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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바위 정면 현장사진입니다. 병풍바위 측면사진입니다. 135년 만에 병풍바위 앞에서 가랑잎을 헤치고 박주잔을 올렸음 135년 만에 찾은 병풍바위 아래 500여명의 동학인들이 집결하여 야영한 영웅들의 골짜기 한반도에서 최초로 성공한 동학혁명의 영웅들이 포위되었던 일월산 상죽현 31번 국도변에서 135년전 1871년4월29일(음력 3월10일)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교조의 제삿날이었고, 이날 전국의 동학인들 500여명이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 아래 집결하여 한반도에서 최초로 동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외세가 침략하기 전에 우리민족 스스로 한반도 최초로 시민혁명에 성공한 후에 77명이 붙잡히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최초의 동학혁명 집결지인 병풍바위가 지금은 숲속에 내동댕이 쳐진 역사의 현장이 되어 박주잔이라도 올려 그날의 원혼을 달래려고 135년 만에 서울에서 천도교 동학학회 한광석 후원회장님, 동학학회 운영위원 임순화 선생님, 숭의여대 배영기 교수님을 모시고, '최초의 동학혁명' 저서의 필자가 안내하여 현장을 찾았습니다. 당시 역사문서에는 경상도 "영해부 서면 우정동 병암(寧海府 西面 雨井洞 屛巖)"이라는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은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2리 병풍바위"로서 현장은 변함이 없고 그 아래 집결지(병풍바위 아래 영웅들이 야영한 골짜기)는 숲으로 변해 있습니다. 135년전 병풍바위를 향하여 한강 이남의 각도별로 동학이 포교된 지역에서 약 500여명의 동학인들이 머리에 유건을 쓰고 청포를 입고 모여들었고, 바로 몇 십미터 아래에는 당시 수운교조가 임명한 초대 영해접주 박하선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동학의 초대접주 박하선은 영해관아의 탄압으로 죽고, 삼년상 중인 상제 박영관(맏 아들)이 모임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시 동학의 제2대 해월 최시형교주를 비롯하여 모여든 동학인들은 도록에 서명하고, 중군, 별무사, 집사 등 동학농군의 임무부여 첩지도 나누어 주어 이때부터 최초로 동학농군이 조직되었던 것이 당시 안핵사 박제관이 정부에 보고한 문초기록에서 명백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후 늦게까지 형제봉에 올라 소를 잡아 엄숙한 천제를 지냈고, 하늘에 고하는 고축문을 낭독하고, 동학인이 바라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찾는 인내천과 능력에 따라 평등을 이룩하려는 무극대도의 후천개벽 동학의 이상 세계가 열리기를 축원하였습니다. 제천행사를 끝낸 동학인들은 죽창과 몽둥이, 횃불을 들고, 2,3시간을 단숨에 걸어 영해관아로 향했고, 당시 강원도 땅인 울진쪽 150여명은 바로 영해읍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탐관오리로 알려지고 동학탄압을 일삼던 영해부사(지금의 시장)의 죄를 물은 후 김낙균이 처단하고, 혁명대열에 포를 쏘아 살상케한 수석포교(지금 경찰서장)도 처단했으며, 관아를 장악하였습니다. 다음 날 영해읍내 5개동 빈곤한 두민들에게 공전을 나누어 주어 혁명에 성공한 후 자진 철수했습니다. 이 때 외세에 영향받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근대적 시민혁명을 성공한 것은 불란서혁명과 비견한 자유 민주주의 이념과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동학정신의 이상을 실현한 후에 자진철수한 것입니다. 이날 최초의 동학혁명에 참가한 영웅들은 지금의 영양군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으로 철수하였으나 포위된 관군에 붙잡히어 효수형, 물고(옥사), 교전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이 동학인들로서 77명의 명단이 역사문서에 역적 또는 원사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해월교주와 이필제 강사원 김낙균 등 혁명의 지도부는 일월산에서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금의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울연전으로 탈출하여 단양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 때 영웅 이필제는 동학의 지도부 요인들을 구출하여 자신의 친구인 단양 정기현가로 찾아가 정석현의 집에 은신하여 동학을 재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영웅 이필제는 수운교조 재세시에 동학접주로서 수운교조를 가둔 수레가 과천에서 대구로 되돌아 가던 중 문경새제에서 도인수백명을 인솔해서 수운을 구출하려 했으나 수운이 육신은 짧고 성령은 영원무궁하니 이번 행차는 천명이니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암상설법을 하여 이필제가 감복한 바가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문무를 겸비한 영웅인 것은 해월과의 대화내용에도 잘 나타나는데 단군과 민족의 역사인식이 투철했습니다. 그는 해월과 동학지도부를 구출하여 보호하고 관의 촉수를 피하기 위해서 그 해 8월 문경의 유생들 모임에 뛰어나가 주모자로 붙잡힘으로서 역적의 죄를 짊어지고 간 희생적이고 참다운 동학인으로서 1871년 12월23일 지금의 서울시청뒤 프레스쎈타가 있는 군기시터에서 능지처사를 당했습니다. 동학혁명의 영웅 이필제가 동학지도부를 구출하여 보호한 점과 동학지도부에 다가오는 관의 촉수를 피하기 위해 그해 8월 문경에서 유생들 모임에 뛰어나가 허술하게 붙잡히어 민란의 죄를 안고 능지처사되었지만 이러한 동학의 영웅이 있었기 때문에 동학지도부는 온전했던 것입니다. 최초의 동학혁명을 지휘했던 제2대 해월(최시형)교주는 23년이 지난 1894년(갑오년) 4월2일에도 갑오동학혁명에 기포령을 발하였습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만석보라는 봇싸움에서 발단한 전라도 고부의 영웅 전봉준접주의 탄생이 있었고, 그 후 기미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의 영웅 제3대교주 손병희선생과 황해도접주 김구주석의 상해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생존을 지켜 오늘의 조국을 보존할 수 있게 한 큰 별을 탄생시켰습니다.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은 한강이남 전국의 동학이 포교된 지역 각도에서 우정동 병풍바위에 모여들어 성공한 후 잡히어 몸바친 동학인들은 100년안에 이들이 갈망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선각자들이고 영웅들이지요. 역사문서에 기록된 우정동 병풍바위는 우리 민족이 근대 불평등시대를 더 빨리 마감하고, 현대 평등사회를 성취하였던 혁명의 성지입니다. 순한문으로 기록된 문서를 한글로 풀어쓴 이들 영웅들이 남긴 이야기는 "최초의 동학혁명- 병풍바위의 영웅들"이라는 책에 진상이 나와 있습니다.
최초의 동학혁명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 1871년도에 잡혀서 33명은 효수형을 당하고 12명은 물고(옥사)된 것이 왕조실록인 고종의 승정원일기(1871년 6월23일 및 12월23일 자)와 안핵사 박재관의 보고문서에 확인되고 있고, 그 후에 잡혀서 죽임을 당했거나 교전으로 죽은 사람이 32명이 확인되는데 이는 1879년도에 동학측이 기록으로 남긴 도원기서 및 1915년에 간행된 시천교종역사에 기록된 것으로서 정부 보관문서(구 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 간행)에 있는 진실된 역사문서입니다. 이 사실은 어느 누구도 왜곡이나 부인할 수 없는 불멸의 영웅들입니다. 영해부 21명 효수형 10명 : 권두석, 권석중, 권영화, 박기준, 박영각, 박영수, 박한용, 박한태, 신화범, 한상엽, 물고자 5명 : 권재일, 박영관, 박종대, 신택순, 장선이, 교전사망 8명 : 박사헌형제, 권일원부자, 박양언, 박지동, 권덕일, 김씨(이름 모름) (박사헌 형제는 박영관 박영각 동일인) 영덕현 6명 효수형 1명 : 임영조, 교형 1명 : 강사원(1885년) 교전사망 4명 : 임만조, 구일선, 강문, 김기호, 영양현 9명 효수형 4명 : 이군협, 이재관, 최기호, 최준이, 물고자 3명 : 신성득, 우대교, 이정학, 교전사망 1명 : 김용운, 교형1명 : 최시형(1898년) 진보현 1명, 효수형 : 정창학 울진평해 10명 (당시 강원도) 효수형 5명 : 남기환, 손경석, 전인철, 전정환, 황억대, 물고자 2명 : 김귀철, 남두병, 자진1명 : 전영규, 교전사망 2명 : 남기상, 김씨(이름 모름) (전동규는 전인철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큼) 경주부 14명 효수형 7명 : 김덕창, 김창복, 박명관, 이기수, 이병권, 임욱이, 허성언, 교전사망 7명 : 이기섭, 이사인, 김만춘, 정치선, 김씨(이름모름) 숙질, 김경화의 백형, 안동부 2명, 효수형 : 김천석, 장성진, 청하 3명, 교전사망 : 이국필 형제, 안씨(이름모름) 흥해 2명, 교전사망 : 박황언, 백씨(이름모름) 연일 2명, 교전사망 : 박씨, 천씨 (2명 이름모름), 장기 1명, 입성시 사망 : 성씨(이름모름) 밀양 1명, 효수형 : 김일언, 영산(지금은 경남) 1명, 물고자 : 송지, 충청노성 1명, 효수형 : 박춘집, 충청홍주 1명, 능지처사 : 이필제,(1871년 12월) 전라남원 1명, 물고자 : 하만석, 서울 1명, 교형 : 김낙균(년도미상), 영해부 6명 : 권기상, 권양일, 김만근, 박순종, 박유태, 박응춘, 영양현 7명 : 곽진봉, 김명북, 안대제, 안소득, 안평해, 이도천, 이성중, 평해현 3명 : 전세규, 전제옥, 전종이, 칠원(경남) 2명 : 설영구, 윤준식, 안동 1명 : 정계문, 상주 1명 : 김천일, 울산 1명 : 서군직, 영해23명 : 박춘서, 이수용, 백갑이, 김소천, 김여수, 박군행, 박군서, 권일언, 권공필, 권이목, 이인언, 전윤오, 김경화(金慶和), 전덕원, 김계익, 김양언, 임근조, 임인조, 유성원, 전성문, 김용여, 박영목, 김성길, 영덕3명 : 구계원, 김씨성을 가진 두명, 영양11명 : 정치겸, 정학이, 최갑대, 초대접주 황재민(黃在民), 김대복, 김치국, 김윤백, 백현원, 김성진, 신성화, 배감천, 경주3명 : 최보관, 이원대, 김경화(金景和), 안동5명 : 김화춘, 김문옥, 김진경, 황재명, 김영순, 청하1명 : 이직보(李直甫 본명 이도한,李道漢), 흥해2명 : 김경철, 손흥준, 영일1명 : 이춘대(李春大), 울산2명 : 초대접주 서군효(徐君孝), 전윤경, 평해5명 : 전윤환, 황윤구, 전윤조, 전한규, 전서규, 상주7명 : 김경화(金敬和), 김형노, 김오실, 김순측, 이군강, 임익서, 권성옥, 대구3명 : 김성백, 강기, 정용서, Copyright 만든사람 : ID goldyong 문의시 Email goldyong@naver.com"> goldyong@naver.com 마지막 고친 날짜 : 2006. 6. 1. 연락처 전화번호 : (사)02-3707-9223 (자)011-264-7380 |
첫댓글 정말 귀한 자료네요 자랑스런 내고향 정말 가슴뿌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