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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위탁생산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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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위탁생산의 세계
‘장사 좀 된다고 가게를 넓히면 망한다’는 요식 업계의 속설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사업을 확장하면 고정 지출이 늘어나고 음식의 맛(품질)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자동차 업계에서도 통용된다. 당장 판매가 조금 늘었다고 무작정 공장이나 생산 라인을 늘릴 수는 없다. 위탁생산은 바로 이런 자동차 제조사들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자동차 공장 하나를 짓는 데는 최소 수백~수천억원, 때론 수조원의 비용이 필요하다. 부지 매입과 건설, 제조설비 구축, 신규 고용 등은 물론 각종 행정 절차도 뒤따른다. 자동차 제조사가 공장을 신축하는 이유는 당연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다. 설비 확장과 동시에 판매가 예상만큼 늘어나면 좋겠지만, 시장과 경제 상황은 그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갑자기 불어 닥친 불황에 공장 가동률이 바닥을 쳐도 각종 고정비는 꾸준히 지출된다.
이런 대규모 투자에 뒤따르는 부담은 회사의 존망을 결정하기도 한다. 약 20년 전, 1조원을 투입해 군산공장을 건설한 대우자동차가 좋은 예다. IMF 여파도 결정적이긴 했지만, 군산공장 건설은 대우자동차 재정건전성 악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우자동차는 결국 GM에 넘어가고 말았다. 삼성자동차 역시 부산공장으로 인해 출범 초기부터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연약지반 때문에 늘어난 토목건설비와 예상보다 높았던 제조설비 구축비용이 삼성자동차의 목을 죄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예전부터 이런 위험성을 낮추면서 유연하고 효율적인 생산방법을 고민해왔고 위탁생산이라는 해답을 찾아냈다. 유럽과 미국에선 꽤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방식이며, 국내에선 이 사업에 처음으로 뛰어든 동희오토가 대표적이다.
위탁생산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신속한 증산이 가능해 늘어나는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물론 가장 큰 매력은 대규모 투자와 노동자 직접 고용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또한 주요 판매국 및 그 인접 국가에서 만들면 물류비와 세금, 그리고 통상마찰 요인을 줄일 수 있고 현지인 고용 창출이라는 무형의 효과도 얻게 된다. 위탁생산 기업이 유럽에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륙의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위탁생산의 다양한 장점만큼 생산 형식과 이유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자동차 제조사는 위탁생산을 전문기업에 맡기지만, 협력 관계에 있는 다른 자동차 제조사에 부탁할 때도 있다. 유럽에 공장이 없는 비유럽 자동차 회사는 위탁생산 공장을 수출 기지로도 활용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차를 생산해 유럽 전 지역에 팔았던 크라이슬러(마그나 슈타이어, 유로스타), 지프(마그나 슈타이어), 기아(카르만, 스포티지 1세대)가 대표적이다.
위탁생산은 투자 여력이 낮은 소규모 브랜드는 물론이거니와 규모가 큰 브랜드들도 컨버터블, 스포츠카 같이 수요 예측이 어렵고 한정적인 모델을 생산할 때 주로 활용한다. 일반적으로 위탁생산 기업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사륜구동 시스템, 컨버터블 모듈과 같이 덩어리가 큰 자동차 부품 제조사라는 점과 여러 회사의 다양한 차를 하나의 라인에서 만드는 혼류생산으로 생산 효율성을 높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즉, 봄과 여름엔 컨버터블을 만들고 가을과 겨울에는 SUV를 만드는 식이다. 참고로 위탁생산은 연간 1만5,000~5만 대를 생산하는 모델에 적합하다고 알려져 있다.
기획에서 생산까지
위탁생산은 전문 업체만의 몫은 아니다. 모델 개발에 참여한 다른 자동차 제조사가 생산까지 책임지는 경우도 있다. 주로 고성능 스포츠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포르쉐가 생산한 메르세데스 벤츠 500E와 아우디-포르쉐 RS2, 맥라렌이 생산한 메르세데스 벤츠 SLR 맥라렌, 스바루가 현재 생산하고 있는 토요타 86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말 포르쉐는 생존을 걱정할 정도로 수익과 규모가 보잘것없었다. 다른 제조사들의 신차 개발을 도우며 부수입을 올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포르쉐가 생산한 메르세데스 벤츠의 500E(W124)도 바로 이때의 결과물이다. 당초 포르쉐는 개발 자문만 맡기로 했으나, 959와 928의 단종 이후 주펜하우젠 공장이 놀게 되자 생산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500E는 500SEL(W140), 500SL(R129) 등에도 올라간 V8 5.0L M119 엔진을 E클래스에 얹은 모델로, 서스펜션과 브레이크 시스템 등을 포르쉐가 손질했다. 차체 제작과 도장은 메르세데스 벤츠 진델핑겐 공장에서 이루어졌고 최종조립은 포르쉐가 맡았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6초 만에 도달하는 실력을 지닌 500E는 당시 가장 빠른 스포츠 세단이었다. W124 500E는 후기형 E500를 포함해 총 1만여 대가 생산됐다.
500E가 ‘500SL로 만든 E클래스’라면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 아우디-포르쉐 RS2는 ‘포르쉐 911로 만든 아우디’라고 할 수 있다. 포르쉐의 입김이 어찌나 셌는지 제작 증서의 제조사명도 아우디-포르쉐였다. 성능 조정은 물론 스타일링과 조립까지 모두 포르쉐가 맡았으며 엔진 헤드와 차체 곳곳에는 ‘PORSCHE’ 레터링을 새겨 흔적을 남겼다. 아우디 80 왜건에 최고출력 311마력을 내는 직렬 5기통 2.2L 터보 엔진을 얹어 0→ 시속 100km 가속을 4.8초 만에 마치는 ‘수퍼 왜건’의 원조였다. 서스펜션, 브레이크 등을 포르쉐에서 세팅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방향지시등, 사이드미러, 휠, 브레이크 시스템 등의 부품을 포르쉐 911(993)과 911 터보에서 가져오기도 했다. 아우디-포르쉐 RS2는 메르세데스 벤츠 500E(1990~93년)의 생산이 끝나 다시 일거리가 없어진 주펜하우젠 공장에서 1994~95년 두 해에 걸쳐 약 2,600대가 생산됐다.
2003년 데뷔한 메르세데스 벤츠 SLR 맥라렌은 벤츠의 F1 포뮬러 파트너이자 지분 관계에 있던 맥라렌이 개발에 참여하고 생산을 맡았던 모델이다. 1955년 등장한 벤츠의 전설적인 로드 레이스카 300SLR(W196S)의 후속임을 주장한 SLR 멕라렌은 F1 차체 설계 분야와 맥라렌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고든 머레이가 설계한 마지막 스포츠카로 맥라렌 레이스카 제작 기술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최고출력 557마력을 내는 AMG V8 5.5L 수퍼차저 엔진을 차체 앞쪽 깊숙이 밀어넣은 프론트 미드십 구조였으며 쿠페와 로드스터 두 가지 버전이 생산됐다. 생산 안정화에 접어든 이후 300SLR과 스털링 모스를 기념하는 722 에디션과 스털링 모스가 추가되기도 했으며 맥라렌 에디션을 마지막으로 단종됐다. 데뷔 당시에는 총 3,500대를 생산할 예정이었으나 높은 가격 탓에 수요가 적어 2010년까지 약 1,400대만이 생산됐다.
마그나 슈타이어(Magna Steyr)
세계 최대의 사륜구동 시스템 공급업체 마그나 인터내셔널의 계열사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4개의 조립 라인을 갖춘 연간 20만 대 생산 규모의 공장에서 여러 회사의 자동차를 동시에 생산하고 있다. 엔지니어링, 사륜구동, 섀시 설계, 조립, 전장, 파워트레인, 전기차 제작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제조 전반에 필요한 능력을 대부분 갖추고 있어 ‘브랜드 없는 완성차 제조사’로 일컬어진다. 마그나 슈타이어의 위탁생산 역사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메르세데스 벤츠 G바겐에 들어갈 사륜구동 시스템을 개발하다 차체 조립까지 떠맡으면서 위탁생산이 시작됐다. 200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위탁생산 기업 유로스타(Eurostar Automobilwerk)를 인수해 몸집을 부풀렸다. 유로스타는 유럽에서 장애인 탑승 특장차로 잘 팔리는 크라이슬러 보이저와 PT크루저를 만든 회사다.
마그나 슈타이어가 만든 대표 차종은 메르세데스 벤츠 E클래스 4매틱(W210,W211)과 M클래스(W163), 사브 9-3 컨버터블(2003~09년), BMW X3(E83), 크라이슬러 300C와 보이저, 애스턴마틴 라피드, 미니 컨트리맨/페이스맨, 푸조 RCZ 등이다. 2017년부터는 BMW 딩골핑 공장에서 생산되는 신형 5시리즈(G30) 물량 일부를 생산할 예정이며 앞으로 공개될 BMW Z5, 토요타 신형 수프라, 재규어-랜드로버 신모델의 생산도 마그나 슈타이어가 맡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멧 오토모티브(Valmet Automotive)
핀란드의 국영기업 발멧 오토모티브는 사브를 위탁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발멧과 사브가 합작해 만든 기업이다. 1969년 이후 사브 대부분의 모델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전문 분야는 컨버터블 모듈이며 다른 위탁생산 업체와 마찬가지로 엔지니어링 용역도 진행하고 있다. 주요 고객은 메르세데스 벤츠, BMW, 미니, 르노, 벤틀리 등이다.
발멧 오토모티브는 주로 사브 9-3 컨버터블(1998~2002년), 포르쉐 복스터, 포르쉐 카이맨(1997~2011년), 오펠 칼리브라, 피스커 카르마 등의 컨버터블/스포츠카를 생산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산 능력을 키워 메르세데스 벤츠 A클래스(2013년~) 같은 대중적인 모델도 만들고 있으며 2017년부터는 벤츠 GLC의 물량도 일부 소화할 예정이다. GLC의 높은 인기로 인해 독일 브레멘 벤츠 공장의 생산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VDL 네드카(VDL Nedcar)
1967년 네덜란드의 트럭 회사 DAF의 승용차 생산 공장으로 처음 문을 연 네드카는 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 33, 44 등의 DAF 차를 만들다 70년대 중반부터 66, 340/360 등의 볼보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0년 경영난으로 주춤했지만 1991년 볼보와 미쓰비시가 합작으로 투자하면서 440/460, S40/V40 등 미쓰비시의 도움을 받은 볼보 모델을 주로 만들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카리스마, 스페이스 스타 등의 미쓰비시 모델도 생산했다. 2001년 볼보가 지분을 팔면서 미쓰비시의 소유가 되었고, 이후 미쓰비시가 손을 떼면서 2012년 덴마크 VDL 그룹의 자회사가 되었다. 90년대까지는 주로 볼보와 미쓰비시 모델을 만들었지만 2000년대에 와서는 콜트와 아웃랜더 등의 미쓰비시 차를 비롯해 2004~2006년에는 다임러크라이슬러 그룹의 스마트 포포를 생산하기도 했다. 최근에 와서는 2014년 미니(MINI) 해치백을 시작으로 미니 컨버터블과 컨트리맨 등을 생산 라인에 추가했다. 연간 최대 생산 능력은 20만 대에 이른다.
카르만(Karmann)
독일 기업 카르만은 코치 빌더로 활동한 경험과 컨버터블 모듈을 만들며 얻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위탁생산을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첫 번째 위탁생산 차는 지금은 사라진 미국 자동차 제조사 AMC의 자블린(Javelin)이다. 자블린은 6기통 3.8L/4.8L, 8기통 5.6L 등의 엔진을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2도어 포니카였다. 1968년에서 1971년까지 생산된 280여 대의 카르만제 자블린은 모두 유럽에서 소화됐다. 스포츠카, 컨버터블, 소형차, 오프로더 등 다양한 차를 생산하던 카르만은 경영 악화로 2009년 파산해 위탁생산을 중단했으나 폭스바겐의 도움을 받아 2017년부터 티구안을 연간 3만 대 이상 생산할 예정이다. 포르쉐 911(1966~71년), 포르쉐 912(1966~69년), 포르쉐 914(1969~73년), 폭스바겐 골프 컨버터블(1/3/4세대), 메르세데스 벤츠 CLK 컨버터블(1998~2008년), 폭스바겐 시로코(1974~92년), 포드 에스코트 컨버터블, 기아 스포티지(1세대) 등이 카르만이 생산한 대표 모델이다.
동희오토
충남 서산에 위치한 동희오토는 국내 유일의 자동차 위탁생산 전문 기업이다. 동희오토의 위탁생산은 기아차가 자사의 높은 인건비 때문에 수익이 낮은 경차를 생산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생산비가 낮은 외부 업체에 생산을 맡기며 시작됐다. 동희오토는 경차 하나만으로는 생산 효율성을 올리기가 어려운데다 생산원가 인하 압박이 강한 경차 특성을 고려해 사무직을 제외한 생산직 전원을 16개의 협력사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고용해 인건비 지출을 줄였는데, 이 때문에 노동계로부터 ‘비정규직 공장’이라는 비판과 함께 ‘위탁생산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동희오토의 생산 규모는 연간 30만 대. 2004년 기아 모닝을 시작으로 2012년부터 기아 레이도 만들고 있다. 참고로 동희오토는 1972년 버스 범퍼를 만들며 자동차 업계에 진출한 이후 선루프, 연료탱크 모듈 등을 만들어왔다.
르노삼성
같은 그룹 내 다른 브랜드의 차를 위탁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선 르노삼성이 대표적이다. 르노삼성은 모기업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소속의 닛산 로그를 2014년부터 위탁생산하고 있다. 르노삼성의 실적을 이끌던 볼륨 모델의 판매부진으로 인해 르노삼성의 부산 공장 생산량은 2010년 27만 대에서 2013년 13만 대로 반토막이 났고 2011∼2012년 4,000억원에 가까운 영업 손실을 봤다. 이와 달리 미국 스미나 공장에서 생산되는 닛산 로그는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는 인기로 인해 생산량 확대가 절실했다. 이때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공장의 상당 부분을 놀리던 르노삼성에 로그의 생산을 맡기면서 두 회사의 고민을 해결했다. 즉, 닛산은 생산 라인 증설 비용을 아꼈고 르노삼성은 활력을 되찾은 것. 로그 위탁생산은 연간 8만 대 수준으로 예상되었으나 로그의 인기가 예상을 웃돌아 2015년에는 약 11만 대의 로그가 부산공장에서 생산되었다. 르노삼성의 2015년 총 생산량이 22만9,000대였으니 1년 생산량의 절반이 닛산 로그였던 셈이다.
글 이인주
[출처] 자동차 위탁생산의 세계 - 카라이프 - 대한민국 최고의 자동차 전문지 카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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