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 문항에는 논평을 달지 않고 지문추적만 해두었습니다.)
【 『장자』「덕충부」 V-5-1 】
故聖人有所遊, 而知爲孽, 約爲膠, 德爲接, 工爲商. 聖人不謀, 惡用知? 不斲, 惡用膠? 無喪, 惡用德? 不貨, 惡用商? 四者, 天鬻也. 天鬻者, 天食也. 既受食於天, 又惡用人?
본래 성인은 노니는 곳이 있으면서도 지식은 근심거리로 여기고 속박은 끈끈이풀로 여기고 덕은 교류[의 조건으]로 여기고 기교는 장사치의 것으로 여긴다. 성인은 꾀를 부리지 아니하니 어찌 지혜를 쓰겠는가? 쪼개지 아니하니 어찌 끈끈이풀을 쓰겠는가? 잃은 것도 없는데 어찌 덕[을 추구하는 짓]을 쓰겠는가? 재화로 여기지 아니하니 어찌 장사치[의 마음]를 쓰겠는가? 이 네 가지 것들은 천(天)의 양육이다. 천의 양육이란 천이 먹여준다는 뜻이다. 이미 천(天)으로부터 받아먹었다면 또한 어찌 인(人)을 쓰겠는가?
⇒ 문항의 지문 번역은 안동림 번역서를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장자』 원문에서 '노닌다'는 부분은, 주석가에 따라서 성인의 '마음'을 콕 지칭해서 노닐게 한다는 주석도 있지만, 꼭 마음을 특칭하지 않고 그냥 성인 자신이 노닌다고만 푸는 주석도 많습니다. 해석상 의견들이 일치하지 않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특히 무심론적 해석을 취하는 주석의 경우에는 이 기출문항 지문의 번역이 가볍지 않은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노닐게 할 마음 자체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음을 노닐게 한다고 푸는 주석도 있지만, 그럼 벌써 해석상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인 셈입니다. 보다 안전하게 지문을 다듬어주는 편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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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진심 상」 7a-21 】
君子所性, 雖大行不加焉, 雖窮居不損焉, 分定故也. 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군자가 성(性)으로 삼는 것은 [그의 이상이] 크게 행해졌다 할지라도 더 증대될 수 없는 것이요, 빈궁해져서 은거할지라도 더 감소될 수도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분수되어 정해진 것인 까닭이다. 즉 군자가 성으로 삼는 것은 인의예지로, 이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순자』「유효」 8-15·16 】
8-15
人無師法, 則隆性矣, 有師法, 則隆積矣.
사람이 스승과 법도가 없다면 곧 본성을 높일 것이고, 스승과 법도가 있다면 곧 쌓음을 높일 것이다.
8-16
人積耨耕而爲農夫. 積斲削而爲工匠. 積反貨而爲商賈. 積禮義而爲君子.
사람이 김매고 밭가는 일을 쌓아나가면 농부가 되고, 자르고 깎는 일을 쌓아나가면 공인이 되고, 물건 판매하는 일을 쌓아나가면 상인이 되고, 예의를 쌓아나가면 군자가 된다.
⇒ 선지④의 경우 '도덕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좀 억지스러울지는 모르겠으나 가령 '도덕성'을 '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해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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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論』「觀因緣品 (第一)」(十六偈) - 開放古籍平台판『大正新脩大藏經』 No.n1564 (30p1b 부근) 】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戲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問曰: “何故造此論?”
答曰: “… 佛欲斷如是等諸邪見令知佛法故. 先於聲聞法中說十二因緣. 又為已習行有大心堪受深法者. 以大乘法說因緣相. 所謂一切法不生不滅不一不異等. 畢竟空無所有. 如般若波羅蜜中說. …”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상주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이러한 인연(因緣)에 대해 능히 설명해주시고 온갖 우스꽝스러운 헛소리들을 탁월하게 박멸하여 버리시니, 나는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려 예를 갖추겠나이다. 온갖 설법자들 중 으뜸이신 분이시여.”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이 논고를 짓는 것인가?”
답한다: “… 부처님께서는 온갖 사특한 견해들을 끊어내어 버리시고 불법(佛法)을 알아차리게끔 해 주시려는 까닭에 우선 성문의 법 중에서는 십이인연을 설하셨나이다. 이미 행실을 닦아서 위대한 마음을 지녀 심오한 법을 감당해낼 수 있는 분이 되셨지요. 이에 대승법을 가지고서 인연의 상을 설명하셨으니, 그것이 이른바 ‘일체의 법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동일하지도 않고 상이하지도 않다.’ 등을 운운하신 것입니다. 이는 필경 공(空)하여 아무것도 있는 게 없는 것이겠지요. 이는 『반야바라밀』에서 설하신 것과 같나이다: …”
【 『金剛般若波羅密經』 -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본: 장절번호 김용옥本 기준 】
제5분 (전체)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뜻에 있어서 어떠한가? 신체의 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신체의 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나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신체의 상이라는 것은 곧 신체의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여 주신다: “모든 있는 것의 상이란 다 허망한 게로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되나니.”
제10분 (10-5 중)
諸菩薩摩訶薩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无所住而生其心.
뭇 보살과 마하살은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색에 머물면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고,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면서 마음을 내지도 말아야 한다. 머무는 곳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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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朱子全書(修訂本) (14)》『朱子語類 (卷18)』「大學五(或問下)」 "獨其所謂格物致知者一段" (599쪽) 】
窮理者, 因其所已知而及其所未知, 因其所已達而及其所未達. 人之良知, 本所固有. 然不能窮理者, 只是足於已知已達, 而不能窮其未知未達.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이미 아는 바에 기인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바에까지 미치는 것이요, 이미 달통한 바에 기인해서 아직 달통치 못한 바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양지(良知)를 본래부터 고유하게 지니지만, 이치를 궁구하는 일[窮理]에 능하지 못한 놈은 단지 이미 아는 것과 이미 달통한 것을 가지고서 만족할 뿐이고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아직 달통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능히 궁구하질 못한다.
【 《朱子全書(修訂本) (6)》『四書或問』「大學或問下」 (528쪽) 】
曰: 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巳矣.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初不可以内外精粗而論也. 然或不知此心之靈, 而無以存之, 則昏昩雜擾, 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 而無以窮之, 則偏狹固滯, 而無以盡此心之全.
말한다: 사람이 배우는 것이란 마음과 이치일 뿐이다. 마음은 비록 한 몸을 주재하지만, 그 체(體)는 허령하여 족히 천하의 이치를 관장할 수 있다. 이치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서 있지만, 그 용(用)은 미묘하여 실로 한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로다. 처음부터 안과 밖, 정미함과 조잡함을 가지고서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의 영험함[靈]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멍청하게 우매해지고 잡스럽게 요란을 떨게 될 뿐이니 뭇 이치의 묘함을 궁구할 수도 없게 된다. 뭇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궁구하지도 못하면, 편협해지고 완고하게 꽉 막혀서 이 마음의 온전함을 지극하게 할 수 없게 된다.
【 《朱子全書(修訂本) (14)》『朱子語類 (卷18)』「大學五(或問下)」 "然則吾子之意亦可得而悉聞一段" (627~628쪽) 】
問: “『或問』云: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不知用是心之用否?”
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 夫心之體具乎是理, 而理則無所不該, 而無一物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 而用實在心也.”
묻는다: “『혹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비록 한 몸을 주재하지만, 그 체(體)는 허령하여 족히 천하의 이치를 관장할 수 있다. 이치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서 있지만, 그 용(用)은 미묘하여 실로 한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로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말씀하신] 용이라는 게 마음의 용이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답하여] 말한다: “이치는 반드시 용(用)이 있다. 어찌 꼭 이렇게 마음의 용(用)만을 말하려 하는가. 대저 마음의 체는 이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이러한 이치라면 곧 담아내지 못하는 바가 없고 하나의 사물에도 있지 아니한 경우가 없다. 그러나 그 용(用)이란 실로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로다. 이치가 사물에 있더라도 그 용(用)은 실로 마음에 있다는 얘기다.”
첫댓글 아, 문제 8번. 안그래도 주자 책을 찾아보려다가 혹시나 하고 들어와봤는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8번 문제 좀 그러네요. 이제까지 '마음밖에는 이치가 없다.'를 양명으로 가르쳤었는데... 이제 어떻하란 말인지....
흑흑..
선생님 댓글 보고 문항을 다시 살펴보았는데 약간의 보충이 필요할 듯 하여 본글을 다듬었습니다. 혹문과 혹문에 대한 해설을 모두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주희가 "마음 밖에는 이치가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바깥 사물들에 이치가 있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에 이치가 없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즉 외물에도 이치가 있고 내 마음에도 이치가 있다 정도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기출문항 지문의 표현을 다시 살펴보니 고난도를 만들려고 표현상 오해의 소지가 있게끔 구성한 것 같아요. 그러나 제 생각엔 문장에 한정보조사를 넣어서 썼어야지 않나 싶습니다. 가령 "사람의 마음 밖에만 있지는 않다" 정도로.
體와 用의 구분이죠. 주희의 입장은 체로 말하면 마음은 물론 사물에도 있으나, 용으로 말하면 마음에'만' 있다는 것인 듯합니다. 인용된 문장을 보면 그게 주희의 입장인 것 같네요.
문제는, 수험생들 헷갈리게 하기 위해 저런 지문을 제시한 것인데, 이제 학교 현장에서는 체와 용을 구분하면서 理를 설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네요.
아, 그런 것 같네요. 특히 혹문 해설부분을 다시 보니..
다시 보니깐 사상내용의 문제 이전에 국어적인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치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용이 미묘하여 마음 밖에 있지 않다"고 하면, 여기서 "마음 밖에 없다"의 주어가 "이치"로 읽히지 "그 용"으로 읽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이네요. 수험생들이 양명으로 오독하기 쉽도록 만들려다가 되려 주희 원문의 본의와 어긋나게 잘못 구성해버린 오역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본글에 고쳐놓은 제 번역문처럼 "이치는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용은 미묘하여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도로 써줘야 원뜻에 맞을 것 같은데..
그렇네요. 주어가 理가 아니라 用이네요. 그렇다면 이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님 지적대로 8번 제시문에서 '그 用이 미묘하여'라고 함으로써 마치 주어가 理인 것처럼 한 것이 문제되네요. 느닷없이 체용론을 제시문에 제시한 것부터 이미 문제지만, 그나마 제대로 번역하지도 못했네요. 이건 의도적인 것 같지는 않아요. 그냥 원문을 안 봤거나 봤더라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네요. 이거 무슨 고딩도 아니고...ㅎㅎㅎ
@힉스 오늘 알게 된 건데 EBS 윤사 수능완성 12쪽에 저 문장이 그대로 있더군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EBS교재에는 번역이 비교적 괜찮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활용한 출제자가 조금 꼬아보려다 번역을 잘못한 듯 합니다. 그런데 연계교재에 이렇게 나와있는 경우도 교육과정 이탈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다른 얘기인데, 문항을 캡쳐하셨는데,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저는 어도비로 하는 것밖에는 모르는 데다가, 어도비 자체로는 이 게시판에서 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도비(스냅샷)-->아래아한글(붙여넣기)--->이 게시판(붙여넣기) 순서로 했는데, 그러다 보니 번거롭기도 하지만 지저분하더군요. 저렇게 선명하게 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약간의 노가다인데 일단 문항 피디에프 열고서 적당한 배율로 키운 뒤 키보드의 스크린샷 버튼을 누르고 나서 그림판 열어 붙여넣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주변 필요없는 부분들 지우고 다듬은 뒤 올립니다. 지운다는 건 지우개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림판의 작업여백 사이즈를 조정해서 없앱니다. 이게 말로 잘 설명이 안되네요.. 그림판에서 원하는 영역(문항 부분)만 네모커서로 잡아주고서 좌측 상단으로 이동시키면 문항의 왼쪽 윗부분의 필요없는 부분들은 날아가죠. 그럼 맨 아래와 오른쪽의 작업창을 문항 위치까지 줄이면서 나머지 부분들을 잘라내는 거에요
@한삶 ㅎㅎㅎ 되게 복잡하네요. 어도비 '스냅샷'으로 하면 순식간에 되는 거라서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아무튼 알겠습니다.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한테 프린트해서 줄 때에도 어도비 스냅샷으로 하면 흐릿하게 나와서 안 좋은 것도 있고...감사합니다.^^
@한삶 오늘 마음 먹고 이런저런 조작을 해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PDF파일에서 스냅샷(PDF파일 자체 내에 있습니다)으로 복사할 때 배율을 125%, 150%, 200%로 한 후, 이것을 문서에 붙여넣기를 해도 선명하게 나오고(다시 적당히 줄여도), 문서에 붙여넣기를 한 후 이것을 다시 '그림파일로 저장->복사'를 한 후 게시판에 붙여넣기를 해도 선명하게 나오네요. 이런 방식을 알고 계셨는지요? 이렇게 하면 다른 품이 필요없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스냅샷으로 복사할 때 '배율'이었네요.
위 2016년 생윤 16번 문항도 이런 방식으로 하니까 붙여넣기를 한 문항이 선명하게 나옵니다. 아무튼 기쁘네요.ㅎㅎㅎ
@힉스 그래요? 사실 전 평소에 아예 그림판 방식밖에 몰랐거든요. 화질 문제도 해결된다면 그편이 좀더 편리한 방식인 것 같군요. 확인해보고 저도 앞으로는 스냅샷을 써볼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
@한삶 이상하게 그림판으로 조정하는 게 안 돼서(그림판이 뜨지도 않더라고요) 이렇게 저렇게 해봤던 건데, 의외로 간단한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전습록』「답고동교서」 조목133 (정인재 번역서 365쪽)에 주희가 말했던 구절의 일부를 양명이 자기 나름대로 평가하는 대목이 있네요. 재미있는 점은 주희 원본의 '체'와 '용'에 대한 문구가 양명의 인용에서는 삭제된 채로 실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양명은 "이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문장을 고쳐놨어요. 퍽 흥미롭네요. 참고삼아 기록해 둡니다.
출제자가 왜 저렇게 번역해놨는지 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전습록 원문이 이렇게 되어 있네요. 晦庵謂人之所以為學者與理而已:心雖主乎一身,而實管乎天下之理:理雖散在萬事,而實不外乎一人之心。(주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 마음이 비록 한 몸을 주재하지만 실로 천하의 이치를 관장한다. 이치가 비록 만사(萬事)에 흩어져 있지만 실로 한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시문 체용론은 『혹문』에 나온 대로 살렸으면서,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명이 변형해서 인용한 것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온갖 일'이라는 번역어를 왜 썼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한삶 아니면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시 평가원 게시판에 올라간 이의제기 게시물에선 '온갖 일'에 해당하는 원문의 주어가 '萬物'이었다고 지적됐는데, 그것이 사실 정확한 지적이죠. 그런데 아마 그 글을 본 출제자는 자기가 전습록에 나온 주희의 글을 재인용했기 때문에 주어가 '萬事'일 거라고 믿고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체용론은 어떻게 해서 들어간 것이냐를 생각해보면 수능완성 12쪽 자료에 한글번역으로 관련 자료가 있고 전습록도 마침 한글번역서가 있으니까, 읽기 어려운 백화문체의 주자어류는 굳이 안봐도 양명이 알아서 인용 잘 해놨겠지 싶어서 적당히 혼합해 섞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물론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2.30 03:25
* 임시 공지
그동안 올렸던 제 글엔 몇몇 평가원 수능/모평 기출문항 지문들의 출처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 중 불교문헌은 대부분 『대정신수대장경』에서 찾은 것인데, 며칠 전 대장경을 뒤지다가 각 문헌 이름에 해당하는 대정장 번호를 그동안 잘못 파악하여 기록해 왔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언제 날잡고 일일이 대조해서 점검해야 할텐데,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포스트를 참고하는 분들이 혹시 계시다면 문헌 이름까지는 참고하셔도 되는데 대정장 번호는 일단 무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한문 원문을 같이 실어놓았으니 해독할 수 있는 분들은 쉽게 대장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