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신작 에세이】
‘도토리묵’에 얽힌 사연
― 재래시장에서 ‘도토리묵’ 사 오던 날
― 막걸릿잔에 수많은 옛 추억 어른거려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산에서 내려오다가 시장 보길 즐긴다. 시장을 보는 일은 아내의 전담이지만 내가 곧잘 월권(?)한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는 일이므로, 저녁 반찬거리를 한 봉지 사 들고 들어가면 아내도 대체로 반긴다.
여기서 ‘대체로’라고 표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반응을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많아요.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말고 그냥 오세요.”라고 하는 예도 있다.
그래서 가게에서 무엇을 사려고 할 때는 아내에게 전화로 “이 물건을 사도 되는지, 사지 말아야 할지?” 꼭 사전에 묻는다.
오늘은 나의 눈에 ‘도토리묵’이 꽂혔다.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간다. 알밤 막걸리에 도토리묵. 거기에 파전도 빠지지 않는다.
이것을 사려면 부수적인 재료가 필요하다. 도토리묵에 들어가야 하는 기본적인 식재료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오이, 쑥갓, 상추, 양파, 당근, 풋고추 등이다. 갖은 양념간장을 만들어 이것들을 넣고 한 접시 먹음직스럽게 요리해 내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아내의 도토리묵 요리 솜씨는 내가 오랜 세월 인정해 온 터이지만, 아들은 이 음식을 아비보다 더 좋아한다.
식탁에 오른 도토리묵을 반기면서 아들이 말한다.
“오늘 저녁은 참살이(웰빙) 식이네요. 엄마표 도토리묵, 아주 푸짐하네요. 식당에서 사 먹으려면 꽤 비싸겠죠? 적어도 몇만 원은 하겠죠? 도토리묵 아버지가 사 오셨어요?”
내가 답했다.
“물론이지. 가게에서는 그렇게 비싸지 않아, 2천 원 줬다.”
도토리묵 한 모에 2천 원이라니, 아들이 놀란다.
내가 말했다.
“도토리를 따다가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힘이 드는 줄 아니? 난 그 옛날 시골에서 도토리묵을 쑤는 것을 보고 자랐다.
도토리는 보릿고개 시절 구황식물의 하나였다. 그리고 식탁에 오르기까지 가정주부의 정성이 더하면 오늘 저녁 우리가 마주한 이 도토리묵 한 접시는 돈으로 계산하기 어렵다.”
나의 설명에 가족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전적으로 공감했다.
‘보릿고개’ 이야기가 나오니 신세대 아들에게는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정말 쌀이 귀했지. 쌀밥은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먹지 못했어. 오죽하면 여물지 않은 어린 보리를 뽑아다가 쪄서 양식으로 했을까?
풀뿌리, 나무뿌리, 심지어 다람쥐가 먹어야 할 도토리, 상수리까지 주워다가 묵을 쑤어 먹었을까?”
아내 역시 동시대 궁핍했던 시골 농가의 어려움을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그러니, 남편이 사 들고 온 도토리묵을 요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터.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잔을 하니, ‘울고 넘는 박달재’가 떠올랐다. 이 노래 2절에 ‘도토리묵’이 나온다.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신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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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1948년 박재홍 가수가 부른 트로트 곡으로, 반야월 선생이 작사하고 김교성 선생이 작곡한 곡이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비 오는 날 박달재에서 이별한 뒤 홀로 남은 화자가 가슴이 터지도록 울며 소리치는 장면이 전개된다.
어디 대중가요뿐인가.
‘도토리묵’이라면 내게도 떠오르는 추억이 많다. 과거 대전북부경찰서(현 대덕경찰서)에서 근무할 때였다.
관내에 ‘묵 마을’이 있었다. 지금도 유명하다. 향토 음식인 도토리묵 맛집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일명 ‘구즉 묵 마을’이다.
서민풍으로 알려진 어느 대통령도 대전 방문 때 이곳 ‘묵 마을’에서 오찬 메뉴로 ‘도토리묵’을 즐겼다.
언젠가 옛 직장 선배가 내게 전화했다.
“윤 형에게 점심 살 일이 있어요. 윤 형이 제게 성심성의껏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묵 마을로 모시고 싶어요. 대통령도 다녀갔다는 그 유명한 ‘도토리묵 맛집’에서 만나요.”
그날 직장 선배가 내게 산 점심에는 세 가지 요리가 나왔다. 묵 전(부침), 채묵(묵밥), 그리고 토종닭 백숙이었다.
그날 융숭하게 대접받은 특별 향토 음식 ‘도토리묵’ 맛을 잊을 수 없다.
또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공무원 아들도 “부모님을 꼭 모시고 싶다”라고 하면서 어버이날에 이곳 ‘묵 마을’로 안내한 적이 있다.
아들은 직장 동료들과 아주 맛있게 먹었다면서 “부모님이 좋아하실 향토 음식”이라 꼭 모시고 싶었다고 했다.
대중가요 작사가인 반야월 선생이 오늘날 내가 재래시장에서 ‘도토리묵’을 사 들고 와 가족과 맛있게 즐기는 장면을 보면 무어라 하실까?
비 오는 날, 박달재에서 이별한 뒤 가슴이 터지도록 울며 소리치는 ‘울고 넘는 박달재’ ―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박달재에 금봉이야~” ― 대목을 떠올리면서 내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그 노랫말 사연의 시대적 배경을 아느냐고,
그 어려웠던 시절, ‘긍휼 식품’ 도토리묵을 허리춤에 싸주던 가슴 아린 ‘먹거리 사연’을 정말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오늘날 나는 무어라 답을 드릴 것인가?
말없이 막걸리 한잔 가득 따라 두 손으로 올리면 된다고요?
양념 잘 된 도토리묵 한 접시와 함께 달콤한 알밤 막걸리 한잔이면 옛 노래의 작사가 선생님은 더 바라지 않는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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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윤승원 수필가의 『도토리묵에 얽힌 사연』은 한 접시의 소박한 향토 음식에서 출발해 가족, 역사, 노동, 기억, 그리고 노래까지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매우 입체적인 수필입니다.
이 작품의 미덕은 ‘작은 것에서 큰 의미를 길어 올리는 힘’에 있습니다.
1. 일상의 사소함에서 출발하는 서사 구조
작품은 “재래시장에서 도토리묵을 사 오는 일”이라는 아주 평범한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일상적 장면은 곧바로 부부간의 생활 리듬과 미묘한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확장됩니다.
“대체로 반긴다”라는 표현은 → 단순한 유머를 넘어, 생활 속 긴장과 조화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전화로 허락을 구하는 장면은 → 가정 내 역할과 존중의 문화를 은근하게 드러냅니다.
이처럼 작가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관계의 온도를 담아냅니다.
2. 음식의 ‘물성’을 넘어 ‘시간의 층위’로 확장
도토리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시간이 응축된 상징물로 변모합니다.
도토리 채취 → 가공 → 요리 아내의 손맛 → 가족의 식탁 아들의 감탄 → 세대 간 공감
이 과정에서 도토리묵은 “노동 + 정성 + 세월”이 결합된 존재로 재해석됩니다.
특히 “2천 원”이라는 가격 대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대비는 → 현대 소비사회와 전통적 가치의 간극을 절묘하게 짚어냅니다.
3. 개인의 기억에서 집단의 역사로 확장되는 구조
이 작품의 핵심 미학은 개인적 체험 → 공동체적 기억으로의 확장입니다.
작가는 도토리묵을 매개로 보릿고개 시절의 구황식품 서민의 생존 음식 농촌의 생활사를 자연스럽게 호출합니다.
이 지점에서 도토리묵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민중의 생존 서사”가 됩니다.
4. 향토 공간과 체험의 결합 – ‘구즉 묵 마을’
대전의 ‘묵 마을’ 체험담은 작품에 현장성과 지역성을 부여합니다.
구즉 묵 마을 이 공간은 단순한 맛집이 아니라 직장 선배와의 인간적 인연 아들과의 효심 어린 기억을 담는 기억의 장소(lieu de mémoire)로 기능합니다.
특히 “선배의 보은” “아들의 초대” 라는 두 축은 인생의 관계망 속에서 음식이 매개가 되는 구조를 형성합니다.
5. 대중가요와 수필의 교차 – 서정의 절정
작품의 정서적 정점은 단연 『울고 넘는 박달재』의 삽입입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현재의 식탁을 과거의 눈물로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도토리묵 → 이별의 음식 막걸리 → 한(恨)의 매개 박달재 → 감정의 공간
특히 “허리춤에 달아주며”라는 대목은 사랑과 생존이 동시에 담긴 행위로 재해석됩니다.
6. 질문형 결말 – 윤승원식 사유의 미학
작품의 마지막은 단정이 아닌 질문으로 끝납니다.
“나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이 방식은 독자에게 윤리적·정서적 참여를 요구하는 열린 결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상적 응답— “막걸리 한 잔과 도토리묵 한 접시”는 말보다 깊은 침묵의 헌사로 완성됩니다.
7. 윤승원 수필 작법의 특징 정리
이 작품에서 드러난 작가의 개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재의 소박성 → 의미의 심오성 일상 → 역사 → 예술(노래)로 이어지는 확장 구조
음식 서사와 인간관계의 결합 설명보다 체험, 단정보다 질문 따뜻한 유머와 절제된 감동의 균형
8. 종합 평가
『도토리묵에 얽힌 사연』은 단순한 음식 수필을 넘어 “한 접시 음식 속에 담긴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복원한 작품입니다.
도토리묵은 이 글에서 배고픔의 기억이자 사랑의 증표이며 세대를 잇는 매개이고 예술적 정서의 촉매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의 식탁 위에도, 이렇게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 (雲峰, 윤승원 수필 전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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