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르트만1세
1398년 12월, 샤티용의 벌판에서 호전왕 헤리베르트1세가 아즈텍의 후에틀라토아니 치말리에게 죽었다. 부고가 튀빙겐에 이른 것은 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차남 하르트만이 그때 스물다섯이었다. 사자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선왕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나이다, 하였다. 하르트만이 물었다.
"군사는 얼마나 돌아왔는가."
사자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하르트만이 다시 물었다.
"상여는 무엇으로 채우겠는가."
좌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 하르트만이 이르되, "비워 두라. 비어 있는 것을 채우려 하면 거짓이 들어간다" 하였다. 이것이 그가 왕이 되어 처음으로 내린 명이었다.
하르트만은 형 카를만이 열일곱에 병사한 뒤로 후계자가 된 사람이다. 어려서 뛰어난 전략가라 일컬어졌으니, 열여섯에 이미 노장들과 더불어 진법을 논하여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살이 날아오는 곳에 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겁이 많다 하였다. 야심이 크고 재물을 탐하였으며, 공정하다는 말과 오만하다는 말을 함께 들었다. 이 여섯 가지가 한 사람 안에 있었으니, 그를 아는 자들은 그가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였다.
세례반 앞에서
즉위한 그달에 하르트만이 아내 헬레네를 불렀다. 헬레네는 동로마의 바실리사 크리소고네 두카스의 외동딸이요, 그 아버지 레오폴트 에티코넨은 마귀에게 홀린 뒤로 칼라트라바 기사단에 몸을 던져 다시는 자식을 두지 못한 사람이었다. 헬레네는 그리스의 예법으로 자라 그리스의 기도를 올리는 여인이었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그대는 이제 슈바벤의 왕비요" 하였다.
헬레네가 대답하되, "저는 로마의 딸입니다" 하였다.
"로마의 딸이 슈바벤의 왕비가 되었으니, 슈바벤의 법을 따라야 하오."
"제 어머니께서 아시면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하르트만이 이르되, "장모께서는 그대가 무엇을 믿는지 묻지 않으실 것이오. 그대의 아들이 무엇을 물려받는지 물으실 것이오" 하였다.
헬레네가 오래 서 있다가 물러갔다. 그해가 가기 전에 그녀는 라틴의 예법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삼십 년 동안 그녀는 자기 뜻으로 무엇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물려받은 것과 물려준 것만이 기록에 남았으니, 이 연대기의 마지막 장이 그것으로 끝난다.
블리싱겐
1399년 7월, 하르트만이 폴란드 왕 마슬라프3세 프로차스카에게 말레 백작령의 정당한 소유권을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이듬해 정월, 블리싱겐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적이 아군보다 많았다. 장수들이 물러서기를 청하니 하르트만이 지도를 짚으며 이르되, "많은 것은 세어 보아야 알고 적은 것은 세지 않아도 안다. 저들은 지금 우리를 세고 있다" 하였다.
"그것이 어떠하옵니까."
"세는 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날 밤 슈바벤군이 늪을 건너 적의 좌익을 쳤다. 적은 아직 세고 있었다. 열세를 뒤엎고 이긴 것이 이 싸움이었다. 이듬해 2월 말레가 온전히 함락되었다.
1402년 8월, 전쟁이 끝났다. 하르트만이 말레 백작령을 빼앗은 상대는 폴란드 왕 콘라트 프로차스카와 그 수하인 마조비아공 아담 에티코넨이었다. 아담은 하르트만과 피를 나눈 일족이요, 신실하다는 이름을 들은 사람이었다.이듬해 8월, 아담이 우울증으로 죽었다.
사관이 적기를, 말레는 백작령 하나였고 아담은 사람 하나였다, 하였다.
창과 화살
같은 해 4월, 하르트만이 제국의 토너먼트에 나갔다.
첫 겨루기에서 그가 말에서 떨어졌다. 좌우가 부축하려 하니 그가 손을 저어 물리고 스스로 일어나 다시 말에 올랐다. 그날 그는 세 번 창을 들었다. 사람들이 놀라 이르되, 저이가 겁이 많다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밤에 시종 하나가 감히 여쭈었다.
"폐하께서는 싸움터에서 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 계셨습니다. 오늘은 어찌하여 그러셨습니까."
하르트만이 이르되, "화살은 나를 겨눈다. 창은 나와 겨룬다. 나는 겨루어지는 것이 두렵지 아니하고 겨누어지는 것이 두렵다" 하였다.
그해 8월, 사람들이 비로소 그를 용감하다 일컬었다.
9월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 에티코넨이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1410년 9월에 다시 그 자리에 임명하였으니, 제국의 칼이 두 번 그의 손에 쥐여진 셈이었다.
그러나 1413년 9월, 사람들은 다시 그를 용감하다 부르지 않았다. 열한 해 동안 빌려 입은 이름이었다.
씨앗과 추수
1405년 10월, 흘로어기어 십자군이 성공하여 아즈텍 제국으로부터 흘로어기어의 땅을 되찾았다.
이 십자군은 1396년에 일어난 것이다. 선왕 헤리베르트1세가 그 첫해에 출진하였고, 1397년 6월에 출진한 슈바벤군이 전멸하였으며, 이듬해 겨울에 왕 자신이 죽었다. 하르트만은 이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승전 소식이 튀빙겐에 이르자 하르트만이 미사를 명하였다. 사제가 축문을 올리며 이르되, "선왕께서 뿌리신 씨앗이 오늘 열매를 맺었나이다" 하였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씨앗을 뿌린 자는 추수를 보지 못한다" 하였다.
사제가 아뢰되, "그러하오나 추수하는 자는 씨앗을 기억하나이다" 하니, 하르트만이 잠시 말이 없다가 이르되, "기억하는 것은 값이 들지 않는다" 하고 물러갔다.
남에게 준 땅
1405년 11월, 하르트만이 피사공화국의 세레네 도제 아달베르토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자기 것이 아니라 휘하 알베리히 폰 글로가우의 피옴비노 백작령 소유권이었다.
1406년 4월 미란돌라에서 적을 거의 다 죽이고 도제의 장남을 사로잡으니 싸움이 판가름 났다. 1407년 3월, 피옴비노 백작령은 알베리히에게 돌아갔다.
1408년 7월, 프랑스 왕 부샤2세가 아키텐과 싸우는 틈을 타 멜길 백작령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이 또한 자기 것이 아니라 휘하 슈타이어마르크백 볼프람의 것이었다.
1413년 10월에 이겨 멜길은 볼프람에게 돌아갔다.
재무관이 감히 여쭈었다.
"폐하께서 피를 흘려 얻으신 땅을 어찌 남에게 주십니까."
하르트만이 이르되, "내가 준 것이 아니다. 그들의 것을 찾아 준 것이다" 하였다.
"찾아 주신 값은 무엇이옵니까."
"찾아 준 자에게는 찾은 자가 갚는다. 땅은 한 번 주면 그만이나 빚은 대대로 남는다."
재위 이십 년 동안 그가 벌인 큰 싸움이 여섯이요 여섯을 다 이겼으되, 제 손에 남긴 땅은 말레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다섯은 모두 남의 손으로 갔다. 그리하여 슈바벤의 봉신들 가운데 그에게 빚지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이름 없는 여인들
1405년 9월, 에르멘가르트라는 여인이 궁정에 들었다. 사료는 그 여인의 가문을 적지 않았다.
1406년 6월에 딸이 태어나 어미의 이름을 받았다. 하르트만은 그 아이를 제 자식이라 인정하되 사생아로만 인정하였다. 이듬해 정월, 그 아이는 마우레타니아의 술탄 힐랄 알제키라시드와 약혼하였다. 젖도 떼기 전이었다.
1412년 8월에 또 딸이 나니 이름을 베네딕타라 하였다. 이 아이 또한 사생아로 인정되었고, 훗날 일칸국의 카간 부칸에게 시집갔다.
사관이 적기를, 왕이 사사로이 얻은 딸 둘이 각각 바다 건너 이교의 왕에게 갔으니, 왕은 자기가 인정하지 않은 자식들로도 나라의 울타리를 쳤다, 하였다.
제국법
1411년 9월 4일, 동로마의 바실리사 크리소고네 두카스가 죽었다. 그 외동딸 헬레네가 바실리사와 카이제린을 이어받았다.
소식이 이른 날 저녁, 헬레네가 남편 앞에 나아가 이르되,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였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그대의 어머니께서 그대에게 제국을 남기셨소" 하였다.
헬레네가 이르되, "제게 남기신 것이 아니라 제 아들에게 남기신 것이겠지요" 하였다.
하르트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서기가 제국법의 조문을 들고 왔다. 제국의 영토가 제국 밖의 나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다. 장남 헤리베르트가 동로마를 물려받으면, 슈바벤 왕국은 그에게 갈 수 없었다. 슈바벤은 사촌이자 마조비아공의 후계자인 아르놀트에게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다시 읽으라" 하였다.
서기가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라."
서기가 세 번째로 읽으니, 하르트만이 문서를 덮고 이르되, "그러면 나는 무엇을 위하여 열네 해를 싸웠는가" 하였다.
좌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날 후계자가 바뀌었다.
딸을 들어 아내를 치다
1413년 11월, 하르트만이 뷔르템베르크백 프레데리 드 포레즈에게 백작령을 내놓으라 명하였다. 프레데리가 거절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414년 정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 에티코넨이 동로마의 바실리사 헬레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하르트만의 차녀 엠마가 가진 동로마의 소유권이었다. 엠마는 그때 열한 살이었다. 곧 황제는 하르트만의 딸을 들어 하르트만의 아내를 친 것이다.
하르트만은 그때 제 땅의 반란을 누르는 중이어서 군사를 낼 수 없었다.
같은 달, 그가 헬레네에게 칠백칠십사 두캇을 보냈다. 전시에 그가 한 달에 거두는 것이 스물두 두캇이요 평시에도 쉰 두캇을 넘지 않았으니, 서른 달을 꼬박 거두어야 나오는 돈이었다.
재무관이 놀라 아뢰되, "폐하, 이는 곳간을 비우는 일이옵니다" 하였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황제가 내 딸의 이름을 빌려 내 아내를 친다" 하였다.
"그러하오나 지금은 우리도 전시이옵니다."
"나는 지금 군사를 낼 수 없다. 낼 수 없는 것을 대신하여 보낸다."
재물을 탐한다는 말을 평생 들은 사람이었다. 그가 한 번에 내놓은 가장 큰 재물이 그것이었고, 받은 이는 아내였다.
필센
1414년 5월, 스투트가르트가 무너졌다.
그해 7월, 필센에서 일만 일천이 삼천 칠백과 부딪쳤다. 슈바벤에서 쓰러진 자가 삼백이요 저편에서 쓰러진 자가 삼천 일백이었다. 중군은 프리슬란트백 필리베르트 폰 포름바흐가 맡고, 좌익은 콘라트가, 우익은 시에나와 피옴비노를 겹쳐 가진 알베리히가 맡았다. 필리베르트는 아내로 에티코넨의 딸을 맞은 사람이다.
왕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사관은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적지 않았다.
같은 달 뷔르템베르크 회수 전쟁이 끝나고 프레데리가 백작령을 잃었다.
일곱 달
1414년 8월, 하르트만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독립이었다.
서기가 제국법의 조문을 세 번 읽어 준 날로부터 두 해 넉 달이 지나 있었고, 황제가 그의 아내를 친 날로부터는 일곱 달이 지나 있었다.
늙은 신하가 감히 여쭈었다.
"폐하, 어찌하여 이제야 하시나이까."
하르트만이 이르되, "정월에는 뷔르템베르크가 남아 있었고, 그 뒤로는 필센이 남아 있었다" 하였다.
"이제는 어떠하옵니까."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자가 떠나기 전에 하르트만이 일렀다.
"황제께 아뢰라. 신이 폐하의 대장군으로 두 번 임명받았음을 잊지 않았다고. 그러나 신에게는 아들이 있고, 아들에게는 물려줄 것이 있다고. 제국의 법이 그 사이를 막는다면, 신은 법을 고칠 힘이 없으니 제국을 나가겠다고."
사자가 아뢰되, "폐하, 황제께서 무어라 답하시겠나이까" 하니, 하르트만이 이르되, "내가 답을 들으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바실리사 헬레네가 남편 편으로 참전하였다. 열여섯 해 전 세례반 앞에서 침묵하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미 일곱 달째 제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으되, 이번에는 남편의 전쟁에 따로 군사를 내었다.
봄에 죽은 두 사람
1415년 3월, 장남 헤리베르트가 두카스 가문의 방계인 리첸다 두카스와 혼인하였다. 잔치는 검소하였다. 아내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였다.
같은 달, 두 사람이 죽었다. 하나는 쿠노2세요 하나는 튀링겐공 에멜리히4세 폰 글로가우였다. 사료는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적지 않았다. 다만 그 무렵 왕의 사람들이 튀링겐에 다녀왔다고만 적었다.
사람들은 하르트만을 공정하다 일컬었다. 그가 봉신의 몫을 빼앗지 않고 오히려 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봄 이후로, 왕이 찾아 주지 않기로 한 자는 무엇을 잃는지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상대가 바뀌다
1416년 2월, 한 달에 두 번 싸웠다. 주마르쇼센에서는 크게 이겼고, 라반트에서는 삼만이 이만과 부딪쳐 겨우 이겼다.
그해 7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 에티코넨이 승하하고, 그 늦둥이 장남 아르놀트2세 에티코넨이 제위를 이었다. 나이 열아홉이었다.
하르트만이 절연을 고한 황제는 이미 세상에 없었고, 그가 싸우는 상대는 소년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은 그대로였으나 상대는 그대로가 아니었다. 사관이 적기를, 왕이 미워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었으므로 사람이 바뀌어도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하였다.
그해 12월, 헤리베르트와 리첸다 사이에 아들이 났다. 이름을 헤리베르트라 하였다.
하르트만이 갓난것을 받아 안고 오래 들여다보다가 이르되, "이 아이가 무엇을 받을지는 내가 정한다" 하였다.
곁에 있던 늙은 시녀가 낮게 이르되, "받는 것은 아이들이 정하지 않고, 주는 것도 어른들이 정하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도 꾸짖지 않았다.
취리히
1417년 정월, 취리히에서 칠천 팔백이 오천 삼백과 부딪쳤다. 슈바벤에서 쓰러진 자가 천 팔백이요 저편에서 쓰러진 자가 사천이었다.
이 싸움에서 중군을 맡은 것은 하르트만이었다. 좌익은 콘라트요 우익은 에른스트였다.
즉위한 지 열여덟 해 동안 그는 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필센에서도 그 자리에 없었다. 취리히에서 그가 처음으로 한가운데 섰다.
싸움이 끝난 뒤 늙은 장수가 아뢰되, "폐하께서 오늘 중군에 서신 일을 군사들이 오래 말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하르트만이 이르되, "오래 말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오래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겼으니 나가야 한다
1417년 10월, 왕이 우르술라라는 여인과 사통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1417년 11월, 독립전쟁의 승점이 백에 이르렀다. 두 해 석 달 만이었다. 황제에게 조건을 전할 사자가 채비를 갖추었다.
12월, 다시 회전이 벌어졌다.
그 전날 밤, 대장군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폐하, 이미 이기셨나이다. 물러나 계시옵소서."
하르트만이 이르되, "이겼으니 나가야 한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옵니까."
"내가 나가지 않으면 저들은 내가 이긴 줄을 모른다."
이튿날 그는 다시 한가운데 섰다. 취리히에서 그리한 지 열한 달 만이었다.
열아홉에 즉위한 황제 아르놀트2세의 군중에서 그가 죽었다. 나이 마흔넷, 재위 열아홉 해였다.
왕이 죽자 독립전쟁은 무효가 되었다. 두 해 석 달 동안 얻은 승점 백은 종이 위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제국의 법에는 조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반란이 끝나지 않은 채 주인이 죽은 경우, 상속의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장남 헤리베르트가 스무 살에 슈바벤 왕국과 그 부속령을 온전히 이어받았다.
사관이 적기를, 그가 두 해를 싸워 얻은 것은 무효가 되었고 그가 하루에 죽어 얻은 것은 유효가 되었다, 하였다. 제국의 법은 산 자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죽은 자의 반란은 인정하였다.
헤리베르트2세
1417년 12월, 헤리베르트2세가 스무 살에 즉위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재주가 뛰어난 협상가라 하였다. 자비롭고 검소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노여움이 한번 일면 걷잡지 못하였고, 남을 속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오만하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즉위한 그달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을 내리는 것이었다. 오래 슈바벤을 위하여 싸운 명장 에리히 폰 몬테풀키아노에게 슈비츠 백작령과 마구간 관리인의 자리를 주었다.
에리히가 사양하며 아뢰되, "신은 선왕을 지키지 못하였나이다" 하였다.
헤리베르트2세가 이르되, "지키지 못한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은 자에게 주는 것이다" 하였다.
나누어 준 것들
1418년 6월, 왕이 할머니 도피네공 게르트루트 드 포레즈로부터 도피네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같은 달, 영지를 정리한다 하여 루카백 페르디난트 폰 슐레지엔-글로가우에게 토스카나 공작령을 내주었다. 후폴트 폰 엥겔베르크에게는 시식시종의 자리를 주었다.
늙은 신하가 아뢰되, "토스카나는 선선대로부터 내려온 땅이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되, "선왕께서는 여섯 번 싸워 여섯 번 이기고도 손에 하나만 남기셨다. 나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둘을 얻어 하나를 준다. 어느 쪽이 남는 장사인가" 하였다.
신하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 위의 그릇
왕의 상에는 그릇이 셋을 넘지 않았다. 선왕 시절 궁의 상에는 열둘이었다.
어느 잔치에서 봉신 하나가 술이 올라 이르되, "폐하께서 잡숫는 것이 신의 집사보다 못하옵니다" 하였다.
왕이 그릇을 집어 던졌다. 그릇이 벽에 부딪혀 깨졌다. 좌우가 얼어붙었다.
왕이 한참 만에 이르되, "그릇 하나가 깨졌으니 이제 둘이다" 하고는 남은 것으로 마저 먹었다. 그 봉신은 이튿날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제 영지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이름
1418년 7월, 궁 밖에서 사내아이 하나가 났다. 선왕 하르트만1세와 우르술라 사이의 자식이었다. 아비가 죽은 지 일곱 달 만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하르트만이라 하였다.
신하들이 처분을 여쭈니 왕이 이르되, "아버지의 이름을 가진 아이다" 하였다.
"그러하오나 폐하."
"이름을 지운다고 아버지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해 8월, 왕이 사생아 누이 베네딕타를 일칸국의 카간 부칸과 약혼시키고,
친누이 게르트루트를 하로트링겐공 피터 에티코넨에게 모계혼으로 시집보냈다.
이태 뒤 정월에는 누이 엠마를 일칸국의 황자 예수게이 톨루이드와 약혼시켰다. 황제가 그 이름을 빌려 어미를 쳤던 바로 그 딸이다. 왕이 칼을 쓰지 않고 사람을 옮기는 법이 이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소식
1419년 3월, 동로마의 바실리사 헬레네가 두카스 가문의 드미트리오스와 모계혼으로 재혼하였다. 왕의 어머니였다.
소식이 이른 자리에서 신하 하나가 축하의 말씀을 올리려 하였다. 왕이 잔을 들어 다 비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흘 뒤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축하 사절을 보냈다. 사절이 가져간 예물은 검소하였다.
첫째 후계자
1419년 4월, 왕이 프랑스 왕 부샤2세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부르고뉴백이자 트로이스백인 지크프리트 에티코넨의 라임스 백작령 소유권이었다. 이듬해 8월에 조건 없이 화친하였다. 아무것도 얻지 않고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1419년 7월, 제위계승의 서열이 바뀌어 슈바벤왕 헤리베르트2세가 첫째가 되었다.
재상이 아뢰되, "폐하, 경하드리옵나이다. 이제 폐하께서 제국의 첫째 후계자이시옵니다" 하였다.
왕이 오래 말이 없다가 이르되, "선친께서는 이 제국에서 나가시려고 두 해를 싸우셨다" 하였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제국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왕이 웃었다. 좌우가 그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한 달
1420년 2월, 상로트링겐공 루트비히 폰 말레가 황권을 낮추자며 제국의 네 번째 내전을 일으켰다. 왕은 파벌에 속해 있었으므로 저절로 루트비히 편에 서게 되었다. 이듬해 정월에 조건 없는 화친으로 끝났다. 얻은 것이 없었다.
1421년 8월, 왕이 오세르백 알브레히트 에티코넨을 말로 달래어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군사 한 명도 쓰지 않았다.
같은 달, 왕이 황제 아르놀트2세에게 황권을 낮출 것을 요구하였다. 사자가 떠나기 전에 왕이 일렀다.
"황제께 아뢰라. 짐의 아비는 이 제국을 나가려다 죽었으나, 짐은 이 제국을 낮추려 한다고. 나가는 것보다 낮추는 것이 쉽다고."
황제가 거절하니 다섯 번째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같은 달에 황제가 스스로 항복을 선언하고 황권을 제한하는 데 동의하였다. 왕이 이를 받아들여 내전이 끝났다.
황제는 열아홉에 즉위하여 스물넷에 굴복하였다. 그가 굴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같은 요구를 위하여 하르트만1세가 쓴 것은 두 해 석 달과 제 목숨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자
1421년 8월, 왕이 작센공 로타르 빌룽에게 뤼네부르크 백작령의 소유권을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황제를 굴복시킨 바로 그달이었다.
신하가 만류하여 아뢰되, "폐하께서는 말씀으로 황제를 굴복시키셨나이다. 어찌 칼을 드시나이까" 하였다.
왕이 이르되, "말로 얻는 것은 말을 들을 줄 아는 자에게서만 얻는다" 하였다.
"작센공은 어떠하옵니까."
"작센공은 듣지 않는다."
1422년 3월, 왕이 작센공과 싸우던 중 머리에 타격을 입고 자리에 누웠다. 그 뒤로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고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아비의 빚
1422년 5월, 대모라비아왕 아르놀트1세 에티코넨이 슈바벤 왕위를 명분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이 사람은 하르트만1세 시절, 제국법에 따라 헤리베르트를 대신하여 슈바벤을 물려받게 되어 있던 바로 그 사촌이다. 하르트만1세가 독립전쟁을 일으켜 그 몫을 없앴으니, 이제 그가 값을 청구하러 온 것이었다.
사자가 서한을 들고 침전에 들었다. 왕은 누워 있었다. 사자가 서한을 다 읽고 답을 기다렸다.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사자를 물렸다. 사자는 뜰에서 사흘을 기다렸다.
사흘째 되는 날 왕이 숨을 거두었다. 나이 스물다섯, 재위 사 년 다섯 달이었다.
말로써 황제를 무릎 꿇린 사람이었으나, 마지막에 온 서한에는 한 마디도 답하지 못하였다.
그의 장남 헤리베르트가 다섯 살에 왕위를 이었다.
헤리베르트3세
1422년 5월, 헤리베르트3세가 다섯 살에 즉위하였다.
티롤백 에기놀프 폰 티롤이 섭정이 되었다. 그가 아이를 안아 올려 자리에 앉히니, 아이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아이가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에기놀프가 이르되, "전하께서 앉으신 자리에 계시옵니다" 하였다.
이길 수 있으나
즉위한 그달에 섭정이 작센공 로타르 빌룽과 조건 없이 화친하였다. 그때 슈바벤군의 형세가 유리하였다.
장수들이 반대하여 아뢰되, "이길 수 있사옵니다" 하였다.
에기놀프가 이르되,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기는 동안 전하께서는 다섯 살이시다" 하였다.
장수들이 물러갔다. 뤼네부르크는 얻지 못하였고, 슈바벤은 두 전쟁을 한꺼번에 치르지 않게 되었다.
저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대모라비아왕 아르놀트1세와의 전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422년 8월, 라우터부르크에서 크게 이겼다.
그해 9월과 10월, 촐레른과 카를스루에에서 잇달아 크게 이겼다. 중군은 프리슬란트백 필리베르트 폰 포름바흐가 맡았다.
1423년 정월, 다시 취리히에서 싸움이 있었다. 만 명이 칠천과 부딪쳐 크게 이겼으니, 슈바벤에서 쓰러진 자가 이천 오백이요 저편에서 쓰러진 자가 오천 오백이었다. 이번에도 중군은 필리베르트였다.
여섯 해 전 같은 자리에서 중군에 섰던 이는 그해 겨울에 죽은 왕이었다. 이번에는 남이 그 자리에 섰고, 왕은 여섯 살이었다.
그해 7월, 켐프턴백 아달베르트 폰 파르힘이 뒤를 이을 자식 없이 죽어 백작령이 왕에게 돌아왔다. 섭정이 그것을 공을 세운 에른스트 폰 랑그레스에게 주었다. 왕의 손에 들어온 것이 왕의 손에 머문 시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1425년 3월, 전쟁이 끝났다. 아르놀트1세가 배상금을 물고 슈바벤 왕국령에 대한 소유권을 스스로 거두었다.
왕은 그때 여덟 살이었다. 다섯 살에 맞은 전쟁을 여덟 살에 이긴 것이다.
승전을 아뢰는 자리에서 왕이 물었다.
"우리가 이겼습니까."
"그러하옵니다."
"저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에기놀프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왕관에서 군사로
1425년 6월, 아르놀트1세가 슈바벤에 사자를 보내어 마조비아의 반란을 진압할 군사를 청하였다. 석 달 전까지 왕의 왕관을 빼앗으려던 자였다.
왕이 물었다.
"저자가 제 왕관을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달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이제 군사를 달라 합니까."
"그러하옵니다."
"주어야 합니까."
에기놀프가 이르되, "주셔야 하옵니다. 달라 하는 것이 왕관에서 군사로 바뀌었으면, 그것이 이긴 것이옵니다" 하였다.
슈바벤군이 모라비아로 갔다. 1427년 2월에 반란이 평정되었다. 이듬해 3월에 아르놀트1세가 또 청하니 왕이 또 군사를 보냈다. 그 사이 여섯 해 동안 슈바벤의 창은 한 번도 저를 위하여 쓰이지 않았다.
홀로 남다
1425년 12월, 전공을 세운 라인하르트 폰 부이용에게 퓌르스텐베르크 백작령을 주었다. 상을 내리는 문서에는 왕의 이름이 적혔으나 손은 섭정의 것이었다.
이 무렵 왕의 고모들이 차례로 시집갔다. 사생아 고모 에르멘가르트가 마우레타니아의 술탄에게 간 것이 1422년이니, 젖도 떼기 전에 맺은 약속이 열여섯 해 만에 지켜진 것이다. 조부가 딸들로 쳐 두었던 울타리가 그제야 다 세워졌다.
1426년 2월에 시리아를 향한 지하드가 일어났고, 그해 12월에는 필리베르트 폰 글로가우가 벤첼 폰 글로가우에게서 플란더렌 공작위를 빼앗아 필리베르트2세라 칭하였다. 두 사람 다 어미가 에티코넨의 딸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1427년 정월, 에기놀프 폰 티롤이 병으로 쓰러져 말을 잃었다. 오 년 동안 소년을 지킨 사람이었다. 위버링겐의 티에트마르 주교가 뒤를 이어 섭정이 되었다.
이듬달, 어머니 리첸다 두카스가 조지아의 왕자 아쇼트 바그라티오니와 모계혼으로 약혼하였다.
할머니는 콘스탄티노플에 있었고, 어머니는 동방으로 갈 채비를 하였으며, 아버지는 무덤에 있었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를 안아 올리던 사람은 말을 잃었다. 왕은 그때 열 살이었다.
1428년 정월에는 피옴비노에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조부가 남에게 찾아 준 땅이었다.
1428년 8월
1428년 8월, 동로마의 바실리사 헬레네 에티코넨으로부터 제국이 그 손자에게 넘어왔다. 슈바벤왕 헤리베르트3세가 바실레우스이자 카이저가 되었다.
동로마의 법은 아들을 먼저 세우고 아들이 없으면 딸을 세운다. 바실리사 크리소고네에게는 아들 만프레트와 딸 헬레네가 있었으니, 본디 제국은 만프레트의 것이었다. 그러나 사십오 년 전, 호전왕 헤리베르트1세가 두 번 사람을 보내어 마침내 만프레트를 죽였다. 그리하여 홀로 남은 헬레네가 제국을 받았고, 헬레네는 하르트만1세에게 시집와 헤리베르트2세를 낳았으며, 헤리베르트2세는 리첸다에게서 헤리베르트3세를 얻었다.
바실리사 헬레네께서는 그해 8월 초하루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눈을 감으셨다. 향년 쉰이었다.
그러나 슈바벤에는 제관이 왔다는 소식이 먼저 이르고 그분이 가셨다는 소식이 뒤에 이르렀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아무도 그 순서를 헤아리지 못하였고, 나 또한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사람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날짜를 받아 적을 수 있었다. 슈바벤이 환호하던 그 여름에, 그 환호의 값을 치른 분은 이미 관 속에 계셨던 것이다.
세례반 앞에서 침묵하였던 여인이 서른 해 뒤에 그렇게 갔다.
사자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 티에트마르 주교가 소년을 데려와 이르되, "전하께서는 이제 로마의 황제이시옵니다" 하였다.
소년이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주교가 이르되,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나이다"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게 옵니까."
주교가 이르되,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는 것이옵니다. 하시려 한 분들은 모두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나이다" 하였다.
왕의 나이 열한 살이었다.
붓을 들다
그 소식이 슈바벤에 이른 것은 그해 여름이 다 가기 전이었다.
나는 그때 이 수도원의 서고에 있었다. 종이 울리고 형제들이 뜰로 뛰어나가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성벽 위에서 연기 기둥을 바라보시던 일이 떠올랐고, 아버지가 칼을 차고 나가시던 문간이 떠올랐다. 그 전쟁들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헤아려 보았다.
노르트가우의 작은 백작 게르하르트가 그 이름을 처음 기록에 남긴 해로부터 삼백육십이 해가 지나 있었다. 그 사이에 열일곱 사람이 이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가 갔다. 어떤 이는 감옥에서 죽었고 어떤 이는 문둥병으로 죽었으며, 어떤 이는 형제를 죽이고 어떤 이는 형제에게 죽었다. 그리고 이제 열한 살 아이 하나가 콘스탄티노플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와 형제들이 사료를 모으기 시작한 지 다섯 해가 되어 있었다. 궁정의 연대기와 교회의 기록, 상인들의 장부와 늙은 기사들의 기억까지 궤에 담기고도 남았으나, 나는 그것들을 꺼내어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을 위하여 모으는지 스스로 대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나는 서고의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브라더 베르톨드를 불렀다. 그가 등불을 들고 들어와 물었다.
"원장님, 무엇을 시작하시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처음부터."
그리하여 나는 붓을 들었다.
논찬(論贊)
수도원장이 평하기를,
세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였으나 치른 값이 저마다 달랐다.
하르트만1세는 두 해 석 달과 제 목숨을 치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헤리베르트2세는 한 달과 말 몇 마디로 황제를 무릎 꿇렸으나 스물다섯에 말을 잃고 죽었다.
헤리베르트3세는 아무것도 치르지 않고 로마의 제관을 받았다.
전도자가 이르되, 빠른 자에게 경주가 있지 아니하며 용사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한다.
법이라는 것을 보라. 제국의 법은 하르트만1세가 살아서 세운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죽어서 남긴 반란은 인정하였다.
법은 그를 미워한 것도 그 아들을 사랑한 것도 아니다. 다만 조문일 뿐이어서 사람의 정성을 헤아리지 않는다.
보에티우스가 옥중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보았다 하였는데, 바퀴는 사람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되 사람이 바퀴를 돌린 일은 없다.
키케로는 스키피오가 꿈에 하늘로 올라 지상의 제국을 내려다보니 한 점에 지나지 않더라고 적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관 또한 그 점 위에 놓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가문의 세 대가 그것을 위하여 목숨과 말과 어린 시절을 바쳤다.
복된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두 나라를 나누어 이르시되,
하나는 스스로를 사랑하여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데까지 이른다 하셨다.
그분이 플라톤에게서 배웠다 하신 대로 참으로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여기 적은 것은 보이는 것들의 소란일 뿐이다.
키케로가 또 이르기를, 불의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남을 해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해침을 당하는 자를 지켜 주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하르트만1세는 봉신의 몫을 여섯 번 찾아 주어 공정하다는 이름을 얻었으되, 어느 봄에 두 사람이 죽고 사료는 그 까닭을 적지 않았다.
한 사람 안에 지키는 손과 해치는 손이 함께 있었으니, 나는 그를 의롭다 하지 못하겠고 악하다 하지도 못하겠다.
이 상속의 뿌리도 잊지 않으려 한다.
동로마의 제관이 헬레네에게 온 것은 그 오라비 만프레트가 죽었기 때문이며,
만프레트가 죽은 것은 호전왕이 두 번 사람을 보냈기 때문이다.
열한 살 아이가 쓸 제관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손을 거쳐 왔고, 그 손들 가운데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아비는 제국을 나가려 하였고 아들은 제국을 낮추려 하였다.
나가려던 자는 두 해를 싸우고 종이 위에서 지워졌고, 낮추려던 자는 한 달에 뜻을 이루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자는 성벽 전체와 싸워야 하나, 안에서 낮추려는 자는 문 하나만 열면 된다.
이 땅의 제후들이 오늘 누리는 몫 가운데 적지 않은 것이 그 한 달에서 나왔다.
앞 권에서 나는 왕관을 썼으되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던 두 왕을 적었다.
이 권에서는 자유를 얻으려다 죽은 아비와, 얻고도 말을 잃은 아들과, 애씀 없이 자유보다 큰 것을 받은 손자를 적었다.
다섯이 모두 제 뜻대로 끝을 맺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다.
잠언에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따로 계시다 하였고, 복된 그레고리우스께서 욥을 풀이하시며 이르시되 하느님의 심판은 감추어져 있을지언정 결코 불의하지 않다 하셨다.
이제 열한 살 된 이가 콘스탄티노플로 간다. 사람들은 삼백육십이 년이 그 아이 하나에 모였다 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그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할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가문에서 가장 애쓴 자들은 모두 무덤에 있고, 애쓰지 않은 아이가 제관을 쓴다.
시편에 이르되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며 헛되이 소란하다 하였으니, 나는 이것을 공평하다 하지 못하겠고 불공평하다 하지도 못하겠다.
몇편 안남았네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폴란드, 헝가리: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 우린 다 죽었어...
신은 독일인이다.
신은 독일인이며 에티코넨 가문이다(?)
@통장 Etichonen "the Godbea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