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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㉛ 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예수는 표적이 됐다.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무시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쏘아붙였다.
“(너희가)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서 23장 15절)라면서 예수는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심지어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서 23장 27절)라고 지적했다. 그러니 사두가이파든 바리사이파든 호시탐탐 예수를 노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 유대인들은 이곳에 와서 솔로몬 왕 때 지은 유대 성전의 자취를 느끼고, 그때의 영광이 다시 이 땅에 재현되기를 기도한다. 백성호 기자
죽음 이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제들이 찾아와 예수와 부활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가 말문이 막힌 적이 있었다. 예수의 대답이 너무도 명쾌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듣고서 바리사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예수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왔다. 바리사이 율법 학자가 물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수는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유대의 그 숱한 율법과 계명 중에 왜 이 둘을 꼽았을까.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왔다.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정신을 다한 자리. 거기에 내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는 ‘나’가 없다. 왜 그럴까. ‘나’가 다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 하느님만 남는다. 그래서 예수는 가장 큰 계명이라 했다. 이웃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거기서도 ‘나’가 다한다.
그래서 둘은 하나가 된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그러니 가장 큰 계명이다. 단순히 받들고 지키라는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이 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불렀다.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벤 아담’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창조 당시 신의 속성을 간직한 아담의 아들, 아담의 후예라는 뜻이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중앙포토
이제 예수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월절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유대력으로는 1월 12일이었다. 예루살렘 성안의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인데,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성경에는 바로 그 시점에 유대교 제사장 카야파의 집에서 예수를 없앨 모의가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그렇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았다.
제사장 그룹은 섣불리 예수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유대 군중이 예수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 가운데서 소동이 일어날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면서 유월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덕분에 예수에게는 시간이 조금 생겼다. 유월절 저녁에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날의 식사가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떼어주며 “이 빵은 나의 살이요”, 포도주를 나누며 “이 잔은 나의 피다”라고 했던 예수는 그 심정이 어땠을까.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수는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촉박한 시간.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또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받아먹어라. 이 빵은 나의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했던 예수의 말씀에는 길이 있다. 나의 살을 바꾸고, 나의 피를 바꾸고, 나의 속성을 바꾸는 길이다. 예수의 살이 내 살이 되고, 예수의 피가 내 피가 되고, 예수의 속성이 나의 속성이 되는 길 말이다.
그런 길을 걷고 또 걷다가 사도 바울로(바울)는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서 2장 20절) 그것이 최후의 만찬장에서 예수가 이 말을 던진 본질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2000년 전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거는 기대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자신을 영적으로 구원해줄 메이사였고, 또 하나는 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줄 현실의 메시아였다. 백성호 기자
예수의 제자라고 해서 다들 이런 고백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특히 유다 이스가리옷은 달랐다. 복음서에는 그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유다는 12사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유다는 자신의 삶을 걸고 예수를 좇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유다는 예수를 팔았을까. 열심당원으로 추정되는 유다의 꿈은 달랐을까. 그가 기다리던 하느님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 이스라엘’이었을까. 무장 투쟁이 더 낫다고 봤을까. 그래서 예수가 설파하는 ‘마음이 가난한 나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요한복음서의 서술처럼 그는 단지 도둑에 불과했던 것일까. 제자 무리에서 회계를 맡아보며 종종 돈을 빼돌렸다는 건 사실일까.
어쨌든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그것은 돛단배가 강물을 파는 일과 같았다. ‘나’라는 존재의 바탕을 파는 일이었다. 유다는 그걸 몰랐다. 강물 없이는 돛단배가 떠 있을 수 없음을 몰랐다. 왜 그럴까. 바깥만 바라보는 이들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눈을 돌려본 이라야 알 수 있다. 아마도 유다는 바깥세상에 강하게 집착하는 성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급기야 예수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다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고 선언했다. 제자들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예수를 쳐다봤다. 예수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며 적신 빵을 유다에게 건넸다. 빵을 받은 유다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때가 밤이었다. 해가 떨어지고, 빛이 떨어지고, 하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도 예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짧은 생각
사람들이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
내 마음을 다 바쳐서
내 목숨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지.
그런데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어디에 계신지 알아야
내가 구체적으로 사랑할 텐데,
어디에 계신지 모르니
추상적으로 사랑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느님에 대한 사랑=충성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충성심이 때때로
이웃 종교에 대한 적개심과 배타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말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궁금합니다.
예수께서 말한
첫째 계명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게 바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향해
과감하게 충성 맹세를 하던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 앞에서
멈칫, 또 멈칫합니다.
왜냐고요?
쉽지 않으니까요.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정말이지,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물음도 생깁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이웃은 이웃인데
왜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에
버금간다고 했을까요.
눈을 감고
묵상해 봅니다.
무언가에 막힐 때는
묵상이 종종
길을 터주니까요.
이 물음에 대한
숱한 신학적 풀이와 해석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하느님이
내 이웃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느님이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이웃들 속에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많은 게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추상적 사랑,
관념적이기만 하던 충성 맹세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요.
그러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실현 불가능한,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히말라야의 빙벽만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우리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한 발짝씩 떼며,
수월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쾌하고 즐거운 길이
될 수도 있겠더군요.
하느님을 만나는 길,
그게
나의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오솔길이라면
그 또한 큰 행복이
아닐까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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