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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사투리가 지배하는 연변에서 어딘가 말씨도 민속도 우리 연변과는 조금은 다른 이색적인 마을이 있다. 바로 도문시 량수진 정암촌이다. 지난 5월 26일 연변일보 취재팀 일행은 이 이색적인 마을을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취재팀이 당도하고보니 마을은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조용하였다. 촌의 영옥서기가 취재팀을 맞이하였는데 머리에 흰댕기가 꽂혀있었다. 마을에서 두집이나 이날 상을 치룬다고 하였다. 몇마디 주고받았지만 대뜸 우리 순수 연변말투와는 다른 느낌이 와닿았다. 영옥서기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상가집에 갔기에 마을에 남아있는 촌민이 아주 적다면서 68세의 안승만로인을 모셔왔다. 이들의 말씨는 순수 연변사투리도, 그렇다고 순수 충청도 말씨도 아닌 충청도 사투리와 연변사투리가 뒤섞인 〈혼합형〉이라고나 할가. 정암촌은 68년전인 1938년 한국 충청북도에서 이주해온 이민들의 개척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당시 일제통치하에 있었던 조선, 북간도에 가면 땅도 주고 집도 준다는 일제의 꼬임수에 넘어가 그들이 충청북도에서 이주민을 모집할 때 보은, 옥천과 충주에서 모인 180세대가 이민행렬에 가담하였던것이다. 이민 온 이듬해인 1939년 정암촌에서 태여났다는 안승만로인(68세)에 따르면 180세대중 100세대는 왕청현 하마탕으로 가고 80세대가 지금의 량수진 석두촌에 안치되였었는데 석두촌은 당시 경작지가 적은 등 불리한 점이 있어 다시 왕청현 라자구에 안치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라자구는 물이 좋지 못하여 당지인들의 수토병이 심했다고 한다. 하여 다시 지금의 정암촌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되였던것이다. 고향에서 <만주의 감자는 사발만큼 크고 옥수수는 팔뚝만하다>는 귀맛당기는 말에 솔깃해져 두만강을 건넜는데 정작 오고보니 듣던 말과는 달랐다. 그래서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가나오나 거칠것 하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남았다고 한다. 1938년 음력 정월에 이주하여 첫해에는 움막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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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촌은 마을 북쪽에 정자같은 둥그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정암산의 유래를 따서 정암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정암산에는 발해시기의 중요한 군사요새로 사용되였을것으로 짐작되는 정암산성이 있고 마을안에도 같은 시기에 축조되였을것으로 보이는170센치메터가량 높이의 돌로 쌓은 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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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길림성재정지원시범촌건설의 혜택을 입어 현재 107세대, 500여명 인구가 살고있는 정암촌에는 산뜻하고 아담한 새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마을 서쪽에 커다란 가스땅크가 있었는데 정암촌 촌민들은 대부분 늪가스를 사용하고있다. 마을에는 병원, 로인활동실, 촌판공실 등 공공시설들이 구전히 갖추어져있었다. 30여명되는 마을 학생들은 통근차를 타고 량수진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있고 또30여명의 젊은이들이 해외나 외지에 돈 벌러 나갔다고 한다. 중국대하무역유한주식회사에서2000만원을 투자할 계획으로 세운 송원록장이 현재 정암촌 뒤산에 자리잡고있는데 이미 1000만원이 투자된 상태, 아직 사육장건설이 채 완공되지 않아 1214마리의 사슴들이 다른 곳의 사육장들에서 흩어져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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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안으로 2000마리로 늘릴 계획, 가공된 록용, 록태는 전부 한국으로 수출할것이며 이로써 농민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게 되며 농민들의 년간 수입은 만원으로 될것이라고 량수진 서기겸 진장인 렴창송씨는 전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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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은 마을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김씨성을 가진 민가에 들어가보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금방 산에서 뜯어온 기름진 고사리를 손질하고있었다. 집에 들어서면서 취재팀 일행은 짐짓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자그마한 주방과 창고가 달린50여평방메터되는 아담한 집에는 일본제 텔레비죤이며 컴퓨터, 청소기, 전자렌지, 가스렌지 등 전자제품들이 다 갖추어져 있었고 방바닥에는 이쁜 주단이 펼쳐져있었으며 술찬장에는 얼핏 봐도 10개는 넘을상싶은 양주들이 줄느런히 얹혀져있었다. 자식 둘이 모두 연해도시에서 독립하고있고 김씨부부 모두 농사를 짓고있다고 한다. 농가라는 감이 전혀 없이 짜장 도시에 사는 시민집 못지 않은 풍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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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촌에는 충청도 사투리와 충청도 웃다리 농악 등이 지금껏 보존되고있다. 1960년대 정암촌에서 공청단서기직을 맡고있었다는 안승만로인은 그때는 현에서 운동대회나 민속활동을 할 때면 정암촌 촌민들의 농악놀이가 늘 한마당을 차지하였었는데 <문화대혁명>시기 농악놀이가 사라졌다가 개혁개방이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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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촌이 충청북도마을이라고 지난세기 90년대부터 한국 충청북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에서 각종 농악기들을 지원해주고 또 한국인들이 직접 농악놀이를 배워주고 가르쳐주어 지금 로인들은 물론 많은 촌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는 기본적인 농악놀이는 다 할수 있다.
지금도 보름같은 명절때면 로인활동실이나 공중장소에 모여 옛 《청주아리랑》을 부른다.
시아비지 죽으면 좋다 했더니 빨래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기로 날 넘겨주소
시어머니 죽으면 좋다 했더니 보리방아 찔 때마다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아버지 골난데는 술받아 주고 시어머니 골난데는 이 잡아주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글/사진 최호 최국철 강정숙 허성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