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4시경, 그리고 그걸 실행에 옮긴 시각은 5시였다. 와우. 그동안 빈둥거린 시간이 이까울 정도로 나오는 게 없었다. 글은 마음의 양식(아니, 책인가?)이라더니, 떠먹인 게 없으니 나올 것도 없는 게 당연했다. 결국 30분동안 아무것도 못 써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 졸렸다. 나가야 할 시각은 6시니까 조금만 눈 좀 붙이고 있자, 란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다. 3년 전 엄마가 사주신 극세사 이불은 절로 침대 밖을 두렵게 만들어 줬다. 불행하게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이 상태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리저리 생각했다. 덕포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5분, 그 길로 서면역까지 지하철로 가는 시간 약 30분, 1호선으로 갈아탄 뒤 교대역으로 가는 시간 15분, 건물 4층으로 올라가는 시간 3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자고 있었다. 아니, 동생이 와서 엉덩이로 내 머리를 뭉개고 있었다. 끔찍했다. 머리가 매트리스에 짓눌려 웁웁거리는 나에게 동생은 당장 저녁을 먹으러 나오라는 어머니의 강령을 전하였다. 아직 내복 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해졌다. 그리고 무척이나 배고팠다. 어머니께서 자던 나를 깨워 부르실 정도로 야심차게 준비하신 메뉴는, 양념을 잘못해서 실패한 돈가스를 넣어 만든 감자수재비였다. 와우. 난 곧바로 이곳을 탈출할 준비를 했다.
5분만에 복장을 갖추고 나서, 아직 내 그릇을 준비하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재빨리 다녀오겠다 말씀드리고 나왔다. 밖은 벌써 어두웠다. 역으로 가는 길에 조금이나마 허기를 달래려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과자를 사고 지하철역에 들어갈까 하다가 오랜만에 좀 고급진 걸 먹어보자 하고 빵 코너로 들어갔다. 와우. 학교 매점에서 1000원 하는 빵이 2300원이나 했다. 뭐가 더 있길래 이리 비싸냐 싶어 이리저리 들춰봤지만 역시 그런 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300원 짜리 빵을 계산대로 들고 갔다. 순간 보게 된 계산대 뒤에 붙여진 빨간 플래카드. '박근혜는 하야하라'. 요즘은 정도가 좀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 곤듀님이 불쌍해지기까지 한다.
뜨거워진 빵 봉지를 들고 지하철 안에 들어가 치즈냄새를 풍겨대는 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었다. 거기에다 지하철에는 히터까지 빵빵하게 틀어주고 있었다. 와우! 입안 가득 '치즈 앤 스파이시' 버거에 땀에 흠뻑 절은 패딩이라니! 내 앞에 있던 어린애 하나가 옆에 있던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나 띠드버거 머꼬시퍼.’ 냄새만으로도 알아맞히다니, 장차 크게 될 녀석일 것 같았다.
안내 스피커가 신나게 풍악을 울리면 사람들이 출입문 앞으로 우루루 몰린다. 튕겨져 나오듯 차 밖으로 나오면 1호선을 찾아간다. 퇴근길이라 그런지 유난히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2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건 처음이라 반대편 승강장으로 넘어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길을 헤멜 때 느껴지는 조급한 마음 때문에 땀이 더 났고, 덕분에 패딩 속은 더욱 뜨겁게 질척댔다.
하나님은 역시 살아계셨다.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흠뻑 젖은 내 옷 속까지도 보셨는지 1호선에서 에어컨을 쐴 수 있게 해 주셨다. 왜 이 겨울철에 에어컨을 틀어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앞뒤 사정 안 따지고 받는 게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는가. 서면에서부터 양정-연산을 거치면서 폰으로 글이나 쓰기 바빴다. 이상하게도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일취월장으로 좌르륵 써내려가는데 집에서는 더럽게 안 써진다. 다음엔 날 잡고 버스에서 몇 시간 동안 써재껴봐야겠다.
교대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내리는 건 처음이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출구로 나왔는데, 내가 다니던 2번 출구가 아니다. 번호가 다른 것 같다. 생판 처음 보는 다른 곳이다. 몇 번이고 이쪽 저쪽 승강장을 다니면서 출구를 찾았는데 거기서 거기다. 패딩 속에는 땀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다니다가는 글 안쓴 벌금뿐만 아니라 지각 벌금까지 내겠다 싶어서 그냥 내가 처음 나갔던 출구로 나갔다. 알고 보니 길 건너편 저 멀리에 2번 출구가 보였다. 교대역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그렇게 나는 몇 번 신호등을 건너서 겨우겨우 도착을 하였다.
놀랍게도 걸린 시간은 딱 52분. 내가 집에 누워서 예상하고 있던 시간과 딱 맞아 떨어졌었다.
2016. 11. 19
첫댓글 천원으로 천국도 가는데,
천원으로 저런 글이 나오다니!
캬, 돈이 쎄긴 쎄구나 ㅋㅋㅋ
그렇다고 벌금을 올리실 건.... 아니시죠? ㅎㅎ
@김시현 천원에 이런 글이 나오는데, 이천원이면 어떤 글이 나올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