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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일식,
1905-1945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
- Rites의 책에서
1930년대 아인슈타인이 나치 독일을 탈출한 후, 예전 대학 동료가 프린스톤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나에게 독일 물리학에 대해 말해 주시게” 아인슈타인이 물었다. “독일 물리학은 없네.” 동료가 대답했다. 나는 이십세기 한국역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매우 다른 이유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다루는 기본적인 요소-공문서와 기초 자료와 면담록-을 사용하면서 1910년 이후 시기에 관하여 서술하기를 꺼려한다. 한국 역사의 주요저작 중 어느 것이나 펼쳐 봐라. 그러면 거의 모든 역사책이 이십세기를 추가 부분afterthought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우선 첫 째로 많은 자료들이 전후 남과 북에서 거의 대부분이 비밀로 분류되어 있으며, 일본 역시 1945년 군국주의가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전전의 공문서들을 공개하기를 놀랄만큼 꺼려한다. 그러나 그 것 이상의 이유들이 있다; 봉인된 공인문서가 그 자체로 보다 깊은 문제의 증상이다. 한국 역사가에게 식민 시대는 너무 고통스럽고 어떤 공인 문서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저항 신화에 너무나 흠뻑 젖어 있다. 북한은 김일성을 칭송하는 전기hagiography에서만 존재하는 사건들로 직조된 그림tapestries을 지어냈다. 남한에서는 1935년에서 1945년의 10년이 빈칸이다: 일본에 의해 학대받거나 이용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 수 있는 기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일본에 부역한 수 천의 사람들은 결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간단하게 역사를 지워버렸다. 심지어 (예를 들면 지방사) 계보학의 보고에 있는 관료의 명단조차 이 시기에는 공란으로 되어있다. 심지어 1945년 이후 분단된 한국의 역사는 국가 분할 때문에 더욱 편견을 갖거나 무효화되었다. 북한에서 이승만에 관해 말할 수 있거나 남한에서 김일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짓을 하면 감옥에 가야한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나?” 하는 질문은 비무장지대(DMZ)의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오직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뿐이다.
통일되고 자유로운 나라인 일본에서 자신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정직하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역사가들도 제국주의적 충동이 여전히 죽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암시하는 일을 꺼려한다. 중국에 있는 일본의 기록에 관하여 아마도 심각한 반향이 있었다. 그 기록에는 한국에서의 일본 행위에 관한 것은 거의 없다. 20세기는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국제적 위상을 향한 느린 부상과 함께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일본을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은 재난으로 끌어들였다. 영국과 미국은 20세기 전반부 태평양을 지배한 세력이었는데 일본을 패권국이 아니라 단지 부하junior partner로 환영하였다. 새로운 세기에 일본은 세계의 나머지와 더불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오랜 우려를 갖고 있었으며 일본의 우려는 가까운 이웃들 사이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컸다. 일본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다.
한국은 신속하게 떠오르는 일본의 광휘에 의해 눈 먼 오이디푸스다. 수세기동안 중국을 지배해 온 온화하고 즐거운 태양을 향해 응시하면서 금지된 도시의 황금 기와와 북경의 황토 언덕이 가진 황금 색조를 꿈꾸듯 처다 보던 한국은 역사가 기록된 이래 처음이라 기록할 만큼 충분하고 강력한 힘 있는 나라를 대면하게 되었다. 뒤이어 오는 혐오감은 니체의 비평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태양을 응시하는 강력한 시도 후 우리가 눈이 머는 것을 막을 때 치료하기 위하여 눈앞에 검은 점을 본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서 한국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낡은 조선에 칼을 찔러 넣고 비틀었으며, 그리고 그 상처가 지금까지의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물어뜯었다. 근대사가 왜 그렇게 적게 쓰였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침묵을 강요하는 죽음 밖에 서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훌륭한 역사를 쓴 정말 소수의 한국인과 일본인이 대단히 중요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근대사를 공유하는 것을 왜 그렇게 겁먹고 불안해하는가? 그들의 관계가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아일랜드 보다 벨기에와 자이레, 포르투칼과 모잠비크와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를 종종 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국경선을 긋고, 지리적 단위의 뒤범벅 속에서 민족 종교 인종과 종족 계보를 따라 분리된 다양한 종족과 민족을 합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1910년 이전에 몇 세기 동안 한국에는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은 인종적 언어학적인 통일체를 갖고 있었으며, 전에 유럽 민족들이 이르렀던 것처럼 오랫동안 인정받은 국경선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과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미덕 때문에 한국인들은 언제나 일본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아주 나쁠 때도 동등하다고 느꼈다.
창조대신에 일본인은 1910년 후 교체substitution에 착수했다; 한국 양반출신 관료 대신에 일본인 지배계층으로의 교체, 한국인 관료 중 대부분을 해고하거나 끌어들였다; 옛 중앙 행정조직 대신에 강제적 조정기구를 설치; 옛 교육기관을 일본식 근대교육기관으로 교체; 초기 단계의 한국식 유형대신에 일본식 자본과 전문지식을 구축, 한국의 재능있는 사람을 일본인으로 교체; 심지어 궁극적으로 한국어를 일본어로 대체하려 함, 한국인들은 결코 일본인들의 이러한 교체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창작품에 가지고 일본인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일본을 구체제, 한국의 주권과 독립, 초기 근대화의 원형 its indigenous if incipient modernization 무엇보다도 국가의 존엄을 낚아채려는 세력으로 보았다. 따라서 다른 식민지 민족들과 달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결코 일본의 지배를 불법적이며 굴욕적인 행위 이외의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더욱이 지리적이거나 중국의 문화적 영향과 특히 19세기까지에 발전의 정도에서 두 나라의 긴밀성이 일본의 지배 전체를 한국인에게 더욱 굴욕적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인들에게 제시된 역동성을 존경하거나 미워하는 관계에 대해 특별한 강렬함을 주었다. “ 우리가 경험한 역사의 사건 외에는 없었다. there but for accidents of histiry go we.”
첫댓글 The Book of Rites는 禮記가 아닐까요?
이 책이 어느 부분에 언급되고 있나요 잘 모르겠네요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한 나라에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
- Rites의 책에서
요 부분이요...
그러네요
인명인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