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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에 기재된 여래장에 대한 찬 반론현양매구(懸羊賣狗) |
각묵 논설위원ㆍ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불교는 연기와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불교 2600년사를 통해 전개되어온 불교주류의 가르침은 이를 근본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초기불교는 오온무아와 제법무아를 천명하였으며, 아비담마도 제법의 보편적 성질(共相)로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였고,
반야중관은 아공법공을 외쳤으며, 유식도 인무아와 법무아를 주창하였다. 이렇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조건발생(緣已生)이요, 그래서 무아라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설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아의 가르침은 오온, 12처, 18계로 정리되는 존재의 배후에 자아니 절대아니 참나니 순수이성이니 이데아니 창조주니 하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대사자후이며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여래장’ 불교교학 혼란 야기
그런데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불교의 주류가 되어 스스로를 대승 중의 대승이라고 자처하게 된 여래장 계열의 경론에서는 연기와 무아를 설하기는 하였지만 아울러 마치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의 배후에 있는 양 일심을 천명하였고, 여래장이나 불성이 상주하는 듯한 언어표현을 즐겨 구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여래장에는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이나 여래장이 불공이요, 존재의 배후에 일심이 상주불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스스로가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불교이해가 수승한 것이라 외친다.
물론 특정 교파의 주장이 특정한 시대에 등장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성향이나 시대정신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이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이것이 중국불교의 주류가 된 데는 이 사상이 그 시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어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지대한 영향 하에 놓여온 한국불교도 그러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과학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현대에는 오히려 연기와 무아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초기불교 등 불교주류의 가르침이 더 적합할 것이다. 불교사 전체로 보면 방계일 수밖에 없었으며, 비불교적 언어표현을 즐겨 사용하여 불교교학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온 여래장 사상에 더 이상 우리 불교가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양머리 걸고 개고기 파는 격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고전 〈안자춘추(晏子春秋)〉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양두매구육(懸羊頭賣狗肉)의 준말이요, 직역하면 ‘양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좋은 물건을 간판으로 내세우고 나쁜 물건을 팔거나, 표면으로는 그럴 듯한 대의명분을 내걸고 이면으로는 좋지 않은 본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는 〈벽암록〉등의 아주 많은 중국불교 선어록에서 잘못된 견해를 질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마지 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것은 혹시 아닐까? [불교신문 2336호/ 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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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양매구’를 읽고
이 평 래 충남대 명예교수 한국불교학회이사장
연기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두 개의 갈대 다발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처럼 마음(na-ma, 名)과 몸(ru-pa, 色)도 그렇다는 것이다. 명색(名色)이란 ‘na-ma-ru-p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마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수작용(vedana-, 受).추상작용(sam.jn~a-, 想).의지작용(sam.ska-ra, 行).인식작용(vijn~a-na, 識)을 가리킨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합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구성요소(Pan~ca skandha-h., 五蘊)’라고 한다. ‘다섯 가지 구성요소’는 변화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변화를 속성으로 한다. 무상(anicca, 無常)이다. 현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모두 늘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왜 변화하는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아(ana-tman, 無我).공(u-nyata-, 0, 空)이다. 초기.부파.대승의 어느 시대의 불교를 막론하고 연기와 무아를 변함없는 진리로 섬긴다. 불교신자는 이것을 믿고 외도는 안 믿는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은 이인가. 그렇다. 무엇으로 깨달았는가. 마음으로 깨달았다.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분별기(vibhajya-vya-karan.a, 分別起)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죽은 이는 모두 윤회하는가?” “번뇌가 있는 이는 윤회(sam.sa-ra)하며, 없는 이는 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고따마 붓다의 전유물인가.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다섯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으므로 사람에게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사람에게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생.노.병.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생.노.병.사의 필연성을 깨닫는 길을 도(ma-rga, 道)라고 한다.
도를 닦을 때 무엇을 도구로 삼는가. 못을 박을 때는 망치 그리고 나무를 켤 때는 톱을 도구로 삼는 것처럼, 도를 닦을 때 마음을 도구로 삼는다.
여래장은 마음의 또다른 이름일뿐 空해석 초기불교-중관사상과 달라
불교의 역사 속에서 오로지 ‘마음’이라고만 불렀는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 여래장(tatha-gatagarbha, 如來藏) 또는 불성(buddhadha-tu, 佛性)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일부학자는 왜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가. 연기와 공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여래장은 연기와 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공여래장(空如來藏).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rl-ma-la-devl--sim.ha-na-da-su-tra,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대정장(大正藏)> 12-221c) 또는 “공진여(空眞如).불공진여(不空眞如)”(<대승기신론>/<대정장(大正藏)> 32-576a)는 번뇌의 존재여부를 두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공은 초기불교나 중관사상에서의 공과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공여래장.공진여는 번뇌가 0%(u-nyata-, 空)라는 말씀이고, 불공여래장.불공진여는 지혜와 자비가 100%(au-nyata-, 不空)라는 말씀이다.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과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으로 풀이한다.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잘 갈고 닦으면 과로서의 여래장이 된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예로 들어보자. 보디나무(Bodhitree)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와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자는 인으로서의 여래장을 여러 깔빠(kalpa) 동안 갈고 닦던 보디싸ㅅ뜨와(bbodhisattva, 菩提薩)이고, 후자는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증장해버린 붓다(Buddha, 佛陀)이다. 과로서의 여래장으로 성숙한 붓다에게는 탐.진.치(ra-ga.dves.a.moha-)의 삼독이 모두 소멸해 버려 번뇌가 0%(空)이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넘쳐흐르는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라는 논리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 뜰에는 감나무에 짙푸른 감이 매달려 있다. 이 짙푸른 감을 잘 가꾸면 가을에는 짙붉은 감이 될 것이다. 떫고 짙푸른 감(땡감)이나 달고 짙붉은 감(단감)이나 모두 감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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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장 유감
각 묵 논설위원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승만경>은 여래장을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다.(如來藏常住不變 是故如來藏)”라고 정의하고 있다.
힌두교의 정전인 <바가왓기따>는 읊는다. “칼날이 그것(자아)을 상하게 할 수 없고 … 바람도 그것을 말릴 수 없다. … 그것은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이다.”(BG.ii.22~25)
그렇지만 여래장을 신봉하는 자들은 여래장은 자아가 아니고 중생이 아니며 영혼(命)이 아니고 인(人, 진인)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만일 여래장이 자아라고 하면 그것은 즉시 외도의 가르침이 되는 줄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천창 교수의 고백처럼 상주불변하는 여래장과 영원, 상주, 부동, 불변, 태고인 자아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대승 <열반경>은 한술 더 떠서 적극적으로 “자아란 곧 여래장을 말한다.(我者是如來藏義)”라고 설한다. 상주불변하는 여래장을 설한 가르침을 두고 진정한 대승이라든지 일승이라든지 최상승이라든지 한다면 그토록 무상.고.무아를 강조하신 우리 세존 부처님이 어찌 통탄하실 일이 아니겠으며, 이 어찌 현양매구(懸羊賣狗)가 아니겠는가.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법’을 중심한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중관-유식의 불교 주류의 가르침이 결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강조한 ‘믿음의 종교’일 뿐이다.(<인도불교의 역사>, 하 148~9 참조)
그런데 불교의 믿음은 여래장이나 불성이나 일심에 대한 믿음보다는 초기경이 강조하고 있는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이면 충분하다.
여래장이 마음이면 상주불변 불가 경론은 외도성행하던 시대의 산물
혹자는 여래장을 마음이라 강변한다. 그런데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마음(心)을 식(識)과 동의어라고 설한다. 그리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오온 외에 절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강조한다.
식은 오온의 하나의 구성요소이며, 오온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조건발생(緣起)이라는 것은 불교의 상식중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래장이 마음이라 한다면 여래장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다. 절대로 상주불변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만일 오온 외에(非卽非離蘊) 일심이나 여래장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나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외도적 발상이며 현양매구일 뿐이다.
유식의 식은 전변(轉變)하는 것이다. 안혜는 식전변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 하여 아뢰야식을 비롯한 모든 식을 ‘찰나생 찰나멸’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의 식은 상주불변이 아니다. 오히려 유식은 식이 조건발생(依他起, 緣起)인 줄을 모르고 자아라고, 상주불변이라고 거머쥐고 있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분명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가 외도의 가르침이 성행하는 때였기에 외도적 성향을 가진 하근 중생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상주불변의 여래장이나 불성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불교 2600년의 전개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 시대에서까지 비불교적이요 외도적 사유를 마구 해대는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에다 일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면서 목을 매달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무아를 역설하는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 |
[주장과 반론이후] 여래장 어떻게 볼 것인가 |
불교신문 2345호(7월21일자)에 보도된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과 충남대 이평래 명예교수의 쟁점토론 ‘여래장사상- 주장과 반론’ 이후, 여래장사상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본지는 경북대 강병조 교수와 인도 뿌네대에 재학 중인 허정스님이 최근 보내온 반론문을 소개한다. 이와 함께 동국대 김호성 교수로부터 여래장사상의 의미, 초기불교와 여래장 사상 간의 논란이 이는 이유 등을 들어봤다.
佛性과 人性 겸한 중생의 ‘이중성’ 개념
# 여래장이라는 이름의 인간들 / 김호성 동국대 교수
부처와 중생 ‘사이’…절대불변의 ‘실체’ 없어 무아. 공과 ‘一音性’ 확인하는 노력 축적해야
여래장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경전의 하나인 <여래장경>에는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의 질문은 “누가 여래장인가”, 혹은 “무엇을 여래장이라 부르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야 옳을 듯하다. 모든 중생, 그 속에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실 모두 여래장이다. 여래로 태어날 수 있는(부처가 될 수 있는) 태아를 수태(受胎)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때 ‘태아’라는 말 역시 하나의 비유이다. 그저 불교의 인간관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은 부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직은 가능태로서만 말한다. 겉으로 볼 때, 중생은 번뇌가 가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으로 볼 때 부처.여래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부처로 현실화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중생(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말하는 개념이 여래장이다.
여래장 속에는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다. 여래장이라 불린 인간은 이렇게 부처와 중생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부처라 할 수도 있고, 중생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그러니까, 여래장의 개념에는 애시당초 절대불변의 실체라는 관념은 들어올 수 없다. 그렇게 되려면, 번뇌로서의 존재라고 하는 측면은 말해져서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래장 사상을 설하는 경론에서는 번뇌로서의 측면보다는 부처로서의 측면에 대한 서술이 더 많은 것 같다. 왜 일까? 번뇌의 얼굴을 한 인간에 대해서는 바로 앞 시대에 유식불교 경론들에서 집요하게 설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여래장사상은 불교심리학인 유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 중생세계에만 집착하는 현실고착을 타파시키고, 부처를 향하여 저 높은 길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를 위하여 당시 여래장 사상이 성립하였던 시기의 힌두교 사상으로부터 많은 표현들이 차용되었던 것 같다. 또 그러한 표현으로 인해서 실제로 여래장 사상을 실체론으로 오해했던 사례 역시 전혀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아.연기.공을 말하는 입장에서는 “여래장사상은 불교(초기불교의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그러한 비판은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여래장 사상 안에 이미 부처와 중생의 이중성을 갖고 있는 만큼(이중적 존재는 절대불변의 실체가 아니므로), 무아나 공을 여래장이라는 개념과 아울러 말하고 있는 경론 역시 존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체론적으로 표현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측면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동시에 연기.무아.공과 여래장이 사실은 한 목소리(一音)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중생의 오온이 모두 무아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을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 역시불교의 핵심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은 번뇌 덩어리의 중생이다”라거나, “모든 중생은 지금 그대로 부처이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보다 온당한 인간관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여튼, 초기불교에 입각한 여래장 사상 비판과 초기불교의 관점을 보다 확충하여 여래장 사상 안에서도 무아.공을 발견하여, 양자 사이의 일음성(一音性)을 확인해 가는 노력 모두를 축적해 갔으면 싶다. 이때 주의할 것은 비판 역시 주석이나 해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결코 대체나 지우기를 통해서 이루어져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어느 경우에나 자기철학의 개진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지금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우리 뒤에 올지 모를 눈 밝은 선지식들의 판단을 위해서는 그 모든 자료들이 다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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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묵스님의 주장을 지지하며
‘실체 없는 마음’ 현대 과학으로도 증명 이평래 교수는 기능적으로만 마음 파악 강병조 경북의대 정신과 교수
‘마음’을 연구하고 있는 정신과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여래장 사상’에 대하여 외람되게 필자의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마음’이란 단어는 사용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때와 장소(경우)에 따라서 기능적(functional)으로 사용할 때도 있고 실체적(identity)으로 사용할 때도 있다. 또한 개념적(concept)으로만 사용될 때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평래 교수가 말하는 ‘마음(여래장)’은 애매모호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때의 마음은 ‘마음’이라는 개념 내지 단어만 같은 것이다.
싯다르타가 연기, 사성제, 무아, 공, 중도 등의 이치를 깨달은 후의 뇌는, 뇌의 구조나 기능면에서 깨닫기 전의 것과는 다르다. 깨달은 후의 뇌의 기능은 욕망과 애착이 적고 자비로 충만한 뇌로 바뀐 것이다. 땡감(깨닫기 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단감(깨달은 후의 뇌의 구조나 기능)이나 모두 감(뇌의 구조나 기능)이다. 같은 감이라고 하는 본성(本性,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이나 단어)으로는 불이(不異)이며 떫고 달다는 위상(位相, 뇌의 구조나 기능이 달라진 점)으로는 불일(不一)이다.
이는 여래장(불성, 마음)을 실체적인 면으로 본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나 개념적으로만 보시고 말씀하신 것 같다. 감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 내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감의 본성이란 것도 없으며 단어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떫은 감과 단감은 그 성분이 이미 같지 않다.
물론 도를 깨치기 전의 싯다르타나 도를 깨친 후의 싯다르타는 같은 싯다르타이다. 그리고 떫은 감이나 단감도 같은 감이다. 같은 유전인자(DNA)가 있기 때문에 같다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DNA도 연기로서 생긴 것이고, 무아이며 무상이며 불변이 아니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부처님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둘째, 각묵스님이 주장하는 ‘마음(여래장)’은 마음을 실체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 같다.
각묵스님의 주장은 분명하며 필자도 동감한다. 여래장(마음, 자아)이 상주 불변이라는 것은, 무상, 고, 무아, 연기를 강조하신 석가모니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음(여래장)은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이는 석가모니의 생각과 일치되며 현대과학으로 증명되었다. 여래장 사상이 나온 것은 죽음의 불안에 떠는 낮은 근기(根機, 과학이 덜 발달된 시기)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음은 뇌의 기능 또는 활동이다’는 사실이 최근 20여년 사이에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밝혀졌다. 우리 불교도 하루 속히 이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드려 이것과 상치되는 교리는 수정하여야 한다. 아니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초기 불교의 교리로 돌아가면 이 과학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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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평래 교수의 글을 읽고
연기와 공엔 어떤 실체도 발 붙일 수 없어 ‘방편’ 쓰지 말고 ‘붓다의 언어’로 말해야 인도 뿌네대 빠알리어학과 석사과정 허정스님
각묵스님의 ‘현양매구(懸羊賣狗)’라는 글에서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은 수승한 불교라는 양 머리를 내걸었지만 존재론적 실체를 찬양해 마지않는 외도의 개고기를 파는 일이라는 글에 대하여 이평래 교수님은 “여래장 사상도 불교의 핵심인 연기와 공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여래장사상을 몇 가지로 설명하였다.
즉, “공여래장(如來藏)은 번뇌가 0%(空)인 상태를,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은 지혜와 자비가 100%(不空)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여래장을 인과로 나누어 설명하면 인(hetu, 因)으로서의 여래장(불성)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과(phala, 果)로서의 여래장(불성)은 정각을 얻은 붓다이다. 이 둘의 관계는 본성(本性)으로는 불이(不異)이며 위상(位相)으로는 불일(不一)이다. 마치 땡감과 단감은 동일한 감(不異)이지만 땡감(因)은 떫고 단감(果)은 달듯이(不一).”
그러나 위와 같은 이 교수님의 반박 글에서 과연 “여래장 사상과 연기와 공이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그분의 주장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왜 그런가? 먼저 이 교수님의 설명을 따르자면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란 과(果)로서의 여래장을 설명하는 측면이기에 여래장이 연기와공임을 설명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공과 불공의 의미는 번뇌의 없음(空)과 지혜의 있음(不空)을 설명이고 그것은 붓다가 번뇌가 없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래장을 인과로 나누어 불일불이로 설명하는 것 또한 여래장이 연기와 공의 뜻이란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연기와 공이란 존재란 서로서로 조건 되어 생멸하고 있고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그것이 마음이라 불리어지고 여래장이라 불리어지더라도 서로서로 조건 되어 있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연기와 공이란 그 어떤 실체도 발 붙일 수 없는 철두철미한 언어이다.
대승에서 마음을 인과로 나누고 이사(理事)로 나누고 체상용(體相用)으로 나누어 그 관계성을 불일불이로 설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주불변하는 실체를 인정하는 이교도들도 그러한 방식으로 실체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힌두교의 전변설(轉變說)이 그것이다.
그들은 주장은 영원불변하고 모든 것의 근원인 브라흐마(Brahma)가 있는데 그 브라흐마(Brahma)가 각각의 아트만(Atman)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마(Brahma)가 아트만(Atman)이고 아트만이 브라흐마여서 서로의 관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不一不二)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다.
일부 여래장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사와 체상용의 방법을 상주불변하는 여래장, 진여, 참나를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승만경>의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다.(如來藏常住不變 是故如來藏)” 라는 표현도 불자들은 외도와 다른 연기와 공의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내적인 이유를 많은 불교학자들은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언어를 사용하는 불교집단이 나타나서 불교가 힌두화되었기에 불교가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여래장사상이 그 시대에 필요했던 방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편 때문에 불교는 사라져 간 것이다. 나는 지금 인도의 뿌네대학에 다니면서 힌두교를 굳게 믿는 교수들 밑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그들은 서슴없이 불교와 힌두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왜 불교가 힌두교와 같은가라고 물으면 그들이 답하는 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여래장, 불성)이 같다는 것이다. 우리(불교인)가 아무리 그들과 같지 않다고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불교와 힌두교는 같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오해를 받을만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변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오해받지 않을 붓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교신문 2352호/ 8월18일자] 2007-08-16 오전 8:55:00 / 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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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기의 「연기와 시간: 松本史朗의 緣起 해석에 대한 中觀的 考察」에 대한 논평
이 중 표
전남대 교수
여래장사상은 불교인가 아닌가? 만약 이런 질문을 부처님이 받았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부처님은 먼저 "네가 말하는 여래장사상과 불교는 어떤 것이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이 문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여래장사상'과 '불교'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래장사상을 불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교를 여래장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공통의 이해가 있다면 논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논쟁은 항상 각기 나름대로 이해한 것에 같은 이름을 붙여놓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자기 나름의 이해에 불교라는 이름과 여래장사상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같다거나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무의미한 논쟁일 것이고,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예시당초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논자는 松本의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하여 논쟁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불교 이해나 여래장사상의 이해가 너무 개인적인 소견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이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불교의 현실임을 통감한다.
불교의 이해에 공통의 지반이 없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불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의 불교 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세인의 주목을 끄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불교 이해에 공통의 지반을 만드는 작업이 절실함을 느낀다.
松本의 주장에 대하여 어떤 논리적인 반박을 하기에 앞서 그가 불교의 기초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입능가경』 「집일체법품」에서는 여래장사상이 무아설에 위배된다는 오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대혜여, 내가 말하는 여래장은 외도가 설하는 아(我)와 다르나니라. 대혜여, 여래응정등각께서는…… 일체의 분별상을 떠나게 하는 무아법(無我法)을 바탕으로 갖가지 지혜와 방편(方便)의 뛰어나고 교묘함으로 혹은 如來藏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무아(無我)를 설하기도 하나니, 갖가지 명자(名字)가 각각 차별이 있느니라. 대혜여, 내가 여래장을 설하는 것은 아(我)에 집착한 제외도(諸外道)의 무리를 싸안아서 망견(妄見)을 떠나 삼해탈(三解脫; 空, 無相, 無願)에 들어가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니, 이 까닭에 제불(諸佛)께서 설하시는 여래장은 외도(外道)가 설하는 아(我)와 다르나니라. 만약 외도의 지견(知見)을 떠나고자 하면, 마땅히 무아(無我)의 여래장의(如來藏義)를 알아야 하느니라.1
이 경에서는 무아와 여래장이 무아법을 바탕으로 설해진 것이므로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다름이 없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무아의 여래장의는 어떤 것인가? 무아설은 자기 존재나 존재현상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이 아니다. 붓다가 이야기하는 무아는 자아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상주론(常住論)도 아닌 '단상중도(斷常中道)'에서 설해진 것이다. 『잡아함경』에는 '단상중도'가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의미 있고 여법(如法)한 주장은 이들 이변(二邊)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설한 법으로서,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그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그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 .2
우리의 삶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을 '짓는 자(作者)'와 그 업의 과보를 '받는 자(受者)'가 동일한 존재라고 한다면 상견(常見)이고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한다면 단견(斷見)이다. 이와 같은 단견과 상견에 빠지는 것은 자아가 시간적인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적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존속성'이 죽음을 통해 단절된다고 믿는 것이 단견이고, 사후에도 끊임없이 존속한다고 믿는 것이 상견이다. 붓다는 시간적 존속성을 가지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아를 부정한다.
『잡아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안(眼;보는 자아)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안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겨서는 남김 없이 사라진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는 것이다. 이 음(陰)이 멸하면 다른 음이 상속한다.3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은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업의 작자(作者)이거나 보의 수자(受者)가 아니라 업보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업보로서의 자아'가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무아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을 통해 형성된 여러 가지 체험의 내용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중생들이 업의 작자나 수자로서의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업보로서의 자아를 알지 못하고 업의 주체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업보로서의 자아를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은 전에 지은 선악업(善惡業)의 결과이며
4 앞으로 지을 업의 종자이기도 하다.
5 이러한 아뢰야식을 중생은 내적 자아로 집착하고 있다.
6 그러나 아뢰야식은 중생의 불변의 내적 자아는 아니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업보와 무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잡아함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한 것을 유식학에서는 업보로서의 아뢰야식은 있으나 아뢰야식이 중생들의 생각처럼 불변의 내적 자아는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무아의 여래장'은 '업보로서의 아뢰야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존재현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은 '업보로서의 마음', 즉 아뢰야식이 전변한 것이다.
『80권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현상은 업이 근본이 되고,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고 하고 있다.7 이와 같이 마음이 업의 근본이 되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생각함으로써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마음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마음으로 파악된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으로 업을 지어 현재의 자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가는 존재이다. 마음은 업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만든다. 부처는 그 마음으로 부처와 부처의 세계를 만들고, 중생은 그 마음으로 중생과 중생의 세계를 만든다. 부처이든 중생이든 자기와 세계를 만들어 가는 마음의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없다
.8 중생은 단지 자신이 그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창조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알든 알지 못하든 모든 인간은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중생이 중생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창조적인 삶의 결과이고, 부처가 부처의 세계를 만드는 것도 창조적인 삶의 결과인 것이다. 부처는 이러한 진리를 깨달아 실현한 사람이다. 『60권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부처들은 일체가 마음에서 변화한 것임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그는 참된 부처를 본 것이다.
마음이 이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닌지라
일체의 불사(佛事)를 지음에 더없이 자재하도다.
만약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라. "마음이 모든 여래(如來)를 만든다."9
중생은 자신과 세계가 창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를 분별하고, 자기와 남을 분별하여 스스로의 분별에 의한 망상의 세계에서 허망한 자아에 묶여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부처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가 '한마음(一心)'임을 깨닫고 망상과 허망한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타(自他)의 분별이 없는 동체자비(同體慈悲)로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이와 같이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는 있으나 창조적인 삶으로서의 마음은 중생과 부처의 차별이 없다. 중생의 마음, 즉 아뢰야식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도 부처와 다름없는 창조적인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 마음이 여래를 만들기 때문에 '여래를 만드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중생의 마음을 여래장이라고 한다.
松本이 '佛性은 緣起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불성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불성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佛性이란 人法 二空이 드러난 眞如이다.(佛性者卽是人法二空所顯眞如)
중생들은 자기(주관;人)와 세계(객관;法)가 각기 실체로서 즉 자아, 또는 자성을 가진 존재로서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허망한 생각 때문에 진실된 모습(眞如)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허망한 생각을 떠나면 인과 법이 공하다는 사실, 즉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眞如이다.
眞如는 '모든 것이 무아의 상태로 무상하게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와 같이 불성이나 진여는 연기와 공을 의미한다. 불교의 핵심은 연기와 무아 그리고 제법무상에 있다고 하면서 연기와 무아를 의미하는 불성이 연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주장은 '불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단 불성이라는 개념뿐만이 아니라 연기, 공에 대한 이해도 천박하고 독단적이다.
이런 점을 홍성기 선생은 자기 그림자와의 싸움이라는 비유로 잘 지적하였다.
논의의 주제가 되는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주장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는 것은 희론이며 시간의 낭비이다. 따라서 松本의 주장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 함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불교 이해에 공통의 지반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홍성기 선생에게 논문의 내용에 대해 몇 가지 묻고자 한다.
1. 불교 이해의 핵심은 '연기'의 이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핵심도 연기의 이해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松本의 주장도 여래장사상은 연기법과 위배된다는 것이고, 그가 말하는 연기법은 그가 이해한 연기법이다. 따라서 홍성기 선생의 비판의 핵심도 松本의 잘못된 연기 이해이다. 홍성기 선생은 松本의 시간적 연기해석을 비판하면서 '중관의 구조적 연기해석'을 바른 해석으로 삼고 있다.
1. 중관의 연기해석을 '구조적 연기해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1-1. 홍성기 선생은 "용수가 중론에서 채용한 논쟁 방법은 다른 어떤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의 보편적 구조로서 연기이고, … 바꿔 말해 연기란 '모든 현상과 존재의 생성구조'이나 그 자체로는 내적인 이율배반으로 인해 결코 근거 지울 수 없는, 즉 연기법이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에서 용수가 벌이는 논쟁의 대강이다.
이때 연기의 내적 이율배반이란 우리가 어떤 전제를 분할할 때 그 분할된 부분들 간의 관계가 서로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결코 독립적, 즉 다르지 않으나(不異) 도대체 분할하였다는 점에서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不一)" p.6.
"즉 不一不異라는 연기구조의 이율배반은 바로 우리가 하나의 전체를 분할하였을 때 분할된 대상들간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도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를 기술한 표현이다. 바로 이러한 연기이해를 우리는 상의적, 논리적, 동시적 그리고 비유적으로 공간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라고 '구조적 연기해석'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공성이란 다름 아니라 전체의 분할에 기인하는 불일불이의 연기구조이며 연기와 공이 동전의 양면"p.7이라고 이야기한다.
1-2. 용수의 不一不異가 연기구조를 이야기한 것인가?
불일불이는 중도의 표현이다. 용수는 八不로 中道를 표현한다. 이러한 용수의 중도는 용수의 창작이 아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斷常中道, 一異中道, 有無中道 등을 설한다. 이러한 중도는 항상 無記 그리고 12연기와 연관되어 있다. 부처님은 괴로운 과보를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는가,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받는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이것은 無記라고 규정한 후에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 다고 하면 常見이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斷見에 떨어진다. …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모순된 두 주장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다.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한다."고 단상중도를 이야기한다. 일이중도는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가 다른가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이야기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또한 무기이며, 두 모순된 주장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중도로 향하여 연기를 관할 것"을 강조한다. 유무중도 또한 모순된 주장을 버리고 12연기를 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볼 때 중도는 단상, 일이 등의 모순된 주장이 12연기를 바르게 관찰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사견이므로 이를 버린 입장이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不一不異는 '우리가 하나의 전체를 분할하였을 때 (하나의 전체에서) 분할된 대상들간의 관계가 같다고 할 수도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상태를 기술한 표현'이 아니다.
우선은 영혼과 육신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며, 이때의 불일불이는 '영혼과 육신이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같다는 주장도 사견이고 다르다는 주장도 사견이므로 '이 둘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이 문제는 영혼과 육신이 실재할 때 가능한 문제이다. 만약 영혼과 육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마치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은 같은가 다른가라는 물음과 같이 무의미한 물음이 된다. 즉 대답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문제에 대하여 12연기를 이야기한 것은 영혼이나 육신이 실재한다는 생각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영혼이나 육신은 12연기의 有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영혼이나 육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중론』은 부처님의 침묵이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중도임을 논증한 책이다. 『중론』은 <관사견품(觀邪見品)>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 품은 『중론』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용수보살은 부처님께서 침묵한 문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모든 존재현상은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인데
세상이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들이
어디에,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어떻게 발생할 수 있겠는가?
(一切法空故 世間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是諸見)
고따마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연민하사
정법(正法)을 설하시어 모든 사견(邪見)을 제거하시었으니
나는 이제 그분께 머리 숙여 절합니다.
(瞿曇大聖主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은 그 목적이 중생들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본 것이며, 잘못된 생각이란 모든 존재현상의 공성(空性)을 알지 못하고 모든 사물이 시간과 공간 속에 실재한다는 생각임을 밝히고 있다. 시간도 공(空)이고 공간도 공(空)이며 사람도 공(空)이고 모든 사물도 공(空)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의 시간적 영속성이나 공간적 무한성, 또는 영혼과 육신의 一異나 여래의 생사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不一不異는 어떤 전체가 있고 이것을 분할하였을 때 분할된 것들의 관계가 不一不異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다거나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용수는 부처님이 침묵한 까닭은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성(空性)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렇다면 공성(空性)이란 무엇인가? 『중론』의 첫머리에 나오는 <귀경게(歸敬偈)>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존재현상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이와 같은 도리의 연기를 설하시어
모든 무의미한 말장난을 잘 없애주시었으니
나는 머리 숙여 부처님께 절합니다.
모든 설법자 가운데 제일 훌륭하십니다.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모든 존재현상은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이다. 따라서 생기고 없어지며, 같거나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존재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한 것이다. 모든 존재현상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고 있는, 즉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성(空性)이란 연기에 근거한 개념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연기의 도리에 의하면 무엇이 생겼다거나 없어졌다거나,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영원하다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등의 논란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설하여 이러한 모든 말장난을 종식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는 업보의 다른 이름이다.
<별역잡아함 202경>은 연기설이 곧 불교의 업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때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했다.
"나의 견해로는 중생들은 상주불멸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다."
다른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나의 견해로는 일체는 무상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다."
<중략>
그때 외도들이 각각 자신들의 소견을 이야기하고 수달다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가 이야기해 보시오."
수달다가 대답했다.
"나의 견해로는 일체 중생은 모두가 유위(有爲)로서 여러 인연(因緣)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오. 인연이란 곧 업(業)을 말하는 것이오. 만약 인연이 화합하여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무상(無常)한 것이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곧 무아(無我)이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모든 견해에 마음이 집착함이 없소.
그대들이 주장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상존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거짓이다'는 말은 (자아의 존재를) 상상으로 꾸며 놓았기(計) 때문에 하는 말로서 (꾸며 놓은 자아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오.이 모든 사견을 탐착(貪著)하면 이는 괴로움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큰 괴로움을 받나니, 생사(生死) 가운데서 무궁한 괴로움을 받는 것은 모두가 자기존재를 꾸며놓기(計有) 때문이오. … 이와 같은 모든 견해(에서 주장하는 모든 존재)는 사실은 유위이며, 업이 모인 것이며, 이연이 화합한 것이오. 이로써 미루어 보건데 (그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움이므로 무아임을 알아야 하오.
이 경은 당시의 외도들과 수달다라고 하는 재가 불자 사이의 대화이다. 외도들은 부처님께서 사견으로 규정하고 묵살했던 문제들에 대한 수달다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한 수달다의 대답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부처님은 12연기를 이야기하여 외도들이 문제삼고 있는 세간, 영혼, 육신 등의 존재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므로 이들 논의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것임을 밝혔다. 그런데 이 경에서 수달다는 이들 존재가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하는 유위라고 이야기하면서 인연은 업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의미이므로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한다'는 말은 '연기한 존재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유위(有爲)란 '무명에서 연기한 망상으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생이나 세간, 영혼 등이 '인연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유위'라는 말은 이들이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업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지은 업의 결과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연기(緣起)는 업보(業報)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無我)와 空은 이러한 업보에 업(業)을 짓고 보(報)를 받는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잡아함 제일의공경>에서 부처님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고 이야기한 것은 무아와 공이 업보를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용수의 팔불중도는 부처님의 무기를 의미하는 것이지 연기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론」 <관사제품>의 다음 게송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緣起를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假名으로 취해진 것이며, 실로 中道이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이 게송은 연기, 공, 중도가 동의어임을 표현한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이 게송은 독립된 문장이 아니다.
<관사제품>에서 제기된 문제는 "만일 모든 것이 空이라면 生도 없고 滅도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성제도 없단 말인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게송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이다.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의미하는 空은 無이다. 용수는 자신이 사용한 空이라는 개념이 有와 모순관계에 있는 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무중도에서 연기에 근거를 둔 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은 연기에 근거하여 無記로써 유무의 모순을 파기했다. 12연기에 의하면 生死, 즉 生滅은 무명에서 연기한 괴로움이다, 무명이 있으면 生死가 있다. 그러므로 사성제의 고성제가 있다. 생사의 괴로움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집성제도 있다. 무명이 멸하면 망념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멸성제가 있다. 망념은 바른 삶, 즉 팔정도를 통해 사라진다.
그러므로 도성제가 있다. 이것이 연기이다. 空은 이러한 연기에 근거하여 생사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없음을 표현한 것이지 全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무명으로 업을 지으면 생사의 괴로움이 나타나고, 무명이 사라진 삶을 살면 생사의 괴로움이 없다는 연기의 도리에 업의 작자나 보의 수자는 없다는 것을 空은 의미한다. 이것은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이 '第一義空'임을 밝힌 부처님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空은 그것이 無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무의 모순을 떠나 중도에서 진실을 보게 하기 위해 施設된 假名이라는 것이 이 게송의 의미이다.
1-3. 따라서 "공성이란 다름 아니라 전체의 분할에 기인하는 불일불이의 연기구조이며 연기와 공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에서 중관의 연기해석이 '구조적 연기해석'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2. "연기란 원래 두 가지 형태로 제기되었다 ; 전체의 분할에 기반하는 보편적 존재구조로서 연기. 이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공식으로 표현된다. 다른 한편 이 보편적 연기구조를 바탕으로 인간이 세계의 사물을 개체화하여 생멸이라는 무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재구성한 것으로서 12연기가 있다."p.13
2-1.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주장은 마치 칸트가 物自體를 인정하고,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우리의 인식구조에 기인한다고 하여 회의론을 극복하지 못하였듯이 회의론에 빠질 위험은 없는가?
2-2. 12연기는 무명(無明)에 휩싸인 중생의 삶(行)을 통해 중생의 마음(識)이 형성되어 그 마음에서 중생계(名色)가 연기하고, 무명이 사라진 마음(正見)으로 살아가는 삶(팔정도)을 통해 열반이 실현된다는 업설이며, 일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心緣起說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이 되고, 여래장사상이 되고, 화엄사상이 된다. 우리가 대승의 모든 사상을 불교라고 옹호하는 근거가 12연기설인 것이다. 아이러니이지만 부처님이 말하는 연기는 12연기라고 주장하는 松本을 비판하는 근거도 12연기설이다. 만약 '전체의 분할에 기반하는 보편적 존재구조로서 연기'가 12연기 외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松本이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한 'dhatu-vada'가 아닐까?
여기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몇 마디 인용하고자 한다.
범부는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이어 이와 같이 분별하나니 자신의 내부에 識이 있고, 외부에 名色이 있다고 한다. <잡아함 294경>
일체는 12入處이다. <잡아함 319경>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게 하는 것, 그것을 聖法律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무엇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을 있게 하는가? 법우들이여, 眼에 의해서, 이비설신의에 의해서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다. 이것(六入處)을 성법률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S.N. 35.116.>
저 육입처는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다. <잡아함 57경>
3. 연기는 시간적 공간적 해석이 불가능하다.
연기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의 관계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시간, 공간,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 등이 모두 무명, 즉 중생의 마음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기의 무대는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이다. 즉 연기는 사물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이론이 아니라 마음의 생기와 변화를 관찰하여 관찰된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는 논리적 해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관찰을 통해 스스로 발견하고 깨닫게 된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여 논리적으로 그 관계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소멸하는가를 깨달았다. 이것이 12연기이고 연기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4념처에서 8정도에 이르는 마음 살피는 법을 가르쳤다. 부처님은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마음이 곧 우리의 삶, 즉 업이며,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12연기 이외에 '전체의 분할에 기반하는 보편적 존재구조로서 연기' 해석은 마치 '인식의 대상은 인간의 인식구조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외부의 실체로서의 물자체는 인식을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칸트의 생각을 연상케 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내부에 사물을 인식하는 마음이 있고, 외부에 인식의 대상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중생의 무명이라고 가르쳤음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4. 순관과 역관에 대한 이해
12연기의 순관은 유전문을 의미하고, 역관은 환멸문을 의미한다고 (松本도 그렇고 많은 일본불교학자들도 그렇게 이해한다) 하고 있는데 순관은 무명에서 생사가 연기하며, 무명이 멸하면 생사가 멸한다는 것을 연기 순서에 의해 관하는 것을 의미하고, 역관은 노사는 생을 연하고, 내지 행은 무명을 연으로 한다고 관하는, 즉 역순으로 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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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불교신문에 기재된 여래장사상에 대한 찬반론입니다. 마지막글인 이교수글은 불교신문과는 관계없는 홍성기씨논문에 대한 반박글인데 여래장 내용이 있길래 함께 덧붙여 보았습니다.
첫댓글 이글은 불교신문에 기재된 여래장사상에 대한 찬반론입니다. 마지막글인 이교수글은 불교신문과는 관계없는 홍성기씨논문에 대한 반박글인데 여래장 내용이 있길래 함께 덧붙여 보았습니다. 님들의 견해는 어떠 하신지요
원각경에 무변허공 각소현발이라 답합니다
ㅎㅎㅎ.. 이제사 여래장 사상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고.. 무엇이 문제가 될 여지가 있는지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랑님^^()...
빠진 것이 있네요 각묵스님의 [무아의 가르침은 오온, 12처, 18계로 정리되는 존재의 배후에 자아니 절대아니 참나니 순수이성이니 이데아니 창조주니하는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온,12처,18계가 존재일까요. 법 이지요. 그리고 참나라는 말이 실체론인가요? 공성의 도리를 아는 나' 이것이 참나가 아닌지요.뜻을 전하는 순수한 언어 일 뿐입니다. 설마 자등명도 실체론이라고 하진 않겠지요.강병조선생의
1.[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의 여래장(마음)이나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여래장(마음)이나 모두 여래장(마음)이다”고 말씀하셨다]라고 이평래씨글이 잘못되었다하셨는데 이말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창조적인 삶으로서의 마음은 중생과 부처의 차별이 없다.]의 의미는 어떨까요. 2.마음은 뇌의 기능이므로 실체가 없나요? 마음이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오온12처18계인데 이들은 마음입니다. 뇌의 기능이란 말은 관계가 없습니다.뇌랑은 오히려 수명과 연결하는 것이 좋을 듯 하네요.
강병조선생의 각묵스님지지 말씀은 불교교리에 전혀 맞지 않군요. 허정스님은 여래장의 我가 비불교적 我라고 하는데 그我가 아니라는 것이 대승입능가경,집일체법품에 나온다고 하네요
전에 (15년전) 여래장을 읽고 참 불교가 어렵구나 한 기억이 나는데(이해가 잘 안되서 ^^) 지금에 와 다시 보게 되네요 ㅎㅎㅎ 지금 보니 별거 아니군요 이중표 교수님 글이 핵심을 제대로 이야기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연기를 단순히 인연과보로 파악보다는 연기가 의미하는바, 그리고 그렇게 볼수 밖에 없는바를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연기는 나를,사물을 제대로 볼수있게금 하는 기준이라는것 입니다 "기준" 거 중요합니다 그 기준이 제대로 되야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그 기준을 모르면 자기 잣대로 이야기 하는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용수보살님도 부처님에 대한 찬탄을 하지않아나 생각됩니다
따라서 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이중표 교수님이 이점을 윗글에서 잘 지적을 해 주셨다고 봅니다 좀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은 초기불교 방에 가서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이렇게 글 올려주신 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항상 밝은 미소 보내며
읽을수록 문제점이 너무 많습니다.[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오온 외에 절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강조한다.오온 외에(非卽非離蘊) 일심이나 여래장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나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외도적 발상이며 현양매구일 뿐이다.]문귀도 이해되지 않지만 가르침도 이상합니다. 불교에서 나를 설명할 때 오온이란 단어외에 쓰면 안된다는군요. 여래장을 자신의 이해선에서 이해하여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