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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야단법석 법회 지상중계 (1)
박진영
미주불교교육문화원(원장 이원익)이 주최한 이 행사에는 워싱턴 디씨 소재 어메리칸 대학교 종교 및 철학부의 박진영 교수가 ‘법화경 새롭게 읽기, 그리고 종교적 세계관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하고 청중들의 질의에 기탄없이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법화경의 역사와 의의를 요약하여 환등기로 비추면서 ‘불난 집의 비유’와 ‘집 나간 아들의 비유’를 비롯한 경전 속의 여러 이야기와 함께 쉽고도 명확하게 그 가르침을 설명한 박교수는 ‘여자도 성불을 할 수 있는가?’‘악인도 깨침을 이룰 수 있는가?’‘우리 사회의 차별 문제’ 등 흥미롭고 현실감 있는 테마를 이끌어내며 두 시간 동안 청중들과 진지한 대화를 이어 갔다.
이 행사의 강연 원고를 행사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법과경> 새롭게 읽기, 그리고 종교적 세계관에 관하여
I. 들어가는 말
이렇게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워싱턴에서 활동을 하는데, 그곳에서도 한인단체나, 한인 불자님들의 모임에서 여러번 불교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불자님들을 만나면 이렇게 물어봅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단 교인이 되면 성경부터 공부하는데, 불자님들은 그 분들처럼 불교경전을 많이 공부하시지 않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불자님들께서, 기독교는 성경만 공부하면 되는데 불교는 너무 경전이 많고 방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해야할지 몰라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고서, 저 같은 교수하는 사람들이 불자들이 쉽게 불교사상을 접근할 수 있게 입문서를 만들어야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이후로 저는 제가 대중 강연을 할때, 가능하면 불교 경전을 하나 선택해서, 그 경전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그를 불교사상과 연결해서 그 의미를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법화경>을 선택했습니다. 불교는 2500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대승불교 경전은 거의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 불교는 21세기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중 하나인 <법화경>의 이야기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새롭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I. 대승 불교의 인간관과 깨침
대승불교가 내세우는 가장 큰 사상은 상구보리 하화 중생이다. 그 중에서도 모든 사람은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불교의 근본 사상인 무아와 연기를 생각해 보면 알수 있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영구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깨친자 역시 어떤 깨침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깨침을 얻을 수 있어야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깨침을 얻지 못했는가? 나는 왜 중생 (衆生)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된다. 깨치지 못한 자를 나타내는 표현, “중생 (衆生)”은 산스크리트어 “사트바 sattva”의 한역으로 존재자 라는 뜻이다. 사트바를 중생으로 번역한 것에 대해, 혹자는 중국 고전 중 예기 (禮記) 에 나오는 귀절을 언급하기도 한다. 즉, 예기에 말하기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죽고, 죽은 뒤는 흙으로 돌아간다 (「衆生必死、必死歸土))는 표현이 있다. 영어로는 “sentient being” 이라고 번역한다. 즉, 중생이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법화경은 왜 모든 사람에게 깨침이 가능한데 나는 깨치지 못하고 중생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중에 다음의 세 비유를 소개해 본다.
1. 부유한 아버지와 가난한 아들의 비유
부유한 아버지와 가난한 아들의 이야기는 <법화경> 4장에 나오는 비유다. 한 아들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집을 나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거지꼴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아버지의 사업은 번창해 갑부가 되었다. 어느 날 한 마을에 오니 부잣집이 보였다. 아들은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 배가 고프고 일이 필요한데도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집을 지나친다. 아버지는 아들을 곧 알아보았지만, 그 아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거지나 다름없는 행색인 아들에게 네가 이 집의 대를 이을 나의 아들이라고 하면, 아들은 자신의 행색의 초라함에 자신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청소일부터 시키면서, 한단계 한단계 자신의 능력을 쌓아가도록 도와준다. 아버지는 마침내 그 아들이 일정한 위치에 올라 큰 뜻을 갖을 만큼 되고, 예전에 스스로를 낮게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본다. 죽음에 가까와서, 아버지는 그가 이 부자집의 아들임을 가르쳐준다.
중생의 모습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중생은 워낙 자신을 중생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자신이 부처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단계 한단계 부처의 말을 배워서 수행하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는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이 본래 부처가 아니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주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것이다.
이 비유는 여러모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 스스로를 두 극단에서 본다.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과대 평과하고, 이기주의적으로 남보다 낮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커다란 일을 할 기회가 오면, 내가 어떻게 저런일을 하나, 하는 생각에 주눅이 든다. 잘 생각해보면, 이 두 극단을 왔다갔다하는 것이 우리들인 것 같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는 중생인 것인지도 모른다. 유교 경전인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맹자의 제자가 맹자에게 스승님께서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맹자가 나는 호연지기 (浩然之氣)가 있다고 했다. 이를 유가적으로 여러방면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나는 이를 커다란 성품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복식 호흡을 하라고도 한다. 물론 이는 신체적인 기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를 또한 삶을 사는데 그냥 입과 코로만 숨을 쉰다는 얕은 생각을 버리고,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할때 우리는 나를 나보다 작게 만들어서 비굴해지는 것을 막고, 그리고 나를 남보다 크게 부풀려서 교만하거나, 남을 내려다 보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서 우리는 다 하나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이다.
2. 누구나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가르쳐주나
(법화경 2장, 불난집 비유)
불교에서는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을 불난 집에 비유하곤 한다. 불이 난 집에 살면서도 중생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화경 2장에서는 이와 유사하게 불난 집안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대피시키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놀이에 정신이 빠진 아이들은 불이 났으니 집 밖으로 나가라는 아버지 말에도 놀이에 열심이다. 아버지는 결국, 방편으로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면 아주 좋은 장난감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말함으로써 이 아이들을 밖으로 대피시킨다는 말이다. 이들이 받은 장남감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 방편과 같다는 것을 다시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편 이라는 말을 우리는 일상사에서 가끔은 부정적으로 쓰기도 한다. 무엇을 위한 방편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그러나, <법화경>에서 말하는 방편, 불교의 <우파야upāya>는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하나하나가 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라는 것이다.
3. 삶의 다양성에 관하여 (법과경 5장, 삼초이목에 대하여)
우리의 삶의 경험 하나 하나가 다 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법화경> 5장은 이를 다양한 모양의 나무와 풀의 모습으로 설명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초목이 있다. 그들이 크기와 모양도 다양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비는 이 다양한 초목에 골고루 나린다. 커다란 나무라고 해서 비를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비를 안 주지도 않는다. 또한 같은 비라도 커다란 나무, 작은 나무, 풀, 모두 각각의 모습대로 그 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삶이라는 것은 결코 획일적이지도 않고 획일적이 될 수도 없다. 삶의 다양함은 다양함대로 인정하면서,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진리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화경>의 가르침은 다양함이 점점 늘어가는 오늘의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삶의 다양성의 의미를 잘 말해준다.
4. 불교에서 악인: 정말 모든 사람이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제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법화경>은 모든 사람은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모든 사람이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잔악무도한 악인도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묻는다.
대승불교 이전의 불교에서는 일천제 (一闡提) 혹은 이찬티카 ( icchantika)라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할 악인의 부류가 있었다. 일천제는 다섯가지 극악무도한 죄 중 하나를 범해 모든 선근의 뿌리가 다 끊어져 버린 악인이다. 일천제는 <다섯가지 중죄 (오역 五逆 Five Deadly Crimes)> 중 하나의 죄를 저지른 자다. 다섯가지 죄란, (1)모친을 죽인 죄; (2)부친을 죽인 죄; (3)성인 (아라한)을 죽인 죄 (4) 붓다의 몸을 상하게 한 죄 (5) 승가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를 말한다. 이러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는 선함의 뿌리가 모두 끊어진 자로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해져왔다.
일천제의 대표적인 예가 데바닷타 (Devadatta 제바달다 提婆達多)다. <법화경> 12장은 이 제바달다의 문제를 다룬다. 제바달다는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으로 석가모니가 깨침을 얻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이를 시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즉, 붓다의 몸을 상하게 하고, 승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묻는다. 불교 사상에 근거해 볼 때, 죄가 영원할 수 있는가? 불교적 세계관은 어떠한 것도 영구불변의 실체를 가질 수 없다는 데 근거한다. 그렇다면 죄 역시 마찮가지이다. 죄가 아무리 중하다고 해도, 그 죄 자체가 영구적인 속성을 갖을 수는 없다. <법화경>은 제바달다의 문제를 다루며 우리가 어떻게 죄의 댓가 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문제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5. 여자도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붓다를 해치려했던 제바달다처럼 극악무도한 존재도 궁극에는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법화경> 그리고 대승불교의 사상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제바달다를 다루는 장에서 <법화경>은 여성의 성불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여성은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영원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서로 맞물려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아, 즉,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의 결합으로 이루어 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를 오랜동안 지배해온 가부장제도는 불교에서도 예외없이 그 모습을 들어낸다. 불교가 시작되던 시기 인도를 지배했던 브라만교는 여성의 몸으로는 깨침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몸은 더럽혀진 몸이고, 그 증거로 여성은 매달 한번씩 피를 밖으로 배출해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이 종교제례등에 참석하는 것을 절대 금지했던 브라만교에 비해서, 불교는 여성에게 불교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기는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부대중은 비구, 비구니, 그리고 재가 남, 녀 불자를 의미하듯, 여성은 불교의 초기부터 불교사회의 일원이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본다면 불교의 획기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전적으로 남녀평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가 깨침을 얻고, 출가한 비구들이 함께 모여서 정진을 하는 승가가 형성이 되고도 여성수행자를 위한 승가는 형성되지 않았다. 붓다를 키워준, 붓다의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역시 붓다를 따르며 수행을 하는 불자 였고, 붓다에게 여성들을 위한 승가를 만들어달라고 말했지만, 붓다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아난다의 권유에 의해 붓다는 비구니 승가를 만들지만, 그 조건으로 팔경계(八敬戒) 라는 비구니에게만 해당하는 여덟가지 계율을 만든다. 팔경계의 근본 생각은 아무리 오랜동안 수행을 닦은 비구니라도, 오늘 당장 출가한 비구보다 승가에서 그 위치는 낮으며, 비구니는 항상 비구의 관리하에서 승가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부처의 전생을 기록했다는 <자타카 (Jātaka)> 혹은 <본생담 (本生譚)>에는 여자의 몸으로 될 수 없는 다섯가지 (女人五障說) 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여성의 몸으로는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고유 영원한 본질이 없다면, 여성이라는 성(性)이 남성보다 하위적이며 따라서 여성의 몸으로 성불을 할 수 없다는 이론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했을 수도 있다. <법화경> 12장에서는 극악무도한 악한인 제바달다도 성불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곧, 대승불교의 유명한 변신성불(變身成佛) 의 이야기가 나온다.
용왕의 딸, 용녀는 8살인데, 그녀의 불도에 대한 능력은 뛰어나고, 사람들은 그녀가 깨침을 얻었다고 한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사리불은 그러한 용녀의 성불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리불은 용녀에게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성불했다고 주장하느냐고 대응한다. 이에 용녀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남자의 몸으로 변신시켰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용녀의 이야기는 사실상 여성의 몸으로 성불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용녀는 왜 여성의 몸을 유지하지 않고 남자의 몸으로 변신을 해야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많은 학자들에게 용녀의 이야기가 여성성불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다른 견해를 피력하게 하는 근거를 마련한다.
이런점에서 보면, 대승불교의 또다른 주요경전인 <유마경(維摩經) > 에서 하늘 아가씨 (혹은 여신) 의 변신성불의 이야기는 용녀와는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깨침이 큰 것을 보고, 사리불은 하늘 아가씨에게 왜 여성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하늘 아가씨는 자신이 12년 동안 여자모양을 찾으려해도 찾지 못했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성의 몸을 바꾸느냐고 댓구하고, 여자의 몸을 왜 변화시키지 않느냐는 질문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다. 모든 법이 모양이 없다면, 어떻게 여성의 몸이라고 해서 특정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이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하늘 아가씨는 사리불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만들고, 자신의 몸을 사리불의 몸으로 변화시킨다. 남성, 여성이라는 성의 문제 역시, 불교에서 다른 모든 것과 같이 고정불변의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승 경전에 나타나는 변신성불설, 즉 여성의 몸에 관한 질문은 꼭 남녀 평등의 문제에 관련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성립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복잡한 설이 있고, 가장 빠른 시기를 잡는다면 대승불교 성립 초기인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2세기 정도일 것이다. 특히 <제바달다품>은 이 초기 형태의 <법화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다.
<유마경>의 성립 연대 역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1-2세기 경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교에서 1-2세기 경에 남녀평등의 문제를 변신성불론을 통해 생각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0년간 불교는 여전히 가부장적사회의 성격을 유지해왔고, 오늘날도 승가는 남성위주의 사회체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법화경>이나 <유마경>에 나온 여성성불에 관한 문제를 오늘날 우리가 첨예하게 다루고 있는 남녀평등의 문제와 전혀 관계없다고 할 필요도 없다.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 (Buddhism after Patriarchy)> 라는 저서를 통해 여성과 불교의 문제에 큰 공헌을 했던 불교학자 리타 그로스 (Rita Gross) 는 그 책의 서두에서 어느 종교가 아무리 가부장제적인 역사를 발전시켜왔어도, 그 종교의 근본 가르침을 보면, 그 종교를 가부장제적인 역사로부터 재 해석해 여성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교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화경>에 나타난 용녀의 변신성불설은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남녀평등을 위해서 기여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남녀평등의 문제를 다루는 오늘의 우리에게 불교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지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교의 근본 정신인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의 자족적 독립적 실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다양한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자아를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 역시 그 자체로 영구불변한 한 특성으로 고정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남녀를 위계질서하에서 보는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불교의 근본 정신과 맞을 수 없다는 것을 변신성불론은 가부장적 불교사에 대한 불교의 무의식적 반항으로 우리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 새로운 모습의 붓다
<법화경>은 극악무도한 악한도 성불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는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정말 나는 깨침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나는 아직 깨침을 얻지 못했는가? 중생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생이 깨침을 얻는데 도움을 주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대승불교의 특징이다. 그 중에서 <법화경>은 새로운 모습의 붓다를 제시함으로써, 중생과 붓다, 깨침과 일상성에 관한 가르침을 준다.
초기 불교에서는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만이 현세의 붓다다. 붓다의 열반이후 중생은 붓다가 없는 말세 (末世)에 살고 있으며, 미래의 부처, 즉 미륵불(彌勒佛)이 올때까지는 이 세상에 붓처는 없다.
<법화경>에서 붓다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붓다의 열반이 다가오자, 붓다의 제자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붓다는 자신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럼 왜 붓다는 죽는다고 했을까? 붓다는 말하기를 자신이 영원히 있다고 말하면 제자들이 수행의 긴박함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법화경>은 붓다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며, 붓다의 앞이마에서 광채가 나와, 수많은 국토에 있는 붓다의 모습을 비축, 또한 존재자 하나하나를 비춘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마치 과학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을 주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붓다의 깨침으로 인해, 모든 중생이 그 깨침의 은덕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모든 존재자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연기의 법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면, 붓다 한 존재의 깨침은 곧 모든 존재자의 깨침이 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보는 붓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첫째는 붓다가 우리가 아는 신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화경>이 많은 종파 불교의 소의 경전으로 사용되어 온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을 통해, 붓다의 깨침에 대한 믿음을 통해 중생이 자신의 깨침의 길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붓다의 깨침이 모든 중생들에게 빛으로 통과하고 있다는 것은 붓다와 중생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한다. 붓다의 깨침이 중생의 몸에 빛으로 다가옴으로써 중생은 깨침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마찬가지로, 중생인 내가 얻은 깨침 역시 나의 존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깨침의 길로 가는 것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본글붙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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