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다녀온 봉화마을을 인터넷 뉴스로 본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공약대로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에 봉화마을을 찾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정치판에서 익은 얼굴들이 참 많다. 봉화마을 골짝을 꽉 메운 인파와 자꾸만 눈물을 훔치는 미망인의 모습과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 현상으로 머리를 삭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모습이 자주 화면을 채운다.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부인을 더 닮은 외모지만 키가 참 크다고 느꼈다. 영상 속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환한 미소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있는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진다. '좋다. 참 좋다.' 나도 박수를 친다.
또 다른 뉴스는 재판에 회부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최한 모습이다. 화면에 비치는 전직 두 대통령의 모습이 참 다르다. 한 사람은 환하고 활기찬 얼굴이고 한 사람은 늘 우울하고 습한 얼굴이다. 여자와 남자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볼 때 환한 얼굴은 희망을 끌어당기고 우울한 얼굴은 절망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나는 웃는 얼굴이 좋다. 우울하고 심각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싫다. 다 풀어버린 얼굴, 작가 임레께르테스처럼 언제 가스실로 직행 당할지 모르는 아우츠비츠의 살인 공장에서도 화단에 핀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행복해 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함이 좋다.
어머님은 척추 시술을 하고 입원을 했다. 하루만 입원하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의사 말에 남편은 어머님 옆에서 새우잠을 잤지만 어머님은 퇴원을 원하지 않으셨다. 병원에 좀 더 있겠다고 했단다. 두 노인의 시소게임은 막을 내렸을까. 두 노인에게 나도 손 들어버렸다. 아잔브라흐마 스님의 말처럼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할만큼 했다는 자의식에 힘이 실린다. 어차피 오래 살거나 일찍 죽거나 운명은 자신의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 <운명이다>처럼. 도종환 시인이 낭독하는 <운명>이라는 시가 봉화마을의 군중 사이로 퍼져가는 것을 본다.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이승에 남은 사람이 저승으로 떠난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을 정도만 살다 갔으면 좋겠다.
어머님이 병원에 가신 후에는 아침마다 주야장창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뚝 그쳤다. 길어봤자 하루나 이틀일 게다. 노인의 마음 상태나 의미를 타진하지 말자. 또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리겠지만 노인이 삐진다고 꼬리 내릴 형편이 아니다. 무심이 천심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농협에 갔더니 아버님이 자전거를 타고 왔다 가셨단다. 그 연세에 어쩜 그리도 정정하시냐고 직원이 내게 묻는다. 나는 오히려 홀가분하고 마음 편하다. 혼자 잘 지내시면서 왜 둘이면 서로 질질 짜시는지. 노인 심리가 의존적이라 그렇다지만. 나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달아버렸으니 따따부따 할 필요도 없다. 슬그머니 고사리 밭이 궁금해지지만 기운이 딸려 못 가겠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우선이다. 타인을 위하는 것 같아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한 것이 보통 사람 속이다.
봉화마을의 추도식이 끝났다. 헌화를 하러 떠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유가족, 정재계에서 참석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화면을 채운다. <강물처럼> 노래가 퍼진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들을 수록 좋다. 오랜만에 애국가를 따라 불러보았다. 4절까지 막힘없이 불렀던 기억이 있지만 다 잊어버렸다. 세월은 내가 걸어온 길이나 내가 알던 것들조차 지워가는데 사람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기억나는 사람으로 살다 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말처럼 운명을 받아들인 죽음인지 모르겠다. 온갖 가십거리에 등장하며 초라하게 늙어가는 전직 대통령보다 얼마나 멋진 마지막이었던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역시 그 용기조차 대인이다. 나도 추하게 늙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추하게 늙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