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냐, 미륵 너는 이 정도의 대접은 받을만하지. 허나, 적수로 나를 택한 것은 잘못이야."
"대감은 이 상황에서도 순장을 말하시는지요?"
적수(適手)라는 말은 바둑의 호선 상대를 말한다. 호적수는 좋은 상대라는 말이다.
"고수는 판세를 보고 투석도 할 줄 아는 법, 니가 한 집단의 두령으로 오늘 힘든 결정을 해야겠구나.
술을 들여라."
박원종이 부하들에게 술을 들이라 명했다. 그의 주변에는 삼군부의 장수들 10여 명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 중 미륵이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박원종은 그만큼 치밀했다.
"투항을 요구하는겁니까?"
"그렇다. 사생결단을 사양 않을 너임을 알기에 협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백칠십 명을 조금 넘는 것으로 파악된 서강패를 도륙이야 내겠지만 그러러면 삼군부의 병사들도 수백 명은 죽어야 할 터. 도성안을 피바다로 만들어 누가 무엇을 얻겠느냐?"
박원종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흥분하지 않는 지휘관의 덕성을 잘 갖춘 인사였다.
"협상이라면 줄 것도 생각 하셨을 터?"
"너의 단과 재산을 온전하게 보존해 주마. 뒷배도 보아주지."
박원종은 피의 쟁패는 피하고 싶은 듯했다. 그는 자신과 미륵의 공존을 요구했다. 원하는 것은 미륵의 목숨이겠으나 그것은 미륵이 거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원하는 것을 말하시지요?"
"너와 당래 막장대 그리고 무반 출신의 용호라는 놈의 목을 원한다."
"... ...!"
미륵은 자작으로 술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박원종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단의 머리를 요구했다. 뱃속이 뜨거웠다. 그러나 결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중에서 용호를 빼 주시요. 단에 머리 하나는 있어야 할 터..."
"좋다. 하하하, 역시 너는 조선의 대장부다. 영문이보다 나를 먼저 만났다면..."
"방금 전의 약조를 담보할 수 있겠는지요?"
미륵이 박원종과 그의 제장들을 일별하며 물었다. 장군 박원종의 약속을 그의 부하들에게 각인시켜 두고 싶었다.
"장부의 말이다. 우리 무인들은 그걸 법이라 하지. 미륵 나는 너를 조선의 협객으로 기억하마. 시간은 아침 동뜰 때까지다."
"한잔 더 주시죠."
미륵이 술잔을 박원종에게 내밀었다. 박원종이 그 잔을 넘치게 채웠다. 미륵은 그 잔을 다 비우고
군영을 나왔다.
"비호?"
가는 봄비가 내리는 길을 걸어 적소로 돌아오며 미륵은 비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비호가 속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미륵의 결정을 다 지켜본 그였다.
"비호 부탁이 하나 있다. 너는 나의 그림자... 단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너의 것도...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이 말을 새기고 앞날을 가거라."
"크흐! 무슨 말씀이신지?"
미륵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성큼 적소로 들어갔다. 가는 봄비가 얼굴로 흘러내려 쏟아지는 눈물을 가려 주고 있었다. 미륵도 비호도 울고 있었다.
"형님, 어찌 되었는지요?"
당래가 산덩이 같은 등치를 흔들며 미륵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협상이란 말에 한가닥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인가. 미륵이 장검 대신 품속의 비수를 꺼내 당래의 복부를 찔렀다. 손이 뜨거웠다.
"커헉! 형...?"
"당래야, 미안하다. 모든 업은 너와 내가 지고 가자."
미륵이 숨을 놓아버린 당래의 눈을 가려 주고 옆으로 다가온 막장대의 심장에 다시 칼을 꽂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용호?"
"두령...?"
용호가 기겁을 하며 옆으로 다가왔다. 당래와 막장대의 상황을 보고 사태를 파악했을 것임에도 피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전 종도들이 굳어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어둠과 비가 함께 쏟아졌다.
"앞으로 막영감의 자리를 이어받아 비호를 잘 보필하라. 황단, 아니 서강단의 2대 두령은 비호다.
알았느냐? 알았어?"
미륵이 하늘을 향해 종도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그 소리는 늑대의 울음이자 호랑이의 포효였다.
"네이~ 두령!"
종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그들 모두가 울었다.
"용호 니가 나의 목을 거두어 새로운 두령을 모시고 박원종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쩌억!
천둥이 쳤다. 하늘이 번쩍 하고 갈라지 듯했다. 미륵이 고개를 늘어 트렸다. 봄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 비 그치면 누구는 매화꽃 만발한 서강가를 걸어 춘3월의 방천둑을 걸어가겠구나. 누구는 강둑을 걸으며 지심귀명례를 읊고 또 읊으리라.
시방삼세제망찰해상주일체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제망찰해상주일체달마야중
지심귀명례
... ...
지심귀명례...
20. 흰소를 타고 탑을 돌다
유원무진대비제망찰해상주일체승가야중
지심귀명례
유원무진삼보제가제세수아정례명훈
지심귀명례.
집주인이 수감되고 잠시 머물던 하숙생들 또한 모두 떠난 자명사에 지심귀명례가 꺼졌던 향 내음 속에서 들려왔다.
윤명의 독경은 거의 한 시간 이상을 끌다 그치고 작은 법당 앞의 마루에서 기다리던 노경위를 맞았다.
"지심귀명례가 무슨 뜻인지요?"
"법륜이지요."
"법륜이라면...?"
"이리 굴러 와서 저리 굴러 가는... 바람은 경계가 없지요. 다만 경계가 있는 것은 오직 금도뿐..."
"금도라고요?"
"마음의 금을 말하지요. 우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 담장보다 성벽보다 높은 금도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속에 유폐되어 고통스러워 하죠."
윤명이 마루에서 내려와 경내 한쪽에 있는 부도 옆으로 가며 말했다. 부도는 파릇파릇한 잔디와 이름 모를 풀섶을 벗삼아 따뜻한 봄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바람은 걸림이 없다는 말인가요?"
"바람은 이리 부는 현실이지만 기실은 저곳에서 와 저곳으로 가는 시간이지요. 부처님이 말한 무상이지요. 저 가막한 시간 앞에 강철도 녹이 슬어 바스러지지 않던가요? "
"어려운 말이군요?"
"아뇨. 어찌 이 말이 어렵다 하시나요? 경찰을 그만 두셨다죠?"
윤명이 부도를 손으로 쓸어 보며 말했다. 단단한 화강암이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기운을 그녀는 즐거워 했다.
"그랬습니다. 사직서를 냈지요."
"아직도 살날이 많은 분이 생도지망을 놓으면 어쩌나요? 어머? 나리꽃이네..."
윤명이 부도 옆에 노랐게 핀 작은 꽃을 보고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노경위는 한국기원에서 돌아 오던 그 골목의 기억을 뒤로 하고 사직서를 냈다. 소영이의 죽음을 앞둔 때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다.
"백회장은 면회하셨나요?"
노경위는 윤명에게 물었다. 백학은 검찰에 소환되어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조명인 윤명 백학이 동시에 불려가 조명인과 윤명은 풀려났고 백학만이 살인 혐의가 아닌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영장이 떨어진 상태였다.
직접 살인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 검찰이 그를 캐다 필리핀의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 혐의를 잡고 그것으로 기소를 한 것이었다. 남일수 사건의 수사 확대는 죽을 쑨 것이었다.
"아뇨. 그분이야 금방 나올거고. 참, 박태보 그 양반이 남거사를 죽인 거 맞기는 맞나요?"
윤명이 다시 법당으로 가 마루 위에 앉으며 말했다. 햇살이 마루 위를 환하게 비추는 한낮이었다.
"그가 남일수를 죽인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 누가 죽였을까요?"
윤명이 햇빛을 한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고 강렬했다.
"끄응."
"호호, 고민이 계시군요? 노선생은 남거사를 죽인 사람을 알고 있는 듯 하군요?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나무관세음... 이 법당의 벽에 그려진 저 그림 아세요?"
윤명이 갑자기 화제를 돌려 법당의 벽에 그려진 벽화를 물었다. 벽에는 소와 소년과 스님이 그려진
열편의 벽화가 법당을 빙둘러 그려져 있었다.
"십우도 말인가요?"
"내가 처음 자명사를 구입했을 때 직접 그린 것이지요. 잊으세요. 사람은 죽었지만 인연은 이어지잖아요. 그것이 경찰을 사직한 계기가 되었고..."
"죄없이 감옥에 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호, 그 또한 업이고 팔자소관... 그는 그런 업장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니 자학하지 마세요."
윤명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담담하고 여유가 있었다. 과연 신통이라더니 자신이 처한 상황 앞에 너무도 담대했다.
"신안을 얻으면 정녕 귀신이 보이나요?"
"귀신은 바로 나고 당신이지요. 우리는 바로 우리들의 어제의 귀신이며 내일의 귀신이니까요."
"얼마전 여러번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윤화백을 꼭 닮은 조선 여인을요?"
"초명 보살을 본거군요. 이 자명사에 담겨진 한 사내의 한과 꿈을 추적하니 그가 꿈에 나타난거지요."
"... ...?"
노경위는 윤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법당 옆의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를 한 바가지 떠 마셨다. 물이 차고 거칠었다. 쇠맛이 묻어 있었다.
"아이는 어찌 살고 있나요?"
"다래 말인가요?"
"아이 이름이 다래였던가요?"
노경위는 물바가지를 놓으며 다시 마루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지엄한 법당의 금도 앞에서 빼어든 담배는 속절 없이 허리가 꺾였다.
20. 흰소를 타고 탑을 돌다
"윤화백은 미륵이란 사내를 신으로 모신 당골이기도 하다면서요?"
"맞아요. 나는 초명 보살이라는 저 조선시대를 살던 한 여인의 한을 연기로 하여 그의 연인 미륵을 신으로 몸에 받고 사는 당골이기도 해요. 그러니 나는 초명이고 미륵이기도 한거죠."
"그렇다면 남거사를 죽인 범인도 알겠군요?"
"그게 중요한건가요? 연기로 이어지는 업이 오직 두려울 뿐이지요."
윤명은 다시 법당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에 작은 쇠방울을 들고 흔들며 귀신을 불러내는 호령을 시작했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딸랑.
"옛날 초명이라는 아름다운 가인이 있었지요. 역정의 삶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거친 윤회의 바다를 건너 만다라에 가고자한 여자였지요."
윤명이 방울을 흔들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올려다 보이는 북대에 앉아 있는 미륵불의 광배에 비친 햇살이 반쯤 환한 환희의 비단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기 시작했고 호흡은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휴..."
윤명이 잠시 접신(接神) 현상을 보이다가 평온을 되찾았다. 미륵불의 뒤에 펼쳐진 탱화 속에 있는 사천왕이 칠성검을 들고 노경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눈 같은 커다란 눈이 안광을 반사하는 듯 했다.
"남거사와 나는 한 마을에서 자랐지요. 그때는 남거사가 조명인보다도 바둑을 잘 두었어요. 남거사는 대대로 순장을 잘 두던 집안의 역사가 있고, 역관 집안이던 조명인도 바둑의 일가(一家)인지라 두 사람은 어려서 경쟁자였어요. 물론 남일수는 조부대에 와 집안이 몰락해 여건이 안되었지만 조명인은 대처로 이사하여 승승장구 명인이 되었지요. 남거사는 그런 친구의 빛을 피해 그늘로 떠돌며 유랑을 했고요. 나는 그런 남거사를 후원하며 지금껏 우정을 지켜 왔네요. 옛날 미륵이란 사내는 바둑의 고수를 하나 키웠는데 결국 그의 배신으로 명을 접었지요. 초명 보살은 바로 이 자리에 절을 짓고 미륵의 천도를 돕고 배신자를 저주했지요. 본인 당대에 죽이지 못하면 친 자식에게 패륜을 당하는 생시 무간지옥도를 원하며..."
"하여 복수를 했나요?"
"진실로 불법을 얻은 불자는 한계가 있지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실로 용서하는
것이란 진실을 알기에... 아, 두렵고도 두렵도다. 저 어린 것이 맨발로 지옥도를 걷는도다."
"... ...?"
윤명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쇠방울을 거칠게 흔들며 스프링을 발에 단듯 한자 이상을 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어 허! 광대 무변 미륵 신아?
어 허! 구천 원혼 사랑 신아?"
저 어린것을 어쩌자고 버릴건가. 어 허 ! "
"... ...?"
노경위는 법당을 나와 약수터 옆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윤명이 드디어 접신을 받고 강신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골의 언어로 어린 것을 찾고 애타하며 울고불고 떼를 썼다.
"어 허! 아이는 안됩니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죄일까? 어 허! 광대 무변 미륵 신아, 구천 원혼 사랑 신아...!"
노경위는 언제 끝날지 모를 윤명의 강신의 장면을 바라보다 법당의 벽에 그려진 십우도를 일별했다.
아이가 소의 꼴을 먹이러 소와 함께 사에 간다. 아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리의 소리에 한눈을 팔다 소를 잃어버리고 그 소를 찾아 온산을 헤메고 다닌다. 지친 아이가 울면서 산을 내려오다 문득 자신이 소의 등에 타고 있음을 알고 득도를 하는 벽화를 보면서 노경위는 무덤덤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노경위는 염불 주사로 점철된 불가의 실상이 멋적었다. 살고 죽고 사랑하고 절망하는 인간살이 속에서 흰소는 무엇이며 소등에 탄 아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덜커덩.
덜커덩.
윤명의 강신은 요란했다. 그녀의 가녀린 몸 어디에서 그런 폭발적인 힘이 나오는지 법당이 흔들릴 정도로 박력이 있었다.
염불을 하고 굿을 하고 탱화를 그리는 여인, 그 하나 하나에 단정함과 무게감까지 있는 윤명의 붉고 뜨거운 혼이 법당을 태우고 그 주변의 공기를 모두 태우는 듯 했다.
"후!"
노경위는 무등을 타고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벽화 밑에 쭈구리고 앉아 깍아지른 법당 뒤편의 바위를 올려다 보았다. 새삼 서울안이지만 지금 여기는 도피안이었다.
"지금 오셨어요?"
"엉?"
노경위는 여자의 소리에 기겁을 했다. 윤명이 다가와 언제 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녀는 식은 땀으로 온몸을 목욕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언제 왔느냐뇨?"
"그럼 온 지 오래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노경위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아, 이 여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20. 흰소를 타고 탑을 돌다
다래가 늦도록 오지 않았다. 인근 바둑 교실에서 다래의 학원에 고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 원장이 대국을 시키려 한 아이를 데려와 대국중이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지방 연구생으로 작년
입단 문턱에서 좌초한 아이라 했다.
"하하 다래가 한 바둑 하기는 하는 모양이야. 오래간만에 청소나 좀 해줄까."
노경위는 소영이 죽고 나서 처음으로 그 방을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다래가 워낙 깨끗하고 부지런 해 깨끗한 편이었으나 높은 곳 구석구석에는 먼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깔끔 하기도 하지."
노경위는 다래의 정리 정돈에 감탄을 하며 책장 구석구석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곳에서 경황 없이 치워 놓았던 소영이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한쪽에 세워 놓으려다 중간쯤에 찔러져 있는 편지를 보고 펼쳐 보았다.
"오...?"
그것은 소영이가 노경위에게 쓴 편지였다. 아마 죽음을 앞둔 무렵 썼던 모양이었다. 어른이 되어 시인을 꿈꾸던 아이였다. 유년에 생모를 이별하고 몸까지 아프던 아이였다. 몸과 마음의 양쪽에 생병을 살던 아이였다.
아빠...
아빠가 이 글을 읽을 무렵이면 소영이는 하늘 나라에 가 있겠지.
아빠 엄마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와 좋은 곳 많이 구경하고 맛난 것 많이 먹어 미안해.
이 다음 아빠 엄마가 하늘나라에 와 나를 찾으면 내가 그곳을 다 안내하고 맛난 것도 많이
준비해 놓을게.
아빠.
소영이의 꿈이 뭔지 알지.
시인이 되는 것, 시인이 되면 뭐가 좋을까.
다래는 아무래도 천재 같아.
말은 못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정신 세계를
갖은 듯 해.
내가 지은 시를 읽어 주면 그리 편안해 하고
즐거워 하더니...
아빠.
허나 다래는 자기 아빠에게 학대를 많이 당했던가봐.
몸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도 있다.
허나 나는 걱정 안해.
아빠가 있으니까 아빠가 얼마나 잘 돌봐 주겠어.
아빠.
아빠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아. 다래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돌보아 주고 그리고 오래오래 살다 나에게 와.
그때까지 소영이는 하늘나라에서 시인이 되어
아빠가 오면 보여줄거야.
하늘에도 바다는 있겠지.
봄이 오면
바다에서 아빠를 생각할거야.
"아이고...!"
노경위는 편지를 얼굴에 비비며 울음을 터트렸다. 사랑했던 아이 목숨이라 생각했던 아이였다.
그러나 소영이 가고 벌써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라 생각하던 아이를 보내고 벌써 6개월을 살아온 것이다.
노경위는 편지를 접어 다시 일기장 속에 넣어 놓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래의 몸에 담뱃불 자국이 있다는 구절이 선명했다.
"끄응!"
노경위는 거실로 나와 윗통을 벗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물걸래에 금방 먹물이 들었다. 다래가 부지런 하기는 하나 거실 주방까지는 무리일 터였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래 저 아이를 어쩔 것인가. 소영이를 대신하여 자신의 자식으로 키우는 것은
마음 먹은 일이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도 커다란 암초가 가로 놓여 있었다.
"으브?"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다래가 들어 오다가 두 손을 입에 모았다.
"오, 이제 오니? 밥 먹어야지?"
"으... ...!"
다래가 기겁을 하며 어쩔줄을 몰라하다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래야?"
딸깍.
그 소리는 방문 시건 장치를 잠구는 소리였다. 노경위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 자리에 주저 앉을뻔 했다.
아.
그랬었단 말인가. 과연 다래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선홍의 피로 물들여 온 아이였다. 그것은 역정의 시간이며 희귀한 경험일 것인가.
"다래야, 청소 하느라 더워 옷을 벗고 있었던 거야. 아빠 옷입을 테니 빨리 나와 밥먹어."
노경위는 겉옷을 입고 식탁에 밥상을 차렸다. 이유를 모를 눈물이 쏟아졌다. 그 눈물은 짜고 매웠다.
"으브 !"
다래가 방문을 열고 자신도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고 자리에 앉았다.
노경위는 다래가 좋아하는 깻입과 된장국을 떠 주고 수도를 틀고 얼굴을 씻었다. 눈물은 푸른가. 손에 가득한 물이 푸르게 보였다.
20. 흰소를 타고 탑을 돌다
"끄응!"
과장이 신음을 토했다. 들고 있던 은단갑을 탁자 위에 놓고 노경위에게 손을 내밀어 담배를 청하더니 길게 빨아 들였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 그럴수가 있어. 그럴꺼야... ..."
과장이 자리를 일어났다 다시 앉아 옆의 작은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를 한병 꺼내 노경위에게 주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옛날 고성이라는 곳에서 수사과장을 할 때 진부령 아래 장신리라는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났어. 집안의 가장이 등에 작은 도끼를 맞고 죽은 사건인데 망자의 아내가 범인임을 자복하여 쉽게 일이 끝나는 듯했어. 평소 여자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를 했던 모양인데... 여러 정황이나 방증 그리고 여인의 자복이 있어 그리 된거지. 그런데..."
과장이 잠시 말을 끊고 노경위에게 담배를 한개비 더 요구하고는 말을 이었다.
"현장검증을 하는데 일이 크게 틀어지는거야. 그집 아들이 자신이 죽였다고 울며 불며 수사팀에 매달리고 나온거지."
"아이가요?"
"당시 열살되는 초등학교 3학년생이 말이야."
"... ...?"
"여인이 소리를 치고 아이를 나무라도 아이는 오히려 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현장검증이 엉망이 되고 말았어."
"그래서요?"
"즉각 아이와 여인을 분리해서 다시 조사가 시작되었고 전모가 파악되었지. 아이가 학교에서 집에 와보니 술취한 아버지가 또 어머니 배 위에 올라타고 구타를 하는거야, 아이가 광으로 가 시골에서 쓰는 작은 손도끼를 가져와 등을 찍어버린거지. 평소에 쌓인 적의가 순간 일어난거지."
"아이의 어머니가 죄를 자청했군요. 아이를 위해..."
"그래, 그게 어머니의 힘이지. 그리고 용기가 있는 아이의 힘이고... 나는 지금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 겁을 먹은 아이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어찌됐을까 하고 말야. 여자는 무기징역을 살았을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인권단체들이 있지도 않았을 때이니 그리고 어머니 없는 아이는 어떻게 살았겠어?"
과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한바퀴 돌더니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로 정동 교회의 높은 첨탑이 바라보였다.
"노름과 바둑 등에 빠져 살면서 변태 기질까지 있는 사내가 딸을 데리고 그 골목을 지나오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앞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호신용이랍시고 품속에 넣고 다니던 칼을 떨어트리자 순간 항상 적의를 품고 있던 아이가 엎드려 있는 사내의 등에 칼을 꽂았다? 자네의 추리는 그거 아닌가?"
과장이 노경위의 얼굴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물었다. 노경위가 고개를 떨구었다. 비록 추리는 내놓았으나 그 추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못했다.
"참으로 물색 없는 인간이었군? 어린 자식에게 칼을 받다니...아이고 이런..."
"과장님 이 일을 어찌할까요?"
"그 아이가 열한살이라 했지?"
"네."
"기가 막힌 일이군. 내 생전에 그런 일을 또 보다니... 아이는 형사 미성년자라 기소는 면하겠지만
사건을 다시 일으켜 종결하려면 큰 충격을 받을 텐데?"
"박태보 때문에라도 담당 검사를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당담 검사는 물론 자네도 다치는 수가 있어. 그리고 박태보는 백학과 연결되어 추가건이 떨어진 게 있어. 금괴 밀수로 엄청난 자금을 마련한 모양이야. 그리고 박태보는 백학이 남일수를 죽였다고 믿고 있고 백학은 그런 자신의 속내를 알고 박태보가 일을 저지른 것으로 확신하는 거 같아. 윤명이란 여자는 멋대로 백학의 자금을 풍족하게 쓰며 남일수를 챙겨 주는 등 돌고 돌며... 이심전심이란 불가에서만 쓰는 말이 아닌 거 같아. 오히려 폭력단에서 더 유용하게 쓰는 말이지."
노경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과장의 말이 맞았다. 이 사건의 가로 세로에는 윤명이 중심이 되어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무슨 일인가를 한 것이었다. 윤명이 과거라는 시간 속에 미륵과 초명의 한을 풀어줄 업장이라면 남일수를 알뜰살뜰 돌보아준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