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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3대 기사단은 '성 요한 기사단', '성전 기사단', '튜튼 기사단'이 가장 대표적인 기사단으로 매유명한 기사단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매우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중 가장 용감히 싸웠고 이슬람군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자왕 리처드 같은 국왕이 이끄는 군대가 아니라 이러한 종교 기사단들이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기사단이 없었더라면 십자군 전쟁은 진작에 끝났을 것입니다. 광신적인 이슬람교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똑같이 광신적인 이들 종교 기사단들 뿐이었습니다. 이외에도 프랑스에는 '성 미카엘 기사단'이라는 종교 기사단이 있었는데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가 이 기사단의 단원이었습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된 것은 프랑스왕 루이 12세와의 정치적인 관계에 의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강대하고 유명한 기사단을 꼽으라면 앞서 말한 3대 종교기사단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요한 기사단 또는 구호기사단(救護騎士團 : Hospitalers)
Knight Hospitalers라고도 함.
11세기에 설립된 종교적인 군대조직.
예루살렘의 성 요한네스 구호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구호기사단은 병든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시작됐는데, 이 병원은 세례자 요한의 교회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한 종교단체가 봉사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병원장이자 수사인 제라르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사역을 집중시켰다. 그는 성지에 이르는 도상의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숙박소를 지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십자군 기사들은 이 병원에 재산의 일부를 기부했고, 성지에 남은 십자군 기사는 구호기사단의 단원이 되어 이 기사단을 부강하게 발전시켰는데, 이들이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슬람교도와 전쟁을 수행했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된 이후 십자군의 지배가 끝나게 되자, 구호기사단은 키프로스로 후퇴하여 순례자들과 병든 사람을 계속 돌보고 성지를 다시 정복하기를 희망하면서 성지 근처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1309년 로도스를 정복하여,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동지중해의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었다. 1522년 오스만 투르크족이 로도스를 정복하고 추방했었지만, 1530년 황제 카를 5세가 구호기사단에게 몰타 섬의 소유권을 위임했다.(아마 일부 투르크 황제인 술탄에게 충성을 댓가로 로도스 기사단의 일부를 정착하게끔 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추방되어 정처없이 떠돌다가 몰타 섬에 정착하게 되었다.) 몰타에서 기사단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여 오스만 투르크군의 맹렬한 공격을 잘 막았으며, 이곳에서 해군력을 증강하고 진보된 방법으로 기사단을 운영했다. 투르크족의 침략위협이 약화된 17~18세기에는 쇠퇴기를 겪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게 몰타 섬을 점령당했다. 1834년 이 기사단의 본부는 로마에 세워졌으며, 오늘날도 여러 분야에서 인도주의적인 사업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사단의 일부는 한 때 재정난에 시달려 악랄한 해적으로써 악명을 떨칠 만큼 크게 타락하기도 했고 그런 일부 해적으로 전락한 기사단은 유럽 각지의 토벌대에 의해 소탕되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한 추리 소설가이자 진짜 사립탐정이던 더쉴 해미트가 쓴 소설 [몰타의 매](사립탐정 스페이드로 소개된 적이 있다)에서 이 기사단이 한 때 프랑스 국왕에게 뇌물 삼아 황금의 매를 바치려 했었다는 기록을 모티브로 삼아서 그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몰타 섬에는 지금도 영화 액소시스트같이 악령을 퇴치하는 그 악령 퇴치사 조직의(혹시 이들 기사단에서 차출된 게 아닐런지...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근거지이기도 하다고 전해진다.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 : Templar)
정식 이름은 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십자군 원정 때 생긴 종교기사단.
예루살렘 왕국 초창기에 만들어졌다. 당시 십자군은 성지의 몇몇 요새밖에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성지 순례자들은 자주 이슬람교도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한 순례자들의 곤경을 동정하여, 위그 드 파?S이 이끄는 8~9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1119년말(또는 1120년초)에 순례자 보호에 헌신할 것과 이를 위해 종교단체를 구성할 것을 서약했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는 왕실 궁전의 옆채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는데 그곳은 예전에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던 지역이었다. 여기서 이 기사단의 이름이 생겨났다. 성전기사단은 기사·서전트(sergeant)·목사·종복의 4개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기사들만이 성전기사단의 독특한 복장인 붉은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을 입었다. 기사단장이 기사단을 이끌었고 각 지방 지부는 기사단장에게 복종하는 사령관이 맡았다. 기사단원들은 청빈과 순결을 맹세했다.
그들은 성지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가 쓴 그들의 생활계율에 대한 선동적인 저서 덕분이기도 했다. 그들은 원래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그들을 교황 직속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주교구에서 재산을 가지더라도 그곳 주교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자 이 기사단의 활동은 급속도로 다양해졌다. 그들은 곧 성지의 그리스도교 십자군 국가의 방위에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성지의 모든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전성기 때 이들의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이들은 상당한 부를 얻었다. 스페인·프랑스·영국의 왕들과 대귀족들로부터 귀족지위·성(城)·영주권·영지 등을 받은 이들은 12세기 중엽에는 서유럽과 지중해 연안, 성지 전역에 걸쳐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들은 군사력 덕분에 금·은을 안전하게 모아 보관하고, 성지와 유럽을 오가며 운반할 수 있었다. 이들의 보물보관소 연결망과 효율적인 운반 조직 때문에 왕이나 정치 순례자들은 기사단을 은행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기사단은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 걸쳐 방대한 자산을 지니게 됨은 물론 막대한 재정적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적은 있었다. 유럽의 다른 대규모 기사단인 구호기사단과 오랫동안 심각한 경쟁관계가 지속되었다. 13세기말에는 이 두 경쟁적인 기사단을 하나로 합치자는 제안이 나왔다. 1291년 성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십자군 요새 아크레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자 성전기사단의 존재이유가 거의 없어졌다. 더구나 1304년경에는 이 기사단이 비밀입단식 때 비종교적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한다는 소문까지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단려왕(端麗王) 필리프 4세는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 내의 기사단원을 모두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했다. 필리프가 이 기사단을 해체시키려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실제로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단지 고질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던 그가 기사단의 막대한 부를 빼앗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성전기사단을 이단과 부도덕의 혐의로 기소하고 많은 기사단원을 고문해 혐의를 입증할 만한 거짓자백을 받아냈다. 프랑스인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이때 필리프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1307년 11월 모든 나라의 성전기사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필리프는 마침내 교황으로 하여금 성전기사단을 탄압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1312)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성전기사단의 재산은 구호기사단으로 넘어가거나 국가에 몰수되었다. 많은 성전기사단원이 처형·투옥되었으며 이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던 자크 드 몰레는 1314년 기둥에 묶여 화형당했다. 성전기사단의 유죄 여부는 몇 세기 동안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최근의 논의는 이들이 매우 부당하고 기회주의적인 박해에 희생되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악마 숭배자로 오명이 씌워졌다.)
튜튼 기사단(Teutonic Order)
독일기사단(Teutonic Knights)이라고도 함. 공식 명칭은 House of the Hospitalers of Saint Mary of the Teutons in Jerusalem.
중세 때 프로이센을 정복해 강력한 국가로 변모시킨 독일 십자군 단체.
1190년경 팔레스타인의 아크레에서 독일의 한 자선 시설과 연계된 자선 단체로서 창립된 튜튼 기사단은 1198년부터 군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기사단장인 헤르만 폰 살차(1210~39 재임)의 지휘 아래 1211년 활동의 주무대를 중동에서 동유럽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이들은 헝가리 왕 엔드레 2세를 도와, 침입한 이교도인 쿠만족과 싸웠다. 그뒤 1225년 엔드레 왕에게 쫓겨났다가 마조비아의 콘라트로부터 프로이센을 정복해 개종시켜달라는 요청을 받은 기사단원들은 비수아 강 북쪽으로 이동해 토른(토루인)에 거점을 마련했다. 1233년 그 지역 담당 단장인 헤르만 발크는 주로 중부 독일에서 자원해온 평신도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 정복을 개시했다. 그 뒤 50년에 걸쳐 비수아 강 하류에서 네만(니멘) 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대부분의 프로이센 토착민들을 몰살한 뒤(특히 반란이 심했던 1261~83년 사이에 토착민들이 많이 몰상당했음)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사단은 정복지의 1/3에 달하는 지역을 교회에 봉납하고 그곳에 새로 생긴 도시에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하면서도 프로이센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해 지역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여러 채의 성을 쌓아 기사들의 거주지와 군사적·행정적 중심지로 삼았으며 기사단의 봉신이 된 독일과 폴란드의 귀족들에게는 봉토를 충분히 나누어줌으로써 독일 농민들을 불러모아 인구가 격감한 지역에 정착시키도록 했다. 1263년 교황이 청빈의 서약에 묶여 있는 기사들에게 무역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한 뒤부터 이윤이 많이 남는 프로이센의 곡물 무역을 독점했다.
1309년 기사단장이 마리엔부르크에 항구적인 거처를 정했을 때 튜튼 기사단은 이미 강력한 봉건 국가를 세워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1237년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로서 활동을 시작한 리보니아 기사단(→ 검의 형제기사단)이 관할하는 발트 해 연안국가(쿠를란트·리보니아, 1346년 이후 에스토니아)와, 단치히(지금의 그다인스크) 시를 포함한 동포메른 지방 및 독일의 중남부지역도 지배했다. 튜튼 기사단은 15세기에 들어와서도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리투아니아를 정복해 개종시키려 했고, 한자 동맹에 속한 상업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402년에는 서포메른의 노이마르크를 매수하고 그 전인 1398년에는 프로이센과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를 갈라놓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영토 사모기티아를 점령하는 등 계속 위세를 떨쳤다 (→ 색인 : 리투아니아 대공령).
그러나 발트 해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폴란드와, 1387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계속해서 기사단으로부터 영토에 대한 위협을 받고 있던 리투아니아는 기사단의 영토가 확장되고 세력이 커가는 데 적의를 품게 되었다. 결국 1408년 사모기티아에서 기사단의 통치에 반기를 든 반란이 일어나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힘을 합쳐 그룬발트 전투(1410)에서 기사단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결과 토루인 조약(1411)이 맺어져 사모기티아와 도브리진 지방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지만 기사단의 군사력은 큰 손상을 입었고 뒤이어 권위와 재정 형편도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폴란드가 전쟁을 계속 벌이자 더이상 버티기 어려워졌고 봉신들이 30년전쟁(1454~66) 때 폴란드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사단은 마침내 굴복했다. 1466년 기사단은 제2차 토루인 조약을 맺고 포메른과 비수아 강 양안 및 바르미아(에름란트)의 주교 관할구를 폴란드에 넘겨주었다. 프로이센의 나머지 지역은 계속 보유했으나 그 지역에서 기사단장의 지위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 격하되었다. 공식적으로 독일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기사단에 폴란드인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525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사단장 알베르트는 프로이센에서 튜튼 기사단을 해체하고 기사단의 영토를 폴란드를 종주국으로 하는 세속적인 공국으로 전환시켰다. 1526년 리보니아 지부의 지도자인 고타르트 케틀러도 기사단을 해체하고 관할 지역을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에 각각 나누어주고 자신은 폴란드 왕의 봉토로 바뀐 쿠를란트의 세속공작이 되었다. 153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가 된 기사단장이 통치하는 나머지 지역과 독일 중남부에 흩어져 있던 기사단 관리지는 1809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어 다른 공국들이 나누어가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34년 빈에서 튜튼 기사단을 교회의 명예 단체로 다시 창설했고 1929년 개편했다.
튜튼기사단 (Teutonic Order)
튜튼기사단은 중세 유럽과 이슬람의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의 3대 기사단 (튜튼, 템플, 요한) 중의 하나로서 기사들이 게르만 민족들로 구성되었다하여 어떤이들은 '독일기사단 (Deutscher 0rd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튜턴기사단은 1190년 제 3차 십자군들이 아콘 (돌레마이)을 포위하였을 때 뤼벡와 브레멘 시민들이 부상병 구호를 위해 세운 병원에서 기원하며, 유대지방의 성지방위를 담당하는 종교 기사단으로 변모하여 1198년에 교황의 승인을 얻었다.
이들은 흑십자 (黑十字) 휘장을 붙인 백색 망토를 입었으며, 의료 외에 이교도와 싸우는 임무까지 맡아 독일 황제나 제후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기증 받았으며 후에는 검우기사단 (劍友騎士團)과 통합됨으로써 기반이 확고해졌다. 1226년에는 폴란드 마조비아공의 부름을 받아 발트해의 슬라브족을 교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동프로이센 지방의 개척과 포교의 임무도 맡게 되었다.
이후 활동 중심지는 프로이센으로 옮겨져 1309년 마리엔부르크에 본부를 설치하여, 각지 도시에 성을 축조하면서 무력으로 개종시켜 독일인의 세력을 확장시켰다. 튜튼 기사단은 14세기에 전 유럽을 호령하며 절정기를 누리다가 15세기 폴란드에게 패배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후에는 명맥만 유지하다가 1809년까지 최후까지 잔존한 가톨릭계 기사단이 교회재산 국유화로 영지가 몰수되어 소멸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인들에게는 독일민족의 영광을 이룩한 전설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세 독일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 JG 27 전투비행단 제 3연대 (gruppe)의 부대마크 - 흑십자가 그려진 튜튼 기사단의 방패를 사용했다. ]
2차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전 유럽을 석권했던 독일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을 튜튼기사단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투기의 날개에 새겨진 독일공군의 상징 마크가 튜튼기사단의 망토에 그려진 흑십자 마크를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하늘에서 1대 1의 대결을 펼치며 적기를 제압해 독일민족의 영광시대를 이끌었던 전투기 조종사야말로 지상의 병사들에게는 20세기에 나타난 기사와 같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황금양모기사단(The Order of the Golden Fleece)〉
(독)Der Orden vom Goldenen Vlies.
(스)La Orden del Toison de Oro.
(프)L'Ordre de la Toison d'or.
1430년에 부르고뉴에서 창설되어, 나중에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및 스페인과 제휴한 기사단.
이 기사단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善良公) 필리프 3세가 1430년에 플랑드르의 브뤼헤에서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와 올린 결혼식을 기념하여 창설했다. 첫 번째 모임은 1431년에 릴에서 열렸고, 1432년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디종에 본부를 두기로 결정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안드레아에게 바쳐진 이 기사단은 처음에는 1명의 기사단장(주권을 가진 공작)과 23명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회원은 그 후 31명으로 늘어났다가 결국에는 51명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를 수호하고 기사도의 전통적 관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이 기사단은 이상적으로는 기사단 회에서 소속 기사들의 행동을 평가하거나 칭찬하거나 비난하여 기사들 사이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반란이나 반역이나 이단의 죄를 지었다는 혐의를 받으면, 동료 기사들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부르고뉴의 마리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이 결혼함으로써(1477) 기사단 단장의 자리는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이 기사단에 소속한 기사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배타적으로 재판할 수 있는 사법권을 기사단에 부여했고, 기사단 단장의 자리를 아들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펠리페 2세의 후계자들이 기사단 단장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단절된(1700) 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사단 단장 자리를 놓고 분쟁을 일으켰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는 1713년 빈에 이 기사단을 창설했고, 그 후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통치자 및 왕위 요구자들은 황금양모기사단을 가장 중요한 기사단으로 계속 내세웠다. 로마 카톨릭교도로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귀족만이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될 수 있었다.
〈검의 형제기사단(Schwertbruderorden)〉
(라)Fratres Militiae Christi.
(영)Order of the Brothers of the Sword. 별칭은 검기사단, 리보니아 기사단.
1202?37년 리보니아(지금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대부분 지역)를 정복해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십자군 기사단.
독일인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들어간 것은 뤼베크와 브레멘에서 온 독일 상인들이 드비나 강어귀 주변지역에서 상권(商權)을 장악한(12세기 중반) 뒤였다. 그 뒤 1202년 리보니아 제3대 주교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이 이 지역에 대한 교회의 기득권을 지키고 이교도 원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강제 개종시키기 위해 교황의 승인을 받아 상설 군사기구로 창설한 것이 검의 형제기사단이다.
1204년 교황에게서 축성(祝聖)을 받은 기사단은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의 규율을 채택했는데, 이에 따르면 기사들은(이들의 흰 망토에 붉은 십자가와 검이 수놓아졌기 때문에 검의 기사들이라 불렀음) 귀족이어야 했고 순종?가난?금욕을 맹세해야 했다.
이들은 각 지구(district)의 성(城)에 살았으며, 자체 평의회(評議會)와, 기사단장이 뽑은 군사책임자가 각 성을 다스렸다. 기사총회에서는 종신직인 기사단장과 그밖에 1년마다 다른 직원들도 선출하였다. 기사단원 가운데에는 병사와 장인(匠人), 성직자들도 있었다.
1206년경 이 기사단은 리보니아 지역의 드비나 강과 가우야 강어귀 주변에 살던 핀우고르족(族)을 강력하게 지배했으며 1217년경에는 드비나 강 북쪽에 있던 이웃 라트비아 부족들과 남부 에스토니아를 정복했다. 그 후 드비나 강 남쪽을 공격했으나 그곳에 살던 쿠르인과 세미갈리아 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236년 9월 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의 사모기티아를 습격해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세미갈리아를 지나 돌아오던 중 세미갈리아 인과 사모기티아 인의 연합세력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받아(사울레 전투) 기사단장 볼퀸이 죽고 기사단의 군사력은 사실상 붕괴했다.
기사단은 이교도와 개종자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한 것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의 질책을 그전부터 받았던 데다가 이때에 와서는 교회를 위해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영지 지배를 확립하는 데 더욱 열중했기 때문에 교황은 기사단을 해체해 튜튼 기사단의 한 지부로 재조직하도록 명령했다(1237).
그 뒤부터 프로이센에 주요기반을 두고 있던 튜튼 기사단의 단장이 리보니아의 관구장(Landmeister)을 임명하게 되었다. 검의 형제기사단은 리보니아 정복을 계속했고 1525년부터는 다시 독립 기사단이 되어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리보니아가 분할되면서 1561년 해체되었다.
〈산티아고 기사단(Orden de Santiago)〉
(영)Order of Santiago.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기사단.
1160년경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의 성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스페인계 이슬람교도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본래 이 기사단이 조직된 도시의 이름을 따서 카세레스 기사단이라고 불리다가 1171년 산티아고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취했다. 1174년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7세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중앙 수도원이 세워진 우클레스 시를 이들에게 주었다. 1493년 이 기사단은 약 7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 매년 수입은 6만 다카트나 되었다. 바로 그 해 카톨릭 군주들(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라 1세)은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이 기사단을 수중에 넣었다.
〈알칸타라 기사단(Order of Alcantara)〉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기사단.
1156년 돈 수에로 페르난데스 바리엔토스가 설립했으며, 1177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특별교서로 승인했다. 그 목적은 무어인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스페인을 지키는 것이었다. 1218년 레온의 알폰소 9세 국왕은 이 기사단에 알칸타라 마을을 하사했고 그후 2세기 동안 알칸타라 기사단은 그리스도교 스페인의 남쪽 국경을 지켰다. 단원은 10만 명에 이르렀고 연간수입은 4만 5만 다카트였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가 1493년 기사단을 왕실에 편입시킨 이래 알칸타라 기사단의 봉토는 왕실 세습지의 일부가 되었다.
1119 성당기사단 탄생
1128년 1월
트루아 종교회의, 성당기사단의 공식인정, 성 베르나르의 성당기사단 협조
1139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성당기사단에 대한 특권부여
1145 '프레스터 요한'이란 이름이 유럽에 알려짐
1182 '성배'가 크레티엥 드 트루아의 미완성 서서시에 등장
1187 예루살렘 함락
1195-1200 볼프람 폰 엣센바흐의 '파르치팔'
1306 이디오피아의 웨뎀 아라드의 사절단,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교황접견
1307
프랑스의 공정왕 필립에 의한 성당기사단의 붕괴, 잔당은 미국, 포르투칼,스코틀랜드등으로 이동
1312 포르투칼의 성당기사단 해체
1319
포르투칼의 성당기사단, 그리스도의 기사단으로 부활, 그해 3월 14일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인준
1394 에스파니아의 항해왕 엥리케 출생
1460 엥리케 사망,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시작
1515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에 의해 장미십자회 창설
1645 영국, 런던, 애쉬몰이 장미십자회의 영향을 받은 'Invisible college'창립
1660 'Invisible college'가 왕립학회로, 욍립학회에서 프리메이슨이 파생
1666 프랑스, 파리, 왕립과학학회 창립
1707 클로드 루이 데 생제르맹 출생(만일 실존인물이라면)
1717 런던에 '비밀결사 대지부'결성
1721
앤더슨의 영국 프리메이슨 회칙을 씀, 러시아의 표트르대제의 런던메이슨지부가입, 러시아메이슨지부 창설
1730 몽테스키외가 런던여행중 프리메이슨 대원이 됨
1737
랑제이가 프리메이슨이 성당기사단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 스코틀랜드식 의식 시작
1740 프랑스의 각지부 탄생
1743 생제르맹 백작의 출현, 리용에서 슈발리에 카도슈단 창립
1753 윌레르모의 파르페트 아미티에 지부 창립
1754(1760) 마르티네 파스칼리스의 엘뤼 코엥의 성당기사단 창립
1756 훈트 남작이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의 영향으로 '엄수성당기사단'창립
1758 생제르맹이 파리에 나타나 국왕에게 자신을 화학자이며 염색전문가라고 소개.
1759 '동성황제공의회'의 창립추정, 1781년에 '보르도의 회칙과 규약'제정
1760
생제르망이 비밀임무를 띄고 네덜란드로 간 후 런던에서 체포되나 석방, J 페르네티의 '일루미너티'조직, 마르티네 파스칼리스의 마숑 엘뤼 드 뤼니베르 창립
1762 생제르맹, 러시아로 가다.
1763 카사노바가 쉬르몽이라는 가명을 쓰는 생제르맹과 만남
1768
윌레르모가 파스칼리스의 엘뤼 코엥에 가입, 파스칼리스와 루이 클로드 생 마르탱과 만남
1771 샤르트르 공작(필립 에칼리테)가 '위대한 동방회' 조직
1772 파스칼리스가 산토도밍고로 떠남, 윌레르모와 생제르맹은 트리뷔날 수브랭 조직
1774 생제르맹의 은퇴, 오베르뉴의 스코틀랜드 집행부 창립
1776 아담 바이만하우프트가 바바리아에 '일루미나티' 창립
1782 빌헬름스바트에서 모든 지부의 총회 개막
1783 토메 후작의 스웨덴보리회 창설
1784 생제르맹의 사망(으로 추정)
1785 칼리오스트로의 멤피스회 창설, 목걸이 사건, 바바리아의 일루미나티의 탄압
1786 미라보가 바바리아의 일루미나티회원이 되다.
1789 프랑스 혁명 시작
1798 칼리오스트로가 로마에서 체포
1804 미국,찰스턴에 고대 스코틀랜드회 설립
1835 카발라 학자인 외팅거가 생제르맹을 파리에서 목격했다고 주장
1865 '영국 장미십자회'의 창립
1868 바쿠닌의 '국제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립
1875 '신지학회' 창립
1879 미국에 '장미십자회' 창립
1884 교황 레오 13세의 프리메이슨 공격
1891 파푸스의 '신비주의의 방법' 출간
1898 알레이스터 크로울리가 '황금의 새벽'에 입단, '텔레마회' 창립
1907 예이츠의 '스텔라 마투티나' 입단
1912 애니 베산트의 '장미십자의 성당회'를 런던에 조직
1918 독일에 '툴레회' 성립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영화도 있잖아요 헤븐오브킹덤이던가? 십자군전쟁 의 배경.. 아무튼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