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지적 우월성을 만드는 교육
전통 교육-책 속에 길이 있다
역사적으로 한 사회의 지배층은 다른 성원을 지배하기 위하여 대다수 피지배층의 교육 기회를 차단하였다. 교육이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힘을 주므로 행여 피지배층이 지배 계급에게 도전하는 발판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소수의 지배층에 속한 이만이 교육을 받고 지식을 지닐 수 있었다.
'학교(School)'라는 말은 원래 여가 혹은 오락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세 서구에서는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는 소수층만이 학교에 갈 수 있었으며, 그들은 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지식이 필요했던 종교 지도자나 성직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농사를 짓거나 도제 생활을 통해 손 기술을 터득하고 사회적 관습을 배웠으므로 굳이 읽고 쓰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조선 시대까지 성균관, 향교, 서당 등에서 소수 양반층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성현이 하던 일을 본뜨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교과서는 소학, 사서, 삼경이었고, 공자, 맹자, 주자를 숭앙하였으며, 실천 항목은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학문의 목적은 부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책속에는 절로 곡물이 있고, 황금의 집이 있고, 책 속에 수레와 말과 활과 화살이 많다"
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옛 사람들은 책을 읽음으로써 의식주뿐 아니라 공명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귀공명을 꿈꾸는 양반집 자제라면 너나 없이 글을 익혔다.
또
"아녀자와 소인배는 가르칠 수 없다"
는 공자의 말에 따라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고 기껏 양반집 여자들이 한글로 된 내훈서, 삼강행실도, 열녀도를 읽어 문맹을 면했지만 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배우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한글을 '암클'이라 하여 여성들이나 쓰는 것으로 천히 여기고 한자를 진서로 받들었으며, 유학을 하는 선비들은 한글 스물 일곱 자로는 심오한 학문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문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는
"언문 27자로 세상에 출세할 수 있다면 어찌 애써 머리를 싸매어 성리학을 공부할 것입니까"
하고 상소를 올렸다 한다. 벼슬을 하거나 출세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며, 그것도 어렵고 심오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조선 시대 양반들은 시서와 육례를 공부하고 과거를 보아 벼슬 길에 나아가기도 하고 행여 과거 시험에 떨어져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높은 학식을 가지고 향약과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의 도덕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거나 권위를 인정 받았다. 그만큼 지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소수의 남성이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데 필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