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 그 흘러가는 이름 이야기
박 상 인
바야흐로 물의 계절이다. 아니 그보다 물이 그리운 계절이라고 해야 옳겠다.
시원한 한잔의 찬물. 바위사이로 소리쳐 흐르는 계곡물. 드넓은 바다 만리포 바다며 아직 가보지는 못하고 그림으로만 본 저 멀리 하와이 와이키키. 남태평양 그 투명한 바다며, 그런데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중한 것은 한글자로 돼있다. 해 달 별 산 밥 돈 금 흙 돌 님 --물, 그 물을 일찍이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이라 했지. 저기 산이 끝나는 곳에 물이 있고, 물이 시작하는 곳에 산이 있더라. 그래서 산은 물을 안고 물은 산을 감싸 안고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물이 있다.
삼면이 바다이고 국토의 3분의2가 산이니 이에 따라서 면면촌촌 골골의 물이 모이고 흐르는 곳이면 어디고 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난다, 잠시 시원한 물로 들기 전에 물이 지나가는 곳곳에 따라 갖가지 다른 이름이 있으니 저 흐름을 따라 물 이름을 찾아가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아 바지 단 걷어 올리고 따라가 본다.
우선 물이 소규모로 솟거나 나는 곳을 샘 또는 우물이라고 한다. 샘(泉)은 깊지 않아 바가지 등으로 쉽게 물을 뜰 수 있는 물이고 우물(井)은 깊어서 두레박 등 긴 끈이나 자루로 길러 올일 수 있는 물이다.
호남지방에서 천수답 논 뒷켠에 웅덩이처럼 물이 고인 곳을 둠벙(똠방)이라하고 경상도 산골에서의 벌생이라 하는데 박완서 소설 “내가 잃어버린 동산”에 나오는 군우물도 황해도 지방에서 부르는 물웅덩이의 다른 표현으로 모두 샘과 우울의 중간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샘이나 우물에서 솟거나 넘친 물은 액체인 물 그 속성상 위치에너지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 작은 물 흐름을 우리는 또랑(溝 구)이라 하고 또랑이 여럿 합쳐서 시내(溪 계)를 이루고 시내들이 몸피를 늘여서 제법 수량과 범위를 키워서 들판을 적tu가서 내(川 천)가 된다. 상형문자인 한자로 보면 우물(井)은 통나무를 잘라 귀맞춤을 한 형상 이고 이 내천 자(川) 또한 내리그은 것은 산이나 둑(堤이고 그 사이에 물이 흐름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본다. 이제 천이 세를 모아 강(江)을 이루며 자라서 좀더 큰 물, 큰 강을 하(河)라 한다. 그러나 이 강과 하의 구분은 뚜렷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예가 중국의 황하와 양자강이다. 하(河)가 대하가 되어 드디어 더 넓은 세상, 물바다(海=sea)로 간다. 그러나 더 넓고 깊은 바다가 있으니 그것이 양, 대양(大洋=ocean)이다. 보아하니 요즘 경영학에서는 대양도 그냥 두질 않고 피 튀기는 레드 오션(red ocean과 망망한 불루 오션(blue ocean)으로 나눈 단다.
우리는 이 작은 샘 또는 우물에서 나온 물이 바다에 이를 때 까지 수많은 형태의 이름을 달고 쉬었다 가기도 하고 격렬한 성깔을 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선 당(塘)과 지(池) 그리고 택(澤)을 보자. 이 세 가지는 모두 우리말의 <못>이란 뜻을 포함 하고 있다. 당의 예로는 연당(蓮塘), 춘당(春塘)이 있는데, 이는 흙 등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을 막아서 물을 잡아둔 곳을 이름이며
지(池)는 지대가 낮은 곳에 물이 모여 고여 있는 형태이다. 택(澤)은 지 와 같은 법위이나 다만 지(池)에 비해 그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은 못 즉 늪에 가까운 물을 이른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담(潭)과 호(湖)도 있는 데 이 두 가지는 그 깊이가 깊은 것은 공통이나 호(湖)가 담 보다 넓이가 넓은 것으로 쓰인 것 같다. 백록담(白鹿潭)과 영랑호 등에서 그 예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설악산이나 금강산 유람할 때 자주 본 탕(蕩)이란 무엇일까? 목욕탕, 십이선녀탕. 일반적으로는 폭포의 물이 떨어진 그 아래에 움푹 파인 곳을 탕이라 부르는데. 그러나 이것들이 그리 쉽게 구별되어 쓰이는 것 같지 않다. 나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질 않는다. 연(淵)은 하천이나 강의 절벽아래 깊이 파인 곳을 이르며 소(沼)는 호수보다는 얕고 넓이가 좁으며, 혹은 물살이 빠른 여울이나 물살이 부딪치는 절벽 한편이나 폭포아래 물이 깊은 곳을 이른다. 이 또한 두부모 자르듯이 나눌 수는 없다. 끝으로 탄(灘)이란 무엇일까? 현해탄(玄海灘), 월탄(月灘) 박종화 할 때의 탄. 물살이 거칠게 흐르는 여울을 말한다. 이 탄(灘)은 하천생태학상 용존산소량(DO=물에 녹아있는 산소의 양)을 높여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천을 직강화(直江化) 하면 이 여울 탄이 없어져서 더욱 오염되기 쉽게 되는 원인이다.
하나 더 우리가 지금 행정구역 단위로 쓰고 있는 동(洞), 신림동, 천호동 할 때 이 동이란 무엇일까? 전통생태학자인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이도원 교수는 글자에서 풀어낸다. 골짜기을 뜻하기도 하지만 즉 동(洞)이란 삼수(氵 =水)변에 같을 동(同)을 합친 것이니, 이는 같은 물을 먹고 쓰는 일종의 지역 공동체의 기본단위를 말한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절묘한 풀이이다. 한솥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 family)라하고 한 우물이나 샘물을 먹는 사람을 우리는 이웃, 또는 한동네사람 하니 뜻이 틀림없다. 그래서 물이 문화의 동질성을 만들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서 남이 아닌 우리로 살아오게 한다. 이렇듯 물은 우리 몸안에서 생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갈라놓거나 묶어 놓은 경계이기도 하다.
예외가 없는 일이 없듯이 위의 것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헛갈리는 것을 풀어보려는 것이 내 작은 의도이나 아직도 사뭇 혼란스럽다. 어느 누가 물의 이름을 명확히 가름 할 분 나왔으면 한다. 내 범위에서 이렇게 다양하니 과연 물의 변신, 물의 속성을 아는 데만 해도 일생이 걸릴 것 같다.
끝으로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없으나 우리는 이 물을 바라다보는 세 가지 상황에 각각 생각해야 한단다. 먼저 “흐르는 물을 볼 때는 지나간 것에 대한 무의미를 ---, 그리고 고요한 물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가라앉는 마음을 -- 끝으로 일렁이는 물에서는 번뇌하는 자기를 봐야할 것이다.” 가슴에 줄을 울리는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현자요산 지자요수(賢者樂山 知者樂水) 라는 말도 있는데 그 중에 현명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나는 어디로 갈거나-- 분명한 것은 석천고황 (石泉膏肓= 자연과 깊은사랑에 빠진 고질 병)에 든 것도 아닌 나는 어느 물가(沿)로 가서 고뇌를 씻을꼬― 일찍이 물의 철학자 노자께서는 상선약수 (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 설 했으니 물을 그저 물로 보지 말고 그래 물에서 답을 다시 알아봐야겠다.
소중한 것은 전부 외자(한글자)로 되었다. 별, 발, 길, 솔. 술. 꿀 돌--- 그래서 물도-
오늘 물 이야기 여기서 물 막음함.
<몇해전 대한항공 기내 사보 "스카이 뉴스"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첫댓글 저도 외자로! 와~ 흠! 예~
흐르는 물에서는 지나간것에 대한 무의미를... 일렁이는 물에서는 번뇌하는 자기를....물을 그저 물로 보지말고 물에서 답을....
은별 그리고 강릉댁은 영원한 그리고 든든한 이 노수의 빽. 수호천사. 치어리더. 메세나.또 뭐 있더라 -응 미네르바라던가? 크세쥬, 선재동자, 강력 써포터 -- 하여튼 그런 저런 쉐쉐(歲謝) 한분들, 결초보은 하리다.
격한 찬사에 격하게 올라오는 감격! 선생님 그늘이 큽니다.
마르지 않는 샘,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