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사임당의 생애 / 율곡 이이
나의 어머니는 진사이신 신공申公의 둘째 따님이시다. 어렸을 적에 벌써 경전에 통달했고,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글씨도 잘 쓰셨다. 바느질이나 수놓는 일에까지 재주가 뛰어나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천성이 온순 아담하시고, 지조가 굳고 정결하셨다. 몸가짐이 안존했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치밀했으며, 말수는 적고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우셨다. 또 스스로 겸손하게 하시니 외할아버지 신공께서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셨다. 어머님은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님께서 병환이 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역력하다가 병환이 나으시고 나서야 얼굴이 펴지셨다.
뒷날 어머님이 시집을 가게 되자,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버님께 “나에게 딸이 많은데 다른 딸들은 시집을 가도 그렇게 서운하지 않았지만 자네 처의 경우는 참으로 내 곁을 떠나게 하고 싶지 않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혼인하신 지 오래지 않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니, 삼년상을 마치신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신부의 예로써 시어머니인 홍씨 할머님을 뵈었다.
어머님은 시댁에서 경솔하고 분별없는 언행을 삼가, 조신하게 처신하셨다. 어느 날 집안 일가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데 여자들이 모두 모여 담소한 일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으니, 시어머님께서 “새아기는 왜 말이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어머니께서는 꿇어앉아 “저는 여자이기 때문에 문밖에 나가보지 않아서 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다.
훗날 어머님은 강릉으로 근친을 가셨다가 돌아올 때, 외할머니와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셨다. 일행이 대관령을 반쯤 올라왔을 때, 친정 마을인 북평을 바라보며 어머님을 그리는 정을 못 이겨 수레를 멈추고 한참 있다가 처연히 눈물을 흘리며 시 한 수 지으셨다.
늙으신 어머님 강릉에 계시는데
서울을 향해 홀로가는 이 마음.
때때로 고개 돌려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이는 곳에 저녁 산만 푸르네.
서울에 돌아온 뒤에 수진방에서 살았는데, 그때 당신의 시어머님이 연로하여 집안 일을 돌볼 수 없으므로, 어머님이 맏며느리로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성품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으시니,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님께서는 살림을 규모있게 하여 웃어른을 봉양하고 아랫사람을 보살필 수 있었다. 집안 살림살이를 할 때 모든 일을 혼자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시어머님께 말씀드린 뒤에 하셨다. 시어머님 앞에서는 일찍이 계집종들도 꾸짖은 일이 없으셨다.
말은 항상 온화했고 얼굴빛은 항상 화순했으며, 아버님께서 어쩌다 실수를 하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써 간하여 고치게 하셨고, 자녀들이 잘못이 있으면 엄하게 경계하여 타이르셨다. 또 가까이 거느리고 있는 아랫것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꾸짖으시니, 사내종이나 계집종들이 모두 공경하고 마음으로 받들어 모셔 잘 보이려고 했다.
어머님은 평소에 늘 친정인 강릉을 그리워하여 깊은 밤 고요할 때면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기도 하시고, 때로는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셨다. 어느 날 친척 어른이신 심공沈公의 몸종이 와서 거문고를 탄 일이 있었는데, 어머님께서는 그 거문고 소리를 들으시고 눈물을 흘리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움을 품은 사람을 더욱 애타게 만든다.”고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아무도 그 뜻을 깨치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님께서 일찍이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시구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다.
밤마다 달을 보며 비나니
생전에 한 번 더 뵙게 해 주소서.
아마도 어머님의 효심은 하늘에서 내신 것인가 한다.
어머님은 갑자년 겨울 10월 29일에 강릉에서 태어나서 임오년에 아버님과 혼인하시고, 3년 뒤인 갑신년에 서울 시집으로 오셨다. 그 뒤로 때로는 강릉에 돌아가 계시기도 했고, 때로는 봉평에 사시기도 했으며 신축년에는 서울로 다시 돌아오셨다. 경술년 여름에 아버지께서 수운판관에 임명되시고, 이듬해인 신해년 봄에 삼청동 셋집으로 이사하셨다. 그해 여름에 아버님이 나라 물자를 운반하는 일로 관서 지방에 가시게 되었는데 두 아들이 모시고 갔다. 이때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이 계신 여관으로 편지를 보내셨다.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셨다는데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지금 아무도 없다.
그해 5월에 일을 마치고 아버님께서 배편으로 서울로 올라오시는데,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님께서 병환이 나셨다. 병환이 나신 지 겨우 2, 3일이 지나자 여러 자식들에게 “내가 아무래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에 평상시대로 편안하게 잠자리에 드셨다. 자식들은 병환이 좀 나으신 줄로 생각했는데, 17일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그때가 향년 48세 셨다.
그날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서강(西江)에 도착했는데, 행장 속에 있던 놋그릇이 모두 붉게 변해 있었다. 모두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어머님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평소에 글씨도 뛰어나게 잘 쓰시고 그림도 잘 그리셔서, 일곱 살 때부터 벌써 안견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도를 그리시니 아주 훌륭했다. 특히 포도그림은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어머님께서 그리신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 원제: 선비행장先妣行狀
- 行狀: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을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