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인 설날을 맞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올 한 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또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 누리는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대축일로 정하고 우리 겨레 모두와 함께 설날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합니다. 설 혹은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 씁니다.
설날 곧 신일이란 근신하여 경거 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슬기로운 우리의 조상들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에, 그 해의 운수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입니다.
그래 서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한 해의 첫날을 설날이라고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가짐을 경건하고 바르게 가짐으로써, 벽사초복(辟邪招福), 즉 사악함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설날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기 위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경거 망동하여 화를 불러들이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리길이 멀다 하지 않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조상들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을 찾음으로써,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고향이라는 텃밭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고, 친척과 가족들, 그리고 정답던 이웃들이 살던 곳입니다. 고향, 바로 그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합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 하지만, 그러나 타향은 남남이 모여서 사는 곳입니다.
타향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그렇지 않습니다. 끈끈한 인정으로 서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았던 곳이 고향입니다. 고향 안에서 나는 조상들의 후손이며, 한 가족의 대를 이어 온 사람이며, 아버지이며, 아저씨이며, 그리고 자식입니다. 그래서 고향은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나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명절이면 조상들을 위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조상 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상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그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로부터 충효(忠孝)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던 우리 겨레는, 이렇게 제사를 통해서 선조들의 유업을 기리게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법과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을 터득하게 했던 것입니다.
정조 차례(正朝茶禮), 즉 설날 아침에 조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나면, 웃어른들에게 새해의 첫 인사를 큰절로써 올렸는데, 이것을 세배라고 합니다. 이 세배 역시 우리 자신들이 누구이며, 또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답게 아랫사람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절 값과 더불어서 덕담(德談)으로 아랫사람들에게 한 해의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어른들에게 세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지름길이 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그리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을 잘 지키고 따를 때,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경거 망동으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앉을 자리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타락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은 이 땅의 인륜 도덕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풍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분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주인을 반갑게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종은 참으로 축복받을 종입니다. 그러나 종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동한다면 주인으로부터 호된 꾸중과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종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깨닫고, 그 위치에서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종다운 생활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처럼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서도 안됩니다.
人間이라는 글자가 잘 말해 주듯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을 때 여기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은, 이런 관계를 바르게 해주는 축복된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명절을 우리에게 물려주신 우리 조상들은 오늘 우리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물론이지만 살아 계신 부모님들을 잘 모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우의를 나누는 데도,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만큼 철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명절을 잘 지냄으로써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전통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온갖 사조와 풍물들이 밀려와도 우리가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본받아서,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종다운 삶을 지키는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일입니다.
오늘 설날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려서 올 한 해는 모두 건강하시고 또 소망하시는 일들이 성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강영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