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자판기 외 2편
고성만
그의 하루는
남들이 일과를 끝낼 즈음에 시작 된다
매일 되풀이되는 생활 속
목마른 사람이 샘을 찾듯
낙타가 오아시스를 발견하듯
투입구에 돈을 넣은 다음 성급하게
구멍 안으로 손을 디밀었다가 앗 뜨거,
내지르는 비명을 듣는다 때때로
긴 복도 낭하 기역자 니은자 꺾어진 거리 돌아와
벽에 기대어선 사람들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늘 쪼들리지만 웅웅웅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생은 얼마나
가상한가 오늘은 어제보다 못할지라도
웅웅웅 좋은 날 올 거야
조롱박새처럼 시선 피해 들어온 어린 연인이
파인애플주스를 뽑아
나누어 마시는 것을 도와주었고
인사불성 취객에게 안면을 강타당할 뻔하면서
결국 비워질 컵과 깡통 가득 안은 그는
고독한 밤의 수호자
환하게 밝힌 불빛 찾아
하루살이 떼 날아드는,
옻
가장 먼저 물드는 나무를 찾아 온 산을 헤매었다 제 속에 품은 독기 때문에 안타까이 저무는 저녁
아름다운 소녀의 눈을 사랑한 청년은 성 안 우물로 몸을 던졌다는데 물로 바람의 일기를 쓰는 바다에 언제 닿을지 몰라 강을 따라가며 울던 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형 혹은 동생을 죽여 버리기 위해 사타구니에 숫돌 끼고 주머니에서 녹슨 칼을 꺼내어 날카롭게 갈아보지만 슝슝 가랑이 사이 비파 숨긴 여자 곁에 퍼질러 앉은 세월
가장 먼저 물들어 가장 오래 물들이는 나무를 베어다가 터럭이란 터럭 모두 벗어버린 닭다리와 함께 무쇠 솥에 넣고 푹푹 고아 들이마시면
발끝부터 머릿속까지 벌겋게 올라라, 옻!
고군산군도
달이 뜨면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두레박 줄 늘어뜨린 채
어느 날 하루는 왼발을 헛딛고
어느 날 하루는
오른발을 헛딛을 때
수평선에 피었다 지는 물꽃
어머니, 바다가 흐려요
비안도 무녀도 장자도 신시도 선유도
동학난리 인공난리 새만금난리
징글징글한 세월 속
온갖 난리 끝에
바다로 나가는 길이 막혀
눈썹처럼 떠있는 섬들
무명빛깔 눈물은
낮은 곳을 흘러가고
때때로
아버지같이 누워있는 섬, 섬들
달이 뜨면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걷기의 즐거움
어느 날 하루는 어깨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와 함께 걸었고 어느 날 하루는 물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오랫동안 부잣집의 청지기로 근무하다 회계를 잘못하여 주인마님의 눈 밖에 난 서생처럼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어떤 굳은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걸으라고 내게 부여된 두 다리를 움직였더니 걸음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직장까지 왕복 한 시간 정도를 걸었고, 조금 더 있다가는 야트막한 뒷산을 걸었다. 걷다 지치면 집으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를 한 병 산다. 마트 주인은 막걸리를 꼭 검은 봉지에 담아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병을 흔들면서 집으로 돌아와 커다란 대접에 따른 후 쭉~ 들이킨다.
매번 걸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처음 40분간 정도가 고역이다. 마음은 벌써 고개 너머에 있는데, 발은 터벅터벅 낙타 흉내를 내고 있으니 눈이 게으른 탓이다. 중도에 그만두고 싶다. 근육은 딱딱하고, 발바닥은 무덤덤하다. 정신은 산만하고, 뱃속은 더부룩하다. 시작이 반이랬지, 마음을 다잡는다. 한 시간이 지나면 반응이 온다. 조금 지쳤다는 뜻이다. 이제 슬슬 앉을 자리를 찾는다. 앉지 않는다.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예전에 몇 마디 배운 <사철가>가 제격이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을 찾어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다음으로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이어서 <대전부르스>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올 줄이야’ 그 다음은 <나그네 설움>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너무 처량해지지 않기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바꾼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마지막엔 군가 <행군의 아침>까지 부른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눈 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봄엔 봄의 노래를 여름엔 여름의 노래를 가을엔 가을의 노래를 겨울엔 겨울의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아는 노래가 별로 없다. 다음에는 더 많은 노래의 가사를 외워야겠다고 다짐한다.
한 번씩은 일상의 탈출을 시도한다. 무등산 옛길 1구간 ‘무진고성동문지~청풍쉼터~옛주막터~원효사’까지 걷다보면 내가 흡사 도붓장수가 된 기분이다. 헐거워진 가죽신을 끌고 가다 찔레 그늘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소복한 여인과 함께 밤을 보내는 그런 상상. 1구간에 이어 2구간, ‘원효사~서석대~입석대’ 코스로 간다. 주상절리의 바위가 여인의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다. 말 그대로 천연기념물이라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번엔 지리산 둘레길로 진출한다. ‘운봉~비전마을~흥부골자연휴양림~인월’까지 운봉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걷는다. 송흥록 생가에 이르러 다리를 푼다. 가을에 붉게 타오르던 비전마을 황산대첩비를 둘러싼 숲이 봄엔 연두로 부풀어 오른다. ‘운봉~서어나무숲~노치마을 회덕마을~구룡치 솔정지~주천’ 구간 중 특히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소나무 길은 일품이다.
나는 대개 홀로 걷는다. 걷는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인적 없는 산길,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발바닥이 뜨거워지면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 뇌의 명령을 받지 않는 다리는 자동 왕복 운동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내가 나를 잊는다. 길과 내가 하나 되는 중이다.
시가 떠오른다. 배고픔처럼, 그리움처럼, 나는 나에게 정직해지고 싶다. 내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고백하고 싶다. 하도 간절하여 마주 오는 여자에게 슬쩍 미소를 보낸다. 여자는 무시한다. 그래도 말을 건네는 척하며 다가가 껴안고 입을 맞추거나 젖가슴을 주무르고 싶다. 지치고 허기가 져 헛것이 보인다.
농약가게 빵집 우체국 펜션 교회를 지날 때 배낭 속 물컵이 딸랑거린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들어간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친 사내는 길 위에서 생을 끝마칠 거라 했다 국도를 달리는 차들이 아슬아슬 비켜가고 몇 장의 고지서 청첩장 부고가 날아와 쌓이는 동안 바다로 향하는 강엔 기러기 울음소리 산으로 다가가는 마을엔 마른 연기 자국 뻐꾹채 쑥부쟁이 벌개미취 비로용담 천남성 백리향 하늘말나리 만나러 오늘도 걷는다, 나는.
고성만 / 1963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