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술기운인가!
오전 내내 투박해진 관절을 놀리며 걷고,
자리에 앉아있을 땐 어디엔가 기대서 손등으로 턱을 괴고 한껏 찌푸려진 눈으로 희미한 시선을 던졌다.
며칠동안 잠이 잘 안온다. 갑자기 불안하다.
오전에 서원대 후배의 졸업식에 가고 싶었는데
보건소 문에 들어선 순간
같이 있는 여사님이 한꾸러미 검진가방과 까운을 준비해 놓고
나즈막히 오늘 출장을 가야한다고 입꼬리로 말을 흘린다.
난 우리 여사님이 정겨울 때도 있지만
예고없이 혹시 내가 안따라줄까봐 닥치고서야 말을 꺼내는 모습이
무서울 때가 있다. 두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사님은 내가 부탁에 약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아신다.
내게 생각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검역하는 트럭을 타고 월오동에 있는 '에덴원'이라는 공동 생활터에 갔다.
정신이상자, 지체장애자들을 모셔놓은 곳이다.
비인가 시설이다. 즉 나라로부터 보조금이 없이 그들 나름대로의 자구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자원봉사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불편한 사람을 가진 가족단위가 들어와 살면서
서로 도와주며 사는 작은 나라다..
하루 중의 한 끼는 옆에 있는 학교에서 급식하다 남은 음식을 가져와 해결하고,
나머진 어떻게 그럭저럭 먹고산다고 했다.
피곤하다. 어젠 무지 피곤한 상태에서 술을 주량을 넘게 먹었드랬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검진을 시작한다.
시간 관계상 나와 여사님이 각각 반씩 맡기로 했다.
그리고 혹시 의사소통에 이상이 없을까 해서 거기 친구들을 하나씩 붙여줬다.
나의 통역을 맡은 사람은 한쪽 팔이 없는 십대 후반의 여자아이..
무척 밝다..
혹시 신체가 자유로운 내 모습에 거리낌이 있을 성싶어 조심스러웠는데
밝다...너무나.. !!
가라앉은 슬픔도 부유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맑은 호수 같은 아이..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하며 깍듯이 대하는 게 쑥스러울 정도다.
문득, 과연 내가 선생님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씁쓸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
방을 들어서다 움직임이 느껴져 고갤 돌려 좁다란 마당을 바라보니
햇살 좋은 오후, 늙수그레한 할아버지, 다운증후군으로 보이는 그 분은 너무 해맑은 표정에 나이는 할아버지라도 아저씨처럼 느껴진다.
제목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제8요일'에 나왔던 주인공이 떠올랐다. 돌아오는 트럭에서..
이젠 피냄새는 구수하다고 느껴지지만, 입냄새는 잘 적응이 안되고 있다.
같이 갔던 여사는 오바이트를 할 뻔했다고 한다.
검진을 하면서도 혼자서 이런걸 왜 해야되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어짜피 치과에 가야 할 환자다.
한편으로 여사님이 너무 실적에만 신경을 쓰는 건 아닌지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좋게 받아들였다..
어딜 가든 이런 시설에 있는 분들은 이가 다 빠져 잇몸으로만 사는 분들을 빼곤 모두다 치과환자다.
검진을 위해선 올 필요성을 못 느낀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고선 그네들이 보건소에 왔을 땐 정말로 잘해드려야겠단
마음의 다짐을 새삼 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보람 있었다.
보다보니 치과치료 도중의 흔적이 보인다.
여기선 어딜가서 치료를 받냐고 하니
귀가 홀린건지 어디서 많이 듣던 치과 이름이 귀에 들어온다.
재차 물어보고선 조금은 섬뜩 놀랬다.
내가 배우러 다니는 선배네 치과다..
오후에 치과에 가서 오전에 있던 얘길 들려주니
원장님 말을 빌리면 거기 목사님을 알아서 어느 눈 많이 오던 날, 찾아간 게 인연이 되었다고 말을 건넨다. 아무 일도 아닌 양..
혹 별 일이 아닌 것 처럼 꾸민 거던가 정말 별 일이 아니라 생각을 하던가 좌우지간..
감동 빵빵 먹었다.
오늘은 치과서 다섯시간 내내 서있었다.
원장님한테 감동먹어서.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다.
경박한 말로 상태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 놓았다.
몸이 많이 불편한 사람들의 방에 들어서니 모두가 한결같이 누워있다.
나무 같다.
잎이 다 날아가 버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허리가 잘려져 나가 밑동만 덩그라니 남아 있는..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고목이 움직인다. 옴팡진 눈으로 날 주시하며 일제히 가지 전체가 흔들린다. 떨어질 꽃잎도 잎사귀도 남아있질 않다.
스르르 입이 열리고 한줄기의 연기가 위, 식도를 타고 올라와
흐물흐물 흩어지자 입안이 보이기 시작한다.
검진을 할 필요성이 없음을 또 다시 느낀다.
그들은 환자다.
이가 아파 잠 못자는 환자일수 있지만
맘에 씻기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껴안은 환자다.
어떤이는 매일 밤 짐을 싼다고 한다. 아들내미가 데리러 온다고..
또 어떤 이는 지금도 아들내미가 어디서 뭘하는지 알고 쉬도 때도 없이 아들 자랑을 하지만 짐이 될까봐 연락을 못한다고 한다.
대충 적는다.
모두, 이가 하나도 없는 사람만 빼고 'O'표를 한다.
그들은 어짜피 치과에 가야 한다.
획하니 돌아서서 방에서 나오려 하다가 너무도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고목이 가지를 움직여 글자를 쓴다.
나이테가 늘어나는 만큼의 속도로
가지 끝이 움직여 컴퓨터의 자판을 누르고 있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랑에 관한 글을 쓰는 중이었다.
사랑이라!!
문득 그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듯한,
너무 다른 성질의 것들이 접했을 때의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그게 사람이었든.. 전지전능한 신이었든...
자판을 두드리는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러자 어제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메일을 열며 읽었던 외로움에 대한 글이 생각났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는 자신이 슬프다는 작가의 말..
그의 모습이
적어도 잠깐이나마 글쟁이가 되고싶었던 날..
한없이 겸허하게 만들었다.
솔직한 그의 고백..
난 그걸 모른다..
아직도..
적어도 그는 외로워 보였다.
그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