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과학계를 호령하던 사회성격 논쟁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이하 ‘사구체 논쟁’)은 왜 소리소문 없이 빈사하고 말았는가. 최근 사구체 논쟁에서 사회변혁의 한 축을 자임했던 교수가 한 주요일간지를 통해 ‘뒤늦은 책임론’을 펼쳐 화제가 되고 있다. 정성기 경남대 교수(경제학)가 바로 그 인물. 종속적 독점자본주의론의 입장으로 한때 논쟁에 참여했던 정 교수는 최근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한울 아카데미 刊)이라는 책을 펴냈다.
“조선 기사, 강조 지나쳐도 왜곡 아니다"
지난 2월 26일, ‘조선일보’에서는 ‘사구체 논쟁의 오류’와 ‘지식인의 편가르기 현상’을 문제제기하고 있는 정 교수의 기사를 실었다. “학생들에게 사회구성체 논쟁의 오류를 고백하고, 강의실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는 정 교수는 “지식인이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보다 앞장서서 편가르기에 나서는 요즘 현실은 사회구성체 논쟁 와중에 이미 배태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 교수는 우리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담당 기자의 강조가 실린 기사”라며, 하지만 “사회구성(체)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소중한 유산이며 좌파뿐 아니라 사회해체적인 자유주의와 우파 역시 겨냥하고 있는 것”이라 해명했다. 사실의 일면적인 부분만을 부각시킨 조선일보의 의도적 기획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구체 논쟁은 1985년 중남미 종속이론의 아류에 불과하던 한국사회 분석을 비판한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1)’이라는 박현채 前 전남대 교수(경제학)의 논문이 시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 교수의 이론은 일제하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주장한 안병직 前 서울대 교수(경제학) 등의 주류 이론에 맞서 ‘종속적 자본주의’로 분석한 것이었다. 박 교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라는 사회주의적 전망을 내놓고 안 교수가 논리적 대척선상에서 ‘중진자본주의론’이라는 자본주의적 전망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촉발됐다. 이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이론적 구조’를 썼던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 ‘민중민주론’의 윤소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주변부 자본주의론’의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 등 소장 정치경제학자들이 가담해 1980년대 사회과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국가의 강압적 지배정책 완화, 대중문화 영역의 폭발적 팽창 등 국내외적인 변환 속에서 사구체 논쟁과 정치경제학적 분석은 시민사회 논쟁과 문화담론 등에 의해 국가주의, 경제환원주의, 스탈린주의 등으로 비판받으며 논쟁의 주도권을 넘겨준 후 퇴색하고 말았다. 이는 시민사회 논쟁의 당사자들 대부분이 학계에서 대체로 지속성을 이어오고 있으며 현실정치에서도 일정한 지분을 확보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안 제시 없이는 논쟁 가치 없다”
정 교수는 “사회구성(체)은 한국사회를 남한과 동등하게 봄으로써 북한의 존재, 분단 현실을 사상해버렸으며 당시 논쟁 당사자들은 이제 서구 이론의 수입과 추상적인 대안 제시에서 벗어나서 우리 언어로 국가, 직장, 가족과 같은 구체적 수위의 현실분석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정 교수 식의 ‘정리와 책임’론에 대해서 경계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원론적으로 공감할 수는 있지만 사람마다 다른 정리의 방식이 있는데 특정 방향으로 가도록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일축한다. 실제로 과거의 사구체 논쟁에 가담했던 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이후 작업’을 수행중이다. 윤소영 교수의 경우 후기 알튀세 연구 및 신자유주의 비판, 정성진 교수의 경우 트로츠키주의 및 국제적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비교적 과거와 근접한 틀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병천 교수처럼 1990년대 초반 이후 포스트마르크스주의나 비판이론,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으로 이론적 전향을 감행한 이도 다수다. 한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약관의 나이에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었던 이진경 서울대 강사의 경우와 같이 정치경제학이 아닌 프랑스철학, 문화이론 등 다른 분야로 연구 방향을 돌린 이도 있다.
박 교수의 비판에 대해, 신원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논쟁 당사자는 “현재로서는 한 두 마디로 재단할 수 없다”고 전제한 후, “이후 누적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무시한 채 논의를 끄집어내는 것은 세인의 흥미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류 교수 역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에 대한 논점이 뚜렷하지 않다”고 논평했다. 또한 박 교수의 남북한 분단 현실 인식에 대한 논의는 이미 백낙청 서울대 교수(영문학)가 주장한 ‘분단체제론’의 내용과 중첩되는 사항이 많다.
“불꽃 꺼졌어도 유산 여전히 크다"
이미 ‘현대한국의 사상흐름’(당대 刊)을 출간한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한일사상사)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지적 폐쇄성, 단순성을 갖고 있고 이론적 기반에 있어 주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박현채 교수의 경우 오쓰카사학(大塚史學), 안병직 교수의 경우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은 사구체 논쟁을 경유한 이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윤 교수는 ‘포스트 담론’이 주도하는 지식 동향에 대해서 “여러 사상의 흐름이 있어야 하겠지만 민족·계급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즉, 과거의 거대 담론은 폐기돼야 할 것이 아니라 미시적 문제와 함께 연결된 방법론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이름: chosun ( 남 ) 2002/3/2(토) 10:11 (MSIE6.0,Windows98) 134.95.38.124 1024x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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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기 교수,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시 거론
(2002.02.25)
'脫분단의 정치경제학…' 출간 85년 ‘창작과 비평’ 57호에 게재된 고(故) 박현채 교수의 기고 ‘한국사회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 1’로 시작된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은 80년대 내내 사회과학계를 뒤흔든 최대 이슈였다.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방향을 둘러싸고 숱한 논객들이 뛰어든 이 논쟁은 80년대말, 90년대초 갑자기 ‘증발’했다. 의견 수렴이나 이론의 진전에 따른 논쟁 해소가 아니라 동구권과 소련 등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란 현실 변화 때문이었다. 이 논쟁의 학술사적 의미는 무엇이고 이를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경남대 정성기 교수(경제무역학부)가 ‘탈분단의 정치경제학과 사회구성’(한울아카데미)을 출간,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성찰과 역사적 책임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80년대 중반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면서 서울대·한신대·경남대에서 강의했던 정 교수는 88년 종속적 독점자본주의 입장에서의 사회변혁을 제기한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전개와 과제’(사회경제평론 1집)를 발표하는 등 논쟁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 정 교수는 “지식인이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보다 앞장서서 편가르기에 앞장서는 요즘 현실은 사회구성체 논쟁 와중에서 이미 배태됐다”고 말한다. 그는 “나를 포함해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라거나 교조주의라고 낙인을 찍는 ‘언어폭력’으로 공격했다”고 자성한다. 정 교수를 25일 오후 만났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시 거론한 이유는.
“해방 이후 사회과학계 최대 논쟁인 사구체 논쟁에 대해 누군가는 끝까지 책임져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채무장부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썼다.”
― 꼭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하나?
“개인적으로는 나의 오류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지않고는 더 이상 가르칠 수도, 글을 내놓을 수도 없다는 절박한 반성이 일어났다. 학생들에게 세상을 잘못보게 하고, 오도한 데 대해 가르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회구성체 논쟁의 성과와 해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회구성체 논쟁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통일적, 근원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 혹은 좌파진영 내부의 편가르기가 심각했다. 그 과정에서 학문하는 사람 스스로 인간성이 황폐화됐다. 마르크스 주의에서 출발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은 기본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출발한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자생성이 떨어졌다. 70년대에 우리 학계에서 제기된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반성, 전통에 대한 재인식, 한국적 사회과학에 대한 모색이 이어지지 못하고, 마치 패션처럼 마르크스 주의가 학계를 휩쓸었다.”
―개인적으로 사회구성체 논쟁을 거치면서 자성을 통해 얻은 수확이 있다면.
“끝없이 바깥만 쳐다보고 분석, 비판하는 사유와 삶의 방식을 청산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근대 이후의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은 엄청나게 야만적이고 위험한 사고방식이었다.”
―지식인의 편가르기에는 어떤 해결책이 있다고 보는가.
“지식인들의 편가르기는 망국적인 수준이다. 지식인들이 앞장서 지역·계층 갈등을 치유하기는 커녕 실제보다 증폭시켜서 재생산해낸다. 80년대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좌파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붕괴로 지적 부도를 냈고, 세계화를 통한 한국 사회 발전을 얘기한 우파 지식인의 비전도 90년대 후반 IMF 사태로 무너졌다. 지식인들은 자기를 구속하는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에서 벗어나, 가정과 직장, 삶의 현장에서 실사구시를 통해 다시 희망을 발견해야한다.”
( 金基哲기자 kichul@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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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한국사회 구성체 논쟁, 지금은?
뉴스메이커 기사전송 2008-11-2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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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대논쟁’열기 식어… 현 사회변화 방향 재논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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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입장이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진보적 입장에서 서울대 민교협을 이끌던 안병직 교수는 2000년 이후 보수적인 ‘뉴라이트’로 전향한다. 사진은 1991년 강경대 타살 사건 당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안 교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한국사회구성체논쟁. 멀리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단체인 민청련 내부의 C·N·P(각각 CDR·NDR·PDR의 약칭으로 시민·민족·민중민주주의혁명을 뜻함) 논쟁까지 소급하지만, <창작과비평> 1985년 통권 57호에 실린 ‘한국자본주의논쟁’ 기획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경제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던 박현채 교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국독자론)을, 이대근 성균관대 무역학과 교수가 ‘주변부자본주의론’의 입장에서 국독자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었다. 그 후 논쟁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논쟁은 학계뿐 아니라 운동권 내에도 깊숙이 번져 나갔다. <한겨레신문>은 창간 1년 후, 학계와 운동권에 걸쳐 있는 이 논쟁의 쟁점을 신문지면에 지상중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2월, 국정연설에서 이 논쟁을 언급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젊은 대학교수를 모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니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니 하는 이론 조류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진보 진영에 걸쳐 있는 지식인과 운동권 들 거의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이 논쟁에 참여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참 타오르던 논쟁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미증유의 대논쟁이 증발한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당시 논쟁을 ‘한국사회구성체논쟁’(죽산)이라는 4권의 책으로 정리한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운동의 과학화라는 면에선 큰 성과가 있었지만, 나중에 논쟁이 현실이 아닌 환원주의·이론주의로 흘러간 면이 없지 않았다”면서 “또한 논쟁 과정에서 감정적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이후 운동그룹 간의 연대를 방해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변호사 시절 관심 논쟁 후 참가 당사자들이 걸어간 길은 너무나 달랐다. 가장 극단적인 방향으로 간 그룹은 이른바 학계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하 식반론) 그룹. 외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입장을 대표하고 있던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1989년 잡지 <사상문예운동>에 ‘중진자본주의로서의 한국 경제’를 발표하고 종전의 식반론 입장을 폐기한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민교협을 이끌던 안 교수는 2001년 정년 퇴임 후 일본 후쿠이 현립대학 특임교수를 지내고 돌아온 뒤부터 뉴라이트운동에 뛰어들었다. 2007년 9월부터는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이명박 정부가 탄생하는 데 이론적 기초를 다졌다. 현재 이 정부의 배경인 뉴라이트 운동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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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교수와 박현채 교수는 당시 진행하던 논쟁을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4권짜리 책으로 집대성했다. 사진은 책의 1, 2권. | 그러나 당초 논쟁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조희연 교수는 “원래 식반·주변부자본주의론과 관련된 글은 이대근 교수가 아니라 다른 분이 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이대근 교수가 쓰게 된 것”이라고 당시 사연을 공개했다. 논쟁에서 박현채 교수가 국독자론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박 교수의 논지는 조금 복잡했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박 교수는 기본모순에서 자본주의를 이야기한다면, 주요모순으로 반봉건민주변혁의 과제를 제기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진경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생)는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 이하 사사방)이라는 저서를 통해 박현채 교수의 국독자론을 비판한다.
이후 전개된 논쟁의 중심축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하 신식국독자론)을 둘러싸고 진행된다. 이진경 교수는 “신식국독자론은 집단 창작물”이라고 말한다. 신식국독자론의 논지는 종속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와 같은 식민지가 아니기 때문에 신식민지이며,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는 발전이 지체된 것이 아니라 독점이 강화되었고, 국가와 결탁하는 양상을 띄었기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반면 당시 <노동해방문학>에 이정로라는 필명으로 PD론을 비판한 백태웅씨(서울대 법대 81학번·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신식국독자론은 우리(NDR민족민주혁명-CA그룹)가 식반사회론에 맞서 사회구성체 개념으로 최초로 채택한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신식국독자론을 정식화한 것은 PD 입장이 아니라 ND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당시 백씨가 있던 그룹에서 ‘한국 사회의 성격과 노동자 계급의 임무’라는 이름으로 팸플릿을 낸 것은 맞지만 이론적 배경이 튼튼했던 것은 아니었다”라며 “특히 ‘독점 강화 종속 심화’ 명제 등 신식국독자론의 핵심 명제를 구체화한 윤소영 교수를 비롯한 <현실과 과학> 그룹의 역할이 컸다”라고 말했다.
학계 식반이론가들 뉴라이트로 전향 <현실과과학>은 새길출판사가 발행하던 무크지.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총 10권을 발행했다. 신식국독자론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과 당시 소련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동향 등을 주로 실었다. <현실과과학>은 당시 막 태동하던 PD 그룹의 이론적 원천지였다. <현실과과학>에 모든 글을 실은 것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연구 성과는 82학번이 주축인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이하 서사연)들에서 나왔다. 서사연의 모태는 김진균 교수의 상도연구실이다. 1980년 대학에서 쫓겨난 뒤 83년 상도동의 33㎡(10평)도 안 되는 건물 3층에 처음 만들어 이름이 상도연구실이다. 서사연이 태동할 당시 상도연구실은 신림동과 봉천동을 옮겨다니고 있었다. 전효관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는 “서사연은 이창휘(현 ILO 아시아태평양사무소 노사관계전문가), 진중권(현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 조국(서울대 법대 교수), 이지원(한림대 일본학과 교수), 이진경, 전효관 등 7~8명이 당시 주체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상도연구실에 모였던 것이 모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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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노해 나눔문화 상임이사,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 백태웅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교수, 신현준 음악평론가, 양원태 장애인권포럼 상임이사,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전효관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교 교수,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진중권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 | 주로 81~82학번 비주사파 운동권이던 이들은 필명으로 <주체사상비판1, 2>(도서출판 벼리) 등을 펴냈다. 이어 논쟁은 무크지 <현실과과학>을 무대로 계속된다. 우선 식반론 비판. 주체사상에 근거한 한국 사회 인식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진경 교수는 “이북 입장에서 한국을 볼 때 당시 작전통제권도 없고 불가침조약의 당사국도 아니라는 점에서 식민지라고 봤고, 또 한국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상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그렇게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겠나”고 말했다. 두 번째 대립각은 이정로·박노해(현 나눔문화 상임이사) 등 ND 입장의 신식국독자론과 그어졌다. ND 측 한국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선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속성으로 인한 ‘낮은 생산력’이라고 주장했다. 셋째는 <사회와 사상> 등 잡지를 통해 '이견'을 제시하던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와 논쟁이다.
윤소영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내놓은 저서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공감)에서 “1988년부터 이병천 교수가 신식국독자론과 PD론을 두고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인민노련를 이끌고 있던 주대환 씨가 이 교수의 매제였다”면서 “나와 이 교수 사이의 논쟁은 <현실과 과학>과 인민노련 사이의 논쟁이었던 셈”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의 상대방은 당시 논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는 “당시 백태웅씨의 견해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ND론의 발표 공간이던 <노동해방문학>의 주간이었다. 그는 현재 네그리 등 자율주의마르크스주의 입장을 갖고 있다. 조 강사는 “당시 신식국독자론이 사회구성체론인 동시에 곧바로 정치혁명론·조직론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의 사회관, 즉 반봉건적 요소를 주장하는 견해를 극복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면서도 “그럼에도 당시 논쟁들은 좌파운동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소련에서 건너온 스탈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사회 전체를 일국적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는 것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이병천 교수는 “당시 논쟁의 줄기는 크게 한국 사회에 대한 것과 이념 일반에 대한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둘 다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한국의 진보 세력은 사회구성체논쟁 이후 무책임하게 손을 놔버렸다”고 주장했다.
“주체사상 근거 한국 사회 인식 부정확”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사회운동의 다수를 차지하던 NL 입장이 과연 이 논쟁에 제대로 참여했냐는 것이다. '민족자주화운동론' 등을 저술했고, 정태인 현 성공회대 겸임교수 등이 주도한 무크지 <녹두서평>에 정민·조진경 등의 필명으로 당시 NL 입장의 글을 쓴 정철영(도서출판 유북 대표·한국사회여론연구소 기획위원)씨는 “(NL 입장에서) 엄밀하게 말해서 사구체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정 대표는 “개인적으로는 최민 등 CA그룹과 가까웠을 뿐 NL 진영의 일원은 아니었다”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NL 입장은 논쟁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했으며, 당시 논쟁할 수 있는 운동그룹이 전부 ‘지하’로 들어가면서 사실상 논쟁에 참여한 흐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자신의 필명으로 발표한 글의 일부는 이 ‘지하활동 성원’이 발표한 것이며, 엄밀히 말해 자신의 ‘위치’는 출판기획자였다고 회고했다. 정 대표는 정민 등의 이름으로 <사회와사상> <역사비평> <사회평론> 등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뒤 ‘민족자주화운동론’필화 사건으로 복역한 뒤 신변을 정리했다.
‘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론’의 정립과정도 알려진 것과 조금 다르다고 그는 증언한다. 신식국독자론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하비합법전위조직으로 주장하는 통일혁명당이 1985년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발전하면서 들고 나온 이론이라는 것. 이론적으로 신식국독자론 보다 앞서서 나온 것이며, 다만 ‘시차’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공식적으로 NL의 식반자 이론은 한민전이 1987년 하반기 무렵 ‘한국사회를 다시본다’라는 문건을 발표하며 담긴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김정일의 교시 등에서 ‘북한의 한국사회 인식’틀로 확인되고 있는 이론이다. 정대표는 “신식국독자론에 대한 식반자론의 반비판의 대부분은 이북에서 나온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정대표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사회구성체 또는 사회성격논쟁은 한국전쟁 후 최초의 남과 북 사이의 변혁노선논쟁인 셈이다.
1989년부터 91년까지 잇따른 현실사회주의 몰락은 논쟁이 급속도로 사그라지는 데 큰 변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논쟁에 참여하면서 ‘평화공존론’을 연구했던 송주명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사회적 콘텍스트가 바뀌면서 예전의 관심사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힘들었다”라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동북아시아지역의 지역주의와 민족통합 등 지역 평화로 관심이 이동한 것이다.
신현준씨도 사구체논쟁 당시엔 정통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조절이론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정치경제학 연구자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학내 노래패 동아리 메아리 활동 경력을 살려 지금은 음악평론가로서 더 명성을 쌓고 있다. 양원태 씨는 서울대 경영학과 85학번으로 1987년 대선 당시 구로구청 부정개표 의혹 사건과 관련해 농성을 하다가 옥상에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다시 학교를 복학한 1990년대 초반 그는 늦깎이로 서사연·현실과과학 그룹에 합류했다. 국회의원 비서관과 출판사 사장을 거쳐 그는 현재 장애인권포럼 상임이사로 있다.
사구체논쟁은 최초의 남북 변혁노선 논쟁 이진경 교수는 들뢰즈·푸코를 거쳐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개념을 '코뮌주의'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이 교수는 자본주의 금융위기 등을 다룬 논문들을 덧붙여 <사사방> 증보판을 냈다. 역시 그가 편집과 집필에 참여한 <부커진> 2호는 ‘다시 사회구성체론으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다시 논쟁의 재점화는 가능할까.
이 교수는 “논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자기관심사에 따라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만한 응집력으로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라며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경제적 분석으로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사회구성체논쟁이 비록 장은 달리했지만 계속되어왔다는 의견도 있다. 조정환 강사는 “자율주의가 주장하는 ‘제국’ 역시 넓은 의미의 사회구성체론”이라며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사회의 변화방향을 어떻게 추구해야하는가에 대한 모색은 중단 없이 계속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사구체논쟁의 진정한 자리는 학계가 아니라 민중투쟁과 정치적 실천의 현장이어야 한다”라며 “현재도 사실 총체적 논쟁이 아닐 뿐 현재의 금융위기를 어떻게 보고 대응할까에 대한 케인즈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적 입장 등 다양한 입장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 하위수준의 ‘사구체 논쟁’은 존재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진경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논쟁의 현재 의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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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구 기자> |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하 ‘사사방’)의 증보판이 나왔다고 전했을 때, 이번 취재에서 만난 많은 당시 참가자는 도대체 왜 그 책을 다시 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이 교수는 증보판 서문에서 “100년만큼이나 긴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책을 위해 다시 서문을 쓰는 심정은 적이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대부분 20대 사회과학연구자에게는 생소한 책이겠지만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 ‘사사방’은 이른바 PD 진영 초입자에겐 세미나 필독서이자 특유의 난해함으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수유+너머의 카페에서 이진경씨를 만났다.
‘사사방’이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논란이 많았다. 책에도 언급됐는데 이진경이라는 이름이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의 줄임말이다는 말도 돌았고, 집단 창작물이다는 소문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운동권으로서는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레닌 전집이나 일본 서적에서 직접 인용했다. 학부 졸업생 신분이었는데 가능한 일이었나.'
“책에 쓴 것처럼 이진형이라는 가명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오독되어서 이진경이 된 것이다. 나중에 조직 사건(1990년 노동계급 사건)으로 안기부에 연행되었을 때 거기서도 ‘진짜 경제학이라며?’ 하고 비아냥거렸다. 우연히 얻은 이름이지만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이번에 ‘사사방’ 증보판에 실린 논문도 그렇고 부커진에 실린 것도 마찬가지로 오랜 우회 끝에 정치경제학으로 돌아온 것인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이진경 교수의 작업이 외부에서 보기엔 고담준론처럼 보였는데 현실 분석으로 돌아온 건가.
“나는 이전에 낸 책들도 현실 분석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마디즘> 책을 쓰면서 오랫동안의 도제 기간이 끝났다고 쓴 적이 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는 자본에 대한 내 나름의 정리였다. <미-래의 맑스주의>를 쓰면서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면 난감해할 만한 명제를 실험적으로 찾아냈다. 노동가치론을 다시 쓰려고 했고, 계급에 대한 입장을 재정립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한국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면을 보려고 노력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부커진과 ‘사사방’ 증보판에 실린 논문을 보면 네그리와 장하준에 대해 선을 긋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성체논쟁 당시의 ‘논쟁’ 부활인가.
“네그리의 제국은 너무 앞서나갔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과잉 제국주의라는 말을 썼지만, 흐름의 경제 공간이 만들어졌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하루 시차도 아니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경제가 가능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유물론자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글로벌자본주의적 착취와 어떻게 대결할 것인가. 이탈의 지대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국가 차원의 대응과는 조금 다르다. 이를테면 나름 자립경제를 주장했던 김대중 정권은 IMF 요구를 완전히 받아들여 개방한다. 신자유주의체제를 정착시킨 당사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글로벌자본주의와 다른 생활방식과 양식을 어떻게 조직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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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구 기자> |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대안은 뭔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외부를. 이곳(수유+너머)에는 정규직도 별로 없다. 돈이 필요하면 나가서 벌어오면 된다.”
유럽식 참여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입장도 있다.
“나는 보드리야르에게서 개념을 빌려와 시뮬라크르자본주의라고 불렀는데, 증권화된 이 자본주의는 파생상품의 연쇄폭발로 위기를 가져왔다. 리먼브러더스 사태 등 위기가 현실화하고서야 파생상품을 규제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데 과연 규제의 형식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유연성 축적 체제 이전의 케인스주의나 포드주의로 돌아갈 수도 없다. 대량소비할 소득을 노동자에게 제공해야 하고, 복지국가의 잉여가 충분해야 가능한 조치기 때문이다. 불안은 신자유주의는 이미 끝났는데 다음은 뭐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앞으로 어떤 주제로 집필할 계획인가.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에 이름을 붙인다면 ‘생명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다. 생명복제시대에는 생명복제가 자본의 이윤창출의 주요 수단이 된다. 생명산출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론으로 치환이 불가능하다. 자본의 착취가 생명력 자체까지, 미시적인 세포이사 수준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시대. 착취에 맞선 운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시대의 착취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인권을 넘어선 생명권’이라는 개념을 고민하고 있다. 생기론이나 생명사상에 기대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근본 개념을 정리하는 것이 목표다.”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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