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벌써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62해. 가물가물 해 지는 기억을 더듬어, 전쟁을 겪었던 벗들과는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나누고, 전쟁을 겪지 못한 후배들에게는 그 때의 상황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전하고져 이 글을 올려봅니다. -
두개의 애국가
이 해 범.
1. 잃어버린 동무
그때 지금의 경동시장 일대는 고려대 앞에서 부터 질펀한 논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 건너편 홍릉가까이에 내 동무의 집과 거기서 남으로, 한 숨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날은 마침 동무와 함께 그 들판의 끝자락에 있던, 기동차의 출발점인 성동 역(지금의 제기 역) 근처의 냇가에서 버들치를 잡기로 약속한 일요일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흘렀고, 그 투명한 개울에는 송사리랑 버들치가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나와 단짝 동무인 문식은 종로5가에 있던 학교가 파하면 늘 청량리 행 전차를 타고 이곳에 내려서 논길을 걸으며, 물고기를 잡자고 수 없이 약속해 왔지만, 번번이 깨졌던 것 인데, 오늘은 정말 운 좋게 그 벼르던 일이 지켜지게 된 날이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이른 아침부터 신나게 노래 부르며 겅둥겅둥 뛰다시피 개울로 향했다.
“온 겨레 정성 덩이 해 떠오르니, 온 설날 이 아침이 밝아오도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문식이가 와 있었다. 우리가 낄낄거리며 사이다병에 버들치와 송사리를 몇 마리 잡아넣었을 때, 웅성거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거리로부터 들려왔다.
난리가 났다고 했다. 전쟁이 터졌다고 했다. 인민군이 쳐 내려온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하는 말이,
“ 이 철 딱 성이 없는 놈들아 어 여 집으로 가라. 전쟁이 났단 말이다.”
우리는 전쟁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른들의 그 무겁고 두려운 표정을 보고 덩달아 겁에 질려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회사에서 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우리에게, “그래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지만, 우리 국군에게 쫓겨 가고 있단다. 그러니 안심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늘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왜냐하면 그 때 아버지는 대통령이 살고 계시는 곳(경무대)을 내 집처럼 드나드시는 분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따라서 안 가시는 곳이 없으셨고, 한 번은 정전으로 전차가 서는 바람에 인력거를 타고 서울역까지 갔지만, 이미 대통령이 떠나시는 바람에 역장에게 대통령 수행 기자임을 알리고, 객차 떼어낸 증기기관차의 머리통만 혼자 타고 쫓아간 일도 있었다는 말씀을 듣고, 얼마나 동무들에게 으스댔는지 모른다.
그러함으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러면 그렇지 국방군이 그렇게 쉽게 인민군에게 질 리가 없을 꺼 야 ...”
그 다음날 월요일 학교에 갔을 때, 우리 반은 반 이상이 결석을 해서 썰렁한 분위기였고, 문식이의 얼굴도 볼 수 없었는데, 그 날 이후 다시는 단짝 동무를 만날 수 없었다.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다음날은 27일 화요일이었는데, 소낙비가 잠시 내렸던 것 같다. 국방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 때문에 사람들은 다소 두려움이 가셨고, 은은한 포성이 들리자 전쟁구경을 한답시고 삼삼오오 홍릉근처 높은 지대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 끼어 헉헉대며 산마루턱에 올라가 보니, 동쪽하늘에 쌍무지개가 떠있었고 아득히 멀리서 포연이 풀썩 솟고, 한참 뒤, 멀리서 들리는 천둥처럼 아련한 포성이 울리는 것이 차라리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간부터 콩 볶듯 볶아대는 총소리에 우리 식구는 기겁을 하고 놀랐다. 아직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태였다. 도대체 어찌하여 좋을지 몰랐다. 쫓겨 간다던 인민군이 이렇게 가까이 와 있단 말인가.
우리는 혼이 나간사람처럼 벌벌 떨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총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다가, 새벽이 뿌옇게 밝아오자 다소 잠잠해 졌고, 이때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이 되셔서 서울이 아마 인민군의 손에 떨어진 것 같으니 어디론가 피해야 하겠다고 하셔서, 우리 식구는 무조건 남으로 방향을 잡고 집을 나섰다.
청량리 길바닥에는 벌써 피난행렬이 시작되어 있었다. 모두 우왕좌왕하며 어디로 가고 있었지만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어떤 젊은이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붉은 글씨의 어깨띠를 메고 가는 모습을 보고, 그 어깨띠에 민주주의란 글자를 발견하고 스스로 대견스러운 마음이 되어,
“아버지 우리나라가 이겼나 봐 요.”
“무슨 소리냐?”
“민주주의는 우리나라를 말하는 것 아니에요?”
“아니다. 조용해라”
아버지의 다급한 제지에 움찔해진 나는 얼른 시선을 강 쪽으로 돌리며 왕십리 굴다리를 빠져나와 지금의 행당동 강변을 향했다. 그러나 잠시 후 도착한 강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어디에 바늘을 꽂을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강물에 가로막혀 아무도 더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경찰복장의 남자가 칼빈 총을 메고 난감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그도 황급하게 달아나다, 강물에 막히자 살길을 찾아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때 멀리서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외침이 들려왔고, 강가에 서있던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옆을 보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 동생도 모두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6월28일 이른 아침 수요일에 서울은 인민군에게 함락 되었다.
3. 호밀 죽과 호주기
전쟁은 모든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가족 에게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배고픈 고통을 안겨주었다. 돈이 있어도 시장에서 쌀을 살 수 없었다. 국방군이 모두 쌀을 훔쳐갔다는 소문에 국방군이 몹시 실망스러워 볼멘소리로 여쭈어보니, 아버지는 고개만 가로저으셨을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랬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철없는 어린이가 이러한 사태를 명확히 이해할리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
어느 날 쌀독에 쌀이 몽땅 떨어진 그날, 아버지는 쓸 만한 옷가지로 가득 찬 륙색을 메고 새벽에 어디론가 나가셨다. 그리고 캄캄해 져서 오셨는데, 그 륙색에는 애호박과 처음 보는 곡식이 그득히 들어 있었다.
“아버지 이게 뭐야”
“호밀 이란다.”
“호밀이 뭐야?”
“밀가루를 만드는 곡식이란다.”
어머니는 이 호밀을 맷돌에 갈아서 거친 밀기울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수제비로 만들어 허기진 식구들의 배를 채우게 하셨다. 그러나 유달리 비위가 약한 나는 이 밀기울로 만든 수제비를 억지로 먹은 탓에 체하게 되어, 쉴 새 없이 설사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 이질이란 고질병을 얻게 되었다.
다음날인가 누가 우리 집 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겁먹은 내가 빼 꼼이 대문에 다가서자 그 남자는 대뜸 나를 보고,
“어린이 동무 아버지 동무 집에 있음 메?”하는 것 이였다. 나는 어른을 동무라고 부르는 그를 웃긴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팔에 붉은 글씨로 [내무서]라 쓴 완장을 두른 그를 보자 어쩐지 두려운 생각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는 안계신데요”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정말이오? 거짓말하면 혼나요 ” 하면서 그는 벌컥 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는데 허리에는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그의 무단 침입은 별 볼일이 없이 되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공갈은 우리 식구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아버지 동무 오면, 내무서로 나오라 하시오. 만약 나오지 않으면 반동분자요... ”
그 다음날 우리 식구는 창신동 언덕바지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물론 아무런 세간도 옮기지 않은 채 방 하나만 빌려서, 잠시 몸만 피했던 것이다.
전쟁은 더욱 심해지는 것인지 매일처럼 B-29가 서울역 근처를 폭격했다. 또 호주기(F-84 일명 슈팅스타)가 날아와서 쉴 새 없이 기관총을 갈겨댔다. 그 비행기는 이대통령의 아내가 호주 사람인고로 그 사람(프란체스카의 국적은 오스트리아였는데 그것을 오스트랄리아로 오해한데서 나온 말임)들이 대한민국을 도와주기위해, 그 호주의 비행기를 보낸 것이니 호주기라 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비행기가 쌕쌕거리며 날아다닌다 해서, 그냥 쌕쌕이라 불렀다.
나는 그때 인민공화국을 미워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버지를 내무서로 나오라고 거드름을 피우고 간 내무서원이 무서웠고, 큰길 모퉁이에 세워놓은 커다란 지도에 인공기의 배지(badge) 하나하나 붙여 나갈 때마다 그건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하루하루 그 배지의 수가 불어나고, 지도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붙여져 가는 것을 볼 때, 까닭 없이 가슴이 조여지는 듯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쌕쌕이가 오는 날을 기다렸고, 그 비행기 편대가 한바탕 기총소사를 하고 가면, 무엇을 먹고 체했을 때 답답하던 가슴이 동치미 국물을 마셨을 때처럼 후련했다.
4. 깨어진 거울
뚝 터진 물처럼 급하게 쳐 내려가는 인민군의 발 빠른 진격과는 달리, 서울점령 보름 가까이 후방의 치안은 아직 어수룩했기 때문에, 이른바 반동분자로 의심 될 수 있는 사람도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만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들의 치안상태는 안정되어 갔고, 철저해 졌다.
창신동으로 몸을 피한지 열흘 쯤 되던 날. 아버지가 낮에 창신동 뒤 돌산 그늘에서 숨어 계신 동안 ‘인민위원회’라는 곳에서 나왔다며, 어머니에게 전쟁 나기 전 어디 살았으며, 남편의 직업이 무엇이냐 꼬치꼬치 캐묻고 다음날 인민위원회로 출두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저들의 그물망이 점점 좁혀져 옴과,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는 까닭에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을 하신 듯, 온 식구를 데리고 어둑어둑해진 저녁에 제기동 집으로 다시 갔다.
그날 밤 우리 식구는 시골로 내려가는 도중에 꼭 필요할 듯한, 물건들을 챙겼다. 양은 솥단지 하나, 밥그릇 몇 개, 수저와 젓가락, 따위는 어머니가 이고 갈 물건이었고, 어렵사리 구한 보리쌀과 장독대에 있던 햇 된장, 간장 따위의 식품, 그리고 입을 수 있는 옷가지를 아버지의 배낭에 채워 넣었고, 나보다 힘이 센 남동생은 홑이불 몇 장을 멜빵 하여 짊어지도록 만들었고, 나는 때 없이 설사와 곱똥을 누어 대는 까닭에 도중에 기진한다고 하여, 그냥가기로 했었지만, 그래도 뭔가 만만한 게 없는 가 둘러보다가, 방에 걸려있던 온 몸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체경이 눈에 띄므로, 깨지지 않도록 누비이불로 둘둘 말아서 등에 메도록 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아버지는 성동 역에서 전차를 타고 마포 쪽 길로 가기로 작정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성동 역에 당도해 보니,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줄은 서로 뒤엉켜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우리 식구는 그 혼란 중에 잃어버리게 될까 두려워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가며 전차에 다가갔지만, 결국 나는 우리가족과 떨어져 군중 속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영 수야! 전차에서 내려라” 어머니의 울음 섞인 비명소리.
“언니 빨리 내려”동생의 울먹이며 지르는 고함소리.
“영 수야! 마포 종점에서 기다려라”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을 귓가에 들으면서 내 몸은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저절로 전차에 딸려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고아가 되는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0살짜리가 어찌 그런 사려 깊은 생각을 할 것인가. 오히려 체경을 멘 까닭에 옴치고 뛸 수 없을 만치, 꼼짝 할 수 도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내 쉬는 구리텁텁한 입 냄새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할 겨를이 없었다. 더욱이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마포종점에서 반드시 만나게 될 테지 하고 덤덤할 수 있었다.
전차가 남대문 가까이 왔을 때였을까 공습경보 싸이렌이 요란하게 울렸고, 전차 속의 사람들은 새파랗게 죽은 얼굴이 되어, 전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앞 다투어 뛰쳐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놈의 체경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맨 나중에 어슬렁거리며 전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는 쌕쌕이 4대가 편대를 이루어 나타나는가 싶더니, 차례차례 남산 쪽에 불똥을 갈겨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건물의 그늘로 숨어들어 귓속말로 그 남산 근방에 탄약저장소가 있기 때문에 그 곳을 때리는 것이라 했다.
그 요란한 기총소사 소리에 두려워 내 가슴은 새가슴처럼 팔딱이고 있었지만, 쥐 죽은 듯 꼼짝 못하는 인민군의 무력함과 거칠 것 없이 내려 꼬치는 쌕쌕이를 바라보며, 정말 후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서 얼마가 지났을까 건물에 피신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전차로 모여들었고, 멍하니 비행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 치는 바람에 덩달아 다시 전차를 탔는데, 대부분 목적지가 서울 역 쪽이었던지 아까처럼 붐비지 않았다.
전차는 의주 로를 달리는 듯하더니, 이내 서대문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아현동 비탈을 한번 튕기듯 지나 공덕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나는 이쪽을 와 본 일이 없다. 고작해야 종로5가에 있는 효제 국민학교에서 청량리역의 바로 전 역인 성동 역까지 다니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길의 전부였기 때문에, 서대문이니 아현동이니 공덕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한참 뒷날 알게 된 지명이고, 내 머리 속에 고스란히 새겨진 기억의 장소가 그쯤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마포종점에서 북새통에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체경을 짊어진 채 전차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고 마포강변 쪽으로 나가는 피난민의 행렬을 두리번거리기도 하며 얼마나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언니 ”하고 반가움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오는 아우와 눈물범벅의 어머니, 안도하시는 아버지의 넉넉하신 얼굴, 그리고 여섯 살짜리 누이동생과 네 살 박이 누이동생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머니 잔등이에 업혀있던 한 살짜리 동생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하마터면 나는 정말 전쟁고아가 될 뻔하였다. 왜냐하면 공습경보가 내리자 어머니는 내가 길을 잃고 헤매 일 것이니 걸어서 가자고 하셨고, 아버지는
“아니다 그 애가 침착하니, 다시 전차를 타고 마포종점까지 갔을 것”이라며 걸어가다가는 그 아이가 기다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하여서, 아버지 판단대로 전차를 타고 오셨다는 것 이였다. 그랬다 아마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면 나는 도로 오던 방향으로 갔을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이산가족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산산조각이 난 체경을 버리지 아니하고 등에 메고 있었던 것인데, 그때 내 나름대로는 우리 가족이 나를 찾기 쉽게 하려면 눈에 잘 띄어야겠다는 신통한 생각이 떠올라 그냥 메고 있었던 것이다.
5. 여의도 비행장
마포 종점 거리에 보이는 것은 온통 새우젓 가게였고 전쟁으로 인해 가계는 닫힌 채 대부분 빈 독들만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퀴퀴하고 고리 고리한 새우젓 냄새가 배어있는 듯한, 강변거리였다. 우리 가족은 두 시간 넘게 기다려, 어렵사리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여의도에 올라섰다. 그때 여의도는 활주로 외에는 대부분 모래투성이의 황량한 땅이었지만, 이 비행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비행기를 띄웠고,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수송기( C-46)를 타고 귀국 했던 대한민국의 으뜸이 되는 비행장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 띄는 것은 포탄에 맞은 것인지 몸통 일부의 껍질이 찢어져 벗겨진 채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누어있는 건국 호 한 대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이 비행기를 사기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성금을 모았고, 심지어 코흘리개인 우리들까지 나서서 모금에 참여 하였다. 우리들은 매일 사이다병을 모아서 학교로 가져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전쟁나기 한 달 전쯤인가 이 비행기가 서울 하늘로 편대비행을 할 때, 나와 내 동무들이 만세를 부르며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몰랐었는데, 나머지 비행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여의도를 지나 영등포역 못미처 안양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하루 종일 걸어갔다. 많은 무리들이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인공치하가 된 땅이므로, 피난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일가친척이나 연고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는 배고픈 인민들이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사령부는 백만이 넘는 인민의 양식 조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서울을 벗어나는 것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이다.
( 건국 호인 T-6는 우리나라 공군의 최초의 비행기이고, 국민성금 36만 불로 캐나다에서 생산한 것을 10대 사왔다고 한다. 우리공군은 건국 호 10대와 정찰기 L-4, L-5 각각 6대를 합한 총22대가 우리가 갖고 있는 비행기의 전부였다. 여의도 비행장이 포격을 받아 이 중 한 대가 부서졌고, 나머지 9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고 11대 공군참모총장 김 두 만 장군은 그때 일을 2003년8월5일 공군전우회 ‘이 주의 인터뷰’중에서 증언한바 있다. )
6. 자갈무덤
저 사람들은 어디를 가 던 지, 쓸 만한 벽만 보이면 빨간 페인트로 [김일성 장군 만세] 또는 [스타린 대원수 만세]라고 써 갈겨 놓았다. 아마 그래서 빨갱이라고 하는가 보다 생각하며, 얼마를 갔을까. 배가 싸르르 아파오고, 주체할 수 없이 똥이 마렵다. 오늘 벌써 여섯 번째다. 나는 길섶의 논두렁에 엉덩이를 까고 한 바탕 기총소사를 해댔지만 먹은 것은 이미 오래전에 쏟아버렸으므로, 그저 물똥만 죽죽 쌌다. 그리고 이내 삐질삐질 곱똥이 나왔다.
기운이 하나도 없고, 앉았다 일어나니, 머리가 핑 돈다. 햇볕은 어찌 그리 뜨겁게 내려 쬐던지 그냥 누워버리고 싶었지만, 온 식구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으니, 나 혼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 고질병은 고향에 가서 양귀비대를 삶아먹고 낫을 때까지 360리 길 내내 계속되었다.
이때 아버지가 휘적휘적 논 가운데로 들어가시더니 허수아비가 쓰고 있는 테만 남은 밀짚모자를 벗겨 오셨다. 그리고 이내 내게 씌워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안 쓴 것보다는 나을 께 다. ”
아버지의 응원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한길로 나왔을 때, 나는 예사롭지 않은 자갈더미를 을 보게 되었다. 그 자갈더미에 얹어놓은 기다란 종이에 선명한 붉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우다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복수에 끓는 피 용솟음친다.]
그리고 얼마를 더 가니 캐터필러(caterpillar), 즉 무한궤도가 끊어져 흩어지고 포탑이 반으로 깨어진 탱크가 길옆에 벌렁 누워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자갈더미가 인민군 전차부대원 동무의 돌무덤이었던 모양이다. 그날 우리가 겨우 안양까지 왔을 때 김일성 장군 보다 더 붉은 해가 저물었다.
7. 초대소
얼마를 어둠 속에 걸었던가. 발은 벌써 부르터 물집이 터진지 오래되었고, 아버지의 륙색을 타고 가던 네 살 박이 여동생은 어쩌다 아버지가 잠시 쉬기 위해 내려놓으면, 한 발자국도 걷지 않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겁을 주기위해 비행기 온다고 하면 자지러지게 우는 것이 그때 내 옹졸한 마음에는 어찌나 밉살머리스럽던지 모른다. 그러나 6살짜리 여동생은 소처럼 순해서 고분고분 따라왔다. 어찌어찌 하여 지지대 고개라는 데를 한참 내려가니,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까마득하게 높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곳이 수원이라 했다. 우리는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그 동네 어떤 집 문 앞에서 기웃거리자, 북어처럼 바싹 마른 남자가 신경질적이 말씨로 인민위원회에 가면 재워줄 텐데, 왜 성가시게 남의 집 대문을 뚜드리느냐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더니, 가래침을 탁 뱉고는 이내 문을 닫아걸었다. 아버지는 될 수 있으면 인민위원회를 피하시고 싶어 하셨다. 왜냐하면 저들이 말하는 바, 반동의 괴수인 이승만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던 신분이 발각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다른 집을 찾다가는 도리어 의심을 받기 십상이므로, 인민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초대소를 찾아갔다. 그 집은 큰 기와집의 사랑방이었는데, 아마도 반동분자의 집을 인민위원회에서 접수해서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랑방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자리 잡은 식구들이 몇 가족 있었고, 눈 꼬리가 위로 치켜 찢어져 날카롭게 보이는 청년이 우리가 어디를 가는 중이며,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인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취조를 끝낸 청년은 이내 나와 내 아우를 매서운 눈으로 훑어보다가, 드디어 내 동생에게 물었다.
“어린이 동무! 아버지가 뭐했지?”
“신문사에 다녔어” 아버지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이마에 땀방울이 솟을 때,
“거기서 문선공을 했단 말 야.”하고 동생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쑥 내미는 것 이였다.
얼마나 조마조마 했던지,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는 이미 나와 바로 내 밑의 남동생에게 누가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물으면 무조건 문선공이라고 말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다. 나와 내 아우가 10살, 8살로 철이 없는 나이인 까닭에 저들의 심문에 걸릴 위험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하여튼 동생은 참 엉뚱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다음 날이었던가. 고향 길을 찾아 다시 출발하는 거지꼴의 백성들이 어디서부터 꾸역꾸역 신작로로 모여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사람들의 입성이란 대개 표백하지 않은 누런 광목으로 만든 바지저고리를 입거나, 베 핫바지에 베잠방이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들의 옷은 이미 땀과 먼지에 찌들어 꾀죄죄했고, 고달픈 길을 가므로, 모두 표정 없는 얼굴로 개미의 무리처럼 끝없이 이어져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곳이 오산 못미처 어디쯤이라고 했던가.... 갑자기 굉음이 들리고 비행기의 모습을 미쳐보기도 전에 불줄기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마치 나를 겨냥하여 쏘는 것 같았다.
우리 식구는 길 한 가운데서 눈과 귀를 막고, 길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사라지고 난 뒤, 잔솔이 듬성듬성 자라고 푸새나무가 애들 키만큼 자란 언덕으로 몸을 숨겼던 사람들 중 유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나오는 사람들이 여남은 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는 이미 고개를 옆으로 떨어뜨리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쉬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우리에게 유엔기가 폭격을 하더라도 백성을 향해 쏘는 법은 없을 터이니 결코 한 길을 벗어나지 말라고 거듭 거듭 일러 주셨기 때문에 그날도 무사할 수 있었다.
8. 서울 거지
오산 읍내에 들어섰을 때 또 한 번의 폭격을 받아 우리 가족은 혼비백산하여 내 아우는 신발 한 짝을 잃고 한 발은 맨발로 걷다가, 역시 폭격의 와중에 잃어버린 듯한, 큰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 한 짝을 주워 신었으나, 그 헐렁한 것이 몇 발짝 걷지 못해 자꾸 벗겨짐으로, 결국 댕댕이 넝쿨을 노끈삼아 칭칭 감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해는 참으로 참외가 풍년이었다. 서울 대림동을 지나면서 오산에 이르기까지 길가에 참외밭이 군데군데 있었고, 우리는 그 참외를 사먹거나 인심 좋은 곳에서는 더러 개평을 얻어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대개 참외는 노랑참외거나 개구리참외였는데 이 개구리참외는 겉모습이 개구리처럼 얼룩얼룩한 초록색이었으나 속은 호박 속처럼 붉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한 땅에 숨어있던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을 빗대어 개구리참외라 했다고 한다. 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지만, 그러나 참외만으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버지는 배낭에 들어있는 얼마 남지 않은 옷가지로 보리쌀이나 밀 따위로 바꾸었고, 아무래도 고향 길을 가려면 한참 더 가야하기 때문에 때때로, 동정심에 호소하기 쉬운 나이인 나와 동생에게 교대로 밥을 얻어와 보라고 하셨다.
그날 내 차례였기에, 나는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워 죽고 싶었지만, 집 문 앞에서 어정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줌마 밥 좀 주세요. ” 하며 들어갔을 때,
“야! 이 서울 그지 야! ”하며 날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누런 개한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쫒아 나왔다.
너무도 놀랐다. 비행기의 폭격에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는 주전자를 팽개치고 얼마나 허둥지둥 뛰었는지 모른다. 그때 아버지가 허수아비에게 벗겨낸 테 만 남은 밀짚모자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많은 시골사람들의 인심은 아직 따듯해서, 우리 형제는 가끔 가련하다며 건네주는 숭늉 속의 누른 밥과 물크러지기는 했지만 묵은 김치 따위를 얻어 조금씩 나누어 먹으며 고향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걸어갔다.
9.한진 나루
우리가 서울을 떠난 지, 몇 밤을 지냈는지 나는 까먹어버렸다. 다만 평택 근방 어디라고 했는데, 강처럼 큰 개울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 그곳이 정확한 지명인지 분명치 않지만, 그때 그 마을 사람들이 한진 나루라 부른것 같다.
그곳에도 고향을 찾아 가는 무리들이 나룻배를 타기 위해 떼를 이루고 모여 있었는데, 예외 없이, 붉은 완장을 두른 내무서원이 그들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가족 차례가 되었는데, 이 내무서 동무는 아주 까다로운 사람으로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배낭을 하나하나 뒤져가다가 원고지 몇 장을 발견하고 사냥개처럼 코를 씰룩이며 무엇인가 낚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동무! 동무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문선공인데요.”
“그런데 왜 원고지가 있습니까?”
“제가 이 종이를 좀 쓰려 구... ”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손을 펴보라 했다. 그리고 사나운 표정이 되어,
“거짓말 마시오. 문선공은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법이요.”라고 날카롭게 외쳤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와는 달리, 나루터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멀리서 백로 두 마리가 먹이를 쫒아 성큼성큼 걷고 있었으며, 눈이 툭 불거져 나온 문절망둥이가 펄쩍 펄쩍 뛰어 다니고, 검은 뻘 땅에는 엄지발이 유난히 크고 붉은 게가 하늘의 별보다 많이 깔려있었다.
아버지는 초조한 표정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제 별 수 없이 저들에게 끌려가게 될 것이라 낙담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멀리서 완장을 두른 채 나루턱으로 헐떡이며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가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뭐라 다급하게 말 하자,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나, 그 조사관 동무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더니 나루의 반대 방향인 마을을 향해, 연신 줄방귀를 뀌어가며 다급하게 뛰어갔다.
10. 개선문
해가 지면 초대소로 찾아가 눈을 부치고, 해가 뜨면 다시 걷기를 거듭하면서 남으로 가는 길은 고달프고, 검문을 통과하여야 하는 두려운 길이었지만, 점점 고향에 가까워진다는 희망이 있었다. 무사히 한진 나루를 건너 우리는 아산을 지나 예산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아마 신창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어쩌다 아버지가 감개무량 하신 듯,
“여기가 ‘신창’ 이구나!” 혼자 중얼거리시자,
“신창은 구두창 아냐요?”하고 아우가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바탕 웃었고, 나는 왜 모두 웃는지 모르고 덩달아 웃었다. 왜냐하면 그때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수군수근 북한을 욕하는 것을 보고, 왜 나쁘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서울 창신동에 있을 때, 장교인 듯한, 인민군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누런 군복과 빨간 별이 붙어있는 모자가 참 멋있어 보였고, 가슴에 엇비슷하게 찬 권총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이 신기해하며 그의 주위에서 맴돌자 그는 자기가 먹던 미숫가루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작은 아이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었다.
한 아이가 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저씨동무 왜 작은 애한테 더 많이 줘요?”하고 따지듯 묻자, 그는 우스개처럼,
“응! 인민군은 작고 약한 자를 돕기 위해 왔거든. ”하며 빙긋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응 그러니까 지주의 땅을 농민에게 나눠 주기위해 왔단 말이다. ”
그의 뒷이야기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좋은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인민군은 좋은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동무가 가만히 있는데, 느닷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짓이 나쁜 짓인 것처럼, 모두 잠들어 있는 일요일 새벽에 갑자기 쳐내려온 것은 분명 나쁜 짓이라고, 무슨 큰 발견을 한 것처럼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참 이였기 때문이다.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길은 남향으로 되어 홍성이 되고, 똑바로 가면 오가라는 작은 마을을 거쳐 삽 다리 쪽으로 해서 덕산방향이 된다.
오가 마을 어귀에 가까이 오자, 열댓 명의 내 또래의 아이들이 핫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개선문을 지나는 그들은 한껏 으스대며 목청껏 노래 부르고 있었다.
[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밀림의 긴긴 밤아 말 물어 보자.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 아 그 이름도 빛나는 우리의 장군.
아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만주벌판 눈바람아 이야기하라.
밀림의 긴긴 밤아 말 물어 보자. 만고의 빨치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 아 그 이름도 빛나는 우리의 장군.
아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그랬다. 서울서부터 여기까지 몇 개의 개선문을 지났는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어떤 마을이고 그 마을 어귀에 이를 때면, 으레 푸른 생솔가지를 꺾어다 만든 개선문에 종이로 만든 깃발이 무수히 꽂혀 있었고, 붉은 색 바탕에 붉은 별이 자리 잡고 있는 인민공화국의 국기와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소비에트 국기들이 바람에 나부낄 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11.한티 재
오가 쌍 효자비 근처 어는 집 사랑 채에서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고향에 다 온 듯 정겨운 기분을 느꼈다. 모기를 쫒기 위해 홰처럼 쑥대를 묶어 불을 피워 놓은 데서 피어오르는 파르스름한 연기와 쑥 내음, 그리고 소가 걸어가는 듯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씨, 또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기신 듯 편안한 얼굴이 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정말 힘들고 지겹고 따분하며 두려웠다. 제일 나이가 많다는 내가 겨우 10살인데 그나마 십리도 못가서 피똥을 싸야했고, 짝짜기 신발을 용케 끌고 절름거리며 걸어온 8살짜리 내 아우, 그리고 겨우 6살 밖에 안 된 계집애가 얼마나 힘들까만, 도수장에 끌려가는 짐승인 듯 아무 말 없이 따라온 여동생, 이렇게 셋은 정말 아무것도 타지 않고, 순전히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특별히 우리만 겪은 일이 아니고, 이 나라의 백성 모두가 당해야 했던 고통 이였던 것인데, 그나마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서로 헤어져 헤매는 슬픈 일도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정말 축복 받은 셈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오가로부터 일자로 뻗은 논길을 종일 걸어 삽 다리를 거쳐 덕산을 지나고 까마득히 솟은 한티고개를 앞두고 어떻게 저 고개를 넘을까 엄두가 나지 않아 주저앉았다.
얼마를 쉬었을까 나는 까마득히 솟은 그 산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아버지 저 산 이름이 뭐에요?”
“응 개 산이라고 한단다.” 아우가 또 엉뚱 끼가 발했는가,
“왜 하필 개산이야! 닭도 있고 소도 있는데 말예요.”
“그렇구나. 두 째 말이 그럴듯하다. 아버지도 어려서 그게 궁금했었단다.”
“이젠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물었을 때,
“그럼 알고 있으니까. 그 개는 멍멍개가 아니라 열려라 ‘깨’ 할 때, 그 개(開)자 란다.”
“그럼 열린 산이란 말인가요? 산이 어떻게 열려요?”
“잘 보렴, 저 산 제일 높은 곳이 꼭 문이 열린 것 같지 않니? 저기 움푹 파진 곳을 문 다래미라 한단다.”
“문 다래미가 뭐래요?”
“문을 매어 달았었다는 말이란다..”
“정말인가요? 근데 문이 없잖아요?”
“그렇지 문은 없는 게 당연하지 날아갔으니까.”
“에이! 문이 비행기도 아닌데 어떻게 날아가요?”
“물론 문이 날아갈리 없지. 그러나 아득한 옛날부터 그런 전설이 있단다.”
“전설이 무엇이에요? ”
“오라 그건 오래 전 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뜻이란다.”
“아 옛날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네...”
“그렇지.” 아버지는 우리들이 재미있어하자, 그 전설을 들려 주셨다.
옛날 옛적 아주 옛날에, 마고 할머니가 개산에 살았었는데, 그 마고 할머니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이 남매가 커가면서 서로 힘을 뽐내며, 매일 티격태격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속상해하던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남매에게 내기를 걸어 서로 다투지 않게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마침 산에 문이 없어서 허전하니 돌문을 해 다는 것인데, 먼저 돌문을 다는 사람이 이기게 되고, 진 사람은 다시는 덤벼들지 않고 이긴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것 이였다.
그리하여 남매는 문짝에 쓸 만 한 돌을 뜨려 멀리 떠났는데, 누나는 검고 반질반질 오 석을 찾아 충청도 남포 땅으로 갔고, 남동생은 흰 돌을 찾아 경기도 수원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남포 땅으로 간 누나가 먼저 돌을 짊어지고 도착하게 되었고, 막상 누나가 먼저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던 할머니는 실망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딸은 시집을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에 은근히 아들이 먼저 도착하기를 기다렸기 때문 이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뜨거운 팥죽을 누나에게 주었고, 머리에 문짝을 이고 오던 누나가 한 손을 펴서 팥죽을 받는 순간, 앗 뜨거 하고 문짝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문짝은 굴러 떨어져 둘로 깨졌고, 그 서슬에 깨진 문짝이 튀어 올라 멀리 날아갔다는 것이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그냥 흐르는 대로 내 버려 둔 채, 다만 이마에 흐르는 땀만 닦아가며 가파른 언덕길,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을 아버지의 이야기를 응원삼아 얼마나 걸어 올라왔을까, 거의 기진하여 아무데고 털썩 주저앉았을 때, 시커먼 사닥다리 비행기가 산마루를 스치듯 낮게 날아 쇳소리를 남기며 서쪽하늘로 멀리 날아갔다. 우리는 그 비행기가 사라져간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 하늘아래 호수처럼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바다를 발견하고 형제가 기쁨에 들떠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아버지 저기가 바단가요?”
“그렇구나. 얼추 다 왔다. 저 아래 아득하게 보이는 게 우리 마을이구나. ”
12.두개의 애국가.
내 고향은 태안반도의 중간쯤에 있다. 그러니까 읍내로 가자면 서쪽으로 20리길이고, 면소재지는 동쪽으로 십리를 간다. ‘한 다리’라는 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언덕위로 어리성이란 마을이 있고, 이 ‘어리성’ 우묵한 마을을 넘어가면, 마파람 불어오는 쪽으로 급하지 않게 비탈진 마을이다. 이 마을은 80여 호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인데 ‘귀밀리’라고 한다 그 말뜻을 보면, 귀한 것이 빽빽하다는 뜻이라는데, 무엇이 그리 귀한 것이 빽빽한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이름만 그럴듯한, 그렇고 그런 작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래윗집에서 소꿉동무로 자라나 혼인을 했고, 나와 바로 내 밑의 아우가 태어난 곳이므로, 우리에게는 참으로 귀한 마을이다.
우리식구가 마침내 우리 고향집, 정확히 말하면 3째 할아버지가 그 아버지인, 내게는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되는 어른들을 모시고 살고 계시는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우리가 친척집 모퉁이를 막 지나 할아버지 댁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할아버지 댁에서 참나무 몽둥이를 든 젊은 사람 대여섯 명과 삼으로 꼰 질긴 노끈에 칭칭 묶인 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묶인 사람이 바로 셋째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가 반갑다는 인사를 미처 나누기도 전에, 젊은 청년들이 우르르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눈 깜박하는 사이에 묶어버리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정말, 꼬박 엿새를 삼백 육 십리를 걸어서 고향집에 도착한 그날 그 순간, 너무도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멍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침착하신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라 곧 올 테니...”하시며 할아버지와 함께 순순히 그들에게 끌려서 우리가 왔던 어리 성 쪽으로 넘어 가셨다.
다음날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내무서로 끌려간 이유를 마을 인민위원장 집 아주머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 까닭은 작은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택견인가, 뭔가 해서 매우 날파람이 있었는데, 성미까지 불같아서 마땅치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그 중에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세상이 바뀌니, 이 판에 오지게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것이고, 아버지는 이 와중에 뜻하지 않게 한 묶음으로, 엮인 것이지만, 저들에게는 뜻밖의 일로, 전쟁나기 한 달 전, 출마했던 우익인사를 잡게 됨으로써, 버릇없이 말해서, 망둥이를 낚으려다 숭어를 잡은 셈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도 우리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새 나라에서 반듯이 배워둬야 하는 공부가 있었으므로, 나는 공회당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곳에 가보니, 그 공부라는 것이 반동분자를 가려내어 고자질해야하는 까닭과 인민공화국의 노래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를 가르치던, 면 인민위원회에서 왔다는 선생동무가 나에게 애국가를 불러보라 하였다. 나는 숫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국가를 부르라는 것이 좀 이상해서 주저주저 하다가, 그 선생이 눈 꼬리를 치켜뜨므로, 목을 움츠리며 모기만한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때 갑자기,
“ 동무 누가 반동 노래를 부르라고 했남....” 느릿느릿한 말씨와는 달리 사람을 때리는 행동은 어찌나 빠른지, 잔등이가 타는 듯한, 아픔과 함께, 얼마나 호되게 때렸으면, 낭창낭창한 뽕나무 회초리가 부러져 내 발 아래 떨어졌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애국가를 부르라 해 놓고, 사람을 허방다리 수렁에 빠트리는 그 고약하고 싸가지 없는 선생동무가 미워, 이때부터 인민공화국이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 그리고 반동의 노래를 불렀다는 벌로서, 하루 종일 목이 쉬도록 저들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 이 조선.
찬란한 문화로 이어온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들세........
그러나 나에게는 이 하찮아 보이는 일로 인해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고, 철이 들면서 전쟁의 실상과 저들의 무도함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증오로 자랐다.
13. 상여 집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끌려 간지 나흘이 되던 밤. 나는 모기에 뜯기고 빈대에 물리다 막 잠이 들려할 때, 어른들이 수군수군 하는 소리를 잠결에 들었고, 얼핏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생각했으나, 이내 골아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해가 떨어지고 온천지가 캄캄해지자, 세 째 할머니와 어머니는 나보다 두 살 위인 아저씨를 부르시고는 묵직하게 보이는 대나무 소쿠리를 내미시며 무언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심부름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우물쭈물 하면
서,
“거긴 무서워서 혼자 못가 유 ”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시며,
“되련님! 그럼 영 수 와 같이 가유... ” 하시며 절대 비밀이라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을 끝 상여 집에 숨어 계시다는 것이었다.
우리 고향 마을은 남쪽으로 비탈진 언덕을 의지해 집들이 모여 있고, 그 아래 제법 넓은 들에 기름진 논과 마을의 서쪽에는 실개천이 갯고랑 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 짠 물과 민물이 만나는 두 물 머리 뚝 방위에 상여집이 있었다.
아저씨의 이야기로는 비가 오는 날은 틀림없이 달걀귀신을 비롯한 온갖 귀신이 다 나온다 했고, 어른들마저 밤중에 이곳을 지나가려면 뒤가 켕긴다며 별로 내켜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도 없는 밤, 밥과 반찬을 담은 소쿠리를 들고 이곳을 가야하는 아저씨가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고향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상여 집이나 달걀귀신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었으므로,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도리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캄캄한 뚝 방 길을 별빛으로 길잡이삼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어갔다. 어쩌다 무엇인가 물 컹 하는 것을 밟고 멈칫하면, 아저씨는 그것은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 구렁이일 꺼 라 일러주었으므로, 얼마나 기겁하고 놀랬던지, 달걀귀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어스름한 집 그림자 앞까지 도착하자,
“삐약 삐약”하고 아저씨가 병아리 소리를 흉내 냈고,
“꼬끼요”하고 할아버지가 수탉소리로 대답을 하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암호였던 것이다.
이때 아버지가 상여 집 문을 나서면서,
“왔구나. 용케 왔구나.”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해미의 북쪽에 있는 음암 이라는 곳까지 끌려가서 사흘을 갇혀 있다가 나흘 째 되던 밤, 먼저 할아버지가 뒤를 본다고 나왔다가 잽싸게 달아났고, 지키던 사람들이 갑자기 당한 일이라 당황해서 모두 할아버지를 쫒아갔을 때, 아버지 역시 슬그머니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때만 해도 참 어수룩했던 시절이다.
그 후 얼마 동안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한 그 며칠 뒤까지, 낮에는 인민학교에 가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원수와 더불어 싸우다 죽은 우리의 주검을 슬퍼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밀림의 긴긴밤아 말 물어 보자...]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 찬 찬란한 문화로....]
그리고 밤이 되면 아저씨와 함께 상여집 앞에서,
우리가 “꾀꼴 꾀꼴”하면,
어른들이 “꾀꼴이”하고,
우리가 “뻐꾹 뻐꾹”하면
어른들이 “뻐꾸기”하면서, 매일 암호를 바꾸어가며, 밥 나르는 일을 거듭했다.
14.총소리.
추석이 가까워 오자 마을 앞의 논들은 누렇게 익어갔고 풍년의 기쁨이 이 시골사람들의 마음도 느긋하게 하려는 즈음, 인공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라는 사람들이 마을 인민위원장을 시켜 사람들을 모으게 하고는 동네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논 에 나가 벼이삭 낱알을 하나하나 세어서 평균을 내어 공출할 양을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로는 아주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셈법은 틀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아주 벼이삭이 많이 달린, 실한 것을 뽑아 그 것으로 평균을 삼는다고 은근히 불평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부터 음산한 분위기가 마을을 감돌았다. 먼 곳에서 밤낮없이 ‘딱꿍 딱꿍’ 하는 인민군의 총소리가 들려왔고 모두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 총소리는 마을에서 서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의 야산에서 들리는 것이라는데, 인천상륙이 성공하고 서울을 다시 찾았다는 소식이 이 촌구석까지 뒤늦게 들리자, 달아날 길이 막혀버린 인민군 패잔병과 그동안 제 세상 만난 듯 설쳐대던 토박이 빨갱이들이 악에 바쳐, 조금만 우익과 가깝다거나 개인적인 원한이 있으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미처 수복되지 못한 지역은 저들의 세력아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국방군이 미군과 함께 점령해 들어온 뒤부터, 다시 그 산에서는 ‘탕탕 ’하고 M-1소총 소리가 들렸는데, 그 것은 산을 타고 북으로 가려다가 잡힌 빨치산들을 잡아 당한만큼 이를 갈며 앙갚음 하는 것이라 했다. 나는 그 때 어려서 무엇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른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피가 피를 부르는 슬픈 역사가 기록되고 있다]고 탄식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여름내 제 세상을 만난 듯 초가지붕을 온통 덮어가던 박 넝쿨과 베어도베어도 새순을 내고 자라는 모시밭은 영원히 그렇게 자랄 듯 보였지만, 어느 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뒤로 모두 시들시들하고 맥없어 보이듯이, 백일 동안 서슬 퍼렇던 인민군은 가을이 오자 서울을 버리고 허둥지둥 쫓겨 가고 말았다.
15.발진 티푸스 (typhus)
어쩌면 한국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의 앙갚음이 일어나지 않고, 한 사람도 총칼에 생명을 잃지 않은 이상한 마을은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귀한 것이 빽빽하다는 마을 이름이 과연 헛말은 아니라고, 어른들이 예사로 싱거운 소리를 하며, 마을 인심이 차차 안정되어 갈 때, 아버지는 임시수도가 있는 부산으로 서둘러 내려가셨고, 우리는 마을 앞길의 우물가 초가집으로 옮겼다. 증조부 내외, 그리고 3째 할아버지 내외와 그 가족, 그리고 우리 식구가 함께 지내기에는 여러 가지 불편하고 비좁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양귀비대를 삶아먹은 덕으로 겨우 이질은 나았으나, 이번에는 ‘하루거리’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되었다. 이 병은 하루는 말짱하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엄청난 열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이른바 말라리아모기에 의해 옮겨지는 학질(瘧疾)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 숨도 자지 못하시고 베수건에 물을 추겨 내 이마에 얹어주시며,
“워떠커냐! 피난 올 때 모기장만 갖고 왔어도, 이런 병을 걸리지 않았으련만...”후회 하시다가...
“ 금계 랍이 있었다면 대번에 나을 텐데...”하시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 쉬셨다.
온 식구가 쑥을 뜯어 홰를 만들어 토방에 놓고 마당에 화톳불을 피워 놓아도, 앵하고 덤벼드는 모기를 감당할 길 없어, 사람들은 자기 몸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모기를 죽여 보지만, 파상공세로 달려드는 이놈은 끝이 없어, 새벽까지 잠을 설치게 만들고, 그 중에 학질모기는 이렇게 사람을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한 다음날 밤, 높지도 않은 천정이 하늘만큼 까마득히 높다고 생각하며 이를 딱딱 마주치며 턱을 떨고 있을 때, 머리에 수건을 쓴 마귀할멈이 시퍼런 낫을 내게 향하여 막 찌르려 하였다. 나는 이제 참말로 죽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이내 까무러쳐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가 막 내 이름을 부르며 흔들기에 눈을 떠 보니, 어머니가 눈물 젖은 얼굴을 내 볼에 부비고 계신 것이었다.
약이 없던 그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시골사람들이 학질을 앓는 환자를 갑자기 놀래게 하면, 그 병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마귀할멈으로 변장을 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열이 나지 않았으니, 그 하루거리는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걸레로 잘 닦아내도 어린애가 똥을 쌀라치면 그 자리 틈새로 똥이 끼어 말라버리는 왕골과 짚으로 짠 자리가 한 장 깔려있는 방. 그 자리를 들치면 갑자기 놀랜 벼룩이 높이뛰기를 하며 튀었고, 벽은 초배도 하지 않은 채, 조대 흙으로 맥질한 맨 벽인데, 그 벽의 갈라진 틈새로부터 수많은 빈대가 중공 오랑캐처럼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무리지어 밤이면 우리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급히 등잔을 켜고 빈대를 잡으려면, 어찌나 빨리 도망을 가는지 우리들은 그저 급하여 그 놈을 손가락으로 눌러 문지르고, 그 빈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벽에 댓 닢 같은 핏자국을 남기며 터져 죽는다.
구더기가 바글바글 하는 푸세 식 뒷간에 가면, 똥통에 가득한 그것을 마다하고 항문에 달라붙어 빨아대니, 어른 아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간지러워 엉덩이를 흔들게 하는 파리 떼. 이놈은 항문을 빨다가 밥상머리에 날아들어 비린 것을 용케 알고 새까맣게 달라붙는 아주 더럽고 염치없는 놈이다.
그 뿐인가. 허연 지렁이처럼 생긴 회충은 얼마나 뻔뻔하고 징그러운 놈인지 가득이나 못 먹어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불쌍한 백성의 뱃속에서 그나마 영양분을 쪽쪽 빨다, 그러다가 뱃속에서 난리법석을 부려 횟배앓이라 하는 고통을 주는 기생충인데, 그 중에도 촌충이란 놈은 심심하면 마디마디 끊어서 뒷구멍으로 내보내고, 오징어 낚시처럼, 갈고리가 수 없이 달린 머리 부분은 작은창자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양분을 빨아댄다.
그래서 어른들은 비위가 좋은 사람을 보면,
“예라! 이 촌충을 회쳐 먹을 뻔뻔스런 놈아! ”라고 욕한다.
또 머리가 가려워 긁을 때마다. 우수수 비듬처럼 떨어지는 새까만 머릿니. 옷 솔기마다 다닥다닥 붙은 서캐를 엄지손톱 둘을 서로 마주쳐 눌러 죽이고 잡아내도, 끝이 없이 알을 까는 이. 해방 후 미군이 들어왔을 때, 지천으로 흔하던 그 DDT가 한 움큼만 있어도 몽땅 죽일 수 있었을 것인데....
이처럼 고약한 물 컷과 기생충 때문에, 그때 이 나라 사람들은 누렇게 뜨고 부석부석한 얼굴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놈들이 전염병을 옮겨, 얼마나 많은 목숨을 빼앗아간, 정말 전쟁 통에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일급 살인마로 그들에게 희생된 수를 어림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말이지 그때 이 나라의 위생은 원시상태였다.
유난히도 추운 날. 일사후퇴라고 하던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서, 벌써 천안까지 내려왔다는 소문에, 마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사뭇 불안 해 하던 날. 어머니는 무슨 예감이 있으셨던지 우리 5남매를 모두 벗겨 이불을 뒤집어쓰도록 하고, 마당에 나가셔서 옷가지에 붙어있는 이를 훌훌 털어내시더니, 하나 밖에 없는 가마솥에 몽땅 넣고 삶았다. 이 솥은 밥솥이며, 국솥이며, 더러는 푸성귀도 데치는 솥이지만, 이렇게 빨래를 삶는 솥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인가 어머니는 오슬오슬 춥다하시며 누우셨는데, 나흘이 넘도록 일어나시지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가 발진 티푸스(typhus)에 걸린 것이라 하며 슬슬 피했다.
16.고아원
누비치마 같이 생긴 두렁이만 입고 아무나 지나가는 남자 어른만 보면 아버지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바람에 어머니를 민망함으로 어쩔 줄 모르게 하는 돌 지난 넷째 동생과 두 여동생을 셋째 할머니 댁에 맡기고, 나와 내 밑의 아우는 읍내에 있는 친척 할머니 댁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그것은 다 키워놓은 자식 둘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그리고 처절한 결단이었다는 것을 철없는 아이들인 우리들이 어찌 알았으리. 우리 형제는 어머니와 잠시 동안이라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하여 슬퍼하였지만, 다만 며칠 밤만 지내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달램에 겨우 진정되어, 새로 겪어야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을 갖고 읍내에 볼일 보려 간다는 이웃 아저씨를 따라, 타박타박 이 십리 길을 걸어서 친척 할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고아원으로 갔다.
그러나 고아원 생활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살아온 우리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꽉 짜여 진 틀 속에 묶어있었다. 그 고아원의 아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이불개고, 청소하고, 채소밭에 나가 똥거름 주고, 뽑아온 열무를 다듬고, 왕자인체 거드름 피우는 원장 집 자식들의 얄궂은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애매한 매를 일상처럼 얻어맞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과 그 가족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모든 고아들을 불러 세우고 새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새 옷이 그렇게 많은지 동네 아이들까지 불러서 입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새 옷을 갈아입고 기뻐해야 할 아이들이 별 표정 없이 덤덤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서쪽 언덕길로부터 쓰리쿼터 한대가 붕붕거리며 이 고아원으로 들어섰고, 차에서 키가 까마득히 크고 새까만 흑인 아저씨가 성큼 내려섰는데 그의 손에는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원장은 그 미군과 아무런 주저 없이 한국말로 떠들었고, 미군은 쏼라 쏼라 영어로 알아듣는 것처럼 대꾸하면서 열심히 손짓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고아들이 고아원을 배경으로 쭉 늘어서자 미군은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자동차에서 몇 덩이의 박스를 내려놓고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띤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
미군이 돌아가자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고아들은 이제껏 제가 입고 있던 새 옷을 너도 나도 벗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는 까닭을 알 수 없어 멍하고 있었다. 그때 원장 할아버지의 눈에 흰자가 번뜩이자, 친척할머니가 눈짓으로 말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원장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이 옷을 벗으면, 큰 아들에게 추잉 껌을 하나씩 나누어 주라고 말 하였다. 물론 고아들에게는 그런 국물도 없었다.
10시가 넘으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자는 척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원장과 할머니가 다투는 소리가 구제품 창고로 쓰고 있는 옆방에서 들려왔다.
“임자는 내 규칙을 몰라서 그러 남.”
“왜 모른대 유 그것들 불쌍한 게 그러치 유.”
“불쌍 불상은 절마다 있는 디. 버릇된 단 말 여...나미 눈도 있는 디...”
“됬 슈 알었 슈.. 내일 벗길 테 유...”
다음날 우리는 입었던 옷을 도로 벗었다. 그리고 그 한 달 뒤, 정말 기적처럼 병이 나은 어머니가 우리를 고아원에서 이끌어 내시고, 모처럼 장에서 사서 입힌 구제품이 바로 내가 잠시 사진 찍히기 위해서 입었었던 그 옷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옷의 주인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당치않은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누워서 침 뱉는다는 말’이 있고, ‘내밥먹은 개가 뒤축을 문다는 말’도 있지만, 이 일을 겪은 뒤, 나는 친척 할아버지에 대해 은혜는커녕 미움의 감정을 품게 되었고, 모든 고아원이 못쓸 짓을 하는 데라고 싸잡아 욕하게 되었다.
17.공갈 마
삼 잎(대마초)을 말아 어른 담배 피우듯 흉내 내던 동 팔이가 해가 떨어져 사방이 어둑어둑해지자 서쪽냇가에 재미있는 구경꺼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캄캄한 밤에 웬 구경거리가 있을까 믿어지지 않았지만, 혹 미꾸라지라도 잡는 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냇가 가까이에 도착한 그는 물고기 잡을 생각이 아예 없는지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살금살금 미루나무 등걸이 뒤에 숨는 것이었고, 나는 맥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 숨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냇가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멀리서 텀벙텀벙하는 물소리와 함께 여자들이 깔깔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 왔던 것이다.
미루나무 뒤에서 컴컴한 냇가를 내려다본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놈처럼 숨이 멎을 듯 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그것은 비록 어두움 속이라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동네 누나들이 벗은 몸으로 미역 감는 모습을 난생 처음, 그리고 뜻밖에 훔쳐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침을 꼴깍 넘길 만큼 숨 막히는 짜릿한 시간은 누나들의 놀랜 비명소리에 이내 끝났다. 동 팔이가 그만 쇠똥을 밟고 누나들이 있는 그곳으로 미끄러져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내리 딸 일곱을 낳은 끝에, 해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치성 드려 낳은 자식이라 동 팔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지만, 동무들은 노는 곳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용케 냄새를 맡고 나타나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를 똥파리라고 불렀다.
하루는 참새 잡는다고 초가집 추녀 밑 썩은 구멍을 쑤시다가, 알을 훔치기 위해 기어 들어갔던 구렁이를 엉뚱하게 집어내게 되자, 제 방귀에 놀란 노루처럼 펄쩍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골병이 들어 똥물을 약으로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굴장사가 돈 대신 겉보리와 바꾸려 지게를 바쳐놓고 저희 집 사립문을 들어섰을 때, 때가 새까맣게 낀 손으로 굴 바구니의 생굴을 한 움큼 퍼먹다 소리 없이 다가온 갯것장사에게 귀때기를 얻어터지기도 하며, 심술이 나면 노란 꽃게 알을 널어놓은 초가집 지붕위에 진흙을 뭉쳐 팔매질 치기도 하며, 욕을 어찌 나 잘 해대던지, 예사로 하는 말 속에 걸쭉한 욕을 번번이 비벼 넣어야 말이 되는 그런 동무였는데, 무엇이 비위 상했던지 이웃 아저씨 뒤통수에 대고 삿대질하다가 들켜, 화가 난 아저씨가 그 아버지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에, 죽지 않을 만큼 된통 매를 맞은 일도 있는 골치 덩어리였지만, 본 마음씨는 올곧아 늘 약한 사람의 편이 되어주는 정의로운 동무로, 얼핏, 서울서 헤어진 동무 문 식이를 생각나게 하는 아이였다. 그때 나는 모든 서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을 “공갈 마”또는 “후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저희들을 욕하는 말인 줄 오해하고, 나를 때리려 떼로 덤벼들어, 급기야 얻어터지게 될 순간, 어디서 느닷없이 나타난 동 팔이가 지게 작대기를 들고 휘두르는 바람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일도 있었다.
읍내 고아원에 있는 동안 나는 가끔 동 팔이의 그 너부데데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동 팔이 같은 아이가 커서 고아원 원장이 된다면, 입혔던 구제품을 시장에 팔아 알속 챙기고 제 식구 배만 채우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 식구는 다시 마을 앞길의 우물가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나를 반갑게 맞아 준 것은 동 팔이였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였는데, 그것은 제가 좋아하는 새를 내가 잘 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덜너덜한 공책을 갖고 와서 거기에 새를 그려 달라 했고, 나는 정성껏 꾀꼬리도, 뻐꾸기도, 황새도 그려 주었는데, 목이 긴 황새는 분명했지만, 꾀꼬리와 뻐꾸기는 내가 보기에도 그놈이 그놈 같았다. 그렇지만 동팔이는 무조건 똑같다며 좋아했다.
자전거를 타고 면에서 나온 우체부가 전해오는 편지를 통 해, 오신다는 소식은 몇 번 있었어도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용케 오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두렁이만 입고 아무나 남자 어른만 보면 아버지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던 넷째 동생이 지나가던 거지를 아버지라며 붙잡으려 쫒아갈 때, 숨이 턱에 닿게 뛰어온 동 팔이가,
“야! 느이 아부지 오시던디” 하며, 제 일같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공갈마”
“지랄허구 자뻐졌디야! 내가 그짓말 하면 이 손에 장을 지질 텨!”
정말이었다. 유엔잠바를 걸치시고 검은 바탕에 노란 꼬부랑글씨로 뭐라고 새긴 마크를 붙인 작업모를 지긋이 눌러쓴 채, 빈 담배물부리를 입에 물고 마을의 동쪽으로부터 오시는 이가, 바로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를 애타게 기다리게 하시던 아버지였다.
* * *
돌이켜 보면, 그때 이 나라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피바람으로, 강토는 초토화되고 두 개의 이념대립으로 인해,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리숭한 백성까지 이유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에선 한 사람도 총에 맞아 죽거나, 서로 복수한다고 몰매 맞아 병신 된 사람이 없으니, 기막힌 우연일 뿐인가. 아니면 지진의 진앙 지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지대처럼, 사상의 지진에서 멀리 떨어진 후미진 촌 동네라서 안전했던 것일까. 개갈 안 나는 생각을 하다가, 과연 오늘날 남북간에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런 기적이 가능할 것인가. 모골이 송연해진다.
-끝-
첫댓글 교수님의 글을 몇번에 나누어 오늘 모두 읽었습니다. 어렸지만 625때 경찰가족으로 핍박받던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납니다.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