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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9월 설교 시리즈 – 미디안 훈련소 입소>제 1교시, 책임감 갖기 훈련!
본문 : 출애굽기 2장 21절(15~22절, 새번역)
르우엘은, 모세가 기꺼이 자기와 함께 살겠다고 하므로, 자기 딸 십보라를 모세와 결혼하게 하였다. <새번역>
구원 받은 자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성화와 거룩의 현장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성화와 거룩의 삶은 말씀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 삶은 결국 ‘사랑하며 사는 삶’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2달간 함께 나눌 모세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세가 배워야 했던 삶에 대해서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탄생부터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하지만 레위인 부모와 가족 덕분에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고, 노아의 방주와도 같았던 갈대상자를 타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 즉 왕자가 되는 역전의 인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친어머니 요게벳에게서 양육을 받을 수 있었기에 말 그대로 그 시대에 이집트와 이스라엘 교육을 함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왕자로서의 교육이었고, 레위인으로서의 교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단단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출애굽의 위대한 꿈을 꾸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모세를 통해 출애굽의 역사는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유대인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동족 이집트인을 우발적으로 죽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출애굽기 2장 11~12절, 새번역>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모세의 무책임한 선택을 따라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그렇게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이집트 사람을 죽인 후 어머니나 바로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면 충분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마치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을 하고 시체를 유기하고도 자신은 동족을 위한 일을 했으니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기 의에 빠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저 살인은 나쁜 일입니다. 죄입니다. 아무리 동족을 위한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일은 동족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비쳐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나가보니 이번에는 유대인들끼리 다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모세는 어제처럼 당연하다는 듯 그들을 말렸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됩니다.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출애굽기 2장 13~14절, 새번역>
모세는 유대인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적대시합니다. 모세의 착각에 큰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탄로 나게 되었고, 소문은 삽시간 온 도시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엔 바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출애굽기 2장 15절, 새번역>
모세는 이때라도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물론 큰 벌을 받겠지만, 안타까운 결과가 생길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이 행동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미 태어나자마자 그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살려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지만 결코 모세를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아직 모세는 이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출애굽기 2장 15절, 새번역>
모세는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만을 받고 살아왔기에, 어머니의 도움, 왕자로서의 도움 그 도움 속에서 아직 ‘책임감’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책임감이 결여 되어 있으니 자연스럽게 ‘신중함’과 ‘인내’는 아직 형성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책임감과 신중함과 인내의 부재가 만들어낸 살인 그리고 도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신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질 형벌을 참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내팽개치고 그는 지금 미디안 광야에 기적의 사람도 아닌, 이집트 왕자도 아닌, 그저 빈털터리 거지 모세가 되어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미디안 광야로 내 모신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 미디안 광야를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훈련의 장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뜻은 맞지만 시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지금 다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모세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훈련 방법에는 분명하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광야의 40일은 분명 하나님이 예비하신 훈련이 맞습니다. 그 시험이란 훈련소를 통과함으로 소위 ‘정리하고 정돈된’ 사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가 오늘부터 모세에게 시작되는 훈련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믿음이라고 찾아볼 수 없고, 실패와 절망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노라 선포하시는 훈련입니다.
마치 열왕기상 19장에 등장하는 850대 1의 싸움에서 승리하고도 도망자가 되어 버린 엘리야를 향한 훈련과도 같은 훈련입니다. 사랑의 훈련이었고, 위로의 훈련이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세우시는 훈련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세의 이 시간은 사실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훈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이란 시간을 빙빙 돌 필요가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하나님의 시간에 움직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책임감과 신중함과 인내가 없었던 그의 섣부름은 다시금 하나님의 시간을 뒤로 미루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참 이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훈련이 아니라 신앙인이라면 누구나에게 찾아오는 당연한 절차로서의 첫 번째 훈련을 잘 통과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훈련소에 입소하시려면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훈련소를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인생의 허무함 느끼며 입소하는 갱생과 회복의 훈련소는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약 11일만에 갈 수 있는 가나안을 40년이나 걸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먼저 명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어찌 되었든 미디안 훈련소, 그것도 약 40년의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모세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인생을 준비시키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런 만남을 준비하십니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이 그리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부으며,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목자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쫓아 버렸다. 그래서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였다. <출애굽기 2장 15~17절, 새번역>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람’을 준비시킵니다. 마치 사람으로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듯, 공동체로부터 받은 상처를 또 다른 공동체로 치유 하시려는 듯, 바로 왕과 자신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을 대체할 사랑하는 아내 십보라를 만나게 하시고, 미디안 제사장의 집이라는 공동체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정말 따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세의 도움을 받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은 그 날따라 일찍 귀가하게 되었고,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 즉 그녀들의 아버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으며, 자연스럽게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모세를 자신의 공동체에 초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딸들 중 한 명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조차 만들지 않았던, 이미 40세가 되어 수많은 결혼이야기들이 오고 갔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당시 모세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이였습니다. 이제는 노총각으로 혼자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그 좋은 위치에서, 마음껏 어느 아내든 고를 수 있었던 그 때도 이루지 않았던 가정을, 이 미디안 광야로의 도착과 함께 이루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모세임에도 하나님은 왜 가장 먼저 가정을 이루게 하셨을까요? 바로 ‘책임감을 배우게 하기 위한 훈련’을 하나님이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1교시가 ‘책임감 갖기 훈련’인 것입니다.
그렇게 가정을 이루고 당연한 수순인 듯 곧 가장이 됩니다. 가정을 이루는 책임감 위에 아버지와 가장이 되는 책임감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니,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다. <출애굽기 2장 22절, 새번역>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현재 자신의 위치와 현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모세는 더 이상 왕궁에 살고 있는 철부지 이집트왕자가 아닙니다. 나그네입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온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책임감이 없냐고, 신중하지 못 했느냐고, 인내가 없냐고 도망이나 치는 철부지 왕자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책임감과 신중함과 인내를 배우게 하기 위해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가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계십니까? 이거 사실상 훈련이면서 하나님의 징계라는 사실을!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세기 3장 17~19절, 새번역>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남자에게 내리신 징벌이었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임감과 신중함과 인내를 배우지 못했던 아담에게 주신 벌임과 동시에 훈련이었습니다. 오늘 모세는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이집트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모세! 선악과를 먹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누군가를 죽이고는 바로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 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바로 그 ‘책임감’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책임감이란 말은 ‘맡은 임무나 의무를 중히 여기고 스스로 끝까지 완수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는 개인의 성숙도와 신뢰를 높이는 핵심 가치입니다. 모두가 이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점점 이 책임감을 잃어가고, 잊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상황, 즉 나도 날 책임지고 싶지 않고, 내 미래도 책임지고 싶지 않고, 그래서 당장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가 결혼과 출산에 대한 기피현상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내 자녀를 책임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일과 가장이 되는 일과 부모가 되는 일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만들어낸 당연한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책임감을 가지기 위해 가정을 이루고 가장이 되고 부모가 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모세의 시대 때와는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가장과 부모가 되는 것에 경제적 상황 등의 다른 어려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이 방법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책임감’부터 가지라고 훈련의 방향을 택하셨는지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가장 먼저 오늘 ‘나’라는 존재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제자로서, 나의 ‘책임감’에 대한 나의 생각과 냉정한 평가는 어떠한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고 있는가? 성도로서 살고 있는가? 제자로서 살고 있는가? 난 나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단순히 모세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가장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고 가장이 되어 보시고, 부모가 되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외로움보다 훨씬 더 큰 감정의 소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일 때보다 둘이 되어 행복한 것도 두 배이지만, 힘든 일도 두 배인 것이 사실입니다. 둘일 때보다 3명, 4명이 되면 행복한 것도 3배, 4배이지만 힘든 일도 3배, 4배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아주 멋진 말을 남겼기에 너무도 공감이 되어 이 말을 전해 드립니다.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기 위해 한 고생은 사실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현재까지는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 책임감의 결과로 만들어진 내 가족과 내 가정과 내 자녀를 볼 때 그제야 창조주의 마음을 조금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죄에 빠진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 그것도 독생자 아들과 바꾸심으로,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책임지신 하나님! 오늘 모세를 통해 인간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모세에게 책임감의 중요성을 알려주시며 책임감을 가지기 위한 훈련을 가장 먼저 행하십니다.
모세야! 나의 꿈이 담긴 너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너부터 져야 한다. 난 너에게 맡긴 소명이 있다! 그 소명의 삶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다해 주길 바란다!
모세야! 먼저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을 이끌어가는 책임감을 가져 보아라! 수고하고 노력하여 너의 가정을 잘 책임질 때 다시 너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야! 너라는 자녀를 바라보는 나의 책임감을 너의 자녀를 보며 너도 느끼기를 원한다! 그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건강하고 바르게 키우기 위해, 잘 되게 하기 위해,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는 가장이 되어야 할지 배우기를 바란다!
모세 대신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도 무관합니다. 40년 훈련소의 첫 시작, 책임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훈련, 혼자가 아니라 십보라와 게르솜과 함께 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다시 한 번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다시금 이 책임감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가장과 부모가 된 여러분들은 그 책임감을 더 잘 이루어가는 성숙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앞으로 가정을 이루고 가장과 부모가 될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으로부터 ‘책임감, 신중함, 인내’에 대해서 미리 묵상해 보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위로로 시작한 이 1교시 훈련을 잘 통과하기를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온전케되리 + 사랑은 여기 있으니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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