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에베소서 제 28 강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에베소서 4:17-20절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17-So I tell you this, and insist on it in the Lord, that you must no longer live as the Gentiles do, in the futility of their thinking.
18-They are darkened in their understanding and separated from the life of God because of the ignorance that is in them due to the hardening of their hearts.
19-Having lost all sensitivity, they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sensuality so as to indulge in every kind of impurity, witha continual lust for more.
20-You, however, did not come to know Christ that way.
Point: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Introduction: 휴가동안 말레이시아 페낭을 다녀왔습니다. 가족들과 귀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기회가 되어서 장모님도 모시고 갔습니다. 이번 방문으로 모두 일곱 번 정도 말레이시아를 다녀온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제가 거의 투어가이드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안내해서 페낭힐이라는 산에도 가서 도시 전체를 설명하며 소개했습니다. 식물원에도 갔고 왠만한 문화에 대한 설명도 제가 할 수 있었습니다. 앎이 가진 유익을 가족과 나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botanic garden으로 불리는 식물원에를 갔습니다. 여러 가지 나무와 꽃들로 공원을 조성해 놓은 곳입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저는 딸들이 관심 갖는 원숭이에 더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딸이 저 때문에 넘어졌다고 토라지는 바람에 달래는 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식물에 조예가 깊으신 장모님은 연신 이곳 저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시면서 나무나 꽃들에 열중하셨습니다. 저는 꽃하면 좋아하는 백합을 포함해 몇 가지만 알지 그냥 꽃은 이쁜 꽃일 뿐입니다. 그러나 장모님께서는 열대기후에서의 꽃의 특징까지 설명하시면서 공원을 세세하게 살피셨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얇음과 아는 사람의 깊음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또 페낭이라는 도시는 두리안이라는 과일로 유명합니다. 이 곳의 두리안은 태국이나 다른 지역의 두리안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리안 투어’라는 관광상품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리’라는 말은 가시나 침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주 두터운 가시로 된 껍질 안에 그 과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리안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그 냄새가 거의 dung 냄새 수준입니다. 참고로 dung은 똥의 영어 낱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맛본 장모님이나 두 번째 시도한 아내는 완곡하나 확실한 거절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시식에 동참한 전재우간사와 주영자매는 ‘이거 너무 맛있는데, 맛이 아주 깊은데’ 하며 손가락에 묻은 것까지 쪽쪽 빨아 먹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제 그 냄새가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연 두리안은 king of fruit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는 사람의 즐거움과 모르는 사람의 괴로움이라고나 할까요!
Point 1: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오늘 본문도 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이방인’, gentile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여기에 이방인이라고 나타나는 단어가 곧 모르는 것을 대표합니다. 이방인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바벨리언, 무식한 야만인입니까? 아닙니다. 이방인의 정의는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 이것이 없는 사람,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것이 이방인의 정의입니다.
또 20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을 영어 번역은 you did not come to know Christ that way 이렇게 나오는데 여기서 ‘배우다’를 come to know 즉, ‘알게 되다’ 이렇게 번역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분과 교제가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가장 현저한 특징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를 보세요.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이것이 우리 믿음의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이 축을 가지고 바울은 누가 그리스도인이며 또 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모르는 것’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보세요. 이방인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의 교제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17절을 자세히 보면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렇게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사적인 권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 안에서 증거하는 것, 다시 말해 지금 말하려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살고 죽음을 결정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이 내용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증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른채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와 피조물이 그 의미를 모르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얘기합니다.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 모르는 것, 즉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알지 못하는 상태의 특징을 얘기합니다.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17절에 나오는 대로 ‘허망’입니다. 영어로 헛됨, futility라고 번역된 마타이오테스라는 이 말의 뜻은 ‘아무 목적없이, 맹목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리석음’ 나아가서는 ‘거짓 종교’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이 허망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 생각 가운데 삶의 구체적인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망하게, 아무 목적없이, 맹목적인 그런 삶의 모습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허망’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허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을 끝내고 나서 느끼는 허탈감, 어떤 프로젝트의 리더로 일을 끝내고 갖게 되는 묘한 공허감, 파트너를 바래다 주거나 보내주고 나서 밀려오는 허전함! (뭐, 그런 허전함이라도 한 번 경험해 보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시간은 갑니다. 그리고 시간은 옵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태훈간사를 보십시오) 또 휴가를 마치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일을 보며 한숨과 함께 밀려오는 그런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열심을 품고 일을 합니다. 굉장한 열심을 가지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그 근본적인 목표가 없는 삶을 사는 삶이 바로 본문이 얘기하는 허망함입니다.
최근에 40대 남성의 과로사를 들었습니다. 총망받는 중견사원으로 인정도 받고 더 인정을 받으려고 불철주야 일에 매달린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쓰러졌고 그리고는 다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 분은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라 천국의 소망을 향해 가셨지만 그 남은 청소년기의 자녀들과 아내는 얼마나 큰 삶의 허망함과 슬픔을 가지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경우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어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게 보입니까? 보세요. 여러분, 이런 이들에게 열심이 없습니까? 노력이 없습니까? 분투와 땀과 눈물이 없습니까? 진한 노고가 없습니까? 이 모든 것이 있었음에도 깊은 허망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특히 젊음의 시기에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을 자극하는 요인과 요소가 있습니다. 학생에겐 학점이 그렇고 학점이 보장하는 미래의 내용이 그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직장인에겐 연봉이 그렇고 약속되는 승진의 자리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열심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에 매달립니다. 모든 열심을 다해 그 goal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저한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믿음의 공동체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을 자극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처럼 에너지가 넘칠 때는 그 에너지를 자극하는 요소가 열심을 이끌어 냅니다. 예를 들면 늘 10-20분 늦게 나타나던 사람이 정각에 혹은 정시보다 10분전에, 한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콩깍지가 씌인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일찍오는 분들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있으므로 말씀도 있다. 그대도 있고 말씀도 있으니 더욱 좋다. 그대 여기 충만하므로 말씀도 충만하도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는 데 대부분 꽝됩니다. 제 청년 목회 경험상 거의 꽝입니다. 허망으로 결과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먼저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앞서가야 합니다. 말씀의 충만, 그 말씀을 제대로 통과하는 그 과정이 먼저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알찬 것이 따라옵니다. 허망과 반대인 꽉찬 것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가장 합당하고 가장 적절한 것이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태훈간사를 보세요. 말씀 따라가서 건져 올린 자매가 얼마나 합당하고 적절하며 꼭 맞습니까? 태훈간사, 제 말이 맞지요? 올해 결혼하는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합당’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영어로 worthy, 가치 있는 혹은 fit, 알맞은, 적절한,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저는 이 단어가 본문의 ‘허망’의 반대가 되는 단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삶이 흘러가는 곳이 결국 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분과 교제하며 가는 인생에게 가장 합당한 것들이 주어짐을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허망한 상태의 마음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어떤 방향과 결과로 나아가는지를 더 설명합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8절을 자세히 보면 17절에서 말한 ‘이방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있으면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총명이 어두워진다’ darkening of the understanding 또는 ‘마음이 굳어진다’ hardening of the heart 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 혹은 하나님을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경우에도 물론 나타납니다. 그것이 본문의 지적입니다. 그런데 좀 더 넓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더 이상 알기를 거절하고 그 거절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게 됨을 말합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마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가? 먼저는 허망한 상태, 그리고 이제 총명이 사라지는, 다시 말해서 영적인 지각이 사라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영적인 소경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해 봅시다. 자, 상황이 있습니다.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떤 happening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관련해서 해석할 줄을 모르는 것이 바로 영적인 시각장애를 겪는 것, 곧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있고 총명이 있고 마음이 연한 사람은 상황을 하나님과 관련지을 줄 압니다. 하나님이 담아 놓으신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나타납니다. 또 나아가 믿음을 경솔히 여기고 말씀을 떠나가는 이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후자의 의미에서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 밑에 지방사투리 중에 ‘디비쪼운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림공부-명절이나 장례식장 가서 밤새면서 하는 그런 공부있지요- 그 그림공부용어 같은 데 열심을 내서 정성을 다해서 온 열정을 쏟았으나 나가리만 되는-나가리의 뜻은 부모님들께 물어보세요- 뭐 그런 상황을 보고서 ‘너, 그만 좀 디비쪼아라’ 이럽니다. 또 밤샘으로 벼락치기해서 공부했는데 헛다리를 집었어요. 이게 디비쪼운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nothing입니다. 가기는 가지만 눈을 감은 채로 간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잘못가면 가면 갈수록 손해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내용을, 그리고 말씀의 가치를 이런 차원에서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말씀 따라가는 것이 바로 이 총명의 밝음으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부드러움과 건강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가 아니고 또 말씀으로 거절하며 사는 것이 영적으로 눈먼 상태로 사는 것이며 이것은 자기에게도 불익이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영적인 지각이 사라지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지각이 사라지면 쓸데없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쓸데없는 맹세가 생겨나고 쓸데없는 외침이나 구호나 열심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하고나면 남는 게 없고 마음까지 허탈합니다.
사무엘상 14장으로 가면 사울왕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울왕이 말씀을 떠나가는 시점의 일입니다. 블레셋과의 일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24절을 보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자, 보세요. 사울왕이 이제 자꾸 말씀을 떠나는 시점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자체에 취해가는 시점입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의 책망도 들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그에게서 어설픈 경건이 나옵니다. 총명이 어두워지는 모습입니다. 열심은 있는데 방향이 없고 서로가 피곤해지는 길로 들어섭니다.
보세요.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는 잘 먹고 그래서 열심히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하는 맹세를 보세요. ‘금식하자. 금식 범하는 놈은 저주 받아라.’ 이런 어리석은 맹세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맹세를 모르고 아들 요나단이 꿀을 찍어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이 밝아졌더라’ 힘이 다시 새롭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전쟁 중에 이런 회복이 있으니! 그런데 이게 저주 받을 일이라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이것을 듣고 요나단이 하는 말을 보세요. 29절 이하입니다.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자, 여기를 보세요. 요나단이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그것입니다. 상식만 가져도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는데 전쟁에서 왠 금식이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임신한 부인이 태중의 아이와 자신의 경건을 위해서 금식에 돌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야, 너는 경건하게 자라야한다. 그러므로 이 엄마가 삼일, 아니 조금 더 하자. 오일 금식에 돌입한다. 믿음으로 자라거라’ 이런 산모는 밥통산모예요. 금식은 무슨 금식입니까? 배터지게 먹어야 그게 정상입니다. 둘이 몫을 먹어야 하니까. 그래서 한 10kg는 기본으로 살이 쪄야 산모도 건강하고 아기도 건강한 것입니다.
보세요. 총명이 사라지면 이런 상식적인 판단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사라지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거절하기 시작하면 가장 중요한 때에 이런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리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절하면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19절을 보세요.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자,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 즉 감각이 없는 사람이 나아가는 길이 어디입니까? 허망으로, 그리고 총명이 없으므로 나아가다가 결국 도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본문을 보세요. 더러움입니다. 그냥 그렇게 더러움에 빠져버립니다. 더러운 줄도 모르고 자꾸 더러운 곳으로 가게 되고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되고 그곳으로 자꾸 자꾸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욕심으로 행하되’를 욕심의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continual lust for more 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움에 푹 빠져 버리고도 그 더러움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안 좋은 비유인데요 또 자칫하면 인격모독이 될 수 있지만 잘 헤아려 비유로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몽골사람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 잘 안 씻습니다. 물론 물도 귀하고 또 씻는 시설들이 부족한 문화에서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줄로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좌우간 잘 안 씻습니다. 머리는 대개 떡져 있고요 냄새도 오랫동안 쌓인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니 서로가 더러운 줄 몰라요. 그냥 그게 생활이니 하고 지냅니다.
그러다가 이들 중에 한국엘 들어와서 좀 씻는 문화에서 직장을 가지고 근로자로 체류하던 사람들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이제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세요. 좀 씻는 문화입니까? 사우나 시설이 곳곳에 있습니다. 요즘은 찜질하고 샤워하고 황토욕하고 목욕하고 장난이 아닙니다. 집에서도 매월 샤워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목욕비누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런 문화에서 지내다가 돌아가는 몽골근로자들이 냄새의 차이, 더러움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것을 불편해 한다는 얘기를 지난번 비전트립 때 들었습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더러운 것도 그 안에 오래있으면 그 나름의 정당화된 논리가 생깁니다. 죄의 정확한 성격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 안에 있어야 되는 자기 나름으로 정당화되고 정교한 논리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못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깨고 못나올 정도로 견고해 집니다. 나아가 그것을 교묘히 즐기며 또 그에 대한 합당한 근거까지 만들어 놓습니다. 인간의 깊은 죄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드러나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모든 더러운 것은 속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또 모르게 되고 나아가 모르는 길로 나아가면 결국 이런 더러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더러움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더러움의 이 성격, 죄의 이 성격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인생은 이 길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 그를 아는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 다시 말해 복음을 아는 것, 나아가 복음의 정수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확히 아신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십니다. 나를 아시고 상세히 아시며 나의 강한 부분도 아시고 나의 약한 부분도 아십니다. 나의 기질도 아시고 내가 넘어지는 부분도 아시며 나의 한숨도 아시고 나의 좌절도 아십니다. 나의 마음도 아시고 그 깊은 상처도 아십니다. 그 상처 하나 하나도 아시며 또 그것을 싸매시는 법도 아십니다.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그 분을 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배우는, come to know Christ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통해서 볼 때 세상적으로 보면 되게 재수 없는 한 지파가 있습니다. 억세게 운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 잘못하는 바람에 완전히 시쳇말로 재수 옴 붓은 그런 지파가 있습니다. 바로 단지파입니다. 단지파가 제비뽑아서 얻는 지경이 어디입니까? 바로 블레셋 옆입니다. 강력하며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또한 구약에서 믿음의 대적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블레셋 바로 옆에 단지파가 위치를 합니다. 그들은 두고 두고 제비뽑은 그 지도자를 원망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많은 좋은 땅을 두고 왜 하필 이런데야?’ 이러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누가 미워서 일부러 그런 땅을 마련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unfair하신 불공평하신 분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석으로 인생을 몰아넣으신다면 그것은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선한 이유가 있으시고 또 그에 대한 대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아시기에 그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그것을 통해 가장 합당한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아시므로 그 사실을 인생이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보세요. 누가 단지파 출신입니까? 삼손이 단지파입니다. 참으로 특이한 성령의 사람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처럼 수태고지, 즉 천사를 통해 그 출생을 알린 바로 그 삼손이 단지파입니다. 삼손과 함께 믿음으로 단지파가 일어섰으면 블레셋이 아니라 울트라 블레셋이라도 단지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 앞에 블레셋이 벌벌 떠며 도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시대에 단지파 가운데 믿음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너무나 희귀했습니다. 아예 없었습니다. 사실 너무 외로운 삼손이었기에 약점이 틈이 되었고 그 틈으로 그가 넘어진 것입니다. 그에게 만약 믿음의 동지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의 연약을 위해 격려하고 중보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면 삼손은 아마도 요셉이나 엘리야나 엘리사를 능가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을 정확히 아시는 그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배우지 않으려했기에 너무나 비통한 사사기의 기록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아시고 또 세밀하게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그렇게 아시는 바로 그 분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깊이 새기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이번 저의 휴가 기간은 제가 가족을 다시 아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무엇보다 감사했습니다. 일주일정도를 거의 24시간 같이 있다보니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딸들이 바다만 보면 아주 멜랑꼴리하게 변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제 아내가 수영하고 나올 때 촉촉한 찰랑이는 머리가 아주 아주 챠밍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추가로 재우형제가 거기서 더 깜해질수도 있구나하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현지인입니다. 현지에서조차 현지인으로 인정안하고 태국인이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믿음 안에서 서로를 알아감 그 자체가 축복이며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길로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거절하는 그런 허망한 길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더욱 더 경계하세요. 그리고 더욱이 더러운 것을 지혜를 가지고 피하시기 바랍니다.
또 분명히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십니다. 너무나 세밀하고 정확히 아십니다. 아셔서 회복시키시고 가장 귀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아십시오. 그 진리를 힘써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의 축복을 넘치게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허망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쉽게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려고 합니다. 어느 틈엔가 더러운 것을 더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를 아시고 또 너무도 분명히 아시는 아버지를 힘써 알며 배워가게 하시옵소서.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