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28 선교분과 인자하신 동정녀 꾸리아에서 야외행사로 충남 아산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 신리 성지를 다녀왔습니다.
며칠 전부터 날씨가 계속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걱정도 많이 하고 제발 출발하는 날이라도 맑은 날씨이기를 간절히 바랐
지만 역시나 일기예보 하기를 하루종일 비가 많이 올 지 모르니 우산을 준비하고 강풍에 조심하라고 합니다. 모든 근심 걱정
을 성당에 계신 성모님과 예수님께 모두 맡기고 드디어 주임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공세리 성지로 출발하였습니다.
공세리 성지는 성당에서 출발하여 수원, 발안, 아산만을 지나면 충청남도 아신시 인주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이 분들 말고도 일곱 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백년이 지난 공세리 성지에서 우리들은 선조들의 순교는 한 개인의 죽음, 가령 병들어 죽은 죽음과는 다른 것임을 알았고
그들의 죽음은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죽음이다. 순교자는 박해로 일시 역사의 암흑 속에 묻힌다 해도 반드시
언젠가는 찬란한 광채로 드러난다.
신리 성지는 조선 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도마, 1866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불뤼 안토니오 주교(1866년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
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신리 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도 그대로 보존 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
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 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곳의 성지를 다녀 온 우리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시고 하느님을 증거하신 선조들의 삶속에서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우리는 그 분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의 삶 안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잘 지고가는 이 시대의 순교정신으로 보답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첫댓글 정리한 글 솜씨가 교육분과 전문위원같군요. 교리교사 또는 홍보실 요원으로 후보로 추천해야겠어요. 정리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궂은 날씨에도 좋은 성지순례가 된 것 같습니다 신앙선조들께서는 날이 궂으나 맑으나 상관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는 삶을 사시다가 순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너무 호사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분들의 넋을 이어받아 신앙의 후손으로서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수고들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