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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본당과 흥남본당 지도. |
49. 함흥교구 흥남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35년
소재지 옛 지명 :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하덕리
현 지명 : 함경남도 함흥시 하덕리
마지막 주임 : 게롤트 피셔 신부(1949.1∼1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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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남성당 전경. |
1927년 일제에 의해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이 세워졌다. 당시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비료공장으로, 1930년 한 해 흥남공장에서만 유기질 질소비료인 황산암모늄을 연간 48만t을 생산했다.
비료 생산이 늘면서 함흥 남쪽의 항구도시 흥남의 인구는 5만 명으로 불어났고, 칼리스토 히머 신부의 기록에 보면 “한국인이 60%, 일본인이 40%”였다고 한다.
인구 증가에 주목한 원산대목구는 1929년 흥남공소를 설립했다. 신자 수가 점차 늘어 100명을 넘기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영흥본당에 있던 히머 신부에게 본당 부지를 찾도록 했고 읍내에 부지 6612㎡를 확보했다.
이어 1935년 본당이 설립되면서 주임으로 부임한 히머 신부는 이듬해 성당을 봉헌했다. 또한, 1936년에 해성학교를 설립, 15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2부제 수업을 했다. 1937년이 되면 본당 신자 수가 4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커졌다.
흥남본당의 발자취를 돌아보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구대준(가브리엘) 신부다.
구상(요한 세례자) 시인의 형인 구 신부는 일제 말 사설학원 폐지 압력에도 해성학교를 계속 운영하면서 자신의 사제관 2층에 ‘대건의원’을 설립, 서영옥(마리아 데레사)씨에게 운영을 맡겨 의료 사도직을 활성화했다.
광복 이후엔 날로 가중되는 북한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1948년 5월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흥남분원을 신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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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성당 전경. |
50. 함흥교구 함흥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27년
소재지 옛 지명 : 함경남도 함흥시 지장리
현 지명 : 함경남도 함흥시 양지동
마지막 주임 : 엘리지오 콜러 신부(1939∼1949.5)
평양직할시에 이은 북한 제2의 도시이자 관북 최대 도시, 함경남도의 도청소재지가 함흥이다. 북쪽은 함경산맥이, 서쪽은 낭림산맥으로 둘러싸인 동해 해안가 성천강 유역 45㎞에 달하는 충적평야에 자리를 잡았다.
성천강이 반룡산 서쪽을 거쳐 남쪽으로 흐르면서 시를 동서로 가르는데, 시의 태반이 반룡산 남쪽 기슭에 있다.
붉게 풍화된 적송림이 우거지고, 숲 사이로 옛 성터로 이어지는 고도로,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여서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도 불린다.
함흥에 공소가 설치된 건 1913년 여름에 한 일본인 신자가 원산본당 주임 가스통 프와요(파리외방전교회) 신부에게 성사를 주러 와 달라고 여러 번 요청한 게 시작이었다.
해서 함흥에 성사를 주러 온 프와요 신부는 1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는 걸 확인하고 공소를 설립했다.
1927년 5월 본당으로 승격했고, 초대 주임 플라치도 노이기르크 신부는 한국인과 일본인 거주지 사이 토담으로 둘러싸인 한옥을 사들여 성당으로 쓰면서 선교에 힘썼다.
2대 주임 알렉시오 브란들 신부는 3636㎡ 크기 새 성당 부지를 사들이는 한편 1934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예수성심회를 조직해 신심 운동에 주력했다.
4대 엘리지오 콜러 신부는 1945년에는 일본군에게, 광복 후에는 소련군에게 본당 사제관을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썼지만, 1949년 5월에 체포되면서 함흥본당은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