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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8 - 명예혁명으로 탄생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부부 공동 왕!
태고 이래 아이의 탄생은 늘 축복받았으며 그 아이가 왕실에서 태어났다면 전 국민의 기쁨
으로 경사스러운 일이건만...... 왕자의 탄생이 오히려 먹구름을 몰고 온 때가 있었습니다.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2세 영국왕은 1688년 5월 가톨릭을 용인하는 “종교 관용령” 을
발표함으로서 국교회 의원들이 등을 돌리는등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6월 가톨릭
신자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왕비가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를 출산 합니다.
영국인들이 바짝 긴장한 것은 엄마인 마리아 왕비가 아들을 가톨릭식으로 교육할 것이고
그럼 왕위에 오른 가톨릭왕은 영국을 국교회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할
것인데...... 예전에 헨리 8세가 왕비와 강제 이혼하고 시녀 앤 볼레인과 결혼하자
로마 교황이 파문에 처하니 헨리 8세가 로마에서 독립해 세운게 "영국 국교회" 입니다.
그 딸인 메리는 비참하게 버려진 엄마를 생각하고 영국인들에게 국교회나 청교도(복음주의)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니, 거부하면 잡아다기 고문하고 재산을 빼앗으며
심지어 화형에 처해 죽이니.... 얼마나 많이 죽였으면 블루드 메리(피의 메리) 라고 불렸습니다.
앤 볼레인의 딸 엘리자베드는 독실한 가톨릭교도 인 것처럼 위장해 살아남아 왕위에 올라 이제
가톨릭을 버리고 국교회로 개종을 강요하니, 메리에는 못미치지만 사람들을 죽였으며.... 그후
찰스 1세는 가톨릭을 후원하다가 반란이 일어나서 1649년에 국왕이 처형당했으니 어찌 되려나?
그런데 가톨릭 신앙을 가진 제임스 2세가 “종교 관용령” 을 발표한 것은... 영국이 국교를
국교회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것은 아니고, 가톨릭도 역시 합법적으로
잉글랜드 땅에서 존속되기를 원했던 정도이니 그럼 그는 종교 관용론자에 가까웠습니다?
오히려 그는 프랑스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도인 위그노 간에 수십년간에 걸친 처절한
종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앙리 4세가 자기 개인만 가톨릭으로 개종하고는 동료
들은 개신교 믿음을 유지할수 있도록 1598년에 발표한 "낭트칙령" 을 루이 14세
가 87년만인 1685년 10월 18일에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폐지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루이 14세의 낭트칙령 폐지와 위그노 탄압을 비판하며 '개종은 진심으로 해야지
강제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는 개방적인 입장을 줄곧 내세웠으니... 그가 진정으로
내세운 종교정책은 가톨릭으로 회귀가 아니라 모든 종파를 위한 종교적인 관용이었던 것입니다.
루이 14세는 가톨릭만을 국교로 인정함으로써 절대왕정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자 했으니,
낭트 칙령이 폐지되자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신변 보장을 받지못하게 되었고 많은 수가 해외로
이주하였으니 1685년에서 1689년 사이에 해외로 이주한 개신교 위그노는 무려 30만명에 달했습니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위그노들이 재산을 싸들고 해외로 이주하자 프랑스 경제는
마비되었고 그들은 네덜란드, 영국과 프로이센을 비롯해 북아메리카까지 퍼져나갔는데, 이때
특히 후진적이었던 프로이센은 이들 위그노를 받아들여 상공업의 발전을 이루는 혜택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는 "프랑스 중앙집권화" 를 위해 지방을 억제
하고자 무분별하게 벌어지던 마녀사냥 재판과 끔찍한 화형을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중지시켰으니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인데.... 그 100년 후인 1787년에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을 선포한 이후에 프랑스에서는 개신교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게 됩니다.
영국의 상공업 종사자들은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인 청교도(복음주의자)들이 많았으니 학계,
법조계 및 의회에도 많이 진출했는데... 성경중심 신앙과 금욕주의, 강경한 반가톨릭
기치로 전통주의에 반대 노선을 취한 탓에 영국 국교회의 수호자인 국왕들에게
오래토록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찾으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의 기원이 됩니다.
잉글랜드왕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왕을 칭할때는 제임스 7세라고 하는데, 헷갈리기 쉬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는 3백년전의 사람으로,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백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혼란에 빠져
장미 전쟁의 막이 오르던 1459년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니 국경 지방을 공격하다가 전사한 인물 입니다.
제임스 2세의 아버지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 청교도들이 못마땅했는데 아버지의 고향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에게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강요하자 반란이 일어나니 전비 마련을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는데 청교도 의원들과 마찰을 빚으니 1642년에 내란이 일어납니다.
1642년 찰스 1세는 기마대와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로 우세한 상황에서 내전을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1645년 의회파의 주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1646년 6월 옥스퍼드를 전격 함락시키자 전세는 의회파로 기울게 됩니다.
1647년 의회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였으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의회파에 넘겨주었으며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와이트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결국 찰스 1세가 의회파에게 처형을 당하자 찰스 2세는 외가인 프랑스로 망명하여 루이
14세에게 의탁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의 왕당파들은 찰스 2세의 복권을 위하여
의회파와 내전을 계속하였으나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의회파에게 격파됩니다.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1세 국왕을 처형한 후에는 나라를 도덕주의로 운영하니...
세익스피어 이래 성황중인 극장을 폐쇄하고 주일(일요일)에는 영업행위나 취미
생활을 금지하였으며 오직 교회만 다니게 하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 까지도 금지합니다.
유쾌한 노래와 춤을 금지하는등 일체의 여흥을 금지하고 전 국민들을 수도승이나 수녀같은 생활을 강요
하며 무력으로 찍어 눌렀는데, 그가 죽자 국민들이 들고일어났으니 1660년 공화정은 무느지고
프랑스로 도망친 찰스 2세가 국왕에 오르니 왕정복고로 청교도들은 된서리를 맞고 미국으로 달아납니다.
1673년 11월 요크 공작 제임스는 모데나공국의 마리아와 가톨릭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제임스는
나이가 많고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으며 말더듬이였으니 15살 마리아는 결혼식날에 처음으로
남편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제임스 2세는 어린 아내를 잘 대해주었고 부부는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요크 공작의 결혼에 불만이 많았으니 찰스 2세는 적자가 없었기에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는 유력한 왕위계승자로, 왕위계승자가 가톨릭교도인 것도 못마땅한 일인데
게다가 가톨릭교도 아내를 들인것이라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왕자비 마리아를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전처 앤하이드 소생인 두 딸들에게 계모인 신부 마리아를 '너희의 새로운 친구'
라고 소개했으니 마리아는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첫째딸 메리 2세와 친하게 지낼수
있었지만 둘째 앤과는 잘 지내지 못했다는데, 4년후 1677년에 친구 같은 의붓딸 메리가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했을 때 마리아는 의붓딸 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찰스, 메리 2세, 제임스, 앤 여왕, 찰스, 에드거, 헨리에타, 캐서린, 캐서린
로라, 이사벨, 찰스, 엘리자베스, 샬롯 마리아등 자식을 얻었지만 이때 성년으로
자란 아이는 메리 2세와 앤 두 딸 뿐이었는데.... 1688년에 그만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탄생했으니 영국 국교도와 청교도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제임스 2세는 종교적 관용을 원했을 뿐인데도 과거 내전을 치룬 쓰라린 역사 때문인지... 장차
영국이 가톨릭 국가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에게 원조를 요청하니 1688년 11월 5일 윌리엄은 대군을
이끌고 영국땅에 상륙하는데... "왕자가 아닌 공주" 가 탄생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공주가 탄생했더라면 제임스 2세는 천수를 누리고 장녀인 메리가 평화롭게 왕위에 올랐을 것인데?
제임스2세는 국왕 군대의 개신교 병사들이 이탈하니 윌리엄 3세의 대군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물러나니 1688년 12월 프랑스로 도피해서는 망명정부를 세웠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자신의 외가 도움을 받아 재기할 기회를 노렸으니 "자코바이트 운동" 이라고 불립니다.
자코바이트는 명예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영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나 반란을 일으켰으니
명예혁명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때로는 정권을 동요시켰지만 운동은
점차 용두사미가 되어 갔고 로버트 월폴 등 휘그당의 정략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자코바이트는 윌리엄 3세나 메리 2세 두 군주보다 프랑스로 달아난 제임스 2세를
여전히 지지했으니 특히 보수파인 토리당에 많았다고 하는데 공공연히 자코바이트라고 천명하는
사람, 틈새에 끼어서 고민하는 사람, 명예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으로 엇갈렸습니다.
토리당이 세습 군주 정부의 원칙을 존중했으며, 적자 상속을 주장하는 자코바이트의 입장과 가까웠기
때문이며 반면에 토리당은 국교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라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를 왕으로
모시는 것에 대한 의문도 있었는데 휘그당의 로버트 월폴이 추진한 ‘자코바이트는 위험 분자’
라는 캠페인으로 공공연히 자코바이트 라고 칭하는 것은 정치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가 됩니다.
자코바이트의 최대 지지 기반은 스코틀랜드, 특히 하일랜드 지방이었으니 잉글랜드와 뿌리 깊은 대립의식
에 또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었으니 경제문제에서도 잉글랜드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1715년의 반란에서 존 어스킨 백작이 지휘아래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이 반란군 손에 떨어집니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적 측면에서 제임스를 지지했으니 청교도 혁명 이후 아일랜드는 소수의 국교회
신자가 다수의 가톨릭 신자를 지배하는 구도가 성립되었으니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요구하며
자코바이트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제임스 2세로 부터 아일랜드의 통치를 위임받은 코넬 백작
리처드 탈보트는 가톨릭 지배의 침투와 자코바이트의 확산에 힘쓰며 아일랜드의 대부분을 제압 합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교도였으니 영국의 적대국이기도 했던 프랑스는 자코바이트를 적극적으로 지원
했는데 루이 14세는 열성적이었으며, 그의 통치때 자코바이트 운동은 절정을 이루었지만
루이 14세 사후에는 냉담해진 프랑스를 대신해 이탈리아 도시들과 스웨덴, 스페인등이 뒷받침합니다.
윌리어마이트 전쟁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공동 통치가 결정된 이틀 후인 1689년 2월 15일에 일어
났으니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에서 루이 14세에게 군대를 빌려 난을 일으킨 것
이니 제임스는 아일랜드에 상륙해 현지 자코바이트 세력과 합쳐서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을 석권합니다.
이에 따라 5월 5일 잉글랜드는 대 프랑스 동맹에 참가하니 윌리엄 3세는 스스로 영국-네델란드
군대를 이끌고 1690년 7월 1일 아일랜드 더블린 남쪽 보인강에서 제임스 군을 물리쳤으니
윌리어마이트 전쟁인데 제임스는 프랑스로 도망치듯 돌아갔고, 아일랜드 각지에서
일어났던 무력 저항도 1691년 10월에 진압되었으며 제임스는 실의에 빠져 1701년 사망합니다.
이후 가톨릭 신자의 공직, 법률직 금지, 토지 소유와 임차도 엄격히 제한되었고, 아일랜드는
몇몇 개신교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으니 또한 이 전쟁에서 영국이 9년 전쟁에 휘말려
‘제2차 백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대 프랑스 전쟁을 반복하며 유럽의 패권 싸움에 참가합니다.
아일랜드내에서는 윌리어마이트전쟁 이라고 불리는 1689년에 시작되었던 9년 전쟁은 영토
를 확장하고 자코바이트를 지원하는 루이 14세의 호전성에 대해 전 유럽 연합을 형성
하도록 만들었으니 대동맹(Grand Alliance) 은 프랑스의 야망을 축소 시키기로 결의합니다.
동맹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왕 윌리엄 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스페인
의 카를로스 2세, 사보이아 공국의 비토리오 아마데오 1세가 이끌었으니.... 이
전쟁은 공성전이 좌우했고, 몽스, 나무르, 샤를루아와 바르셀로나가 두드러졌습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용병을 많이 고용했으니 엄청난 군사비의 지출을 불러와 1696년 프랑스
는 경제 위기를 불러왔으며 해상력(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은 또한 재정상의 피폐를
가져왔고 1696년 사보이의 이탈로 동맹국들은 프랑스와 협상을 맺어 9년 전쟁을 끝냅니다.
1696년 윌리엄 3세 암살 미수 사건은 일명 펜윅 음모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데 9년 전쟁
에서 불리한 프랑스가 펼친 흑막이니 제임스의 서자 베릭 공작이 책임을 부여받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자코바이트를 조직화하고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2월 22일에 음모가
드러나 300명 이상이 체포되니 "명예혁명 체제" 가 여전히 사상누각 임을 알렸습니다.
1689년 1월 의회는 제임스 2세의 폐위를 공식 선언했고 2월에는 권리선언과 권리장전
을 발표해 전제적인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 후에 2월 13일
화이트홀에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부부는 공동 왕에 올랐으니..... 무혈의
‘명예혁명’ 이 완수되고 사상 최초로 세습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 의 막이 열렸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동군연합(두나라 국왕이 같은 사람)이 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제임스 1세 때로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의 딸이자 엘리자베스의
언니인 메리 1세가 여왕이었고, 스코틀랜드에서도 제임스 6세 & 1세의
어머니인 메리 1세가 있었기 때문에 메리 2세는 양쪽 나라에서 다 호칭이 2세였습니다.
메리 2세는 제임스 2세의 장녀로 부모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과는 달리 그녀는
훗날 개신교도들에게 처형당하게 될 할아버지 찰스 1세의 뜻으로 프로테스탄트
로 자랐으니,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였던 오라녜공 빌렘과 결혼
하였으며 1689년 명예혁명 때 남편과 함께 잉글랜드의 공동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의 입김이 더 강한 시절이기도 했고, 명예혁명 당시 남편이 이끄는 네덜란드 군대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낸데다가 부부가 사촌간으로 남편 윌리엄도 잉글랜드 왕위 계승 순위가
아내와 처제에 이어서 3위로 매우 높은 편이기 때문에 잉글랜드 내에서도 별다른 이견없이
공동왕으로 즉위했는데 말이 공동 지배지 사실상 남편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메리 2세 혼자 여왕으로 즉위하고 윌리엄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부군이었다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메리 2세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기에
공동 즉위를 했다고 전해지며 거기에 본인이 재위 5년 만에 천연두로 죽었고 사후
왕위는 공동으로 재위하던 남편 윌리엄이 단독으로 1702년 까지 재위하게 됩니다.
메리 2세는 1689년 2월 13일에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고, 1689년 4월 11일에 스코틀랜드
의 여왕이 되었는데..... 자녀들 까지 일찍 죽으면서 그녀의 직계혈통은 단절되었고
남편인 윌리엄 까지 사망한 이후 영국 왕위는 메리 2세의 동생인 앤에게 승계 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의 장녀임에도 프린세스 로열 작위를 받지 못했는데 큰아버지인 찰스 2세가
재위하던 때에 태어나서 받지 못한 것 같으며, 비슷한 경우로 조지 1세의 장녀인
조피 도로테아가 있는데 원래 프린세스 로열은 '국왕의 재위 중에 태어난 장녀'
에게 주는 것이 원칙이고..... 또 선대 프린세스 로열이 사망한 뒤에만 받을 수 있습니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겸 나사우 백작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내 실질 통치자
(7개 주 총독) 겸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이 된 것인데, 영어
이름은 윌리 엄(William) 이지만 네덜란드어로 쓸 때는 빌럼 (Willem) 이라고 적습니다.
빌럼 3세는 1650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오라녜 공 빌럼 2세와 잉글랜드왕 찰스 1세의
장녀 메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태어나기 직전에 천연두로 사망했고
어머니 또한 1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으니 실권은 총리 요한 드 비트를 필두로 한
공화파가 쥔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총독 직을 이어받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큰외삼촌인 영국왕 찰스 2세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도버밀약을 맺으면서 네덜란드를 위협하여
찰스 2세와 루이 14세는 1672년 네덜란드를 침공했으니 제3차 영란전쟁인데, 네덜란드군이
초전에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자 빌럼 3세는 정적 총리 요한 드 비트를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
을 물어 총리직에서 해임하니 조선의 김홍집 처럼 요한은 빌럼파 시민들에게 린치당해 죽습니다.
이에 네덜란드의 많은 주가 빌럼(윌리엄 3세)을 곧바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니 22세에 총독
에 취임하게 되는데 1674년 찰스 2세가 본국에서 비밀협정 내용이 드러나고 재정적
인 압박을 받게되면서 곧바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되었고.... 루이 14세도 전쟁을
지속적으로 끌고 가지는 못했으니 1678년 프랑스와는 휴전했으나 나쁜 관계에 있게 됩니다.
3년 후인 1677년 전쟁을 치뤘던 영국의 작은 외삼촌인 요크공 제임스의 딸 메리와 결혼
하여 그의 사위가 되니 메리 2세와는 사촌간이기도 한데, 이 결혼은 행복하지는
않았으니 메리는 15살로 어린 소녀였고, 빌럼은 20대이긴 했지만 총사령관으로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리에 대한 관심이 좀 덜했다고 봅니다.
네덜란드 해군의 이름난 명장이자 조선의 이순신에 비견할 만한 해군 제독인 "미힐
더 라위터르" 가 바로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 빌럼 3세로서 통치하던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니, 그는 정치적으로 요한 드 비트 파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 빌럼
의 눈 밖에 나서 무리한 작전을 강요당해 전사한 것 까지 이순신 장군과 비슷합니다.
미힐은 1637년에 선장으로 임명된 뒤 부터 해적 감시임무를 수행했으니 포르투갈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던 1641년에는 네덜란드 해군소장 신분으로 참전하여 포르투갈 해군을 지원했으며 1642년
부터 1652년까지 모로코, 서인도 제도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의 해상 무역선 선장을 역임했습니다.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중이던 1652년부터 1654년까지 네덜란드 해군에 복귀했으며 마르턴
트롬프가 지휘하던 네덜란드 해군은 잉글랜드 해군과의 해전에서 큰 공훈을 세웠으며
특히 1653년 7월 31일에 일어난 스헤베닝언(Scheveningen) 해전에서는 전략적 승리를
기록했고 1653년 마르턴 트롬프가 전사한 이후에는 네덜란드 해군 중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대담한 작전을 펼치는 제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1667년 6월에 미힐은 잉글랜드의
채텀 인근에서 일어난 메드웨이(Medway) 기습을 통해서 런던 템스강의 하구(河口) 를
봉쇄했으니 이를 계기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브레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미힐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진행 중인 1672년 5월 28일 솔베이(Solebay) 해전, 1673년 8월 21일
텍설(Texel) 해전에서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해군을 연달아 물리치면.서... 잉글랜드 군대의 네덜란드
침공을 저지했지만, 반대 진영에 속한지라 윌리엄 3세는 그를 사지인 지중해 시칠리아로 로 파병 합니다.
1676년 4월 29일 시칠리아 아우구스타(Augusta) 해전에서 네덜란드- 스페인 연합해군 진영에 참전해
전투를 벌이던중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으니, 미힐은 자기가 죽어야 할 자리인줄 알았던
것일까요? 살아서 귀환해 봐야 국왕의 견제를 받을 것이니... 장수로서 전장터에서 죽은지라 이순신 및
넬슨과 더불어 명예롭다고 하겠는데, 도고 헤이하치로는 대마도해전때 58세라 더는 전장이 없었습니다.
같은 경우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방면 사령관으로 보내진 것인데 방데미에르사건에서 3만명 왕당파들
이 파리를 점령하려고 하자 그는 기상천외하게도 대포 40문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사격해서 진압하고
통령 정부에 들어갔으나... 바라스는 그를 군화 한켤레를 장교 3명이 나누어 신을 정도로 보급과 급료
가 체불된 부대에 보냈지만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북이탈리아를 차지해 훗날 황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