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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부산통신ᆞ1982~1986
07 사라진 거리
● 07-1 한국 영화는 왜 재미없는가?
“요즘 영화 봤어?” 하고 물으면 대개는 “아뇨”라고 답한다. 가끔 “예”라고 하는 이가 있어도, 본 영화가 「E.T.」라든가 「007」이라든가 「오복성(五福星)」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 제자들은 한국 국산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면 간단하다. “재미없으니까요.” “맨날 똑같은 멜로드라마뿐이에요.” “싸구려 같고 조잡해요.” “어두운 이야기가 많아서 즐길 수가 없어요.” …
이 정도 이유를 들으면, 과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난 2년 동안 본 백 편 남짓한 한국 영화 가운데서도, 놀랄 만큼의 작위적 설정, 고정된 인물 유형, 조잡하고 안이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아니,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은’ 작품도 몇 편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그래서 한국 학생들로부터 “한국 영화가 정말 재미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되받기도 한다. 한국 영화는 왜 재미없는가? 답은 간단하다.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히 체념적이고, ‘켄차나(괜찮다, 대충 괜찮다라는 뜻의 한국어. “그냥그래요” 같은 식으로 쓰이기도 한다)’ 정신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재미있을 리 없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다. 자주 지적되듯, 지금까지 한국의 영화 정책은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국산 영화 제작 실적에 따라 부여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국산 영화 진흥(및 외화 절약)을 위한 묘안(?)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국산 영화의 졸속 남발을 초래한 것이다.
외화는 국산 영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익을 올린다. 그러니 외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제작비와 제작 기간을 가능한 한 줄인 국산 영화를 ‘알리바이’처럼 만들어내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법은 곧 개정되어, 외화 수입권과 국산 영화 제작을 분리하게 되었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인도 등에 이어 ‘영화 왕국’이라 불릴 만큼 제작 편수는 많다. 적어도 제작 편수 면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을 능가한다. 그러나 영화 한 편당 관객 동원 수는 극히 적다.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적도 없고, 외국에 수출되는 영화도 거의 없다.
이런 말만 늘어놓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극장 사정 역시 좋지 않다. 여름이면 후텁지근한 냄새가 가득하고, 발밑으로 쥐가 어슬렁거리는 곳도 적지 않다. ‘영화’를 둘러싼 경제적 환경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또 하나는 검열과 각종 금기가 많아 영화 제작자의 의욕을 꺾는다는 점이다. 물론 ‘반공’을 국시로 하는 이상, 친공·찬공 영화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 그 밖에도 ‘체제 비판’, ‘섹스’, ‘일본’ 등 여러 금기가 존재해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만들기 어려운 구조다. 결국 문제작이 될 만한 작품은 애초에 나오기 힘들다.
‘일본인’은 쿵푸 영화의 악역 정도로 등장시키는 것이 무난하고, 누드는 기껏해야 뒷모습까지, 앞에서 유두는 금지, 노골적인 성행위 암시도 금지다. 한때 일본 핑크 영화에서 흔히 보이던 것처럼, ‘꽃’이나 ‘말(馬)’이나 ‘파도’ 같은 상징을 남발하는 상징주의가 여전히 주류다.
정부·관료 비판, 사회 풍자, 현실 폭로도 자제하는 편이 낫다. 그쪽의 미움을 사면 단순한 ‘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어두운’ 정체의 역사관 같은 이야기를 써왔지만, 사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근 들어 국산 영화가 학생들과 젊은 세대의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밝은’ 소식이 이 글의 진짜 주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1984년) 대히트한 「고래사냥」(배창호 감독)일 것이다. 낙제생 대학생, 실어증에 걸린 매춘부, 인텔리 부랑자의 눈물과 웃음과 감동의 이야기는 본지('현대코리아') 연재 「이곳은 서울」에서 이미 상세히 소개되었으므로 생략하겠다. 주인공이 ‘문제 많은 대학생’(가수 김수철이 열연)이라는 점이 공감을 산 탓인지, 평소 국산 영화에 관심 없던 대학생층에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부산에서는 가장 큰 극장인 부산극장이 장기 상영했고, 주말에는 국산 영화로서는 드물게 줄이 생겼다!)
배창호 감독은 아직 30대 초반이지만, 연이어 히트작을 내며 단숨에 젊은 인기 감독으로 떠올랐다. 데뷔작은 「꼬방동네의 사람들」로, 스승 격인 이장호 감독의 「별들싀 고향」「바람불고 좋은 날」「어둠의 아이들」 등 하층민을 다룬 작품들과 비슷한 결을 보인다. 서울 슬럼가 주민들을 등장시킨, 다소 ‘인정극’의 분위기를 띤 작품이다.
철공 노동자의 활약을 그린 「철인(鉄人)들」은 대종상을 수상했다. 이어 최인호 원작, 배창호 감독, 안성기 주연의 ‘황금 트리오’가 만든 「적도(赤道)의 꽃」이 나왔다. (「고래사냥」도 같은 트리오다.)
서울의 고층 주택가에 사는 자폐적인 카메라광 청년(안성기)과 중년 남자의 애인이 된 젊은 여자(장미희)의 기묘하게 뒤틀린 연애를 주제로 대도시 서울의 현대적이고 불모의 청춘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최신작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는 6·25 전쟁 때 헤어진 자매의 재회를 축으로 한 작품이다. 다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 협찬 성격이 강해 다소 계몽적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장호 감독은 데뷔작 「별들의 고향」 이후 인기 정상의 감독으로, 「어제 내린 비」,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최근 화제가 된 작품은 시카고 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을 받은 「바보 선언」이다.
이 영화로 데뷔한 신인 배우 이보희는 한때 일본 잡지 특집 표지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겉모습은 여대생 같지만 실제로는 매춘부라는 설정이다. 전자 오락기 소리, 판소리 등을 배경 음악으로 사용하고 만화적 움직임, 어린이 작문 낭독 같은 내레이션을 활용해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다.
「과부춤」은 과부들의 삶을 풍자와 사회성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무릎과 무릎 사이」는 매우 섹시한 영화였으나 작품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최신작 「어우동(於宇同)」 역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지만 여성관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정진우 감독은 「뻐꾸기는 밤에 운다.」, 「앵무새는 몸으로 울었다.」, 「갈매기여, 훨훨 날지 마라」 등 이른바 ‘새 시리즈’로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한국 영화에 네오리얼리즘적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두용 감독은 토속적 색채가 강한 작가로, 「여인잔혹사(女人残酷史)」로 대종상을 받았다. 샤머니즘과 전설, 민속 의례를 담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임권택 감독은 「족보(族譜)」, 「만다라(曼陀羅)」 등으로 일본에도 알려졌고, 최근에는 민속적 주제를 자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비구니(比丘尼)」는 불교계 반대로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김효천 감독, 하명중 감독, 이미례 감독 등 여러 신진 감독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쯤에서 여러 감독의 이름을 나열하다 보니, 「한국 영화는 왜 재미없는가?」라는 제목을 배반할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일단 여기서 “끝”이라 하자.
(198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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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2 한국, 강화되는 문화 분야의 자유화
“제2의 서울의 봄” 등으로 불리는 반체제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 활동 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민주화 추진의 분위기가 확산됨에 따라 한국에서는 그동안 금서로 묶여 있던 저작들이 해금되는 등 문화 분야에서 자유화 경향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반체제 문학자의 상징적 존재인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가 10년 만에 해금·복간된 것을 시작으로, 김지하의 작품만 해도 『대설・남(大説・南)』 제1권(복간)에서 제3권(최신간)까지, 담시 「분씨물어(糞氏物語)」와 희곡 「동의 이순신(銅의 李舜臣)」 등을 수록한 작품집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가 잇달아 출간되어 모두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아직 복간되지 않은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도 대학가 서점 등에서는 초판본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금서였던 문병란의 『땅의 연가』, 조태일의 『국토』,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등도 복간본 혹은 초판본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이러한 해금 시집들 가운데 특히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신동엽의 시와 산문을 묶은 『신동엽 전집』이다. 1975년 초판, 1980년 증보판이 모두 금서 처분을 받았고, 이번 수정 증보판이 간행되기까지 10년, 시인 사후 16년 만에야 비로소 독자들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동엽은 1960년 이른바 “4·19 혁명”을 체험한 세대로서 「껍데기는 가라」 등의 저항시를 썼으며, 김수영 등과 함께 1960년대 ‘현실 참여파’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60년대 최대의 민족 시인”으로도 불린다.
생전에 간행한 시집은 단 한 권뿐이었지만, 사후에는 시선집과 전집 외에도 평전 두 권이 출간되고 다수의 신동엽론이 발표되는 등, 김지하를 비롯한 1970년대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련의 해금 조치로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저항시·민족시, 이른바 ‘현실 참여시’의 계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와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한 창작 활동이 기대된다.
이미 양성우의 『낙화』조태일의 『연가』 등의 새로운 시집이 간행된 데다, 젊은 문학자들이 김지하의 작품과 사상을 고찰한 평론집도 편찬되고 있다. 또한 다수의 무크 형식 문예지(「실천문학」「문학의 시대」 등)를 중심으로 앞으로 전개될 한국의 “민중·민족을 위한 문학” 운동의 향방은 주목할 만하다. (1985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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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3 한국의 축제
한국 부산에 산 지 삼 년이 되었지만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국내를 틈틈이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 목적 없이 떠나기에는 역시 가족이나 직장과의 관계도 있어서 나가기가 어렵고, 취재나 현장 조사라는 명목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럴 때 좋은 구실이 되는 것이 지방 축제다.
이것만은 현지에 당일 도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사진을 찍거나 특이한 민속 행사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가족에 대한 설득력도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한국 축제를 본 것은 아니다.
큰 것으로는 강원도 강릉에서 음력 오월 오일에 열리는 단오제, 삼 년에 한 번 열리는 충청도 은산의 별신대제, 고전 소설 '춘향전'의 지열라도나몬 히로인을 모시는 전라도 남원의 춘향제, 경상도 진주의 고도 진주의 개천제 등이다.
이 외에도 신라와 백제의 옛 수도인 경주의 신라문화제, 부여·공주의 백제문화제 등이 유명하지만, 내 생각엔 이것들은 아무래도 관제의 대규모 행사라는 느낌이 들어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학생들을 동원한 매스 게임이나 운동장 민속 예능 콩쿠르가 중심이고, 내가 찾는 시골 축제의 "외설적"이며, "서민적 활기"가 넘치는 카니발적 분위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가장 추천하는 것이 강릉 단오제이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는 가족 단위로 갔는데, 두 번째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간 주도형 '지방 축제'로, 메인이 되는 무당(샤먼)의 무속 의식부터 가면극, 씨름 대회, 그네 경기까지 시내 남대천의 강변 가득한 회장에 흩어져 있고, 이 외에 서커스나 귀신의 집, 연예 쇼 등의 텐트 속의 떠돌이 공연에다 노점, 포장마차, 거리 상인들이 하천 부지나 제방 위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것이다.
이 포장마차에서 파전, 오코노미야키 같은 빈대떡을 집어 먹으며 막걸리(탁주)라도 마시고 있으면 한국 서민들의 표정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시골 양반풍 노인은 두루마기에 가죽 신발을 신고 머리에 큰 짐을 얹은 노부인을 거느리고 빈손으로 유유히 걸어간다.
옆 포장마차에서는 중년 부인 무리가 마침내 장고를 들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사위와 골판지 상자 하나로 아이들에게 백 원, 이백 원을 뜯어내는 "내기" 야바위꾼이있고, 순찰 경찰에게 단속을 당한다. 하지만 경찰이 그 자리를 떠나면 바로 가게를 내는 등, 꽤나 능글맞다.
옆 테이블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무심코 뒤돌아봤다. 가게 주인을 향해 계산이 너무 비싸다, 바가지(표주박, 변하여 실질이 없는 부당한 고가)라고 아가씨(젊은여자)가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금액을 분연히 내던지듯 내버려 두는 아가씨와, 그 일행인 젊은 남성의 뒷모습을 나는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관(官)에 대한 민(民), 남성에 대한 여인, 유교에 대한 무속과 같이 한국은 이원론적 대비가 뚜렷한 나라이지만, 일단 서민 생활 수준이 되면 국기인 태극기의 문양처럼, 음과 양이 서로 만(卍)자 모양으로 뒤얽혀 혼돈스러운 양상을 띠하게 된다.
시장, 축제, 무속 의식, 이것들을 지탱하는 것은 사실 여성의 힘이며, 그것은 여자-어머니-민(民)-무속 종교-아이와 같은 대항계열(対項系列)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축제가 5, 6월, 10, 11월에 집중되어 있는 (소위 여름 축제는 적다) 것은 모내기와 벼베기라는 벼농사 농업의 주기를 따르고 있으며, 그때 농촌의 부인들이 휴식을 위해 단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하나의 큰 이유가 아닐까.
밤이 되면 강변 일대의 텐트에 불이 켜지고, 유원지의 일루미네이션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어때, 도쿄 디즈니랜드랑 여기 축제 중에 뭐가 더 재밌어?" 나는 데려온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물론이지." 여섯 살 된 둘째 아들이 말했다. "디즈니랜드 말이야." (1985년 9월)
II 부산통신ᆞ198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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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4 사라진 거리
부산이 고향이라는 재일교포 지인을 잠깐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바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30년쯤 전에 살았다고 하며, 15년 전에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친척집이 있는 곳도 역시 그 근처라서, 그곳을 찾아볼 마음인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눈에 띄는 운동장까지 갔다. 부산역에서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한 것 같아 보였다. 시가지를 연결하는 터널이 당시에는 없어서, 크게 산을 우회해 가는 코스밖에 기억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다음 목표는 산 쪽 수원지에서 흘러오는 하천인데, 이는 최근 하천 위를 복개하여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하천 가의 가옥들도 뿌리째 철거되고, 넓은 기간 도로가 만들어져 있으니, 아무래도 지리 감각이 흐트러져 버리는 것이다. 그 하천이 이 도로 아래를 흐르고, 이 큰 길 양쪽의 가옥들은 당시 뒷길 자리라는 것(물론, 그것은 많이 정비되어 재건축되었지만)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에게도 3년 조금 넘게 전에 살았을 때와 지금은 이 일대의 광경이 완전히 달라진 것으로 비친다. 그전에 복개도로 아래의 하천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근처 구멍가게 몇 곳이 모인 국민학교(초등학교) 앞 골목에 장난감과 색종이 등을 사러 갔던 것도 아직은 그립다 할 만한 과거는 아니다. 학교 동료 선생님에게 처음 이끌려 간 중화요리집의 탕수육이나 팔보채는 맛있었다.
늘 아줌마가 낮잠을 자며 가게를 보던 과일가게는 싸고 물건이 좋아 종종 들르곤 했다. 강가의 판잣집 같은 나가야(長屋) 앞을 지나가면 집 안에서 뒹굴거나 식사하는 모습이 훤히 보여서, 이것이 한국 하층 서민들의 생활인가 하고, 왠지 작은 발견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도시들의 한구석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구덕산을 뚫고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터널이 생기고, 그에 맞춰 시가지를 달리는 도로가 서둘러 만들어졌다. 철거 문제로 엉망이 된 집 한 채가 공사 중인 도로 한가운데서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철거되었다. 예전 거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거짓말 같은 변모다.
그곳을 15년 만에 방문한 것이니, 내 지인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금 화가 난 듯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친척집은 쌀가게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작은 시장이 있고, 그 입구에 쌀 가게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일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발을 들여놓자, 지인은 주변 풍경이 낯익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좁고 복잡한 뒷길이지만, 옛날에는 이 길이 주변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거리였다고 하는 지인의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가게 앞에서 자전거를 치우려는 아저씨에게 지인은 곁에 다가가 친근하게 말을 건다.
아이구! 아저씨의 입에서 큰 놀라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은 나에게는 조금 부끄러워질 정도로 과장된 몸짓으로 재회를 기뻐했다. 고도 성장으로 격렬하게 변모하는 거리를 익숙해진 내 눈에는, 이 부산의 변용보다 그다지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멈춰 서 보면,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정신없이 변화하는 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하철 공사로 파헤쳐진 도로. 도로 폭 확충을 위해 길가의 건물이 철거되고, 잇따라 새로운 빌딩으로 탈바꿈해 간다. 수양버들 가로수가 이어지는 하천가의 거리가 복개 확장되고, 나무가 베어지고, 평평한 무기질적인 거리로 변해 버린 것도 목격했다.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中洲)인 을숙도는 파밭과 철새와 수초의 섬이었는데, 지금은 둑과 매립 공사로 인해 사막화되어 모래와 진흙으로 덮인 육지로 이어진 땅이 되어 버렸다. 강가 일대에 흩어져 있던 슬럼가는 철거되었고, 강물 흐름이나 물새 등을 보면서 파 구이를 먹고, 막걸리를 마시는 운치있던 한 주류 판매점도 이미 자취를 감췄다.
얼마 전에 나온 조세희의 사진이 담긴 작품집 '침묵의 뿌리'를 들춰보며 물길에 놓인 목교에 젊은 남녀가 나란히 걸터앉아 있는 을숙도의 사진이 있었는데, 으레 을숙도다운 이런 풍경도 이제는 볼 수 없다.
나룻배도, 강가 산책로도, 거기에 가게를 열었던 포장마차도 이제 흔적도 없다. 그것이 나에게는 마치 일본의 고도 성장 경제를 쫓아 억지로라도 발전하려는 한국의 의지처럼 느껴져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이 나라의 변화는 과감하고 단절적이다. 변화는 끊임없이 끊어진 모습 그대로 쌓여 중층적으로 퇴적되어 간다.
도시 경관의 변화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순식간에 도시의 한쪽 구석이 철거되고, 순식간에 근대 도시의 일부가 그곳에 나타난다. 뒷길이나 골목길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샌가 그곳을 불도저나 지게차가 무참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 바둑을 즐기는 노인들을 걷어차 버린다.
이것은 우리가 1950년대부터 60년, 70년에 걸쳐 일본에서 봐 온 풍경이지만, 그것을 눈앞에서 재현하면 복잡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소금 사이소!" "라고 소리치던 소금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고, 오징어 가게나 우산 수선하는 아저씨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물론, 강변 도로에 있던 네다섯 채의 포장마차는 공사 기간도, 넓은 도로가 만들어진 지금에 와서도,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뒷골목 문화'는 이렇게 계승되어 가는 것일까? "제 고향은 없어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고향이 없어요."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인은 술에 취한 탓인지 몹시 감상에 젖어 있었다. 다만, 그의 추억 속에는 그 도랑을 사이에 둔 거리가 그대로 살아남아 있을 테지만, 지금 거기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이제 그것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아니면 지금의 이 도시도 언젠가 다시 세피아색(추억의 갈색)의 '사라진 도시'가 될 것인가? (198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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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사라진 거리
● 07-5 전통예능
최근이라고 해도 지난 10년가량의 경향인 듯한데, 한국의 학생들 사이에서 전통예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학 축제(대학제)가 가까워지면 장구·징·꽹과리·북 등의 민속 타악기를 다루며 화려하고 요란한 리듬을 울려가며 연습하는 모습이 캠퍼스 안에서 흔히 보인다.
〈국악의 향연〉 같은 행사도 원래는 노년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판소리 대회나 떠돌이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의 흐름을 잇는다고 하는 사물놀이 공연장에 가 보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열기에 압도될 정도라는 것도 최근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전통예능이라 해도 크게 나누면, 아악이나 궁중무처럼 사회 상층 계급(귀족·양반)에 의해 세련되고 전승되어 온 예능과, ‘농악’·‘탈춤’ 등으로 대표되는 서민적·농민적인 민속예능이 있다. 여기서는 주로 민속적 예능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데, 이러한 예능은 오랫동안 ‘양반’ 계급 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 멸시받고 억압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칠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당시의 지배 권력이나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백안시되거나 탄압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던 듯하다. 예를 들어, 이러한 서민 예능의 주역이었던 ‘광대’라 불린 예인들은 명백히 차별받는 하층민이었고, 판소리의 원류를 형성한 ‘무당’, 그 예능을 세련되게 다듬고 전승해 온 ‘기생’ 등과 같은 부류로 여겨져 일반인들로부터 통혼(通婚)을 기피당하는 차별을 받았다.
이는 일본에서 가부키 배우들이 ‘강변 거지(河原乞食)’라 불리며 천시되던 것과도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민족문화·민중문화의 재평가와 부흥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예능을 보존·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때 사라질 뻔했던 예능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활발해지고 있다.
줄타기·접시돌리기·인형극 등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각지를 순회하던 남사당(또는 남사당패) 집단의 재결성, 강원도 강릉 단오제에 전해 내려오던 강릉관노가면극의 부활 등, 민속학자와 예능 전승자, 나아가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되살려진 예능의 사례도 적지 않다.
여기에는 매년 각 지방 도시를 돌며 전국전통예능대회가 개최되어 우승을 겨루는 전국적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신라문화제(경주)·백제문화제(부여·공주) 같은 지방 축제가 열려 그 지역의 전통예능이 중심 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더 나아가 판소리·무당굿의 전승자들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보호·육성하려는 정부의 문화정책 등이 민속예능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전통예능 보호·장려 정책이 본래 민중예능이 지녔던 서민성, 즉흥성, 권위와 권력에 대한 저항성 같은 역동성을 ‘죽이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따라서 이런 경향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듯하다.
서민적 전통예능의 대표적 레퍼토리인 탈춤은 경기 지방의 양주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 황해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는 봉산·강령(鳳山・康翎)탈춤, 경남 지방의 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 부산 지역의 동래야류·수영야류 등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들 모두 종이나 박으로 만든 소박하고 다소 그로테스크하며 익살이 넘치는 탈을 쓰고, 유머러스한 짧은 극이나 춤을 선보인다.
세련된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거칠고 역동적인 움직임의 미를 보여준다. 물론 옛날에는 각 지방마다 다양한 특색의 탈춤이 행해졌겠지만, 현재는 위에 언급한 것 외에는 거의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에 지금 전승되고 있는 것들을 보존·발전시켜 후세에 전하려는 지역 주민들의 열의도 강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강릉관노가면극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두겠다.
이는 대사가 없는 춤과 동작만으로 이루어진 무언극이다. 먼저 무대(라고 해도 관객들이 둥글게 둘러싼 광장)에 복면처럼 머리를 통째로 덮는 탈을 쓰고 허리에 나무 고리를 두른 ‘장자마리’(또는 보슴놈—허리의 나무 고리에는 미역이나 색천이 달려 있다)가 등장하여 익살스러운 춤으로 관중을 웃음짓게 한다.
이어 관을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삼베로 만든 수염을 달아 위엄을 뽐내는 양반이 등장한다. 계속해서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곱게 화장한 소매각시(=새색시)가 나와 양반과 함께 춤을 춘다. 그러나 곧 붉고 검은 험상궂은 탈을 쓴 ‘시시닥타기’가 등장해 각시를 납치하려 한다. 분노한 양반이 그들을 쫓아내지만, 그들을 따라갔던 각시에 대한 분노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각시는 용서를 빌다가 양반의 수염을 목에 감고 쓰러져 죽고 만다. 놀란 양반은 허둥지둥 무당을 찾아가고, 신목(神木)에 기도한 끝에 각시는 마침내 되살아난다. 마지막에는 각시의 재생과 해피엔딩을 축하하며 등장인물과 관객, 마을 사람들이 어우러져 군무를 춘다. 풍요를 기원하는 단오절에 걸맞은 ‘재생과 혼인’의 탈춤이라 할 수 있다. (1985년 12월)
Ⅱ 부산통신・1982~1986
07 사라진 거리
● 07-6 시장
한국의 서민 생활을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시장에 가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인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쓰고, 무엇을 즐기며 살아가는지, 시장을 한 바퀴만 돌아보면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시장에 모여드는 아저씨·아주머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인의 ‘원형’ 같은 것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지런하고, 말도 빠르고 손도 빠른 아주머니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이라도 멱살잡이로 번질 듯한 격렬한 말다툼(때로는 실제 몸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을 목격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여성’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는 시장. 그에 비하면 가게 안쪽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하게 차를 홀짝이고 있는 주인이나, 장보기에 지쳤는지 골목 안쪽 선술집(대폿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는 ‘남성’들은 그다지 생기가 없어 보인다.
“여자는 자기 동네 장날을 모르는 편이 팔자가 좋다”는 옛 속담은 이제 완전히 유명무실한 옛이야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큰 도시든, 아무리 작은 마을이든 ‘시장’이 없는 곳은 없다.
생활 잡화에서 식료품, 의류,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이 유통되는 곳이 한국의 시장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자연히 음식을 파는 집과 술집, 떠돌이 약장수나 광대, 거지, 좀도둑, 소매치기까지 모여들어 일종의 ‘축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동서의 양대 큰 시장이라 할 만한데, 이곳에 한 발 들여놓으면 색채와 소음, 물건 냄새가 뒤섞인 ‘미로’ 속에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흥정’을 모르면 장을 볼 수 없다. 추켜세우기, 너스레, 애원, 울상짓기, 위협, 아첨, 감언이설, 시비조까지, 생각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상인과 팽팽하게 주고받기하는 데에 시장 장보기의 진짜 묘미가 있다.
“좀 깎아 주세요”, “비싸요!” 정도도 말하지 못한다면, 시장 장보기는 포기하고 슈퍼마켓에서의 ‘침묵의 구매’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상품과 돈, 서비스와 돈의 교환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는 사실 말과 말이 오가며 거래되는 셈이다. 독설가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시장은 지난 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수십 년 전 시장 사진을 보면, 옷차림만 다를 뿐, 땅바닥에 대야나 보자기를 펼쳐 놓고 채소·소금·건어물을 파는 할머니, 머리에 짐을 이고 다니는 아주머니, 손수레(지금은 리어카)에 과일이나 냄비·솥 같은 일용품을 싣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저씨, 지게를 지고 장꾼의 짐을 나르는 지게꾼, 가게 앞에서 손님을 끄는 식당이나 주막의 아가씨들 모습이 담겨 있다.
세피아빛으로 빛바랜 사진을 새삼 들여다보며,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어수선하고 혼잡하며 혼돈스러운 시장이야말로 한국인의 그 ‘소용돌이 무늬’ 같은 활기 넘치는 카니발적 퍼포먼스의 뿌리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런 시장 풍경이 쉽게 사라지거나 변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부산의 특징적인 두 시장을 소개해 보자. 하나는 노천 수산물 시장으로 유명한 자갈치시장이다. 이곳은 부산 항구를 따라 길게 이어진 해안의 해산물 시장으로, 갈치·조기·도미·가오리·대구·가자미 등 한국인이 즐겨 먹는 싱싱한 생선을 좌판 위에 늘어놓고 목청껏 외치며 파는 노점 생선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그 곁에는 붕장어를 고추장 양념에 재워 구워 주는 포장마차, 해삼·멍게·굴을 날것으로 맛보게 하는 노점이 있고, 쪼그려 앉은 아저씨들이나 연인들이 작은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어선에서 막 내려온 새우나 오징어를 골라 회로 떠 먹는 일은 이 시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러운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6·25 전쟁 때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가진 것을 내다 팔면서 ‘시장’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커졌다고 전해지는 '국제시장'이다. 의류 거리, 전기제품 거리, 신발·가방 거리, 기계 부품 거리 등 거리 전체가 하나의 ‘백화점’처럼 이루어져 있어, 가정용품에서 공업용품, 건축 자재에 이르기까지 ‘상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무엇이든 다 있다고 할 만큼 대규모 시장이다.
수입품 전문으로 한국에 공식 수입되지 않았을 법한 일본산 간장과 된장까지 진열된 ‘도깨비시장’, 여자아이들이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김밥과 어묵을 먹고 있는 ‘먹자골목’ 등, 보고 먹는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986년 1월)
Ⅱ 부산통신 · 1982~1986
07 사라진 거리
● 07-7 동신국민학교 1학년 7반
어릴 적 나는 학교가 싫었다. 몹시 내성적이고 신경질적인 아이였는데(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늘 웃는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선생님께 말을 거는 일이 무척 서툴렀다(초등학교 때 두 번, 중학교 때 한 번 전학을 한 탓인지도 모른다). 같은 반 아이들과 잘 친해지지 못해, 쉬는 시간마다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무리를 지어 노는 모습을 한쪽에서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음침한 아이―그게 바로 나였다.
우리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큰아이를 부산 시내의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시킬 때, 내가 남몰래 걱정했던 것은 이런 ‘학교 싫어함’(이라기보다는 학교 공포)이 혹시 아이에게도 잠재적으로 유전되어 있어, 이미 일본인 아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놓인 아이를 더욱 불안한 심리 상태로 몰아넣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올해 3월부터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큰아이의 반은 ‘1학년 7반’. 담임은 김 선생님이라는, 인상 좋은 베테랑 여교사였다. 이 정도면 어떻게든 괜찮겠지 하고 일단 안심했다. 이름은 유치원 때부터 성을 빼고 이름 세 글자(한글로)만 사용해 왔다.
한국식 ‘통명’을 쓰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창씨개명’이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한자 이름을 한국식 독음으로 읽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큰아이의 이름 ‘미사키’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대로 쓰기로 했다. 아마 같은 반 아이들은 성이 ‘미(美)’이고 이름이 ‘사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일본의 란도셀이 아니라 등에 끈을 메는 ‘손가방’(모순된 표현이지만)을 메고, 아이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가끔은 동네 친구가 데리러 와 함께 등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이 뜸해졌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 지각 직전이거나, 실제로 지각해서 학교에 뛰어 들어가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지각 버릇’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지각 버릇도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밥을 먹는 아이를 야단쳐 학교로 떠밀어 보낸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제법 어엿한 ‘국교생’처럼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도 어떻게든 잘 적응하고 있구나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학교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미사키 군의 부모님께”라는 정중한 편지를 받았다. 문장은 몹시 고풍스럽고 품위 있는 일본어로 쓰여 있었고, 미사키 군이 성실하고 씩씩하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성적도 꽤 좋다는 소식을 전한 뒤, 마지막에 ‘부탁’이라며 지금보다 10분 정도 더 일찍 집을 나서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춰 등교시키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놀랍게도 우리 아들은 한 달 가까이 정확한 수업 시작 시간을 모른 채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꼭 10분씩 늦게 오는 아이를 두고 얼마나 고민했을지, 일본어가 가능한 교감 선생님에게 편지를 부탁했을 김 선생님의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늘 모두가 다 모여 있는 교실에 태연히 들어가던 아이의 ‘무신경함’도 대단하다.
마음 약한 나 같았으면 하루 만에 혼이 나서 다음 날부터는 죽기 살기로 지각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나이가 들수록 이 점은 둔해졌지만). 그런데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지각을 해 왔다. 그 태연함에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것만큼은 결코 내 ‘유전’이 아니라고, 어느 날 밤 아내와 서로를 탓하며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민학교에 대해서는 여러 소문을 들었다. 그중 하나가 ‘부탁(촌지)’이다. 특히 1학년 같은 저학년이나 중학교 진학을 앞둔 5, 6학년 담임에게 많다는데, 매달 일정 금액을 봉투에 넣어 전달하는 관행이라고 한다. 내가 아는 한 국민학교 교사는 자신도 교사이면서 딸의 담임에게 매달 2만 원 정도를 건넨다고 했다.
소위 ‘좋은 학교’일수록 이런 관행이 많고, 한 달 평균 수십만 원의 수입이 있었던 사람이 격이 낮은 학교로 전근 가는 바람에 그 수입이 끊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학부모가 담임 교사에게 한턱내는 일은 일상적인 관습인 듯하다.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을 따르라’고 해야 할지 우리도 고민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외국인’이라는 특권을 활용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덧붙이자면, 그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한 일은 전혀 없다. 애초에 1학년 꼬마에게 성적이나 석차가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과외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이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부탁’은 ‘악습’ 말고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국의 국민학교와 일본의 초등학교의 차이라면, 우선 학생 수를 들 수 있을까. 큰아이의 ‘1학년 7반’은 학생 수가 56명이다. 일본이라면 꽤 큰 학급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반이 ‘7반’까지 있으니, 1학년 학생 수만 해도 엄청나다.
가을 운동회는 오전에 1~3학년, 오후에 4~6학년으로 나누어 2부제로 진행된다. 한 번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풍, 어린이 저금, 예방접종 등은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부모 참관이나 PTA(여기서는 ‘육영회’라고 부른다)도 있다.
급식이 있는 학교는 거의 없고 도시락을 가져가는 듯하다(1학년은 오전 수업만 하므로 필요 없다). 한국답다고 느껴지는 행사로는 월요일 아침의 ‘국기 게양’과 ‘국민의 맹세’ 제창이 있고, 또 1년에 몇 차례 ‘방공 훈련’이 있다. 삼각 두건 같은 것을 쓰고 학교 지하 대피소로 피하는 훈련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방재 훈련’을 하니 비슷한 것이리라.
2학기에 들어서자 큰아이가 집으로 가져오는 숙제가 많아졌다. 국어 교과서를 다섯 번 읽기, 산수 교과서의 그림을 노트에 옮겨 그리고 답을 쓰기, 그림일기 쓰기 등 하루에 몇 시간씩 걸려 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이렇게 숙제가 많았던가 생각해 보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자, 숙제다 숙제다 하며 아이를 방으로 몰아넣고 텔레비전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조금 과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북한 공산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공산군은 마구 총을 쏘았습니다. 대포도 함부로 쏘았습니다. 그날은 6월 25일입니다. 집과 학교가 불탔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죽은 사람도 아주 많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을 떠났습니다. 산으로 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도망갔습니다. ‘아, 다리가 아파.’ ‘아이구, 배가 고파.’ 집을 떠난 아이들은 울었습니다.” (「6·25 이야기」, 국정 교과서 『바른 생활』 1학년 1학기 중에서)
아들이 교과서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들으며, 발음이 좋은 데는 감탄하면서도, 그 내용에 대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으로 돌아가 ‘공산군’도 ‘국군’도 등장하지 않는 교과서를 보게 되면 어떤 문화적 충격을 받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로서 마음 한구석이 조금 아파온다. (1985년 12월) 206쪽
Ⅲ 韓国で考えたこ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