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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토) 제29일차 사모스 루트를 택하다
6시에 일어났다. 불이 켜졌다. 짐 싸기에 용이했다. 미숫가루를 먹은 뒤 5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사리아로 간다. 어제 공지에서 ‘사리아로 가는 길엔 산실 루트와 좀 더 긴 사모스 루트가 있다. 산실 루트는 19킬로로 짧지만 경사도가 약간 급하다. 사모스 루트는 길지만 베네딕토 수도회의 왕립 수도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중 25킬로 사모스 코스를 가기로 했다. 마을 출구에서 사모스로 향하는 왼쪽 길을 택했다. 가다가 카페를 만났다. 문 열기를 기다려 토스타에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한참을 걸으니 사모라의 베네딕토 수도회의 왕립 수도원이 저 멀리서 보였다. 당겨 찍었다.
마을에 들어와 가까이서 수도원 사진을 찍었다. 박 선생님이 안 보였다. 마침 윤 이사가 바르에서 나오면서 박 선생님이 이 바르에 들어갔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알았다고 표시하면서 수도원의 탑 사진을 좀 더 가까이 찍으려고 수도원에 다가섰다.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다른 문을 찾다가 하는 수 없이 돌아왔다. 박 선생님은 바르에서 주문을 한 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를 마신 후 동전으로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찾으려니 지갑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내 겉옷이 침대에서 떨어져 있어 집어 입은 적이 있었다. 그때 지갑을 빠뜨린 것임에 틀림없다. 지갑 안에는 몇 달러와 몇 개의 동전이 들어 있었다. 중요한 신분증도 카드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냥 잃어버린 셈 쳤다. 잃어버린 내용물보다 잃어버린 사실 자체에 아쉬움이 컸다. 바르에서 나왔다. 박 선생님이 수도원에 가보자고 하여 다시 수도회에 갔다. 이번에는 수도회 건물을 빙 돌았다. 앞에서 본 모습과 다르게 새롭게 보인 풍경이 있었다. 수로가 있었다. 그리고 안내판에서 왜 사모스가 약초 마을인지를 알게 되었다.
휴대폰에 로밍 기간이 실효되었다고 떴다. 모처럼 출국 전에 마음먹고 로밍하고 왔다. 그런데 이곳이 고산 지대이고 외진 곳이어서 통신사 연결이 잘 안 되었다. 별 사용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한 달의 기한이 지난 것이었다. 통신사에 배신감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정을 잘 모르고 괜히 로밍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장 길과 숲 속 길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125킬로 남았다. 두 루트의 합류 지점인 아기이다를 지났다. 윤 이사가 차를 세우더니 우리를 기다렸다. 잃어버린 것이 없느냐고 물어 내가 지갑이라고 했다. 웃으며 나에게 지갑을 건네주었다. 분명 아까 윤 이사를 만났을 때 지갑 이야기가 없었다. 그때는 윤 이사도 몰랐던 것이다. 알베르게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윤 이사는 혹 여권 분실인가 해서 다시 차를 몰고 갔다 왔다고 했다. 내가 큰 내용물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찾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리고 윤 이사에게 미안했고 고마웠다. 바로 사례 표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윤 이사가 거절했고 박동문 선생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1시 반에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긴 코스를 탔기에 숙소 도착 시간이 늦었다. 2층 침대를 사용했다. 점심은 사과, 마차 그리고 일행 동료가 준 고기 몇 점으로 때웠다.
근처에 유명하다는 문어 요리점에 갔다. 레스토랑에 손님으로 가득 찼다. 좀 기다렸다가 요리를 주문했다. 상황을 보아서 한 접시만 시켰다. 빵과 맥주는 별도 주문이었다. 돈을 내야 했다. 그다지 맛도 없는데 사람들은 별미라고 먹고 있었다. 22유로가 나왔다. 누구나 그럴 것인데 먹을 것도 없고 비싸고 맛없는 것이 제일 싫다. 딱 그 경우였다. 그 다음부터 식당에서 문어 요리는 시키지 않기로 했다. 문어 요리 한 접시만 시킨 것은 잘한 일이라고 박 선생님도 그리 말했다.
식사 후 우리는 마을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산타마리아 교회를 지났다. 그리고 안내판에 소개된 사리아 명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수도원에는 문이 닫혀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오늘 지나는 길이 내일 가는 까미노 길이었다. 사전 답사를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국음식을 판다는 문구가 한글로 쓰인 가게에 들렀다. 신라면을 팔고 있었다. 한 개에 무려 2.5유로나 했다. 4개를 구입했다. 다시 슈퍼에 들러 간식으로 먹을 사과 4개를 샀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카톡을 하고 동영상도 만들었다. 건강걷기 앱에서 통신비 할인 신청을 했다. 짐 정리를 하다가 내 모자가 없어졌음을 발견했다. 혹시 내가 그 식당에서 모자를 놓고 온 것이 아닌가? 휴대폰 사진에서 나를 찍은 사진을 보았다. 분명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를 내가 벗은 적이 없는데 이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가 뒤로 넘겨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모자를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았던 것이다. 내 스스로 놀랐다. 나는 내 스스로 명료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기억력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박 선생님이 나에게 건네준 쪽지도 내가 받지 않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긴 순례 길에 정신 줄을 놓았나. 이를 어찌할 것인가.
저녁은 오늘 사온 신라면으로 때웠다. 라면은 유럽 수출용이었다. 한국에서 먹던 라면 맛은 아니었다. 약간 덜 맵고 된장 맛이 났다. 일행인 박미학 씨로부터 계란 하나를 얻었다. 내일 간식으로 먹으려고 챙겨 두었다. 오늘 내 생일이었다. 집에서 누구도 내 생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안사람에게서도 말이 없었다. 음력으로 내 생일은 석탄일 전날이었다. 안사람은 절에서 꽃꽂이 진두지휘하느라고 경황이 없었고 힘든 하루였다고 했다. 나 또한 주위 누구에게도 내 생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하루가 지나갔다.
5월 12일(일) 제30일차 순례길 100km를 넘다
6시에 일어났다. 미숫가루를 먹었다. 그간 아침에 잘 먹었는데 이제 떨어졌다. 카톡 작업을 한 뒤 출발했다. 오늘은 뽀르또마린으로 간다. 22.5킬로다. 7시 5분 전에 출발했다. 아침인데도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가 상당히 많았다. 어제도 둘러보았지만 사리아는 큰 도시였다. 순례자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많은 곳이었다. 참고로 여기서 산티아고까지 거리가 100킬로 남짓하다. 생장에서 출발하지 않고 여기서 출발하여 걸어도 순례증을 준다고 했다. 단 걸은 것을 인증받기 위해 적어도 세요는 매일 두 개 이상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생장부터 걸어왔기에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어제 지나던 길로 갔다. 바르에 들러 크로와상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이내 도심을 지나 숲길로 지나는 다리를 건넜다.
숲길은 안개가 짙게 끼었다. 철로 옆으로 난 까미노 길을 지나기도 했다. 9시가 지나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그 나름 운치가 있어 좋았다. 10시 지나서야 햇살이 나기 시작했다.
도중에 100킬로 표지석을 만났다. 그간 우리가 700킬로를 걸어왔고 이제 100킬로만 걸어가면 되었다. 뜻깊은 이정표가 아닐 수 없었다. 기념으로라도 인증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 준 뒤 내 사진도 찍어 달라고 했다. 약간 구부정하게 서있는 자세로 찍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사진을 찍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씩씩하게 여기까지 왔다는 표시를 하기 위해 허리를 곧추 세운 상태에서 다시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우뜨라스 마을 상점을 들렀다. 이 가게는 신라면, 김치, 박카스 등 한국 식품을 파는 가게였다. 이 식당에서 라면으로 식사하는 일행도 있었다. 나는 한국 상품에 대한 사진만 찍고 나왔다. 다 왔다.
뽀르또마린에 들어가기 전에 큰 다리가 있다. 그 아래로 미뇨강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 이 마을은 지금 강물이 흐르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1962년에 댐을 건설하면서 지금 장소로 옮겼다고 했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마을로 들어가는 높은 계단이 있다. 그리고 웅장한 입구가 있다.
다시 걸어 올라가니 바로 우리가 묵을 호텔이 보였다. 오늘은 남녀가 호텔 분산 투숙한다. 여자가 묵을 호텔을 다녀온 분이 여기 호텔이 훨씬 낫다고 했다. 윤 이사도 그간 남자가 여자에게 양보했으니 오늘 시설 좋은 호텔에 배정해 드렸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이 되길 기다려 1시에 투숙했다. 짐 정리를 한 뒤 점심 식사하러 나왔다.
강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유리창으로 내보인 강의 풍치가 좋았다. 정식 메뉴를 시켰다. 15유로였다. 수프와 돼지고기와 타르타가 나왔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지만 잘 나왔다. 호텔에 돌아와서 손빨래를 했다. 수건, 양말, 팬티뿐만 아니라 상의도 세탁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해 빨래가 아주 잘 말랐다. 저녁도 되기 전에 거두었다. 휴식 시간에 카톡 작업을 했다. 와이파이가 잘 돼 11일자 동영상을 게시했다. 12일자 동영상도 만들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사하러 나섰다. 또 그 레스토랑에 갔다. 그런데 만원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주변 식당을 찾다가 없어 바르로 들어갔다. 10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박 선생님은 메인 요리로 생선을, 나는 치킨을 시켰다. 역시 식당에 따라, 가격에 따라 맛이 다르다. 맛을 별반 모르겠다. 후식으로 나오는 타르타는 먹지 않고 내일 간식으로 먹으려고 싸가지고 나왔다.
호텔로 돌아와 쉬었다. 내일 알람을 6시로 조정했다. 내일 7시에 식사할 때 짐을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미리 캐리어를 정리해 두고 잤다.
5월 13일(월) 제31일차 운해를 보다
6시 20분에 일어나 캐리어부터 옮겨 놓았다. 그리고 7시에 식사했다. 사과와 요구르트를 챙겼다. 그리고 7시 반에 출발했다. 안개가 짙게 끼었다. 그런 풍경도 운치가 있었다. 오늘은 빨라스 데이로 간다. 25.5 킬로다.
안개 속 숲길을 한동안 걸었다. 두 갈래의 방향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박 선생님이 어느 길을 선택할지 몰라 기다렸다가 같이 갔다. 이제 올라가는 길이었다. 언덕을 한참 올랐다. 그리고 언덕 아래 굉장한 풍경을 보았다. 바로 운해였다. 그간 산행을 여러 차례 했지만 이런 운해는 처음 보았다. 저 멀리 산들이 작은 섬처럼 보였다. 언덕을 조금 올라왔을 뿐인데 우리가 이렇게 높이 올라왔는가. 그간 우리가 고산 지대를 걸었음을 실감했다. 연신 사진을 찍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장면도 찍었다. 다시 숲길을 지나고 뙤약볕 길을 걸었다.
1시 반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10유로를 냈다. 1층 침대로 자리잡았다. 우선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인근의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돼지고기는 10유로와 소고기 9유로였다. 여기는 돼지고기가 더 비싼 음식이다. 그간 죽 걸어오면서 소 사육장은 많이 보았지만 돼지를 사육하는 농가를 보지 못했다. 그리 돼지를 사육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와이파이가 잘 터졌다. 카톡 작업도 하고 메모도 한동안 했다. 12일자 동영상을 전송했다. 오늘 날짜의 동영상도 만들었다. 시간이 늦어 안사람에게만 전송했다. 저녁이 되어 다시 그 식당에 갔다. 윤 이사가 추천한 철판요리를 먹겠다는 생각으로 갔다. 메뉴판을 보니 두 종류가 있었다. 철판요리와 석판요리가 있었다. 철판요리라는 말을 들었기에 철판요리를 주문했다. 나는 철판요리가 철판 위에 직접 구워 먹는 요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릴에 구워 나오는 요리였다. 석판요리로 주문했어야 했다. 하지만 철판요리도 양이 굉장히 많고 맛도 좋았다. 고기 일부를 잘라 석판요리를 주문한 일행에게 드렸다. 그분도 석판요리 고기를 맛보라고 나에게 갖다 주었다. 두 개의 맛을 비교해 본 결과 철판요리가 더 낫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 선택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잠시 숙소 밖 벤치에서 쉬었다. 쉬는 김에 슈퍼에 가서 콜라를 사왔다. 대화를 나눈 뒤 숙소로 들어갔다. 박미학 씨로부터 오늘도 계란 하나를 얻었다.
5월 14일(월) 제32일차 개인 세요를 받다
5시에 잠을 깼다. 오늘은 아르수아로 간다. 30킬로다. 만만치 않은 거리여서 파스를 어깨에 부착하기로 했다. 6시 10분에 출발했다. 너무 일행을 믿었는가. 오늘 갈 길에 대해서 묻지 않고 나왔다. 도심에서는 까미노 표지가 없는 데가 많다. 방향을 몰라 헤맸다. 행인도 없어 지나가는 택시 기사에게 물어 방향을 찾았다. 까미노 표지를 발견했다.
박 선생님이 속이 안 좋으신지 먼저 가라고 했다. 혼자 걸어가다가 바르에서 기다렸다. 그곳에서 어떤 분이 세요를 찍어 주고 있었다. 나도 세요를 받았다. 세요를 찍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기부제였다. 여기서는 세요를 이런 식으로도 활용한다. 1유로를 기부했다.
오늘 긴 거리인데다가 더운 날씨였다. 다음 카페에서는 콜라를 주문했다. 여기서는 바르에서 콜라를 주문하면 잔에 얼음 몇 덩이를 넣고 레몬 한 조각을 넣어 준다. 콜라를 마신 뒤 그 잔에 가져온 봉지 커피를 털어 넣었다. 아이스커피를 만들어 마신 뒤 출발했다. 도중에 까미노 길을 잘 못 찾아 두 번이나 놓쳤다. 그때마다 일행이 지적을 해 주어 제대로 갈 수 있었다. 징검다리 앞에 왔다. 정겨운 생각이 나서 사진을 찍었다.
거대한 수목의 숲길을 지나고 이소 강을 건너니 아르수아 도시가 나타났다. 숙소를 향하여 가다가 길 건너편에 서있는 우리 일행을 발견했다. 그곳에 알베르게가 있었다. 1시 40분이었다. 숙박비로 10유로를 냈다. 1층 침대에 자리 잡았다. 짐을 푼 뒤 카톡 작업부터 했다. 오늘 날짜 동영상도 만들었다. 점심은 먹지 않았다. 샤워하고 환의하고 휴식을 취한 뒤 낮에 일행을 찍은 사진과 12일자 동영상을 게시했다.
저녁엔 인근 식당으로 갔다. 식당 여주인이 푸근한 시골 아낙네 모습이었다. 10유로의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양이 푸짐했다. 후식인 야쿠르트는 먹지 않고 챙겼다. 슈퍼를 들러 과일을 산 뒤 돌아와 쉬었다.
5월 15일(수) 제33일차 33일만의 기적
5시 40분에 일어났다. 어제 가져 온 요구르트를 먹었다. 준비를 마친 뒤 6시 20분에 출발했다. 오늘은 빼드로우소를 간다. 20킬로다.
일출은 물론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좋았다. 이런 풍경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캄캄한 밤중에 일어나 서둘러 목적지에 간단 말인가. 도중에 바르에 들어가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었다. 오늘은 박동문 선생님이 컨디션이 좋은 듯했다. 먼저 출발해서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안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안부 전화였다. 도중에 쉴 겸 바르에 들러 커피를 마신 뒤 다시 걸었다.
혼자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일이면 순례 길도 마치게 된다. 그간 33일간 걸으면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내가 출발할 때 또는 카톡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돌아오라고 당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격려 차원인 줄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여기를 오지 않았기에 나에게 무리한 주문이었다. 더더구나 나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기에 이번 기회에 굳건한 신앙심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33일 동안 먹고 걷고 자면서 건강해졌는가. 그간 내가 잘 먹었고 잘 잤고 잘 걸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내 사진을 보니 얼굴에 살이 많이 올라 있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고기를 많이 먹어서 살찐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오해를 샀을 뿐. 햇반이 떨어질 때까지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그러면 체중 감량을 한 것도 아니고 도대체 나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단 말인가. 내 스스로 의문스러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바지 속의 가운뎃다리가 쑥 일어났다. 그래 이것이다. 내 몸이 건강해졌다는 표시를 그런 식으로 내 몸이 나에게 보여준 것이다. 33일만의 기적이었다. 야고보님이 신앙심이 없는 나에게 그간 수고했다고 주신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기뻤다. 도중에 꽃무리를 보았다. 보기 드문 꽃인데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보여 그 꽃도 찍었다.
알베르게에 11시에 도착했다. 오전에 도착하기는 오늘로 세 번째인 것 같다. 그런데 숙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숙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 쉬면서 오늘 날짜 동영상을 만들었다. 12시가 안 되어 일행 중 한 분이 지금 알베르게에서 손님을 받는다고 했다. 숙소비 10유로는 윤 이사에게 준 뒤 입실했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가족과 카톡을 했다. 호일이 이번에는 홍콩에 놀러 갔다고 했다. 한번 해외여행을 경험하니 또 한 번 가게 되었구나 생각했다. 점심은 남은 라면 두 개로 식사했다. 고추장도 가져 와 일부는 일행에게 주고 우리는 상추와 고기를 얻었다. 그런 대로 잘 먹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찍은 안개 사진과 꽃 사진을 보란 듯 게시했다. 이성헌 부자를 찍은 사진도 개인 카톡으로 전송했다. 그 후 샤워도 하고 손빨래도 했다. 8순 어르신이 나에게 동영상을 보내 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개인 카톡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5월 13일부터 15일까지 동영상을 개인 카톡으로 전송했다. 나도 개인 바탕 배경 화면을 전번에 찍은 구름 위로 나는 새의 사진으로 바꿨다.
박 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10유로 순례자 메뉴로 식사했다. 돌아오는 중에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박 선생님은 본인 외에 자제에게 선물을 한다고 티를 여러 장 샀다. 나도 한 장 샀다. 그런데 박 선생님은 옷이 8유로이고 내 옷은 5유로였다. 이유를 물어 보니 내 옷이 이월상품이라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상도덕은 잘 모르겠지만 속이며 장사하는 곳은 아니었다. 나는 싸고 좋은 것이면 좋다. 이월상품이라도 만족했다. 내 옷만 샀다. 아들의 기호도 모르는데 싼 옷을 사는 것은 아니 사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와 옷을 잘 샀다고 자랑을 하니 그 옷을 사러 가게에 가시는 분도 있었다. 저녁에 계란을 또 얻었다. 밤에 전 부장이 와서 내일 일찍 출발하자고 했다. 이유는 내일 산티아고에서 순례증을 받는다. 그런데 산티아고는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증을 받으러 대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가급적 일찍 가서 받는 것이 기다리지 않아 좋다고 했다. 9시에 소등이 이루어졌다.
5월 16일(목) 제34일차 산티아고에서 순례증을 받다
5시에 기상해서 준비했다. 짐을 실은 뒤 5시 반에 출발했다. 오늘은 드디어 순례길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로 간다. 거리는 20.5킬로다. 비교적 짧은 거리다. 나는 박동문, 홍교수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도로가를 걸었다. 아직은 어두워서 숲으로 가는 까미노가 있는지 모르겠고 그냥 대로변을 걸었다. 물론 바르는 문 열지 않아 식사할 수 없었다. 시장한 채로 그냥 걸어갔다. 뒤따라오던 일행도 차츰 거리가 멀어졌다. 날이 밝아지면서 까미노 표지를 따라 걸으면 되었다.
성당 앞까지 걸어왔다. 거기에 두 갈래 길이 나있었다. 그 중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까미노 표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다시 올라가라고 했다. 그래서 윗길로 올라갔다. 골목길을 나오니 대로가 나왔다.
우리는 대로를 따라 산티아고 방향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공항이 보였다. 사거리 교차점에 서있는 순례자상도 보았다. 계속 도로변을 따라 걸어갔다. 아직 아침을 안 먹었기에 호텔에서 아침을 먹은 뒤 다시 출발했다. 가다가 까미노 표지를 발견하였다. 이제 제대로 길을 찾아가나 싶었다. 까미노 숲길을 걸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 놀랍게도 아까 본 성당이 다시 나타났다. 내가 종전에 그 성당의 사진을 찍었기에 분명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까미노 표지를 보지 못하고 대로를 따라 간 것이 잘못이었다. 50분을 그 자리에서 맴돈 것이었다. 아침에 빨리 걸어서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하겠다는 생각은 헛된 일이 되고 말았다. 여태 실수 없이 잘 왔는데 막판에 이 무슨 실수란 말인가.
어제 공지에서 중세기 때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성인을 깨끗이 뵙기 위해 시냇물에서 몸을 씻었다는 라바꼬야 마을을 지나게 된다고 했다. 이제 제대로 그 마을에 왔다. 기념으로 개천 사진을 찍었다.
다시 공지에서 라바꼬야 마을을 지나 몬떼 도 고소에 오르게 된다고 했다.
몬떼 도 고소는 ‘기쁨의 산’이라는 뜻이다. 순례자들이 천여 년 전부터 까미노 길을 걸었다. 당시는 길이 험하고 위태로운 일이 많이 발생해서 순례 중에 사망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온갖 고생 끝에 몬떼 도 고소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자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1982년 교황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를 방문했다. 그 방문 기념비가 언덕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그 언덕에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 역시 가까이 가서 기념비 사진을 찍고 그 언덕에서 도심의 모습을 찍었다.
도심에 들어왔다. 이제 까떼드랄을 향해서 걸었다. 1킬로 남짓 걸었다. 멀리 집 끝자락에 까떼드랄 지붕이 조금 보였다. 이제 다 왔다.
골목길에서 나오니 까떼드랄의 웅장한 건물과 드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10시 45분이었다. 광장에서 윤 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수고하셨다며 우리를 하나씩 안아주었다. 우리는 순례증부터 받기 위해 순례자 사무실 위치부터 물었다. 대기자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사무실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우리 일행들은 이미 순례증을 받았거나 우리보다 앞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앞서 갔는데 왜 늦게 여기에 도착했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래도 시간은 가기 마련이었다. 드디어 차례가 왔다. 직원이 내 여권과 끄레덴샬을 확인하더니 기록증도 받겠느냐고 물었다. 물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꼼꼼히 컴퓨터 화면을 보며 크레덴샬에 찍힌 세요를 대조하는듯했다. 내가 제대로 완주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이리라. 확인을 다 마친 듯 순례증과 기록증을 내주었다. 5유로를 주고 서류를 넣는 통을 샀다. 증서는 종이쪽지 두 장에 불과하지만 담겨 있는 의미는 컸다. 34일간의 행적을 인증하는 서류다. 사무실 앞에서 증서를 들고 서있는 내 모습을 기념으로 찍어달라고 했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까떼드랄 박물관에 들어갔다. 대성당의 건축물과 조각에 대한 박물관이었다. 야고보 상을 찍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야고보 성골함이었다. 성골함이 있는 위치를 직원에게 물어보니 레프트, 레프트 하면서 왼쪽으로 두 번 돌아가라고 했다. 까떼드랄 정문 앞으로 갔다. 직원에게 배낭 검사를 받은 뒤 들어갔다. 까떼드랄 내부는 거대하고 화려했다. 대 보수공사 중이었다.
한 동안 둘러 본 뒤, 우리는 야고보 성골함을 볼 수 있는 줄에 섰다. 먼저 위층에 올라갔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야고보 상이 누워 있었다. 그 앞에서 참배한 뒤 상을 안아 보았다. 거기에는 야고보 성골함이 없었다.
이번에는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에 성골함이 있었다. 거기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눈으로만 보았다. 철문 사이로 보이는 성골함의 사진을 찍었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갖든 산티아고에 온다는 것은 야고보를 참배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 오늘 내가 야고보를 참배한 것은 그런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순례길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었다. 단순히 트레킹을 한 것만이 아니다. 이는 내 삶의 역사에 큰 의의를 부여하는 사건이다. 그리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한 뒤 광장에 갔다. 광장은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곳이었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찍은 인증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했다. 우리는 서로의 완주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버스 탑승까지는 시간이 남아 잠시 쇼핑했다. 손녀 성윤의 옷을 8유로에 샀다. 다시 모여 전용차량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호텔에서 먼저 캐리어부터 정리했다. 오늘 찍은 단체사진이 카톡에 올라왔다. 이를 저장했다. 오늘 날짜 동영상을 만들어 게시했다. 확인해 보니 단체사진이 누락되어 있었다. 그래서 포함시켜 다시 게시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 동영상은 안에게만 전송했다. 박 선생님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배불렀다. 밥 생각이 없었다. 혼자 갔다 오시라고 했다. 저녁은 사과 하나로 때웠다. 박 선생님이 다녀오더니 사과 하나를 갖다 주셨다.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안 먹었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편안한 마음으로 푹 잤다.
5월 17일(금) 스페인 땅끝마을에 가다
6시에 일어났다. 카톡 작업을 했다. 7시에 아침 식사를 했다. 어제 공지에서 9시에 차량으로 시내로 손님을 모신다고 했다. 그리고 2시에 광장 앞 호텔에 모여서 차량으로 피니스떼레와 무시아 관광을 한다고 했다. 나는 굳이 9시에 시내 관광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홍 교수와 11시에 만나 광장에 걸어가기로 했다. 박 선생님은 쇼핑을 해야겠다며 9시에 먼저 출발했다. 홍 교수가 10시에 먼저 가겠다는 카톡을 나중에 보았다. 그러면 굳이 11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배낭을 메고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비를 착용하고 까떼드랄을 향해 걸어갔다.
일단의 순례자들이 까떼드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 힘들어 고개 숙이고 가는 모습이 내 어제 모습을 보는 듯했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까떼드랄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광장으로 가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며 걸었다. 비는 그쳤다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우비를 배낭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기를 반복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광장에 들어왔다. 홍 교수와 이기숙 씨를 만났다. 같이 쇼핑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점심때가 되었다. 이기숙 씨 안내로 케밥 집에 갔다. 제대로 된 케밥을 여기서 처음 먹어보았다. 콜라와 케밥의 세트 메뉴로 7.5유로였다. 유명한 집인 듯 윤 이사와 전 부장 그리고 일행도 많이 이 식당에 찾아 왔다.
식사 후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박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 상가가 문 닫아 쇼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오늘 분명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이다. 박물관도 문을 닫았다. 약속대로 2시에 광장에서 모였다. 그리고 전용차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승차했다.
다시 햇볕이 나기 시작했다. 100킬로, 1시간 정도 이동하여 피니스떼레에 도착했다. ‘땅끝마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산티아고 순례자들 중에는 이곳까지 순례 길을 걷는 이도 있다고 했다. 산티아고에서 3박 4일 정도 더 걸으면 되겠다. 무엇보다 청명한 날씨에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눈에 겹쳐 오고 시원한 바닷바람과 바닷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간 고산지대를 걷다가 바다에 오니 절로 기분이 났다. 스페인의 명품은 저 구름이다. 바다 건너편 육지 위로 쭉 뻗어 있는 일자 구름! 명품이었다. 이정표에 ‘km 0.000’ 표시가 선명하다. 이어 등대 사진을 찍었다. 해변으로 내려가 순례자들이 그간 지녀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로 그간 지녀온 물건을 태운다는 곳도 보았다. 지금은 공해 문제로 이런 물품 소각을 금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참을 돌아본 뒤 약속한 시간에 다시 전용차량에 합승했다.
다시 전용차량을 타고 무시아로 갔다. 산티아고를 소재로 유명한 영화 ‘더 웨이’를 본 적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가 순례 길을 걸으며 걷는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내용의 영화다. 엔딩 장면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바로 무시아의 교회였다.
무시아에 도착하니 바다가 더 가까이 느껴졌다. 여기 이정표에도 ‘km 0.000’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하긴 피니스떼레나 여기나 똑같은 조건이긴 하다. 여기는 아까 피니스떼레와 달리 마치 우리나라 제주 앞바다같이 느껴졌다. 해변과 언덕을 한동안 오르내렸다.
거대한 돌조각이 서있었다. 둘로 쪼갠 듯한 형상의 조각이었다. 일행 중 젊은 여성들이 흥이 난 듯 돌을 잡아 다니며 문을 여는 듯한 몸짓을 연출했다. 순례길 완주의 사명을 다한 뒤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관광을 즐기는 듯 했다. 나도 이를 재미있게 보고 사진을 찍었다. 갈매기들이 언덕 바위 봉우리에서 앉았다가 날고 있었다. 가까이 가진 않고 당겨 찍었다. 무시아 교회를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그리고 차량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관광하는 날이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7시 반 호텔에 돌아왔다. 시내에서 저녁에 해물로 식사할 일행은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식사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오늘도 박 선생님은 식사하러 혼자 나가셨다. 나는 사과 한 개로 저녁을 때웠다. 박 선생님이 식사하고 와서 사과 한 개를 갖다 주었다. 맛있게 먹었다. 저녁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홍영길 선생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기념패를 주었다. 홍 교수는 그간 무리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홀로 된 모습을 본 젊은 여성들이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하여 그 부류에 합류되어 있었다. 그 보답으로 선물을 하겠다고 돈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여성들이 선물로 고른 것이 기념패였다. 우리도 보답하려고 홍 교수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기로 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남은 하루 저녁 시간은 그 일행과 사전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내일은 호텔에서 마드리드로 이동한다. 그간 캐리어 외에 사용했던 가방도 이제는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방 속의 짐을 꺼내 캐리어에 넣고 그 가방도 캐리어 속에 넣었다. 정리를 마친 뒤 푹 잤다.
5월 18일(토) 마드리드로 가다
6시에 기상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짐을 정리한 뒤 7시에 캐리어를 내놓았다. 윤 이사가 침낭을 캐리어에 넣든지 내가 소지하라고 했다. 이미 캐리어는 짐으로 찼다. 출국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낭을 소지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11시 20분까지 휴식을 취했다. 사실 일찍 출발해야 마드리드 관광을 할 수 있는데 마드리드 행 기차표가 없단다. 그리고 그 구간은 철로 보수 중이라고 했다. 윤 이사는 캐리어를 가지고 먼저 떠났다. 오늘 전 부장이 인솔한다. 휴식 시간에 쉬면서 카톡 작업을 했다. 11시 20분에 집합하여 전용차량을 타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렌페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점심은 우리가 해결해야 해서 빵과 물을 바르에서 샀다. 우리가 타는 차는 2등석이었다. 그리고 오렌세에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그런데 기차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탔다. 이는 공항에서나 경험하는 일이었다. 나는 곧 버스에서 내려 기차를 탈 줄 알았다. 그런데 한 시간 이상 줄곧 버스는 달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는 사모라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탄 뒤 하차했다. 사모라 기차역에서 마드리드 행 기차로 갈아탔다. 마드리드 역에 6시 반에 도착했다.
호텔은 바로 역사 인근에 있었다. 호실 배정을 받은 뒤 입실하니 캐리어는 이미 호실에 와 있었다. 나가서 저녁을 해결했다. 어두워졌다. 마드리드 관광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돌아와 배낭 정리를 했다. 내일 선물을 사게 되면 들어갈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돌아가면 여행기를 써야 한다. 그런데 전에 분철해 왔던 책자 일부를 숙소에 그냥 두고 왔었다. 책자가 있어야 기록을 정확히 할 수가 있다. 박 선생님께 그 책자를 빌렸다.
5월 19일(일) 귀국 길에 오르다
6시 모닝콜로 일어났다. 호텔 창문에서 바로 본 동틀녘 모습도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과 동영상을 전송하는 카톡 작업을 했다. 7시 반에 아침을 먹은 뒤 짐 정리를 했다. 로비 집합 시간인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먼저 나왔다. 그런데 로비에 여행객 아무도 없었다. 일행 중 한 분이 와서 이미 탑승해 있다고 했다. 버스 주차장으로 가서 탑승했다. 버스는 마드리드 공항으로 갔다. 이미 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윤 이사와 마지막 악수를 나눴다. 그간 선물을 사지 못했으니 선물을 사야 했다. 돼지고기 하몽 같은 음식을 샀다. 알고 보니 하몽이 아니라 순대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그리고 올리브유를 샀다. 이제 제대로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환승하기 위해 파리 공항에서 내렸다. 공항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절차를 밟은 뒤 다시 대기실에서 국내로 갈 비행기를 기다렸다. 기내식을 두 차례 받지만 그때까지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선물로 초콜릿을 샀다. 그리고 간편식을 사서 점심을 때웠다. 가격이 스페인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탔다. 출국할 때 타고온 에어프랑스다. 가운데 네 자리 좌석 중 가운데 자리였다. 불편했다. 나는 기내에서도 잘 자는데 여느 때보다 못 잔 것 같았다. 지루해서 영화를 보았다. 다른 채널로 돌리려다가 그만 유아 채널을 건드렸다. 여기 유아채널은 임의 채널 변경이 제한되어 있었다. 승객이 함부로 채널을 변경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 동안 시도하다가 결국 승무원을 불렀다. 한참만에야 채널을 변경할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프랑스식과 한국식이 있다. 전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한국식을 선택했다.
식사 후 이제 밤이 되었다. 소등이 이루어졌다. 불편하나마 눈을 붙였다. 파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시간은 출국할 때 걸리는 시간에 비하면 짧다. 그 점이 좋았다.
5월 20일(월) 건강한 몸으로 귀국하다
기내식으로 아침을 먹은 뒤 오후 12시 35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안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히 귀국했음을 알렸다. 짐을 찾은 뒤 박동문 선생님과 함께 마일리지 적립을 하러 갔다. 프랑스 항공 국내편만 마일리지가 적립된다고 했다. 지난 번 국내편 여행 마일리지 적립에 관한 사항은 일주일 후에 다시 전화 걸어 달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박 선생님과 헤어졌다. 리무진을 타고 관악지점에 하차하였다. 기사는 화물표를 달라고 했으나 나는 표를 받지 않은 채 탔기에 없었다. 요새 내 기억이 확실치 않다. 나는 정신이 온전하다고 믿고 있지만. 수첩을 찾아보니 그 안에 있었다. 알고 보니 전 것이었다. 내가 오늘 표을 받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안사람이 차를 가지고 왔다. 짐을 싣고 귀가했다. 안사람은 다시 외출했다. 나는 캐리어부터 정리했다. 빨랫감을 잔뜩 내놓았다. 이번에 옷을 덜 가져갔지만 그래도 안 입은 채 가져 온 옷도 있었다. 이것도 빨랫감으로 내놓았다. 정리를 마친 뒤 캐리어를 옥탑방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안사람이 바로 돌아왔다. 내가 스페인에서 사온 선물을 소개했다. 안사람이 올리브유 성분을 알고 싶어 해서 간단히 아는 대로 설명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했다. 임경유, 구본황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도 알릴 겸 산행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은 열무비빔밥으로 식사했다. 오랜 만에 집밥을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설거지도 하고 빨래를 너는 등 가사를 도왔다.
밤에 자리에 누워 내 배를 만져 보니 저녁을 먹었음에도 내 배가 홀쭉 들어가 있었다. 그간 고민이었던 뱃살이 어느 새 다 빠졌음을 다시 확인했다. 안사람은 내가 건강한 몸으로 산티아고 순례 길을 다녀온 것에 만족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다녀와서
귀국한 다음날부터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간 못 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는 쓰기 쉬웠다. 그간 글을 쓰겠다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순례길 사진이 매일 적으면 60여 장에서 100장이 되었다. 100장이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것은 승경만 찍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발할 때 찍고 도중에 이정표도 찍고 마을 들어서면 찍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찍었다. 이는 기록 차원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 상세 정보를 보면 시간과 장소가 나오니까 그 점도 활용했다. 그리고 휴대폰 메모장에 그날그날 메모를 했다. 이런 자료를 활용하니까 일기 쓰는 것은 쉬웠다.
문제는 이를 여행기로 바꿔 적는 일이었다. 다기다양한 길과 풍경, 천변만화하는 하늘과 구름을 되살려 그 감상을 적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날 의미 있는 생각을 했다면 모를까. 정신없이 좇아가고 맥없이 기다리고 그리고 걷는 것이 힘들 때는 특별히 생각한 것도 없었다. 또 개인적인 사건과 감상이 위주인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막상 일기에 사진을 입력한 뒤 글을 쓸 때는 이런 불필요한 상당수의 글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사진을 위주로 풍경 묘사를 더해서 글을 썼다. 사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보만 책자를 보고 썼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사전 정보 내용도 이 글을 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번에 가보니 한국인의 젊은이들이 이 길을 많이 걷고 있었다. 자유로운 개인 여행이었다. 이 점이 부러웠다. 그런데 순례 길을 걷다가 어느 한국의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다섯 번째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게 했지. 여행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가는 방법은 많다. 그 할머니도 그렇게 하는데.
서두에도 썼지만 나는 그냥 친구 권유에 따라, 흥미 있을 것 같아서 출발했다. 도중에 순례 길의 의미에 대해 신부의 말씀도 들었지만 산티아고에 왜 가는지 고민은 필요할 것 같다. 고민한 내용에 따라, 목마름에 따라 그 고민은 해결되고 갈증은 해소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800킬로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나도 고민 없이 떠나서 사실 조언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 다만 그 필요성을 느껴서 한 마디 해보았다.
시간과 돈, 그리고 준비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갖춘 뒤에 떠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지길 기다리면 때를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목마름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이다. 후일에 산티아고 순례 길 완주를 버킹 리스트 1순위에 올렸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