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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나 마르치 (Johannna Martzy)-옮긴 글]
-슬픔과 청결미를 노래한 신비스런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
올린이: BACH2138 (푸른 부제는 제가 임의로 단 것입니다.)
from 무반주 바이올린 곡 음반(EMI) 해설지에 있는 글이랍니다.
명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쌍벽인 지네트 느뵈, 지오콘다 드 비토의 붐과 함께 모노시대의 매혹적인 개성을 지닌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요한나 마르치의 명성이 가장 높은 듯하다. 요한나 마르치는 느뵈와 드 비토와 함께 음악적 깊이 위에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연주자였으며, 그녀만의 매력적인 향기를 지닌 연주자였다. 그녀의 개성적인 매력은 전후파인 오스트리아의 에리카 몰리니의 재래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여성스런 사랑스러움과 부드러운 친밀감, 소리의 청결감, 약동하는 감성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남성적인 패기가 느껴지는 느뵈나 드 비토와는 대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치가 활약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40. 50년대가 그녀의 전성기였는데, 이 시기는 알다시피 각각 이질적이면서 확고한 양식성을 존중하는 연주로 세계를 리드하고 있던 시게티와 하이페츠라고 하는 두 거장의 최 전성기였다. 당시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낭만주의적인 연주에 등을 돌리고 이 두 거장의 영향을 받았다. 20년대에 태어난 느뵈(그녀는 하이페츠를 존경했다.)의 연주도 확실히 객관주의 적인 면이 엿보여지며, 이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마르치 또한 충분히 노래하면서도 지적인 컨트롤이 담긴 하이페츠식의 단정한 조형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마르치에게는 또 다른 면, 즉 완고하게 개성적으로 노래하는 그녀만의 매력이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개성미가 강한 그녀의 연주는 오리털과 같이 세밀하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친밀감이 깊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마르치는 사실주의적인 연주기에 역행하는 신낭만주의 연주기(지금이 그 변화의 고비라고 말해진다.)의 제1세대 중 한사람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인기가 최근 재 부상하게 된 것도 스턴, 셰링, 수크 같은 사실주의적인 연주기수들의 연주가 상식화. 정형화되어 우리에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의 반동이라 할 수 있다. 크레머나 펄만, 정 경화 등 신낭만주의 파들의 대두도 시대의 미의식이 확실히 흐름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연주는 듣는 사람의 감정을 피곤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다. 머리로 이끌어 나가는 날카로움, 자신의 해석으로의 강요, 정복감등이 그 주된 원인인데, 이에 반해 신낭만주의의 싹이 틀 시기의 연주가들 중 다수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부드러운 배려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요한나 마르치는 EMI와 DG에서 13장의 레코딩밖에 남기고 있지 않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시마노프스키, 라벨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다. 그러나 후기 낭만파의 탐미적인 곡이나 기교위주의 곡은 피하고 있다. 즐겨 연주했던 곡에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특히 슈베르트, 멘델스존, 브람스 거기에 드보르작과 라틴계의 소품이 있었다.
마르치는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의 유명한 후바이에게 사사했으며, 명교수 칼 플레쉬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나는 이전에 독일의 어느 저명한 음악 평론가로부터 칼 플레쉬 만년의 연주(베토벤과 브람스의 협주곡)의 실황테이프를 연구용으로 복사한 것을 받았는데, 그는 이 테이프가 요한나 마르치의 것이라고 써서 보냈다. 또 마르치가 즐겨 사용했던 악기는 플레쉬의 유품인 과르넬리이다. 마르치가 플레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문헌에도 씌어있지는 않지만, 마르치가 플레쉬라는 사람의 연주를 높이 존경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그녀의 연주스타일에서도 알 수 있다. 마르치의 명료함과 따뜻함, 친숙한 동시에 기품 있는 섬세한 음, 그리고 허물어지거나 너무 빠져들거나 하지 않는 지성이 느껴지는 단정한 스타일, 이러한 것들은 모두 플레쉬 자신의 신조이자 취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치는 헝가리인이며 후바이의 만년의 가장 만년의 제자이다. 후바이에 관해서 대략적으로 밝혀 본다면, 시게티와 레너, 그리고 바르톡의 명연주자들을 길러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기교파의 간판제자 폰 베차이 거기에 바흐보우(이른바 곡궁-옮긴이 가필)에 의한 바흐연주의 명수 에밀 텔마니가 있다. 여성으로는 요하임의 조카딸이라고 할만한 엘리달라니와 유명한 엘레나 루빈스타인(하지만 그녀는 쉐프칙의 문하이다.), 그리고 마르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정열적인 베차이, 레너와 바르톡의 명수 티보르 바르가가 정열적인 마자르족출신다운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마르치는 시게티, 달라니나 텔마니와 같이 마자르 전통의 특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플레쉬와 유사한 독일의 소박함, 프랑스의 명쾌함을 함께 가진 중부유럽적인 개성이 그녀에게는 보여 지는데, 라이벌인 보베스코, 이다 헨델과 마찬가지로 노래해나가는 것이 실로 개성적인 맛이 있다. 신낭만주의의 리리시스트로써 그 특징은 특히 그 음악성이 가진 부드러움과 화사한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남자를 넘어선 느뵈, 드 비토에 대항할 수 있는 그녀만의 개성, 그것이 마르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약력을 설명하면, 1924년 헝가리 티메스팔 출신인 그녀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7살 때 후바이에게 인정받아 그의 제자가 된다. 10세 때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 F.가브리엘 교수에게 사사하고 13세 때 공개연주로 센세이셔널한 성공을 거두었다. 1940년에는 두아르 레메니를 기념한 콩쿠르에서 대상을 획득, 1942년 후바이상도 수상한다. 1947년에 23세였던 마르치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유일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상을 받았다. 이 때부터 유럽에서 폭넓은 연주활동을 하며 명성을 키워나갔다. 1957년과 1960년 미국공연 또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녀와 같이 연주한 지휘자들로는 오먼디, 베이넘, 크럼페러, 라인스도르프, 마르케비치, 클레멘스 클라우스, 솔티 등으로 마르치의 명성이 상당했음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그녀는 폴란드 출신으로 플레쉬 문하의 정열 발산 형 연주의 명수였던 이다 헨델(마르치보다 한살 위)과는 아주 대조적인 라이벌이었다.
마르치의 전성기는 1950. 60년대였다고 보여 진다. 그 후 모국의 리스트 음악원에서 교수로 근무하였으나, 최근 같은 음악원에서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수년전(1979년 타계)안타깝게도 마르치는 국외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바흐와 마르치
바흐(1685~1750)는 헨델(1685~759)과 함께 바로크시대 최대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바이마르의 오르가니스트를 출발점으로 알렌슈타트, 뮬하우젠, 쾨텐등의 궁정 부속 오르가니스트, 악사장, 지휘자로 근무, 만년에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교회의 합창단 악장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주자로서 바흐가 주로 다루었던 악기는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다. 완벽주의자이며 탐구심이 강했던 바흐는 쾨텐에서의 궁정부속 오르가니스트 시대의 9년간 중, 31세 때부터 37세 때까지 7년에 걸쳐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6곡의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작곡했다.
바흐의 바이올린곡이라고 하면 관현악모음곡 제3번의 아리아와 2번의 샤콘느, 3번 파르티타의 프렐류드와 가보트 등이 유명한데, 샤콘느를 제외하면 피아노 반주용으로 편곡된 것이 많다, 그런데 9세기 후반이 되어, 헝가리 태생의 유태인으로 브람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요제프 요아힘이 전곡을 1세기 반에 걸쳐 완성해 내어 비로소 이 곡은 유명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이 곡의 거대한 가치를 발견해 낸 바이올리니스트가 적기 때문인지(당시 바이올린 연주회에서는 파가니니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오페라의 아리아적인 패러프레이즈나 기교과시적인 탐미적인 협주곡들, 살롱적인 소품들이 주로 연주되었다.)금세기 전반의 카페, 에네스코, 시게티, 부쉬, 메뉴인등이 한곡 전체를 리사이틀에 넣거나, SP레코드에 녹음(시게티가 최초)하게 될 때까지는 이곡은 단독으로 1곡만을 연주되는 일이 많았다. 그것도 사라사테의 유명한 펠페튜르 모빌풍의 장식적인 연주가 주류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대가, 중견 급의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반드시 리사이틀에서 연주하고 거기에 전곡의 레코드 녹음에 도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평가 받는데 빠질 수 없는 곡이 되었다. 바흐가 이 무반주 바이올린 곡 집을 쓴 것은 그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기능의 최대한의 표현성을 극복한 이후의 쾨텐시대 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의 바흐는 당시 거의 독주악기로 쓰이지 않았던 첼로를 위해 유명한 6곡의 모음곡을 썼다.(이 곡은 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바흐는 파가니니와는 다른 의미로 바이올린의 표현능력을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이전 코렐리의 교회 소나타의 단순한 양식을 발전시켜 베토벤에 의해 완성된 고전주의 양식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 교회 소나타의 특징인 완-급-완-급의 4악장의 간단한 양식에 커다란 스케일로 깊은 감성세계를 부여하였으며, 거기에 반주부분에 있어서도 본래 단성적인 악기인 바이올린이 주선율과 부선율 모두를 연주하도록 하는 대담한 도전을 시도하였다. 물론 당시의 바로크 바이올린은 상당히 휘어진 활을 사용했기에 2성까지는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지만, 3성이상의 하모니를 표현할 경우에는 아르페지오적인 수법으로 연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려운 기교를 익힌 후에’라고 바흐는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이 곡은 이탈리아 바로크의 교회 소나타의 찬가 풍 전통에 한 발을 디디면서, 깊이와 따뜻함, 동시에 엄숙한 감정의 조화로운 표출을 기본으로 요구하고 있기에 단순한 표현기교상의 숙련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연주자의 전인격적인 깊이와 비범한 상상력, 높은 정신성을 요구하고 있다.
어쨌든 이 곡은 바이올린으로 오르간의 효과를 살려내고, 그 위에 연주자의 인간적인 진, 선, 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쉽게 손을 댈 수가 없다. 파르티타는 이탈리아파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개척한 서민적인 독일(알르망드), 스페인(사라방드), 영국(지그), 프랑스(쿠랑트)의 4개의 완급의 춤곡을 기본으로 하여 알르망드 앞에 프렐류드를 넣고, 다른 무곡앞에 간주곡풍의 곡을 삽입하는 등 다채로운 변화를 준 서민적인 매력이 가득한 곡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바흐의 6곡의 무반주곡을 현대의 활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기교, 템포, 프레이징 등의 숙달,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부하면서 원숙한 감성과 지성이 갖춰져야만 가능하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도 이름난 거장, 중견들도 바흐의 무반주라고 하면 단단히 마음먹고 충분한 연구와 리허설이 없이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흐의 이들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반 바이올린 적으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현대의 바이올린으로 그 다성적, 대위법적 구조를 명확히 연주할 경우 바흐음악의 구조적인 매력을 맛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선율미에 있어서도 최고수준의 깊은 고찰과 멜로디가 나타나고 있다. 파르티타 제 3번의 프렐류드를 바흐는 후에 칸타타에서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고 있을 정도이며 같은 파르티타 3번의 가보트 거기에 소나타 2번의 아다지오 등, 놀랄 정도로 다채로운 선율이 이 곡 안에 담겨져 있다. 본격적으로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작곡한 것은 바흐이다. 그 뒤에도 슈타미츠, 제미니아니, 핏힐, 루스트, 칸파뇨리가, 그리고 20세기가 되어서도 레거, 이자이, 바르톡, 힌데미트 같은 사람들이 작곡하였지만 바흐를 넘어서지는 못한 것 같다. 거기에 바흐의 시도에 자극받아 슈타미츠, 나르디니, 부르니가 독주 바이올린에 의한 2중주의 작품에 도전해 보았으나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바흐의 대 걸작이 누구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었을까? 통설에 의하면 초연은 런던 주재의 페터 잘로몬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는 하이든으로부터 잘로몬 세트의 교향곡을 헌정 받은 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바흐자신은 쾨텐시대에 레오폴드 공주 궁정악단의 동료로 요제프 슈피스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도록 하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슈피스가 연주했는지에 대한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호로비츠는 ‘악보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폭언(?)의 진상은 악곡을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연주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가 연주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치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에 대하여 어떤 기본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해석은 금세기 바흐의 무반주 연주사상 명확히 구분되는 몇 가지 표현타입(이는 오늘도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중 어떤 흐름위에 놓여져 있는 것일까? 먼저, 바흐와 같은 혈통인 독일적인 전통이 있다. 요제프 요아힘, 부슈, 그리고 현재의 오토 뷔흐너(뷔흐너는 에밀 텔마니와 더불어 곡궁 연주를 지지함-옮긴이 가필) 에게 까지 이어져, 고전주의적인 확고한 구조와 고귀하며 소박한 정신 미(고전적인 리리시즘)을 나타내는 흐름이 그 첫 번째이다. 또 다른 해석인 로맨틱한 구파적 해석 즉, 윌리 부르메스터(독일-오스트리아 문화권에 동화한 유대인 거장)과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이 연주하는 바흐이다. 아주 농후한 로맨틱함을 가진 바흐로 특히 후베르만이 연주하는 소나타 제2번의 안단테, 파르티타 1번의 사라방드와 두블은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프렐류드, 가보트, 그리고 무반주 소나타 제2번의 아다지오에서 커다란 스케일의 명연을 보여주는 크라이슬러의 바흐 해석도 독일-오스트리아권이 남긴 제 1급의 유산이다.
요아힘을 매우 존경했던 요제프 시게티의 바흐는 확실히 요아힘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슈가 고전주의를 지키면서도 민족적 색채를 바흐에 강하게 부여했던 반면 시게티는 오늘날 바흐 연주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는 요아힘의 고전주의를 극대화시켜 주지적, 정신주의적인 경향을 확대시키면서, 바흐의 바이올린 곡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주기술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시게티는 20세기 바흐 연주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또 오늘날 신고전주의적인 바흐를 연주하는 제 1인자로 여겨지고 있는 셰링도 시게티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정서적인 면을 배제하고 즉물적인 곡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독특한 법을 가진 독일의 볼프강 마르쉬너나 미국의 폴 주코프스키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 같이 일견 무기적으로 들리는 바흐 연주 같은 실험적인 시도도 개척자인 시게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바흐가 있다. 하이페츠와 밀스타인의 무반주 전곡에 귀를 기울려 보라. 특히 하이페츠는 조형의 완벽성을 철저히 추구한 사람이다. 밀스타인의 바흐는 하이페츠의 연주법과 기본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음악적인 자유로움과 즐겁게 들리도록 만드는 그만의 정신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마르치의 바흐는 어느 흐름에도 속하고 있지 않다. 마르치의 무반주를 듣고 덧붙인다면 유려한 감정표현과 신선미 넘치는 노래라고 하겠다. 신고전주의적인 리리시즘의 듣기 편안한 연주이다. 거기에 유연함과 우아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라이벌인 이다 헨델과 같은 정열발산형의 직접성은 없다. 마르치안에 있는 근대적인 자아성찰성과 순도 높은 지성이 연주를 뒷받침하고 있기에 그녀의 연주가 결코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고 절도 있는 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나카무라 미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