 개종자들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인 율법 선생의 지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까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16-19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니라 하는 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고 했습니다.
‘눈 먼 인도자여’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라는 책망은, 하나님보다는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맹인이어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성전과 성전의 금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또한 제단과 그 제단 위의 예물 가운데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주님께서는 성전의 금보다는 성전이, 그리고 제단의 예물보다는 제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보다 성전의 금을, 제단보다도 그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더 중시하도록 오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까지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뒤집힌 가치관을 가지고 진리를 오도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주님께서는 통렬하게 책망하시며 저주하셨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이 최고의 가치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녔다 할지라도, 그의 머릿속에 있는 가치관이 세상의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1)몸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2)금생보다 영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라야 고작해서 100년 안팎이지만,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계시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여기와 지금’이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당신은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 단계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영원에 비추어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신의 모든 삶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시 39:4-7에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와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분요하며, 재물을 취하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솔로몬의 허사가를 아십니까? 그림자와 같은 것을 붙잡으려고 일생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초로인생이요, 안개 인생이요, 화살 같은 인생이요, 일장춘몽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도 꿈도 실체가 아니고 현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는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고,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대학 최고의 행복은 인생의 최고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고, 인생 최고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고, 일꾼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재생산 사역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인생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네 번째 저주의 선포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저주 선언은 세 번째 저주 선언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되,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 가운데 ‘박하’로 번역된 ‘헤뒤오스몬’은 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을 가리킵니다. ‘회향’으로 번역된 ‘아네돈’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근채’로 번역된 ‘퀴미논’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드린 것으로 나오는 이와 같은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입니다. 즉 율법은 토지소산 중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의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십분의 일을 엄격하게 떼어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이렇듯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열심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는 열심을 보이나,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하는 그들의 영적무지와, 또한 남에게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개역 성경은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고 번역했습니다.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의와 인과 신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비교해서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준수해야 할 모든 율법과 비교해서도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모든 율법 조항들의 근본정신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의(義)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89:14절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판단은 의로우시고, 하나님의 의는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의를 바라고 정의를 바라는 것입니다. 시 15:1-2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불의가 판을 칩니까? 이 불의한 세상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의롭게 살아갑니까? 주님께서 율법의 중요한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하나는 긍휼 곧 인(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불쌍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을 향하여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 곧 자비를 바라시는 것 역시, 하나님 자신이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또 한 가지 주님께서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은 신(信) 곧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 곧 신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상은 또 얼마나 불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 세상의 불신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뿌리가 깊고, 이러한 불신은 성도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義)와 인(仁)과 신(信) 이 세 가지 덕목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경건한 신앙심 없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드리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열과 성을 다하여 지켜야 할 이와 같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 버리고, 율법의 형식적 외식적 준수에만 치중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제사장이 강도 만난 이웃에게 마땅히 기대되는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 그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번째 저주 선언에 대한 결론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페기론 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저것’이란 십일조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저버리지 말고 다 실천하여, 온전한 신앙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적인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신약 시대는 십일조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이상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먼저 두 번째 주장부터 반박하자면, 십일조 헌금도 드리지 않는 사람이,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율법주의에 속한 것이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오늘 주님의 말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이미 십일조 실천의 필요성을 확인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축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이 법칙은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적용되어 집니다. 믿음의 세계에도 성도가 지켜야 할 축복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에 특히 물질의 축복과 관계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십일조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물질의 축복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들에게 물질 축복의 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 설교를 하면 좋아하는 성도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헌금에 관한 설교는 성도들을 위하여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말은 돈에 대한 관리를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재물을 바르게 쓰도록 교훈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성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친 ‘리차드 포스트’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척도를 알아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 그리고 침례교의 신학자인 ‘헤롤드 피케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출발점은 바로 십일조의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이 분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또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회심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심령의 회심이고, 둘째는 그의 돈지갑의 회심이다.”고 했으며, 웨슬레는 “한 인간 중 회심해야 할 마지막 부분은 그의 돈지갑이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로 알려졌던 김재준 박사 같은 분도 말하기를 “구원의 확신을 맛본 사람이 최소한 십일조도 바치지 못한다면, 그 신앙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웰 목사님은 말하기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거두어 가실 때, 그 돈이 소리를 지르면서 나에게 고통을 주고 도망간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으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교훈을 따라서, 이 불의한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 이 잔인한 세상에서 인자한 사람이 되고, 이 엄청난 불신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열심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24년 9월 29일 / 마 23:23-26
마 23:23-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25)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1853-1856년까지 러시아와 프랑스;영국 등의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다. 흔히 ‘크림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인데, 그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베들레헴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놓은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지하 바닥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줬다는 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별의 위치를 어디로 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가 대립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성지 예루살렘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것이 있었지만, 별을 어디에 새기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시작된 싸움은 그리스 정교회의 중심에 서 있는 러시아와 카톨릭교회의 중심인 프랑스 사이에 전쟁을 하게 만들었고, 카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영국과 오스만 제국 등이 가세하여 약 2년 반 동안 유럽 전역을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의 지하 바닥에 별을 어디에 새기면 어떤가? 그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사소한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소한 문제에 얽매여서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본질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하고 있는 않나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호된 책망의 말씀이다. 마태복음 23장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예수님의 책망이 7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네 번째 책망이다.
왜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호되게 책망을 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3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무슨 말씀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참 잘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말로는 잘 하면서 실제로 자기들의 신앙적인 삶의 모습에서는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살지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아주 호되게 책망을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생활이 엉망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신앙생활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주까지 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인가 말이다.
아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일반 시민들은 감히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우리 가운데 중에 두 번씩 금식하는 분이 계신지? 이건 그들의 신앙생활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신앙생활 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 기도할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모두 멈춰놓고 기도했다. 우리 중에 하루에 3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지? 하루에 한 번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도 때론 힘들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저도 하루에 최소한 세 번씩은 기도하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하루 밥 세끼 먹으면서 식사 기도하니까 말이다. 1분도 안 걸리는 식사기도 말고, 정말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에 몇 번이나, 몇 분 동안이나 기도하시는지? 그런 우리에 비하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신앙생활을 잘 했다.
또 그들은 구제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열심히 구제했다. 구제해 놓고서 ‘구제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그들은 참으로 열심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참 열심히 잘 드리는구나!’ 박하(薄荷)는 유월절 쓴 나물의 양념으로 많이 쓰이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를 말한다. 회향과 근채는 미나리과에 속한 식물로 미나리 비슷하게 생긴 채소이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이스라엘 농작물 중 아주 사소한 수확물이다. 그들은 채소와 같이 사소한 것이 생기면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렸다.
여러분은 십일조를 어떻게 드리는가? 소득의 정확한 십일조를 하시는지?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옆집에서 채소 한 묶음만 가져다주어도 그것에서 십일조를 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작은 소득 하나 - 채소 한 묶음까지도 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다. 뭔가 작은 것 하나 생기면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렸다.
그렇게 열심히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철저하게 하고, 말씀 배우는 것 열심했던 그들을 향해서 왜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호통을 치면서 책망을 하셨을까?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어서 나온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지극히 작은 것까지 십일조를 드리면서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데, 왜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열심히 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존경스러울 만큼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다 빠져 있었다. 그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다.
‘의’라는 말의 성서언어(헬라어)는 ‘크리시스’인데, 이 말은 ‘정당하고 공정한 삶’의 모습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모습,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정말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인간관계를 말한다.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 앞에서 공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잣대를 들이댈 때에는 관용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 엄격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둘 다에게 공정해야 한다.
특별히 권력자들에게는 공정성이 더욱 요구됩니다.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스가랴 7:9-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려 하거나 그들의 눈에서 눈물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십일조를 드리고 매일같이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물과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권력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그들은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조차 빼앗는다고 말할 정도로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압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매일 아침 희생 제사를 드렸고, 3일에 한번씩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참으로 경건하게 사
여러분,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권력이 주어졌다면 그 권력이 공정하게 사용되도록 해야 합니다. 내게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재산이 있다면 그것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공정하다고 판단되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으로 일할 때에도 공정하게 일해야 합니다. 내 욕심과 명예욕 때문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공정하게 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공정한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왜곡되고 편향된 마음이 아닌 공정성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공정할 수 없습니다. 내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내 욕심에 찌든 기준을 따라 행동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면 절대로 공정한 생각이나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공정하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은 공정한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결정이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거기에 공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독교 황금률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내가 한 이 행동을 다른 사람이 했을 때 나는 어떠하겠는가?
- 내가 하려고 한 행동을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했을 때 나는 기쁘게 그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인’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다. 인(仁)이라는 말은 성서언어(헬라어)로 ‘엘레오스’라는 말인데,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자비’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특히 연약하고 병들고 궁핍한 사람에게 더욱 친절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도 그것이었다.
요 13:24-25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신앙적인 행위보다도 우리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
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는가? 겉으로는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보다 신앙생활 조금 못한다고 생각하면 업신여기고 멸시했다. 자기들이 만든 규례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어버리고 미워했다. 이방인, 세리, 죄인, 창녀 등을 멸시하고 미워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면서도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멸시했다. 그러니 그런 마음으로 구제한들 어찌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제가 되겠는가? 사람들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복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가? 이웃이나 형제와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이 더 먼저인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대로 한다면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아름다운 관계이다. 아무리 경건하게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 그리고 그 사람과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얼굴조자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헌금을 많이 드린다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원망 들을 만한 일이나 불편한 관계, 미운 사람이 우리에게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고 관계가 불편하면 모든 삶이 불편하다. 정상적일 수가 없다. 부부싸움하고 나서 예배드리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부부싸움하고 난 후에 기도하면 기도가 제대로 되는지? 교회에 오면 눈에 미운 사람이 보이면 속이 뒤집어지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예배조차도 드리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라는 말이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미운 사람이 없어야 한다. 사람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없어야 한다. 내 생각과는 서로 다르고 내 마음과는 다른 모습의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할 때에 가족공동체나 교회공동체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향내 나는 산제사가 될 수 있다.
사랑은 모자란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모자람을 용납하여 내가 대신 채워주는 것이다. 사랑은 잘못했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것을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로 인해서 내 마음이 아플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해 주고 상대가 잘 되도록 다방면으로 돕는 것이다.
우리 교회와 가정이 이런 교회 - 이런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 인생이 행복해지고, 가정이 행복해지고, 교회가 행복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을 버렸습니다.
‘신(信)’이란 말은 ‘믿음’이라는 말이다. 믿음이라는 말의 헬라어 ‘피스티스’에는 ‘충성’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다. 군인들에게 충성은 생명을 다 바쳐 싸우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이 섬기는 왕이나 장군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싸우는 것을 충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보여야할 믿음의 모습도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군인이 자신을 위해서는 싸우는 군인은 없다. 우리 십자가의 군병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생명을 걸고 충성하는 것,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 그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을까?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한다고 하면서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십일조 잘 드린다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금식한다는 것을 일부터 드러내서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할 때에도 큰 길가에 나와서 큰 소리로 기도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구제하고서는 ‘내가 아무개를 도와주었다’고 떠벌리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했을 때에는 얼굴에 기름을 발라 금식한 표시를 내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면 하늘에서 상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란다. 그래야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급이 우리에게 있다. 아무리 큰일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게 믿음이고 그게 충성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칭찬을 받고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사람아!’ 우리 교회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는 이렇게 책망 듣는 분이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 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고 섬기심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원한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공정함과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을 예수님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루살이와 같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도 약대와 같이 크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실패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물론 사소한 것에 관심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에서 크고 작은 모든 삶에서 -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간에 모든 삶에서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는 모습이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할 때에도 가정이나 직장에서 일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는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 내가 하는 이 일은 공정한 것인가? 사사로운 개인의 감정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는 일인가?
- 내가 하는 이 일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인가?
- 내가 하는 이 일이 믿음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런 물음이 우리의 거울이 되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한다.
신앙의 속과 겉
마 23:23-26 / 서윤발 목사
Ⅰ. 서 론
지금 남편과 다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조사해 봤더니 5%(100명 중 다섯 사람). 충격적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가족이 함께 살아가면서도 가장 중요한 가족간의 사랑과 친밀함은 잊어버리고 그저 남편은 돈 벌고 자기일 하기에 바쁘고 또 아내는 아내대로 집안일 하느라고 지쳐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공허감을 느끼는 겁니다. 돈은 좀 모았고, 직위도 올라갔는데 왠지 모르게 가족들은 서로 멀어져 있는 것 같고, 또 심지어 부부가 서로 행복하며 느끼며 살아온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번 주에 어느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인상에 남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EX1) 한 중년 남자가 아내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서 영화구경을 하자고 했다. 아내가 왠 일이냐면서 막 반가워하면서 따라 나섰는데 가면서 잠시 백화점을 들러자는 겁니다. 그래서 잠시 들렀는데 이 사람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두 시간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지쳐버린 겁니다. 그 날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 버렸지요. 부부가 서로 무관심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서로간에 즐거워하며 지내는 패턴이 달라져 있어서 이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는 겁니다. 슬픈 일이지요.
EX2) 역시 어느 중년 부부의 이야긴데 이 부부는 두 사람이 다 교수였습니다. 그래서 한 날 외국으로 가서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처럼 외국에 나가니까 아내 되는 사람이 그곳 백화점에 꼭 가보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가고 5시에 만나서 함께 강연장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5시가 지나도 부인이 오지 않았습니다. 강연은 7시에 시작되지만 그곳까지 가는데 꼭 두시간이 걸린답니다. 그래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7시가 돼서야 약속장소에 나타났습니다. 강연은 취소되고 위신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도 안절부절 못 하고 아내의 친구도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데 그 남편이 그랬다는 겁니다. 우선 콜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겠느냐고. 그랬더니 아내의 친구가 감동을 해 가지고 이런 남편도 있냐면서 그러고 아내도 감동을 해 가지고 내가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결혼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강연장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사과를 했더니 또 강연장에서는 지각한 부부를 축복해 주고 해피엔딩으로 그 날을 마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참 따뜻한 이야기이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 가를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기억하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데 가정에 있어서도 이렇게 정말 중요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듯이 우리가 믿음생활 하는데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본질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 그러면 의무를 생각하지요.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할려고 하니 힘들고 안 할려고 하니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계명들을 주셨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모든 계명들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가족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섬기는 그 자세 그리고 성도들간에 서로가 한 가족, 한 형제임을 알고 사랑하며 지내는 그 자세.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사실 계명이라는 것 자체도 바로 이런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주신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장 중요한 가족관계의 삶을 잊어버리고 어떤 의무감 속에서만 힘들게 신앙을 가지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해서 입니다.
Ⅱ. 본 론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꾸짖으심
우리가 읽은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심하게 꾸짖고 계시는 좀 무서운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들을 향하여 그렇게 무섭게 나무라셨을까?
그 사람들이 과연 어떤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하셨는가?
23절을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러시면서 그 꾸짖는 대상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 서기관 : 서기관은 본래 율법의 필사본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지만 후에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율법에 있어서는 정통하였고 또한 율법의 세세한 적용 항목까지 만들어 일반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 바리새인 : 바리새파의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거룩하게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그 하는 일만 보아서는 아주 좋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필요악과 같은 존잽니다.
없어서는 안되고. 그러나 있음으로 해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참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사람들 덕분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덕분에 신앙이 유지되고 있다는 그런 긍정적인 면보다는 아주 부정적인 면이 더 크고 강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사람들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앙이 왜곡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 후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약 400여십년 동안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끌어 오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고 바라시던 그런 모습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면서 아주 심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앞선 사람들, 신앙생활을 먼저 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율법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신앙을 왜곡시켰는가?
23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했습니다.
※ 박하 : 여러분 잘 아시는 식물입니다.
※ 회향과 근채 : 둘 다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음식의 양념으로 사용된 방향제 우리나라에도 있는 걸로 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바쳤다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집에서 조그마한 밭을 일궈서 상추를 심고 상추가 나면 그것까지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겁니까? 사실 이런 면에서 이 사람들은 우리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율법에 대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23절 후반을 보니까 "의와 인과 신"을 버렸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 의 : 말 그대로 의로운 삶
※ 인 : 이웃에 대한 사랑
※ 신 :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대한 진실되고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
그러니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롭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율법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무리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해도 시간이 좀 지나고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죄를 지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는데 또 다시 시간이 흐르면 또 어느새 죄를 지은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율법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족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롬3:20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했습니다.
2) 그리고 정말로 율법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깨닫게 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듯이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또한 율법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서기관이 주님께 찾아와서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주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막12:30-31 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이 때까지 율법을 잘못 알아 왔다는 말이고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빠뜨려 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정결규례라는 것이 있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고 무엇을 마실 때에는 반드시 부정한 지꺼기를 걸러 마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마치 물을 마실 때 하루살이 같이 하잘 것 없는 것은 하나, 하나 다 건져내면서 낙타와 같이 큰 것은 그대로 마셔버린다는 겁니다. 특히 낙타라는 짐승은 레위기11:4에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말씀해 두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것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얼마나 율법의 정신을 왜곡시켰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3. 종교인들의 왜곡
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1) 자기 도취에 빠져버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다.
나만큼 거룩한 사람은 없다.
나야말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2)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그렇게 봐주기를 원했습니다.
야! 저 사람은 살아 있는 성인이다.
야! 저 사람은 정말로 의로운 사람이다.
그렇게 칭찬해 주기를 바랬고 그렇게 칭찬받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위선적인 행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EX)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권위를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EX) 옷에 다가 말씀을 써 붙이고 다녔다.
EX) 말씀을 담은 상자를 이마에 붙이고 다녔다.
EX) 길거리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려고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표시지요.
EX) 그래서 심징는 "이마에 피가 흘러야 경건한 사람"이다 하는 그런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면 보는 것에 대해서 탐심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경건한 사람은 눈을 감고 다녀야 한다. 그래가지고 눈을 감고 다니다 보니 벽에도 부딪치고 기둥에도 부딪치고...이마에서 피가 그칠 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마에 피가 흘러야 '야 저 사람 이마에 피가 흐르는 것 보니까 참 경건한 사람이구나'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마에 피를 내서 다녔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 황당한 사회지요.
그러니 이런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황폐해 지는 겁니다.
아무리 폼을 내고 포장을 해도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니 그런 사회에서 무슨 신뢰가 있고 무슨 사랑이 있고 무슨 존중이 있겠습니까?
서로를 비웃고 서로를 경계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폐쇄되고 답답한 생활만 있을 뿐입니다.
5.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이라는 것을 단지 율법을 한 계명 한 계명을 지키면서 율법적으로 사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율법적으로 산다는 것을 인하여서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하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들을 주시면서 희망하신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 율법을 통하여 1)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고 2) 사람들끼리 진정으로 사랑하고 3)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EX)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Ⅲ. 결 론
물론 의와 인과 신이 중요하니까 이제부터 율법과 신앙의 모든 형식들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래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열심을 다하여 십일조하고 열심을 다하여 율법을 지킨 그것 때문에 주님이 이들을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들을 책망하신 것은 이들이 이런 의와 인과 신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하신 겁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잘못 오해해서 정말로 열심을 다하여 헌신하고 열심을 다하여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을 보고 그것 잘못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오히려 오늘날에는 율법이나 형식을 너무 무시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좋은 내용만 있다면 견고한 형식이 그 내용을 잘 보존시키고 표현시키는 역할도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식을 만들고 지키기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26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하셨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으면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심령에 깊이 되새기고 아버지의 따스함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처럼 가장 가까운 이웃인 우리 가정을 돌아보고 더욱 귀중히 여기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