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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크기대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강도와 중국 지린 성이 접하는 국경 |
높이 2,750m |
아시아 |
요약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중국과 국경을 이룬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회백색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 7개는 중국에 속하고, 3개는 국경에 걸쳐 있다. 946년의 대분화 이후 세 번의 분화가 있었으며, 2000년대 이후 화산형 지진이 3천 번 이상 발생하는 등 화산분화의 징후가 관측되고 있다.
목차접기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백두산
ⓒ j125/Pixabay | Public Domain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 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자연환경지질과 화산활동 및 지형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그림1. 백두산지역 지질 단면도
1. 선캄브리아기 화강편마암류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3. 제3기말 경사 현무암 고원 4. 제4기 알칼리조면암류 5. 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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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구성암석과 지질구조에 의해서 크게 5부문의 수직구조로 파악된다(그림 1).
백두산의 밑바닥은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이며, 그위에 제3기말의 현무암대지, 제3기말의 경사 현무암고원, 제4기의 알칼리 조면암류, 부석의 순서로 덮여 있다. 백두산의 밑바닥을 이루는 선캄브리아기의 화강편마암류는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걸치는 평북육괴·함북육괴로 백두산의 지표에서는 극히 일부분의 침식산지를 빼고는 노출되어 있지 않다. 제3기에 들어서 지표로부터 60~70㎞ 깊이의 지하에서 상부 맨틀을 구성하는 암석 가운데 방사능원소들이 붕괴되면서 열점이 만들어졌다. 이의 영향으로 당시의 지표암석인 화강편마암류에 수직방향의 쪼개진 틈(열곡구조)이 만들어졌다.
백두산 형성사
그림2. 백두산 형성사
1. 제3기 열곡구조 형성 2. 제3기말 현무암대지 형성 3. 제3기말∼제4기초 경사 현무암고원 형성 4. 백두산 형성(제4기 화산활동 사이 사이에 5번의 빙하작용 겪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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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고도 1,000m까지는 완만한 경사의 현무암대지이다. 이는 제3기말인 310만~1,990만 년 전 6회의 화산분출로 200~400m 두께의 현무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방사능원소들의 붕괴로 만들어진 열점에서의 열에 의해서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의 마그마 챔버(magma chamber)에 모였다가, 자체 압력이 증가되면서 열곡구조의 약한 틈을 따라서 분출한 현무암이다. 이 현무암은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굳어진 것으로 천지 주변의 200~300㎞ 범위에 흘러서 3만㎢의 백두산 화산암의 분포지가 되었다.
백두산의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초의 제2차 염기성 용암의 분출(약 260만~290만 년 전)로 만들어진 녹회색의 현무암으로 470m 두께로 덮여 있다. 해발고도 1,800m까지, 즉 현무암대지와 경사 현무암고원까지가 순상화산을 이루는데 이는 잘 흐르는 염기성 용암이 여러 번 분출된 까닭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이는 제4기에 21만~61만 년 전, 13만 년 전, 9만~10만 년 전의 3회에 걸쳐 잘 흐르지 않으며 점성이 큰 산성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조면암이기 때문이다. 그 두께는 약 650m이다.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
그림3. 일본 북부에 도달한 백두산 화산재의 분포범위(○표는 확인된 지점, 숫자는 화산재의 두께[cm], tr.는 두께 1cm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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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주변의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백두산 꼭대기 지표면은 40~60m 두께의 회백색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는 가스가 많고 폭발력이 큰 화산에서의 분출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공중 분출물이 떨어져 덮인 것이다. 부석은 고온의 마그마가 지상에 분출됨에 따라서 이에 용해되어 있었던 휘발성분과 수증기 등의 가스가 증발되어 바위 부스러기에 구멍이 많이 생기게 된 것으로, 가벼워서 물에 뜬다. 이와 같은 천지 주변의 부석더미는 백두산 화산활동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며, 천지 형성과정과 그 시기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천지는 수면의 해발고도 2,190m, 평균수심 213.3m, 가장 깊은 곳 384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일반적으로 마그마의 분출만으로 이루어진 화구는 그 둘레가 2㎞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천지 둘레는 이보다 훨씬 길며 주변의 외륜산에는 화산폭발의 최후시기를 나타내는 부석이 두껍게 덮여 있다. 따라서 천지는 이 부석의 공급원이 되었던 화산폭발과 함께 화구가 함몰하여 이루어진 칼데라에 빗물 등이 모여서 된 칼데라호이다.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그림 3).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백두산은 해발고도 약 2,000m가 수목한계선이 되어 이보다 높은 지대는 짧은 여름철에 풀만 자라는 산악 툰드라 지대에 속해 주빙하지대이다. 천지 주변의 그늘진 골짜기에는 가장 더운 달인 7월에도 눈이 남아 있고, 땅속 0.8~1m 깊이 이하에 영구동토층이 있어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
주빙하지형으로는 백두산 기상대 근처 동쪽 사면에 표토가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 형성된 계단 모양의 솔리플럭션(solifluction), 역시 기상대 부근 2,180m 고도에 작은 무덤 모양으로 표토가 0.3~0.4m 높이로 부풀어 오른 대규모의 유상구조토, 잔설의 재동결과 녹은 물의 침식에 의해서 지면이 둥그렇게 움푹 파인 설식요지, 암석이 얼고 녹는 것의 반복에 의해서 부서지고 무너져내려 바위부스러기 더미를 이룬 애추(talus) 등이 보고되어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는 강한 바람이 부는 때가 많아 바람이 깎은 지형현상으로 풍식구멍·풍식버섯·풍식기둥 등이 암석에 많이 나타나 있다.
기후
천지 주변의 연평균기온은 -7.3℃이며, 1월평균기온 -24.0℃, 7월평균기온은 8.5℃이다. 월평균기온으로 보면 영상의 기온은 6~9월의 4개월간 10℃ 이상으로 오르지 않고, 영하의 월평균기온은 10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8개월간 계속된다(표). 이를 쾨펜의 기후구로 나타내면 한대기후 가운데 툰드라 기후에 속한다. 천지 주변의 백두산 기후는 동결기(10~5월의 8개월간)와 해빙기(6~9월의 4개월간)의 2계절로 나뉜다. 동결기에는 기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기온이 -40℃까지 나타나고, 해빙기(이곳의 여름철)에도 월평균기온은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해 땅표면이 녹기만 할 뿐 서늘하여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풀만 자란다. 첫서리는 8월 상순에, 마지막서리는 7월 하순에 내려서 무상기간은 7월말에서 8월초까지 20일간이다. 연강수량은 1,500㎜로 주변의 낮은 지대인 삼지연보다 600㎜ 더 많다. 이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응결고도 이상 지역이 넓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개가 자주 발생하여 강수량이 많은 6~9월에 월평균안개일수는 15일이며, 그중 80%가 비와 함께 하여 안개의 평균 계속시간은 6.6시간이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많고, 6월과 9월에는 우박으로 내릴 경우가 많다. 눈은 9월 중순에서 다음해 6월 중순까지 9개월간 내리며, 8개월 이상 눈이 쌓여서 1.2~2m 정도의 두께에 이른다. 바람이 매우 강하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여름철에는 남서풍이 주로 분다. 따라서 백두산의 기후는 기상변화가 매우 심한 고산 툰드라 기후를 나타낸다.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평균 | |
월평균기온(℃) | -24.0 | -21.5 | -16.6 | -7.5 | -0.6 | 3.9 | 8.5 | 8.5 | 1.7 | -5.2 | -13.8 | -21.1 | -7.3 |
풍속(m/s) | 15.6 | 14.5 | 14.1 | 12.0 | 11.3 | 7.4 | 7.3 | 6.8 | 8.5 | 10.0 | 15.5 | 17.4 | 11.7 |
천지주변의 월평균기온과 풍속1)1)
동·식물과 토양
백두산
그림4. 백두산 동쪽사면의 식물분포와 지질추정도
1. 고산대 2. 침엽수림대 3. 침·활엽수림 혼재림대 4. 매몰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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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그림 4의 매몰림대)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따라서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질연대로 보면 오래지 않아서 그 영향으로 천지를 중심으로 반지름 50㎞ 이내에는 소규모의 지진이 자주 나타나고(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1973년 4월과 6월에 진도 2.1 및 2.5의 지진이 있었음), 온천이 많다.
백두산의 특색있는 지형으로는 화산지형·빙하지형·주빙하지형 등을 꼽을 수 있다. 화산지형은 주변부의 순상화산과 중앙부의 종상화산이며, 중심부는 칼데라와 외륜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번의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복성화산임을 알 수 있다. 빙하지형으로는 U자곡과 권곡이 있다. 중국 쪽에서 천지에 이르는 길인 얼다오바이허의 골짜기 가운데 창바이 폭포-빙장 사이의 길이 4㎞, 너비 1㎞의 골짜기가 빙하침식곡인 U자곡이다. 이는 현재 중국의 영토이다. 남포태산(2,433m)의 남쪽 기슭인 포태천 계곡에 빙하퇴적 제방인 빙퇴석(maraine)이 있고, 천지 주변의 칼데라 벽에 빙하침식의 흔적인 권곡과 빙퇴석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이들 빙하지형은 마지막 빙하기(약 1만~7만 년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이는 약 1,000년 전 백두산의 화산폭발과 그 함몰에 따른 천지형성과 모순된다. 권곡이 이때의 파괴에서 남은 것이라고 해도 빙퇴석의 존재는 여전히 모순된다. 천지 주변 외륜산 기슭의 빙하지형 문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마지막 빙하기의 빙하와 천지형성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물과 자원
천지의 총저수량은 20억t으로 그 가운데 70%는 빗물이며, 나머지 30%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용천수이다. 천지에는 물고기는 없고, 식물성 플랑크톤이 5종, 작은 동물과 곤충류가 4종, 그리고 이끼가 생장한다. 천지의 물은 중국측의 달문으로만 유출되어 창바이 폭포에서 얼다오바이허를 흘러 쑹화 강[松花江]을 이룬다. 압록강과 두만강으로는 지하수로서 유출될 뿐이다. 장군봉(2,750m) 부근의 해발고도 2,000m에 있는 백두폭포는 높이 18m, 너비 0.8m로 1단계에서 7m, 2단계에서 11m의 높이를 나타내는 2단계 폭포이다. 천지의 물이 지하수화해 용천수로 떨어져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흐른다. 중국의 창바이 폭포-얼다오바이허 계곡에는 수온 37~82℃의 온천이 13개 있고, 북한에서도 천지 남서부에서 수온 73℃의 온천이 발견되었다.
백두산의 최대자원은 적송·잎갈나무·가문비나무·자작나무 등의 삼림으로서, 이들 목재는 철도와 압록강 및 두만강의 뗏목에 의해서 길주·만포·무산의 제재소로 운반된다. 기타 자원으로는 건축용의 골재와 단열재로 이용 가능한 부석, 천연수로 이용되는 천지의 물, 약초와 산나물 등을 들 수 있다.
한민족과 백두산
백두산 천지
백두산 분지에 물이 고인 칼데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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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풍수지리에서는 지세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이해하기도 하는데 백두산을 '기'(氣)가 결집된 머리로, 낭림-태백-소백 산맥을 백두산의 기가 전달되는 등뼈산맥으로서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인식했다. 그밖에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조사활동
백두산에 관한 최초의 등산기록은 1764년(영조 40)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이 쓴 〈백두산유산록〉이다. 그는 5월 14일 함경북도 경성을 출발하여 5월 23일 백두산 꼭대기에 오른 후, 6월 2일에 돌아와 18일간에 걸쳐서 백두산을 등산했다. 최남선은 1926년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동아일보사의 백두산 탐험대에 동행하여 백두산 정상까지 오른 후, 1927년에 기행문인 〈백두산근참기〉를 발표했다.
이는 백두산의 지리·역사·민속 뿐만 아니라 백두산 문화론, 민족정기의 고취, 조국애의 고창 등을 내용으로 한 웅대한 기행문학이다. 더구나 1931년에 행방불명된 백두산정계비의 자세한 내용과 그것을 세울 때의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여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1936년 8월 7일부터 18일까지의 12일 동안 조선일보사가 주관하여 조사한 후, 그 탐험대원들이 펴낸 〈아아! 천지다〉는 쉽게 씌어져서 일반인들이 백두산을 인식하기에 적절한 책이다. 겨울철의 등산기록으로는 〈백두산-교토제국대학 백두산원정대 보고〉가 있다. 1934년 12월 20일 일본 교토를 출발하여 다음해 1월 21일 교토에 돌아오는 등산보고서로, 겨울철 등산의 어려움과 당시까지의 백두산에 대한 문헌, 등산 중의 사진 등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의 조사보고로는 1989년 8월 2일부터 6일까지 백두산 식물을 조사한 〈백두산의 꽃〉이 있다. 중국측의 조사뿐이지만, 백두산 식물의 천연색 사진과 생물학 분야의 조사가 요약되어 있어서 생생한 자료가 된다. 북한은 백두산의 일부를 1959년에 '백두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으며, 1976년에는 이 구역을 확장했다. 중국은 1958년 천문봉(2,650m) 부근에 기상대를 설치하고, 1960년에는 2,100㎢를 '창바이 산 자연보호구'로 지정했다. 북한과 중국측의 자연보호구는 1980년에 '국제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되었다.
백두산의 교통로는 북한이나 중국을 통하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에서 백두산 입구인 삼지연까지 비행기·열차·자동차 편이 있다. 삼지연에서 백두역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며, 백두역에서 향도역까지는 케이블카로 10분 걸린다.
향도역에서 장군봉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중국 쪽에서는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의 얼다오바이허가 백두산 입구가 된다. 이곳까지는 옌지[延吉]나 안투[安圖]에서 열차나 자동차 편이 있다. 얼다오바이허에서 창바이 폭포 입구까지는 50㎞의 거리로 버스를 이용하며, 버스 종점에서 창바이 폭포를 지나 천지 물의 단 한곳의 유출구인 달문까지는 2㎞의 거리로 걸어서 오른다. 현재 우리가 백두산에 이르는 길은 중국을 통하는 방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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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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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산과 주..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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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양강도 삼지연시에 있는 공항. 삼지연시 북방 10km ..다음백과
[Daum백과] 백두산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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