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와 그가 남긴 선교흔적 : 김포제일교회, 새문안교회, 연세대학교
복음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에 이끌리어 이땅을 밟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국 만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구속적 역사를 바라보고 이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과 헌신적 노력은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세계 기독교회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들 가운데 1885년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더우드가(家)의 한국사랑 120여년의 역사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뉴 브룬스윅 신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 선교에 뜻을 두고 선교지를 모색하던 중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약혼녀에게 한국 선교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고 파혼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언더우드는 홀로 한국을 찾았다. 그때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로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도착 이듬해에 처음으로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수세자들이 늘어가자 언더우드는 교회 설립을 서둘렀고 정동에 있던 자택에서 정동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후에 새문안으로 장소가 옮겨져 ‘새문안교회’가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사랑, 영혼사랑은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낯선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그는 같은 목적을 가진 호튼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언더우드 2세(원한경)를 낳았다. 원한경은 경신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제3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다. 또한 올해 1월 타계한 언더우드 3세(원일한)는 생전에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말로 한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더우드 4세(원한광)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 일가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과 연세대 교수 및 재단이사 등을 맡으며 한국 사학의 발전을 주도해 왔다.
언더우드 일가는 작고한 1세부터 3세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당초 1세인 원두우 박사는 미국 뉴저지주에 안장됐으나, 99년에 3세 원일한 박사가 2세인 부친 원한경 박사가 묻힌 합정동 묘지공원으로 이장했으며, 자신도 같은 곳에 묻혔다.
그가 남긴 선교흔적 :김포제일교회, 새문안교회, 연세대학교
김포제일교회 : 경기도 김포시에는 200여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중에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는,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김포제일교회이다. 김포공항에서 강화로 가는 48번 국도의 바로 옆에 있는 김포제일교회가 김포지역의 첫 교회였던 것이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하여 복음이 제물포를 통하여 들어와 서울에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김포에 살던 김영일과 6명의 젊은이들이 새문안교회에 다니기 위하여 새벽 2시에 김포를 떠났고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 깜깜한 한밤중이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1894년 고군보, 박사라, 이봉춘 등이 16칸짜리 가옥을 매입하여 언더우드 선교사를 당회장으로 모시고 김포읍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1905년 3월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3500평의 대지를 기증하여 교회건물을 지었다. 올해로 교회창립 110주년을 맞은 김포제일교회는 지하에 교회역사자료관을 만들어 한국 교회 역사속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있다.
새문안교회 :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상륜과 백홍준을 장로로 세우면서 설립된 장로교회로 교회 예배는 언더우드 선교사 집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었다. 이 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다함께 성경을 읽는’ 사경회와 교육사업을 일으켰다. 고아원을 겸한 학교로 설립된 언더우드학당의 교회교육이 새문안교회 안에서 송순명 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교회교육의 시작이었다.
새문안교회의 성전은 1895년에 착공을 했으며 현재의 교회 건물은 1972년 창립 85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연세대학교 :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한 것은 알렌이 개설한 의료시설인 ‘제중원’에서 화학과 물리학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일반 사람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그는 1886년에 고아원을 겸한 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신학교’의 전신 언더우드학당으로 도산 안창호와 김규식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언더우드학당은 다시 구세학당, 민로아학당으로 명칭이 바뀌고, 이 구세학당이 커져서 혜화동에 있는 경신학교가 되고, 거기서 오늘날의 연세대학교가 따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큰 업적중 하나가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출발시킨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이었다. 후에 연희전문학교는 한국 교육의 명문으로 자리매김한 연세대학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복음전파 외에도 교육과 YMCA를 통한 사회개혁 운동 등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던 선교사였다. 특히 언더우드의 한국사랑은 언더우드 1세 당대에만 그치지 않고 4대 12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다는 것은 세계선교를 감당하려하는 한국교회에 진정한 선교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제 언더우드 일가의 한국사랑 120여년의 역사도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4대에 걸쳐 언더우드家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를 모두 다했다.’고 고백하면서 언더우드 4세(원한광)가 올해 한국을 완전히 떠난다고 한다니 섭섭한 마음이 금할 길 없다.
김대희 목사
출처 : 고려신학교 연수원(www.ctcg.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