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주사 불성회 원문보기 글쓴이: 푸대화상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법보(法寶) 해인사, 승보(僧寶)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로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이다. 646년(선덕왕 15)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舍利)·가사(袈裟)·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한 절이다. 이와 같이 불사리와 대장경이 최초로 봉안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절이었으며 이후 신라 율종(律宗)의 근본도량이면서 신라 승단(僧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절의 이름은 승려가 되려는 출가자들이 모두 금강계단에서 득도하거나 모든 법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또는 산의 형세가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도사의 창사(創寺)정신
한국의 사찰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이 땅에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사찰로 이름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요체인 불, 법, 승 삼보가 각 사찰에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된 것이다.
통도사는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즉 부처님 진신사리)를 간직하고 있어 진정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통도사는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부처임의 진신인 사리가 대웅전 뒤쪽에 있는 금강계단에서 살아 숨 쉬고 있어서 구태여 부처님의 형상[佛像]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자형(丁字形)법당 외부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즉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쓰여 있다.
불보사찰로서의 통도사
해동의 이름난 명승지, 영축산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에 고승 자장율사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국내 제일 대가람(大伽藍)이다. 영축산이란 본래 부처님 재세시(在世時)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그리드라(Gdhra : 鷲, 독수리)라는 산(봉우리)이다. 본래 이 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며 수행자와 독수리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영축산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인도 영축산과 닮은 이곳에 통도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대국통에 오른 자장율사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영축산 통도사에 있는 전각들과 탑, 석등, 이것들과 어우러져 있는 자연, 그 속에서 불법을 꽃피운 위대한 고승들, 어느 하나 불연(佛緣)과 떼놓을 수 없다.그래서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 해서 통도사라 이름했다고 일컬어진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 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했다고 한다. 이는 사찰의 근본정신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통도사는 계율(戒律)의 중심지로서 모든 승려들은 이곳에서 계(戒)를 받아서 산문(山門)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표현한 탁월한 발상이었다. 보살은 자기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데 있지 않다. 깨달음을 향하여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동시에 고통 받는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통도사의 어원
신라 때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님을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축산에 이르러 보니 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이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자장율사스님께서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이다.
불사리 정신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통도사는 우라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삼보란 불교 성립의 삼대요소인 불(佛: 교주) · 법(法: 교법) · 승(僧: 승단)을 뜻하며, 삼보사찰이란 바로 이들 삼보를 상징하는 사찰을 말한다.
즉,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보조국사(普照國師)이래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금란가사(金?袈裟 - 금실로 수를 놓은 가사)가 봉안되어 있는 통도사는 삼보의 으뜸인 불보사찰의 위치를 지니게 되었다.
통도사를 한국 불교의 으뜸(佛之宗家)이자 가장 큰절(國之大刹)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심으로 인하여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통도사에 봉안된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모셔온 것이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막대한 양의 비단과 채색옷감, 대장경 400권, 불교용 깃발(幡幢), 꽃으로 장식된 가리개(花蓋) 등을 함께 가져와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따라서 통도사는 불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靈鷲山)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Rajarha)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고, 이러한 광경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여, 불교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추앙받고 있다. 따라서 자장율사스님께서 이곳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寺名)의 다른 의미로서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戒律根本道場)으로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라는 설과,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나타내어 대승불교의 이념을 표현하였다는 설이 있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신라 ·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속에 한국 불교의 구심처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의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중창을 통하여 면면히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6개 대표사찰가운데 경상남도의 대본산(大本山)이 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本寺)로 국내 최대의 사찰을 형성하여 구하(九河) · 경봉(鏡峰)대선사와 같은 고승이 계셨으며, 이후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9대 종정이신 월하대종사(月下大宗師)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장율사스님의 계율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靈鷲叢林)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의 사격(寺格)은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를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首寺刹)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본산(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불보사찰(佛寶寺刹)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자장율사스님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경남불교를 이끌고 있으며 자장율사스님의 창사(創寺)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금강계단과 구룡지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건이후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는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알,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셨다. 그런 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설치 하셨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내 상노전 구룡지와 하노전 못의 수면을 보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자장율사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율사스님은 그 용이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역대 큰 스님
자장율사
신라시대의 고승이자 통도사의 창건주. 속성(俗姓)은 김씨로서 이름은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스님은 신라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김무림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국가의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자녀가 없으므로 삼보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자식을 두게 해달라며 “만일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불교의 지도자로 만들겠습니다.”하는 축원 끝에 그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에 들어오더니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었다.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20대 초반에 논과 밭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를 짓고 불가에 귀의한 후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그는 방안을 가시로 둘러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였고,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졸음을 물리치는 고골관(枯骨觀)이라는 엄격한 수행(修行)을 몸소 실천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그의 피나는 고행은 계속되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수행중인 자장을 대신(大臣)의 자리에 오르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거듭된 거절에 화가 난 왕은 조정의 관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그때 칙사에게 준 자장의 답변은 단호하였다.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고 죽을지언정, 파계(破戒)를 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스님의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 시켜주고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은 자장의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항상 공부에 대한 한 가닥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신라는 본격적으로 불교사상이 유입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는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스님은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 : 一名 淸凉山)에 머물렀다. 스님이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 명상하다 꿈에 문수보살이 범어(梵語)로 된 게송을 주었는데 해독치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이상한 스님이 와서 해석하되 “일체법이 자성 없는 줄을 요달해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 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보다 나은 글이 없다” 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으셨던 가사(袈裟)와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舍利) 그리고 발우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이후 자장율사스님은 더욱 수행을 깊이 하여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는 백제로부터 공격을 받아 낙동강 유역까지 후퇴하여 나라의 존망에 까지 직면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자장율사스님에게 소환을 명하여 이듬해, 자장율사스님은 당태종이 선사한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신라에 돌아온 것이다(643).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그를 궁중으로 초청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皇龍寺)에서 7일 주야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의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반월(半月)마다 계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이면 여덟, 아홉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僧)이 되고자 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났다.그래서 자장율사스님은 646년에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은 자장율사스님의 피나는 구법(求法)노력의 결과이며, 거기에는 철저한 자장스님의 계율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스님은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귀국 후, 스님 중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스님께서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 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자장율사스님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들의 의식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선덕여왕에게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제시한다.
또한 자장율사스님의 불교사상은 삼국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고 스님의 한결같은 믿음으로 신라땅을 중심으로 삼국이 통일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당나라로의 유학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통하여 자장율사스님은 선덕여왕의 후원아래 구법의 길을 떠나 입당하여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당시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율사(律師)로 이름나 있다. 자장율사스님의 탄생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원효(元曉)와 의상(義相)보다는 연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자장율사스님은 불교치국정책의 일환으로 탑을 조성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는 등, 곳곳에 신라의 땅이 과거에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나라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으며, 이곳 통도사도 창건하게 되었고 불국토인 신라를 중심으로 해서 삼국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과 신념에 찬 결단이었다. 이처럼 자장율사스님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 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함으로서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예로부터 통도사와 신라 최대의 거찰 황룡사를 형제 사찰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장율사스님보다 먼저 영축산의 반고사(磻高寺)에 머물면서, 낭지화상은 주로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했으며 『화엄경(華嚴經)』에도 밝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낭지승운조(朗智乘雲條)에 의하면 그는 중국의 화엄도량인 청량산(淸凉山 : 五臺山)에 구름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었다 한다. 그는 사미시절의 원효스님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자장율사스님도 낭지화상과 같은 동년배로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낭지화상과 교류하였으리라 본다.
성해당 남거스님
1854년 6월 7일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태어났다.17세에 기장의 장안사로 출가. 취룡 태일(鷲龍泰逸)스님을 은사로, 해령(海嶺)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0년 뒤인 1880년부터 은사를 따라 통도사에 주석하게 된다. 이듬해 1892년 조선조 이후 끊어진 계맥을 이은 당대의 율사인 만하승림(萬下勝林)스님에게 대소승계(大小乘戒)를 수지, 눌암(訥庵)스님 문하에서 대교(大敎)를 마쳤다. 이후 화두를 들고 참선 정진했다.
39세(1892년)에 통도사 승통(僧統)에 취임해 사격(寺格)을 일신하였고, 51세(1904년)에 통도사 총섭(總攝)이 됐다. 1906년 황화각(皇華閣)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원장 소임을 보면서 1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그 가운데, 황화각과 동곡루(同穀樓)를 중수했으며, 1911년 부처님 진신사리탑을 보수할 때 총지휘를 했다.
61세 되던 1914년에는 보광선원(普光禪院) 원장이 되어 납자들을 지도했고, 1927년(정묘년) 음력 12월29일 자시(子時)에 열반했다. 장례는 3일장으로 거행됐다. 제자 경봉은 은사의 열반을 다음의 시로 기렸다.
劫前有樹本無影(겁전유수본무영) 공겁전의 본래 그림자 없는 나무가
偶得春風現世眞(우득춘풍현세진) 우연히 봄바람 만나 세상에 나왔네
莫問吾師歸去處(막문오사귀거처) 스승의 돌아간 곳 묻지 마라
靈光空寂是靈眞(영광공적시영진) 신령한 광명 공적한 것이 이 영진일세
또한, 한암스님은 경봉스님의 청으로 영찬(影讚)을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聖海大和尙影讚(성해대화상영찬)
勤護三寶(근호삼보) 부지런히 삼보 수호하기를
一片赤心(일편적심) 일편단심 이었네
參尋祖意(참심조의) 조사의 뜻 참구하여
透脫古今(투탈고금) 고금을 꿰뚫었네
來耶去耶(내야거야)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明月胸襟(명월흉금) 밝은 달 흉금일세
靈鷲山屹(영축산흘) 영축산 높이 솟고
洛東江深(낙동강심) 낙동강 깊으노라
세수 74세. 법납 58세. 碑(비)는 통도사 부도전에 봉안돼 있고, 문하에 구하천보(九河天輔, 1872~1965). 재하법성(齋河法晟).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경하달윤(鏡河達允)이 있다.
구하당 천보스님
근현대의 고승.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축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스님의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출가를 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경월도일(慶月道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90년 예천 용문사에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경학과 참선을 공부하고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여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하여 교감ㆍ교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9년 무렵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는데,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원 등 모두 1만3천원이었다. 또한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였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포교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등 많은 포교당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전법을 전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역경사업에도 힘써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3년 10월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1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제자가 있다.
문손들에 의해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축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기(金剛山觀相記)』가 최근 출간되었다.
경봉당 정석스님
경봉 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은 근현대의 고승으로서 광주 김씨이며,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으로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7세 때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강원을 졸업 후, 하루는 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본디 반 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경구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 스님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27년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날 새벽 두시 반 경 바람도 없는 데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을 보는 순간 의문 덩어리가 일순간에 녹아내린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마음이 식어버리자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바깥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이제 만나야 할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담발라 꽃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한암, 제산, 용성, 전강 스님등과 교류하면서 친분을 두터이 한다.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장에 취임한 뒤부터 5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4월에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다.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ㆍ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1967년 서울탑골공원에 '만해선사기념비'를 세우고 '경봉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한시와 묵필에도 뛰어났으며 선지식으로는 드물게도 70여년 동안 계속 日記를 남기기도 하였고, 지금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경봉스님이 지은 것이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 회마다 1천여 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正法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탑골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음 5월27일)에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문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열반에 드시니 세수 91세, 법납 75세 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벽안당 법인스님
벽안(碧眼)은 법호, 법명은 법인(法印)인 스님은 1901년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서 태어난 스님은 35세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하면서 당대의 선지식인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불가의 도리를 배우고 정진했다. 제방선원을 돌며 화두를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峯)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득도한다.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을 하고 어른 스님들을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스님은 경봉스님께 매일 아침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 중이던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접하고 오도송을 읊는다.
大道元來無繫縛(대도원래무계박)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玄機何處關形成(현기하처관형성) 현묘한 기틀 어찌 모양에서 찾으랴
九旬磨劍寒霜白(구순마검한상백) 구십 동안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擊罷祖關各方行(격파조관각방행)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이후 통도사와 범어사 해인사 등의 선방에서 정진을 거듭한다. 43세에는 범어사에서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내시면서 청렴결백하고 公私를 구별하는데 있어 엄격함을 지니고 있었다. 공석에서는 가을서리(秋霜)와 같은 엄정(嚴正)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사석에서는 봄바람(春風)같은 따뜻함으로 대중들을 제접했다.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의장을 비롯해 2 · 3대 의장을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말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墨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는 87세 법납 53세였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靈鷲片雲(영축편운) 영축산의 구름
往還無際(왕환무제) 오고 감에 때(時)가 없네
忽來忽去(홀래홀거) 홀연히 왔다가니
如是餘時(여시여시) 때가 이와 같네
노천당 월하스님
현대의 고승. 1915년 4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은 법호(法號)이고 법명이 월하(月下)이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聖海)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구하(九河,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
어릴 때 집 근처의 고란사 스님들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이때 속가의 부모님이 설득했지만 결국 18세인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득도한 후,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을 이었다. 오대산 한암스님 회상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1944년 4월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1950년도부터 30여년간 통도사에 전계대화상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셨다.
이(理)와 사(事)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이 되었고, 1956년 통도사 주지를 하시면서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 염화실에 주석하며 통도사를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된다.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종단 개혁때는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에는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을 재추대 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자리하였다.
스님은 50여년 가까이 통도사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했던 스님은 졸음에 겨워하는 납자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로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언제나 문을 열어놓은 채 지위고하와 노소를 막론하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대중운력에 빠지지 않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청규(淸規)를 지켜왔다. 詩(시) · 書畵(서화)에도 능했던 스님은 옛 조사스님들의 선시 전통을 이으면서도, 간단 명료한 언어와 선기 넘치는 선시를 지어왔다. 스님의 선시는 1998년 문도들에 의해 《월하대종사 상당법어집》으로 묶여진 바 있다.
월하스님은 자신의 가풍에 대해 “안으로 구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하는 것이 없는 것 자체”라고 말하였다. 대중교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녀, 1920년대 중반부터 통도사에서는 대중법회를 개설하여 한 달간 전국 고승들의 법문을 들려주는 화엄산림이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교화사업이 안정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는 방장스님의 원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후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사격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어른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1998년 종단사태 이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후진양성에 필력을 다하였다.
통도사가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 총림(叢林)에 걸맞은 가람의 위용(偉容)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힘이 컸다. 특히 1992년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 건립기금으로 아무도 모르게 1억5000만원을 희사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언론에 알렸다가 오히려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스님의 기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월하스님이 2003년 12월 4일 오전 9시 15분께 세수 89세, 법랍 71세로 통도사 정변전에서 아래의 열반송을 남기고 열반하셨다.
一物脫根塵(일물탈근진)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頭頭顯法身(두두현법신)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莫論去與住(막논거여주)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處處盡吾家(처처진오가)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