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마시면 취한다. 취하면 정신줄 놓고.... 근간엔 술의 폐해만 강조한다만....
술을 알고 마신다는 말은 잔 수를 세는 것도 취함을 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술을 마시면서 최소한의 예의루다 술이란게 뭔지 정도는 헤아려 봄도 좋다.
아랫글은 퍼온 글....
술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한국 전통주 진흥협회란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 자료실에 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어 가지고 왔다.
1. 신화 · 전설 속 술의 유래
가. 신화 · 전설 속 술의 유래
지구상의 모든 민족은 오랜 역사와 항께 그 나라의 기후 풍토에 맞는 술을 빚어왔다. 술은 인류가 만든 최초의 가공음료로 우리나라에서도 상고시대부터 온갖 정성과 비법을 동원하여 많은 명주를 만들어 마시면서 우리만의 멋과 맛을 자랑하는 특색이 있는 술 문화를 창조하였다.
나. 술의 어원 어느 지방 각설이타령에 이런 구절이 있다. “… 밥은 바빠서 못 먹겠고 죽(粥)은 죽어도 못 먹겠고 술만 수울술 넘어 간다….” 술이란 호칭이 이 타령에서 처럼 목구멍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하여 생긴 이름일까? 천소영에 의하면 술의 본래말은 ‘수블/수불’이었다. 고려 시대의 말을 기록한 『계림유사』에서는 소자(酥字, su∂-pu∂t)로 적었고 『조선관역어』에는 수본(數本, su-pun)으로 기서되었다. 조선 시대의 문헌에는 ‘수울’ 혹은 ‘수을’로 기록되어 있어 이 수블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수블’의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술을 빚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해진다. 즉 술은 찹쌀을 쪄서 식히고 여기에 누룩과 주모(酒母)를 버무려 넣고 일정량의 물을 부어 빚는다. 이어 진공상태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발효가 이루어져 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르며 거품이 괴어 오르는 화학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발효 현상은 옛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신비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물에서 난데없이 불이 붙는다는 뜻으로 ‘수불’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히는 ‘물불’이라야 옳겠지만 물은 한자의 ‘水’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술이 발효하는 이 오묘한 현상과 관련하여 옛 사람들은 여기에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양조만은 자기 암시에 걸리기 쉬운 부녀자들이 맡았는지도 모르겠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궁중 요리는 원래 남자들이 맡고 있었으나 유독 주인(酒人), 장인(漿人), 해인(醢人) 등의 술의 발효와 관계되는 일은 여자들이 담당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술 중에서 불과 관계 깊은 것이 소주이다. 알콜 성분이 강한 이 술은 화주(火酒)라고도 하며 불이 붙는다는 의미의 소(燒)를 술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술은 좋은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 술은 백약(百藥)의 으뜸이라 하였으니 적당히만 마시면 이보다 더한 양약(良藥)이 없을 것이다. 지나친 과음으로 술에 감기거나 술에 먹히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체내에서 이상적인 불(에너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다. 주(酒) 자(字)의 기원 이춘영(주정공업, 1976년 9월)과 (고)이성우(1984년)에 의하면 주(酒)자의 고자(古字)는 유(酉 : 닭, 서쪽, 익을)자이다. 유(酉)자는 밑이 뾰족한 항아리 모양의 상형 문자에서 변천된 것으로 술의 침전물을 모으기 위하여 끝이 뾰족한 항아리 속에서 발효시켰던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 후 유자가 다른 뜻으로 쓰이게 되어 삼수변이 붙게 된 것인데 고자(古字)에서는 삼수변이 오른쪽에 붙어 있었다. 보통 삼수변의 글자는 옥편에서 찾을 때 수지부(水之部)를 보게 되지만 주자(酒字)는 수지부에 속하지 않고 유지부(酉之部)에 들어 있다. 유는 지지 유, 익을 유로 훈(訓)이 되는데 원래 술항아리를 상형(象形)한 것으로 술을 뜻하는 것이다. 물 수(水)와 술을 뜻하는 술항아리가 합쳐 술 주(酒)자가 된 것은 술항아리 안의 곡주에 막걸리처럼 물을 첨가하여 거름으로써 유래한 글자로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늘날 술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글자 가운데서도 유(酉)자가 들어 있는 글자들 중에는 애초에 술과 관련되었던 글자가 많이 있다. 술을 뜻하는 유(酉)가 변으로 들어간 모든 한자는 발효(醱酵)에 관한 광범위한 식품명이다. 주류명으로는 酎(세 번 빚은 술 주), 醪(막걸리 료)가 있고 술을 빚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글자로는 醱(술괼 발), 酵(술괼 효), 釀(술 빚을 양)이 있다. 추상어로는 醉(술 취할 취), 酩(술 취할 명), 酊(술 취할 정), 酬(잔돌릴 수), 酌(잔질할 작) 등이 있다. 친구들이 술을 먹기 위해 추렴하는 데서 醵(술 추렴할 갹)이라는 글자가 나왔는데 지금은 기부금 거두는 것을 갹출(醵出)이라 하고 있다. 술 주(酒)자를 쓰기도 하는 소주(燒酎)의 ‘酎’자는 세 번 고아서 증류한 술이라는 것이 본 뜻인데 음훈(音訓)이 혼돈되어 ‘酎’자를 흔히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주란 말은 원래 한자어이다. 만주어에서는 증류주를 아이키(亞兒吉)라고 하고 몽고어에서는 아락(arag)이라고 하며 범어(梵語)로는 아물타(amrta)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평북 지방에서는 산삼을 캐는 사람들의 은어로 술 또는 소주를 아랑주라고 하며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arag酒)라고 한다. 또 어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우리말대사전』에는 아랑주의 뜻풀이가 질이 낮은 소주라고 씌여 있다. 따라서 우리말에서 아랑주니 아락주니 하는 것은 고유어가 아니라 외래어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라. 신화(神話), 전설(傳說) 속의 술의 유래 ‘물은 신(神)이, 술은 인간(人間)이 만들었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 사회에 언제부터 술이 있었을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술의 기원을 확실하게 찾을 길은 없으나 인류의 역사와 함께 술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술이란 음료의 기원이 인류 사회에 있어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 생활이 시작된 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동서양의 전설이나 신화에 으레 술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술의 관계가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신화로 동양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술의 역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신화에 담겨진 서양 술의 유래 술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이 문제는 어느 나라이고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속에 묻혀 있다. 가) 이집트 신화 천지의 신이며 최고의 여신이라는 이시스(Isis)의 남편인 오시리스(Osiris)가 곡물신에게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한다. 나) 그리스 신화 디오니소스(Dionysos)가 술의 시조라고 한다. 술의 별칭은 바커스(Bacchus)의 선술 또는 바커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후세에 붙여진 디오니소스를 이르는 말이다. 디오니소스의 임신 6개월에 어머니 세멜레(Cemele)가 죽자 요정들이 그를 양육하였고 그는 늙은 실제소스틀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디오니소스가 어느 날 뉘사 산에서 뛰어놀다가 포도주를 발견하고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로 돌아와 이카리오스(Ikarios)란 사람에게 포도주를 주고 담그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이카리오스는 기뻐하면서 신기한 포도주를 근처의 목동들에게 한 잔씩 권하였다. 포도주의 달콤한 맛에 목동들은 취하도록 잔뜩 마셨다. 술에 취하여 아찔해지자 독약을 타 먹인줄 알고 목동들은 이카리오스를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이카리오스는 최초의 술 순교자가 된 셈이다. 지금도 그리스 아타카주에서는 ‘디오니소스제’ 혹은 ‘시골제’라 하여 신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포도주제가 거행되고 있다. 그리스의 고전극이 발달된 것도 이 행사의 덕분이라 한다. 다) 로마 신화 바커스(Bacchus)가 처음으로 술을 빚었다 하여 바커스를 술의 신이라 한다. 라) 구약성서 노아(Noah)가 세계에서 최초의 술을 빚었다 하는데 그 술은 포도주였다고 한다. 성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10대 손인 노아의 시대에 대홍수가 일어나 전세계가 물 속에 잠기게 되었는데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 자기의 일족과 동식물의 원종을 실어 홍수를 무사히 넘기고 아라랏 산에 도착하여 재출발을 하였다. 거기에는 포도의 종자도 있었으며 신이 노아에게 포도의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2) 전설에 기록된 동양 술의 유래 가) 중국의 전설 중국의 고서 『전국책(戰國策)』의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술에 대한 첫 기록이 있다. “昔者帝女儀狄作酒而美 進而禹 禹飮而甘之 遂疏儀狄絶旨酒 曰後世必有 以酒亡基國者 옛날 황제의 딸 의적이 술을 맛있게 빚어 우왕(禹王 : 하(夏)나라 왕)에게 올렸더니 우왕이 이를 맛보고 그 감칠맛에 놀랐으나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 말하고 술을 끊고 의적(儀狄)을 멀리하였다.” 위 기록은 하(夏)나라 때인 기원전 2000년 경에도 이미 중국에 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양(東洋)에서 술의 시조(始祖)가 의적(儀狄)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학자 서유구(徐有渠)는 그가 쓴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30년경)』 가운데의 주례총서(酒醴總叙)라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술의 기원(起源)으로 말하면 지금 이를 분명히 밝힐 도리는 없으나 글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사적(史籍)에서 더듬어 보면 술의 기원에 대해 적힌 부분이 있으나 근거가 박약하여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고증(考證)할 길조차 없이 어느 것이 정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중국의 술 전설은 송대(宋代)에 지은 『주보(酒譜)』란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고서에 기재된 술의 연유(緣由)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보아진다. (1) 의적(儀狄)이 처음으로 술을 빚었다는 우왕(禹王)때의 기록 (2) 『요주천종(堯酒千鍾)』에는 술을 요제(堯帝 : 전설상의 황제) 때에 만들었다는 기록 (3) 『신농본초(神農本草)』에는 황제(黃帝 : 전설상의 황제)가 이 술을 다스렸다는 기록 (4) 『내경(內徑)』에 하늘에는 주성(酒星)이 있으니 술을 빚는 것은 천상계나 지상계가 다 같다는 기록 (5) 두강(杜康)이 빚었다고 해서 두강주(杜康酒)라는 기록 이상과 같은 여러 기록 등이 있다. 의적(儀狄)이름은 경서(經書)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세본(世本 : 권(?)간의 잡서)에만 있으며 세본은 믿을 것이 못된다. 『요주천종(堯酒千鍾)』은 본래 공총자(孔叢子)에서 나온 말이며 이는 항설에 불과하다. 또 『본초(本草)』는 염제(炎帝 : 전설상의 황제) 때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근세에 쓴 것이란 설도 있어 염제가 다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경(內徑)』은 삼분(三憤)의 서(伏義, 神農, 黃帝의 書)라고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어본 사람은 그 문장이 육국(六國) 시절 진한(秦韓)의 것이라고 한다. 두강(杜康)은 위무제(魏武帝) 때의 사람으로 두(杜)씨는 본래 유(劉)씨 계통이었으나 주무왕(周武王)이 두(杜)라는 벼슬을 주어 두백(杜伯)에서 지방관으로 있었으나 선왕(宣王)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은 진(晉)나라로 도망쳐 두(杜)를 성(姓)으로 삼았다. 두강은 술 빚기가 능했다는 것뿐이고 두강이 술의 시조라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대체적으로 모든 일이란 지혜로운 사람이 먼저 시작한 것을 후세의 사람들이 흉내내어 계승하는 것이므로 술도 또한 어느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옛 풍습에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술로 제사를 지내왔지만 도대체 누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지조차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그 기원을 알 수 없음은 명백한 일이다. 이상과 같은 사정으로 보아 중국에서의 술의 기원은 결국 애매한 것이어서 태고적에 술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점차 개량되어 왔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 인도의 전설 인도 신화에서는 소마신(蘇麻神)이 감로주(甘露酒)를 처음 빚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 감로주를 범어(梵語)로는 amrta라고 하는데 이는 도이천(忉利天 : 六欲天의 第二天, 須彌山 頂上에 있으며 帝釋天의 居處라고 한다)에서 나는 감미로운 노액(露液)으로서, 이것을 마시면 고뇌를 잊고 장수(長壽)하고 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한다. 이 감로주는 불사주(不死酒), 천주(天酒)라고도 번역되고 있다.
다) 일본의 전설(조李) (1) 새에 관한 전설 일본의 천지천황(天智天皇) 때 국부토군에 사는 죽유(竹臾)라는 사람(전설적인 인물)이 대나무를 많이 가꾸고 있었는데 어느 날 대를 벤 그루터기에서 이상한 향기가 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새들이 쌀을 물어다가 그곳에 넣으니 쌀이 발효되어 술이 되었다. 이것이 술의 시초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2) 미잔오존(未盞嗚尊)의 전설 일본의 『대화사시(大和事時)』에 의하면 신화시대의 인물인 미잔오존(未盞嗚尊)이 신라국으로 가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 왔다고 한다. 그것은 춘성군 신북면(지금의 춘천시)에 있는 우두리(지금의 우두동)였다는 설이 있다. (3) 목화소비매(木花咲比賣)의 전설 『고사기(古事記 : 712년에 쓰여진 책으로 우리나라 왕조실록과 같은 책)』에 목화소비매(木花咲比賣)가 쌀을 입으로 씹어서 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최초의 원시적인 술 빚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이 방법은 지금부터 80년 전, 대만의 동서안 비남사(卑南社)의 마을에도 있었다고 한다. 크고 평평한 항아리에 4~5인의 소녀가 모여 앉아 조금 찐 쌀을 세 손가락으로 집어 잠시 입속에 넣었다 토해내면 하루 반이 지나 감주가 된다. 바로 마시기도 하고 그대로 두어 술맛이 익으면 마시기도 한다. 이 술은 제주로 쓰였으며 별도의 곡주가 있었다고 전한다. (4) 수수보리의 전설 지금도 일본에서 주신(酒神)으로 모시는 백제인 수수보리(須須保理)가 일본으로 건너가 술다운 술 빚는 법을 가르친 것이 술의 시초로 보이며 이는 전설이 아닌 실제 역사의 기록인 듯하다. 『고사기』의 중권 『응신천황조(應神天皇朝)』편을 살펴보면 베 짜는 기술자인 궁월군(弓月君)의 증손인 수수보리란 기술자가 일본에 가서 술을 빚어 응신천황에게 바쳤더니 왕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수수보리가 빚은 술에/나도야 취했도다/태평술 즐거운 술에/나도야 취했도다” 양조 기술자인 수수보리는 이름의 뜻이 ‘술 거르는 이’로 이때에는 비교적 발전된 양조법으로 술이 빚어진 듯하다. 또 가정에서 술 내리던 증류 장치를 ‘고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주신인 수수보리의 이름과 관련 있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신화에서는 야마따(八岐)의 큰 구렁이를 퇴치할 때 먼저 구렁이에게 여덟 항아리의 술(후세에 이를 팔온주(八醞酒)라고 함)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칼로 퇴치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술이 최초의 술이며 이것은 과실주였을 것이다.
(5) 한국의 전설 우리나라 술의 기원에 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의 문화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므로 우리나라 술의 기원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졌으리라 믿어진다.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술잔을 드리는 우리의 풍습은 그대로 손님 접대에도 이용되는데 이는 손님을 신처럼 귀하게 모셔왔던 우리 풍속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는 것이다. 술은 개인의 우울증을 푸는 일로부터 약으로 또는 손님 접대로 그리고 신에 대한 제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되어 오고 있다. 즐거우면 즐거워서 한 잔, 슬프면 슬퍼서 한 잔하며 살아가는 생(生)의 고락이 술과 어울려 전개되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차(茶)를 상용하는 중국이나 일본 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음식 문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문헌으로 술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찾을 수 있다. 동명성왕 건국담의 술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고삼국사(古三國史)』에서 인용되어 있다. “하백의 세 딸 유화, 선화, 위화가 더위를 피해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 뒤 해모수가 신하의 말에 따라 새로 웅장한 궁실을 지어 그들을 초청하였는데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 후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앞을 가로막고 하소연하였으나 세 처녀는 달아났다. 그 중 유화가 해모수에게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정이 들고 말았다. 그 뒤 주몽(朱蒙)을 낳으니 이 사람이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후일 고구려를 세웠다.” 우리나라 술의 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에는 우왕(禹王) 시절에 제후(諸候)를 모아다 도산회(塗山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단군의 자손들이 열석(列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신화시대부터 술에 관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지(魏志)』의 고구려전이나 『태평어람(太平御覽, 46권)』을서오년오월무일(乙西五年五月戊日)에 ‘의정부지관진약주(議政府指關進藥酒)’라는 기록으로 보아 약주가 손님 접대에까지 일반화되었던 한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도 술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의 술이 매우 다채로웠을 것으로 짐작되어 청주와 탁주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진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정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행사가 있었으니 이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추었으며 이름을 영고(迎鼓)라고 하였다(以段正月祭天國中大會蓮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고 전한다. 『삼국지』 한전(韓傳)에는 마한에서는 5월에 씨앗을 뿌리고는 큰 모임이 있어 춤과 노래와 술로써 즐기었고 10월에 추수를 끝내면 역시 이러한 모임이 있었다(常以五月下種訖鬼神群聚舞飮酒書夜無休基舞數十人俱起相髓踏地低昻足相應範秦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加之)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에서도 역시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사가 있어 동맹(東盟)이라고 하였다(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농사를 시작하였을 때부터 술을 빚어 마셨으며 모든 의례에서 술이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고대의 술들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었는지 알기가 어려우나 막걸리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족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졌던 상고시대에 이미 농업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므로 건국담에 나오는 술의 재료도 곡류였을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곡주(穀酒)였을 것이라 믿어진다. 곡류를 가지고 어떻게 술을 빚었는지 그 제조법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누룩이 사용되기 전까지는 곡류가 스스로 상하여 술이 만들어지거나 곡식을 씹어서 침으로 당화(糖化)시켜 빚었거나 곡식을 물에 담갔다 싹을 틔워 그것을 으깨어 당화시킨 뒤에 발효시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편 문학 작품 등의 기록에서도 옛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는 “술 있으면 벗이 없고/벗이 오면 술이 없더니/오늘은 무슨 날로 술이 있자 벗이 왔네/두어라 이난병(二難幷) 종일취(終日醉)를 하리라”고 하였다. 옛 정치가나 시인들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이었다. 신라의 유적으로 남아있는 포석정(鮑石亭)의 터를 보면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 역대 왕공(王公)들이 전복 모양으로 생긴 돌 홈의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를 했다는 이곳은 귀족들의 생활과 술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고사통(故事通)』에는 소주(燒酒)도 원(元)나라 때 생긴 술인데 오직 약으로만 쓰이다가 후세에 와서 술로 마시게 된 것 같다고 하였다. 어쨌든 고려와 원(元)과의 접촉이 있은 뒤에 소주가 차차 유행하여 드디어 몹시 좋아하는 무리가 있었던 듯하니 『고려사(高麗史)』 최영전(崔榮傳)에 보면 경상도 원수(元帥) 김진이 주지(住地)에서 소주 먹기에 탐닉하여 소주도(燒酒徒)의 별명을 들었다고 한다.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술이란 말은 범어(梵語)의 졸라(??羅, sura=未酒)에 연결이 되는 듯하니 이것이 달어의 Sra를 거쳐 조선어에 와서 술로 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일본에서 국을 나타내는 氵儿?(汁)가 옛날에는 술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규합총서』와 『부인필지』에 기록된 음식총론(飮食總論)에는 음식과 술의 관계에 대하여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며 장(醬)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음식의 사시(四時)와 그 특색을 말한 것이다. 밥은 따뜻한 것이 좋고 국은 뜨거운 것이 좋으며 장은 서늘한 것, 술은 찬 것이 좋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술은 그 술을 빚은 고장의 기후 풍토와 생활에 알맞도록 제조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기후 풍토에 따라서 남북이 그 기호가 달랐다. 즉 북쪽 추운 지방에서는 소주류(燒酒類)를 상음(常飮)하였고 남쪽에서는 막걸리를 더 애음(愛飮)하였다. 『지봉유설(芝峰類設)』에는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안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고 하였으니 이 두 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 알 수가 있다는 말이다. 또한 그만큼 술과 음식이 나라의 정치에서부터 집안의 제반사(諸般事)에 이르기까지를 측정할 수 있는 문화 척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술은 신, 조상, 임금에게 바치고 손님에게 드리기도 하였지만 한편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기도 하여 작(爵)은 본래 술잔이었지만 공(公), 후(候), 백(白), 자(子), 남(男) 등 5등작(等爵)의 벼슬이 여기서 나왔다고도 한다. 임금은 명절이나 축일에 술을 내려 신하들에게 상을 주었고 정초에는 모든 신하에게 주과(酒果)를 내렸으며 이를 받은 신하들은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또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으니 북촌(北村)의 부귀한 집안에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하여 떡 만드는 솜씨가 발달하고 남산 밑 구차한 샌님들과 시세없는 호반(虎班)들은 술 솜씨가 늘었다고 한다. 술은 특히 서민들과 가장 가까운 음식이 되었고 마침내는 주점으로까지 발달하게 되었다. 『고사통(故事通)』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주점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2년으로 국로의 요소에 처음으로 주점 6개를 두어 지숙음식(止宿飮食)의 편의에 이바지하게 하였고 이것이 후세에 주막이 되었다 하니 주막이 여행하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생긴 것이 흥미롭다. 손님 접대를 위해 사용되는 술은 대개 자기 집에서 손수 담궈 내는 것을 예절로 삼았기 때문에 술의 제조법에 수 없이 많은 종류를 낳게 하였다. 술의 전래와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이동의 역사를 추측할 때 술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3) 사실적(事實的)으로 본 술의 유래 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술이란 인류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시대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출현되었으며 글자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존속되었다는 것은 은(殷)대의 유적에서 술 빚는 항아리가 발견된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고서중에 술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기술된 것이 있으나 전설적 신화적인 내용이 많아 그 전위의 판단은 어려우나 사실적으로 기술한 내용도 있다. 가) 과실주(果實酒) 저절로 만들어진 과일술이 모든 술의 기원이 된다고 짐작한다. 인류가 짐승을 잡아먹거나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살던 시대, 즉 농경, 목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가 살 곳을 찾아 이동을 한 것은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의 식량이 많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산이나 들에서 나무열매나 과일을 따다 마음껏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남은 과일을 비축할 줄 몰라 아무 곳에나 버려 두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 그들은 배가 고파 다시 열매나 과일을 찾았으나 모조리 따먹어 버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먹다가 남긴 과일 생각이 났으며, 그것을 찾아보니 원형은 없어지고 자연발효가 된 것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으므로 처음 먹어보는 것이지만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러자 취기가 온몸에 돌아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흥분해서 날뛰고 아우성을 치다가 피로에 지쳐 그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전날 흥분했던 것이 썩은 과일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술을 과실주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며 음푹 팬 바위나 나무가 썩어서 푹 팬 곳 등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원시시대나 수렵시대에 있었던 술이었을 것이다. 원시시대에 제일 먼저 과실주가 만들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즉 발효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일은 대개 수분이 90%가량, 당분이 10% 이상 들어있는 데다 그 껍질 부분에는 효모균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즉 물, 당분, 효모가 존재하는 경우, 온도만 20~30℃로 유지되면 알코올 발효는 잘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술의 역사 중에서 과실주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정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의 신화에서는 야마따(八岐)의 큰 구렁이를 퇴치할 때 먼저 구렁이에게 여덟 항아리의 술(후세에 이를 팔온주라고 함)을 먹여 취하게 한 후, 칼로 퇴치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술이 최초의 술이며 그것은 과실주였을 것이다. 아프리카 탐험기에는 나무 밑에 떨어진 과일이 발효한 알콜을 먹고있던 코끼리가 폭주하는 불도처럼 휘청거리며 달아나고 멧돼지가 몹시 취하여 아무데나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보름달 아래 원숭이들이 바위나 나무 등지의 오목한 곳에 잘 익은 산포도를 넣어 두고 다음 달 보름날 찾아와서 술을 마신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포도주가 크게 발전되어 왔다. 포도는 자체적으로 쉽게 술이 되는 성질이 있어 기원전 6000년 전부터 포도주를 빚었던 흔적이 발견된다. 성서에는 이미 노아시대에 포도주가 등장하고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에도 포도주, 맥주 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지구상에 술이 존재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록이나 유물 등을 통하여 대략 기원전 6000년~4000년경 소아시아(지금의 중동지방)에서 술이 탄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술의 제조 방법 중의 일대 혁신인 증류법도 동방에서 탄생하여 중세기의 십자군 전쟁을 거쳐 서양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나) 벌꿀주 벌꿀을 물에 풀어서 마시고 남은 것을 그대로 두었더니 발효되어 술이 되는 우연한 발견에 의하여 벌꿀술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신혼부부가 한달 동안 벌꿀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는데 이 신혼한달 동안을 허니문(honey moon)이라고 한다. 다) 유주(乳酒) 유목 민족은 양유(羊乳)나 마유(馬乳)를 저어서 그대로 며칠 두었다가 걸러서 마시는데 이것은 유당을 알콜 발효시켜 유주를 만든 것이다. 유목 민족은 이 유주를 음료수처럼 만들어서 마셨으며 벌꿀과 섞어 자연적으로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들기도 하였다. 라) 곡물주(穀物酒) 농경민족은 곡물로써 술을 빚었다. 그러나 곡물주를 만드는 데는 과실주 · 벌꿀주 · 유주(乳酒)에 비하여 곡물의 전분을 우선 당화시켜야 하는 한 단계가 더 있어야 한다. 우선 전분을 당화시키는 데 침 속의 전분 분해효소인 프티알린(ptyalin)을 이용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밥을 입 속에서 씹어 항아리에 뱉어 모은다. 그러면 밥의 전분은 당분으로 분해된다. 다음은 보리를 발아시킬 때 전분분해 효소인 아밀라아제(amylase)가 많이 생성되는 데서 맥아(麥芽)로 전분을 당화시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얻어진 당분에 자연효모가 떨어져서 알콜 발효를 하게 된다. 또 누룩은 곡물에다 곰팡이와 효모를 번식시킨 것이다. 따라서 곡물에 누룩을 섞으면 곡물은 보다 효과적으로 당화하고 알콜 발효를 한다.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인류는 자연발생적으로 원시적인 술을 얻어 음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농경 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곡물주를 빚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마) 미인주(美人酒) 『위서(魏書』의 물길국(勿吉國), 숙신 읍루전에 의하면 “곡물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이것을 마시면 능히 취한다”고 하였다. 능히 취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알콜 농도가 높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1613)』에서는 처녀들이 만든다고 하여 미인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곡식을 씹어서 술을 빚는 모습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유구국(琉球國 :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처녀들이 모여서 사탕수수 줄기로 이를 닦고 바닷물로 입 속을 가셔내고는 쌀을 씹어 술을 빚었던 것이다. 그 후 누룩이나 맥아를 이용하여 당화 발효시켜 술을 빚는 방법이 아시아 문화권에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미인주는 가장 원시적인 곡물주로 조상의 제사에 쓰이며 지금도 일부 부족들이 만들고 있다고 한다. 바) 원숭이 술 그런데 청대(淸代) 『청패유초(淸稗類鈔)』에 의하면 “광서(廣西)의 평악등부(平樂等府)의 산중에는 많은 원숭이가 살고 있어서 백과(百果)를 채취하여 술을 빚는다. 나무꾼이 산에 들어가서 그 소굴을 발견하였던바 수백석(數百石)의 술이 있었다. 마셔보니 이상한 맛이라 이것을 원주(猿酒 : 원숭이 술)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강화도 전등사(傳燈寺)의 창건에 원주(猿酒)의 전설이 얽혀있다. 보름달 아래 원숭이들이 바위나 나무 둥치의 오목한 곳에 잘 익은 산포도나 머루를 달 밝은 보름밤에 넣어두고 다음달 달 밝은 보름밤에 찾아와서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 있다. 이와 같은 술은 자연적으로 빚어진 천연주라 하겠다. 일본의 시미즈 세이이찌(淸水精一)란 사람은 젊어서 입산수도하여 오랫동안 야생 생활을 하는 중에 원숭이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들이 술을 담가 먹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술은 다름 아니라 산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도토리와 머루를 이용하여 만든 도토리술과 머루술이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도토리는 씹어서 담그고 머루는 그냥 담근다는 것이었다. 원숭이들도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입 속의 효소를 이용하여 당화 발효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머루는 자체 당으로 자체 효모에 의해 발효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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