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齊)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 고려조에서의 활동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2. 혈난으로 이룬 즉위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 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3. 왕권강화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 윤목(尹穆), 유기(柳沂) 등을 각각 목베었다.
그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 (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4. 중앙제도 정비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기도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 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 - 의정부 - 육조의 국정체제를 왕 - 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5. 지방제도 정비
1403년과 1406년에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이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산(山)․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留都府), 6부(府), 5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74도호부, 73군, 154현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 (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 영길도를 황해, 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하고,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특지(特旨)로써 기능을 헤아려 서용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사법․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7. 토지 조세제도 정비
양전사업으로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量田)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 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 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보충․조운타개․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여 5만~6만 결을 새로이 확보하였고,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하여 공․사천인 자손과 기첩(妓妾)과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으며, 평양, 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 (讓寧君大)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 -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9. 기타
위와 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외정책과 함께 부수적인 정책사업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 덕수궁, 경회루, 행랑, 청계천을 조성하였으며,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고 초가를 개량하였다.
한편, 《경제육전원집상절 經濟六典元集詳節》, 《속집상절 續集詳節》을 수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선원록 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으며, 법전의 조종성헌 존중주의(祖宗成憲 尊重主義)를 확립하였다.
太宗大王(23世) 생애
난세에는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은 대개 남과 다른 생애를 살아간다. 또한 그가 태어나는 때에는 보통 용(龍)과 관련된 태몽이 있거나 이와 비슷한 기이한 태몽이 있게 된다. 그것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든 아니든 간에 하여튼 영웅은 잉태되면서부터 남다르다.
태종대왕(이하 태종이라 함)의 삶은 난세가 만들어낸 영웅의 생애이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조선이 건국되었고, 그가 왕위에 오름으로 해서 조선왕조 5백년의 기반이 다져졌다. 그리고는 왕위를 셋째 아들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선위하면서 더욱 그 틀을 공고히 하였다.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업적을 남긴 태종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의 56 년간의 생애는 이 점에서 충분한 역사적 조명을 받을 만하다.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의 휘(諱)는 방원(芳遠)이요, 자(字)는 유덕(遺德)이다. 태종은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사이에서 6남 2녀 중 다섯 째로 역사를 뒤바꿀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당당한 무인의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으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무력기반을 이미 갖추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역사의 시간은 일단 아버지 태조를 중심으로, 그 흐름의 중심부에는 태종의 힘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그가 주인공으로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무인이었던 태조가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이 신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대륙에서는 세계 대제국으로서 그 위세를 떨치던 원(元)나라가 주원장이 이끄는 명(明)에 의해 패퇴에 패퇴를 거듭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곧 공민왕의 실정과 죽음, 고려왕실의 정통성 시비,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그리고 권세가들의 극심한 농민 침탈 등으로 인해 고려 4백년의 역사는 이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1367년(고려 공민왕 16) 정미년 5월 16일 신묘에 함흥부(咸興府) 귀주(歸州)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아들이 태어나면 점쟁이를 통해 아이의 운명을 알아보는 것이 일반적인 습속이었다. 당시 함흥부에서 유력한 집안의 안주인이었던 한씨(韓氏)는 인근에서 점을 잘 치기로 이름난 점쟁이를 찾아가서 태종의 사주를 내밀었다. 이 때 사주를 본 사람은 문성윤(文成允)이란 이름을 가진 이였는데 갑자기 그 사주를 보더니 모양새를 갖추고 한씨에게 공손하게 대답하기를,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卜人]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마소서.”
라고 하였다. 한편 남은(南誾)은 태종(太宗)을 보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무인의 피를 타고 태어난 관계로 균형잡힌 몸과 강인한 체력, 그리고 그의 얼굴생김새와 군더더기 없는 그의 명확한 말솜씨와 문장실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그만의 흡인력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태종의 용모는 아버지 태조의 얼굴을 닮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다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꼭 닮았다고 할 정도로 비슷했던 모양이다. 태조는 높은 코[隆準]에 용의 얼굴[龍顔], 그리고 뛰어난 풍채와 무인 특유의 의리와 결단력을 가진 제왕의 상이었는데 태종의 용모는 바로 이를 닮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