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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사색인의 십계명*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반 경 환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우리 한국인들은 어떤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낼 능력도 없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
무지몽매한 한국인들과 철학자와의 싸움----,
나는 오직, 고립무원의 단 한 사람의 성실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철학이란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지혜 사랑을 통하여 나의 낙천주의의 세계, 즉, 지상낙원의 세계를 창출해내는 학문을 말한다. 지상낙원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세계이며, 보다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모든 철학자들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통하여 새로운 지혜를 창출해내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이라는 종이 향상되고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를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제1계: 깊이 있게 배운다, 제2계: 잘 질문한다, 제3계: 神의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제4계: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라, 제5계: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아라, 제6계: 언제나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라, 제7계: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제8계: 언제나 낙천적이어야 한다, 제9계: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서라, 제10계: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은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계율이며, 바로 그 계율 속에는 나의 낙천주의 사상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철학예술가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잘 질문할 줄 알아야 하며, 신의 권위마저도 인정하지 않아야 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보여야만 하며, 그리고 바로 그 사상의 신전이 크고 작은 수많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축성될 수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감각이 마비되지 않은 인간이며, 언제, 어느 때나 낙천적인 인간이다.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 나섰던 인간이며,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통하여 방안 가득히 ‘부(지혜)의 성실함’을 쌓아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의 도덕 철학을 창출해내고 그 계율을 통하여 낙천주의 사상의 신전을 지배하고 있는 철학예술가, 수많은 신들의 권위마저도 부정하고 無神論의 정점에서, 새로운 미래형의 인간으로서 황금옥좌를 지배하고 있는 철학예술가, 그는 영원한 제국의 주인공이며 불멸의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예술가는 그의 충신들인 철학자들을 수없이 거느리고, 그 신하들의 호위 속에서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새로운 가치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미래형의 인간들을 창출해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철학예술가의 근본신조는 철학이란 철학예술가를 위해서 새로운 철학예술로 옷을 갈아 입어야만 하며, 철학이란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발 디딤판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더욱 더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철학예술은 그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 속에다가 언제나 늘 푸른 소나무처럼 그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자와 철학예술가, 그들은 모두가 다같은 인간이지만, ‘부의 성실함’의 척도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과 계급으로 나뉘어 진다. 물질자본, 지적자본, 상징자본, 종교자본 등, 우리 인간들의 부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고, 그리고 자본의 유무에 따라서, 마치, 피라미드의 구조처럼 수직적인 서열제도를 구축하게 된다. 성실함의 척도는 부의 척도이며, 부의 척도는 성실함의 척도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만인평등’이라는 폭력적인 잣대로 모든 수직적인 서열제도를 부정하지만,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의 사회, 즉, 귀족사회는 그가 가진 능력에 따라서 모든 특전과 특권을 배분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거짓 환영이며, 민주주의가 사실 그대로 구현된다면----절대로 그럴 리가 없겠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농민과 상인, 지식인과 문맹인, 건강한 자와 불구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성자와 바보의 차이가 없어지고, 그 문화적인 무질서만이 자라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치명적인 독약이며, 생존경쟁이라는 유기체의 본능마저도 부인하는 반생물학적인 정치체제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사색인의 십계명」 제1장에서,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철학적인 話頭를 설명한 바가 있는 데, 지혜, 용기, 성실이 바로 그것이다. 지혜, 용기, 성실은 철학예술가로서의 학문연구의 전제조건이며, ‘사색인의 십계명’은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도덕적(교육적)인 계율이다. 지혜는 그의 뛰어난 두뇌의 산물이며, 그는 그 지혜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지상낙원을 창조하게 된다. 나의 낙천주의 사상은 이제까지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전복시킨 것이며, 나는 나의 모든 것, 즉, 돈, 명예, 시간, 그리고 온갖 욕망을 다 걸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을 싸워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내가 오늘날 철학예술가로 서기까지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김현이란 요상한 괴물을 비판한 이후, 모든 발표지면을 다 빼앗기고,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 악전고투만을 해왔다. 하염없이 가난의 밑바닥으로 추락해가면서도 더욱 더 황홀하게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부(지혜)의 성실함, 모든 인간 관계가 파탄을 맞이하게 되고, 외롭고 쓸쓸함에 사로잡혀서 그 고독을 더욱 더 크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부의 성실함, 차디 찬 냉소와 멸시 속에서 은둔을 강요받고 그때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칸트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 진검 승부의 칼을 들이밀고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보여야만 했던 부의 성실함, 때때로 좌절과 실망의 손아귀에 발목을 잡혀버리고, 쓰디 쓴 인내와 함께, 그만큼의 굴욕의 울음을 울고 싶었던 부의 성실함, 선악을 넘어서서 그토록 끔찍하고 잔인한 영웅의 역사를 탐구하고 자기 스스로 도덕적(교육적) 계율을 명명하고 사상의 신전을 건축했던 부의 성실함,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시킬 수 있을만큼 최고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愛知를 창간하고 그 잡지를 최고급의 잡지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부의 성실함, 인간 전체를 보고 새로운 미래의 인간을 역설하면서도 그토록 지지리도 못나고 가난한 조국에게 발목이 잡히고,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조국 때문에 울어야만 했던 부의 성실함, 더없이 가난하고 비천한 노예계급의 출신이면서도 대중들의 만인평등사상과 민주주의를 그토록 역겨워하고 한 바구니의 달콤한 빵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높이 끌어올리면서 끝끝내는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을 정립했던 부의 성실함----. 하지만 나는 이 악전고투를 통해서 정신의 희말라야를 극복할 수가 있었고, 나의 부의 성실함은 오늘도 고산영봉의 만년설처럼 너무나도 눈 부시고 영롱하게 빛난다. 나는 피 눈물나게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황홀했고, 그리고 그 황홀함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다. 아니, 나는 일찍부터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으로 육성하고 새로운 지상낙원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태어났던 만큼, 나의 용기는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을 감행할 수 있을 만큼 천하무적의 그것으로 단련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대범하고 간이 크고 스스로 발광하는 라듐처럼, 어떠한 사건의 본질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선을 지녔고, 따라서 나는 나의 승리를 스스로 보장하고 장담할 수가 있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사상을 지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내가 왜 행복하지 않은 인간일 수가 있겠으며, 또한 자기 자신의 승리를 장담하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도덕철학을 정립해냈던 내가 왜 성실하지 않은 인간일 수가 있겠는가? 지혜, 용기, 성실은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화두이며, 분신이고, 또, 그리고, 철학예술가로서의 나의 삼위일체이다. 지혜는 용기이고 성실이며, 용기는 성실이고 지혜이다. 따라서 나의 성실함은 지혜이며 용기인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 세 개의 화두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매우 다르게, ‘愛知’라는 단 하나의 화두에다가 각인시켜 두었던 것이다. 반경환, 그로 인하여 ‘愛知’는 얼마나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졌으며, 그 도덕철학(‘사색인의 십계명’)은 또한 얼마나 더욱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졌단 말인가? 이제 철학은 철학예술에게, 철학자는 철학예술가에게 그 지위를 내주게 되어 있고, 이것이 낙천주의 사상가로서의 나의 명령인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누구도 명명해본 적이 없는 철학예술가이며, 모든 철학자들을 나의 신하로 거느리게 되었다. 나는 성실한 인간이며 타인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없이 그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명명할 권리를 지녔다. 나는 가치의 창조자이며 명명자이고, 또한 입법자이며 전제군주이다. 나의 사상을 배우고 싶지 않은 사람, 나의 도덕철학을 배우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나의 사상의 신전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더욱 더 젊어지지만, 그대들은 타인의 사상과 이론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노인병원의 기생충들처럼 더욱 더 나약하고 왜소해져 간다. 좀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 좀더 대범하고 한없이 관용적이며 너그러운 인간, 그토록 어렵고 힘들게 쌓은 명예와 명성을 언제, 어느 때나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수 있는 인간, 가난과 궁핍과 병 속에서도 그 고귀하고 위대한 품위를 잃지 않고, 언제, 어느 때나 행복했던 인간, 좀더 강력한 적을 사랑하고 좀더 강력한 적의 탄생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배우고 익히는 데에도 예법이 있고, 또, 그리고, 필요하다면 만인의 의사에 반하여 수많은 어리석음들을 단 칼에 베어버릴 수가 있는 인간, 또,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의 시체들로 바벨탑을 쌓고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인간,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 모든 욕망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인간,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행복했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면서도 행복했던 인간, 天命을 알 수 있는 나이가 지났는데도 단 한 번의 외국여행도 하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대예술가와 함께 정담을 나눌 수가 있는 인간----. 그의 행복은 어느 누구의 행복보다도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행복이지만, 그러나 우매한 대중들이나 애늙은이들이 걸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크고 헐렁하기만 한 행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자그만 들쥐가 코끼리옷을 빼앗아 입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의 신전은 대한민국에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사시사철 늘 푸른 소나무와 젖과 꿀이 넘쳐 흐르고, 쌀과 보리와 온갖 과일들이 넘쳐나고, 날이면 날마다 스포츠와 섹스와 공부와 노동과 사냥과 낚시와 그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수 있을만큼 자유롭고, 그리고 일년내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 이 모든 건강과 자유와 행복은 그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 즉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전리품인 것이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도 없고, 평화가 없으면 전쟁도 없다. 요컨대 평화는 전쟁 뒤의 전리품인 것이며, 전리품(평화)이 없으면 어떤 전쟁도 일어날 수가 없다. 미리부터 말해두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니, 내가 죽어도 나의 사상의 신전에서는 그 어떤 싸움도 일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사상의 신전의 전제군주이며, 나의 사상은 나의 유한성까지 뛰어 넘어서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더 강력한 적들을 찾아다녔고, 그 성실함으로 인하여 나의 사상의 신전을 건축할 수가 있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머, 아이스퀼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제논, 제우스, 헤라클레스, 알렉산더, 나폴레옹, 부처, 예수,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셰익스피어, 괴테, 보들레르, 랭보, 반 고호, 폴 고갱은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강력한 적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도덕철학의 창시자이자,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의 주인공들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의 삼박자를 다 갖춘 인간들이었고, 모든 인류의 영원한 스승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삶의 의지이고, 이 삶의 의지가 장애를 만나게 되면 그 주체자는 평상시보다 수천 배나 지적인 민감성을 띠게 되고, 그리고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과 고산준령의 험악한 산악지대, 그리고 사나운 비 바람과 그 모든 것마저도 얼어붙을 듯한 추위 등은 최악의 생존 조건이며, 최악의 생존 조건이란 인간의 삶의 의지가 장애를 만난 것을 뜻한다. 때때로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 그 최악의 생존조건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멸해간 인간이나 민족을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 최악의 생존 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나 민족들은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되어갔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난관들과 싸우면서 더욱 더 날카롭고 예리해진 지적인 민감성, 끝끝내 자기 자신의 한 몸을 희생----보트피플들의 人身供養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시켜서라도 다른 동료들을 구원해내려는 살신성인의 희생정신, 상호간의 신뢰와 애정의 표시로써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집단의식, 최악의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빠른 합의와 일치단결의 필요성,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무서운 성실성 등----, 이 모든 것들은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는 백야 현상과 무섭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아 남으며 오늘날의 유럽을 정복했던 바이킹족들, 대영제국의 품안에서 쫓겨나 사나운 인디언들과 들짐승들과 싸우며 신대륙을 개척했던 청교도들, 자기 자신의 조국을 잃고 머나 먼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며 불과 600만 명의 인구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내의 유태인들, 수없이 크고 작은 지진들과 A급 태풍이 열 다섯 번씩이나 지나가는 최악의 생존조건과 싸우며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했던 일본인들----, 그들의 선생은 최악의 생존조건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황금보다도 더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악의 생존조건은 황금종족의 모태이며, 그 황금종족은 더없이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전쟁은 문명과 문화의 아버지이며,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은 그토록 처절하고 끔찍한 전쟁이 끝난 뒤에,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을 불태우며 페르시아 정복사업을 기념했던 것처럼, 더없이 아늑하고 달콤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평화란 피 비린내 나는 전쟁 뒤의 휴식이며, 전쟁이란 그 무사안일과 나태함을 떨쳐버리고 힘찬 일터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조국과 동지를 사랑하고, 조국과 동지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단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바칠 수가 있지만, 눈 앞의 적과 미래의 잠정적인 적을 물리치는 일이라면 그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행위마저도 마다 하지를 않는다. 이와는 정반대방향에서, 학교, 병원, 회사, 정당, 군대 등도 생존경쟁의 전쟁터이며, 그곳에서의 패배는 황금종족의 멤버로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위해, 폭력, 착취, 질투가 제거된 사회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으며, 또한 희생, 우정, 자선, 사랑이 제거된 사회 역시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생존조건은 더럽고 추한 민족의 모태이며, 최선의 생존조건 속에서 태어난 민족은 무사안일과 평화만을 사랑하고 백전백패의 수모만을 겪게된다. 따라서 평화만을 사랑하고 평화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이제 더럽고 추한 민족은 제 삶의 터전을 다 빼앗기고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이민족들의 노예가 되어서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게 된다. 우리 한국인들은 더럽고 추한 민족이며, 단 한 번도 외세의 입김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노예의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일본인들은 전쟁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화를 얻을 수가 있었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평화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평화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일본인들은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의복에 염색되어 있는 가문(家紋)의 무늬를 보고 곧 그 사람의 가계를, 즉 그 명예와 권위의 역사를 읽고, ‘한텐’을 입은 장인을 보고 그의 기술과 책임 의식을, 또 상점의 ‘노렌’을 보고 그 가게의 신용도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가문도 한텐도 집단의 추상적인 명예, 신용, 책임 등을 하나의 시각적 기호로 나타낸 ‘축소’의 한 양식이다. 관념이나 조직 등을 하나의 마이크로로 응축한 이 축소지향이 다름 아닌 일본의 역사와 사회 조직을 지배해온 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119면
“일본인은 세계에서도 깨끗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온천장이 많고 습기가 프랑스의 2배나 되기 때문에 일본인이 목욕을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무라이(武士)가 항상 칼을 차고 있듯이 일본의 여인들은 또 빗자루를 잠시도 떼놓지 않는다. 쓸고 씻고 털고 닦는 일본의 생활은 먼지와의 전쟁이다.
일본인은 필요 없는 것과 함께 있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가지런하지 않는 것이라든가, 그냥 남아 뒹구는 것을 보면 견디지 못한다. 티끌만 한 먼지가 있어도, 심지어 보이지 않는 구석에 먼지가 묻어 있어도 혀로 핥듯이 털어버려야 한다. 그러니까 먼지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이다.”
----앞의 책, 149-150면
라는 예문들에서처럼, 자기 자신과 가문과 회사와 가게와 그리고 상점의 명예를 걸고,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게 일을 했기 때문에,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가 있었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예컨대,
구두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전문
라는 「그 사람의 손을 보면」의 반대방향에서, 자기 자신과 조국의 불명예를걸고 좀도둑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부정부패의 공화국을 연출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대사상가들과 모든 문화적 영웅들의 역사를 다 추적해보았지만,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장점----일본인들의 민족주의의 한계 내에서----은 너무나도 많고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오늘날 일본의 치명적인 약점은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그에 걸맞는 문화적인 영웅이 없고, 또, 그리고, 세계경영에 대한 미래의 전망과 그 전략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사상적으로 매우 미성숙하고,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뿌리는 너무나도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 역사 전체를 통 털어서 나처럼 세련되고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테지만, 그러나 그들의 무서울 정도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다. 진정으로 일본이 세계 속의 일본이 되려면, 마르크스, 프로이트, 베르그송, 프란츠 카프카, 아인시타인, 헨리 키신저, 스티븐 스필버그, 오펜 하이머 등과도 같은 세계적인 대석학들을 길러내야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두 번 다시 되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의 국력은 대동아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소련과의 냉전의 구도 속에서 하나의 우연처럼 움켜진 행운에 불과하며, 따라서, 전승국가로서 그처럼 관용적이고 너그러웠던 대제국(미국)을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하룻강아지의 경거망동에 불과하며, 그 경거망동은 소위 이웃국가들인 한국과 중국과의 적대감만을 증폭시키게 된다. 과연 일본의 영원한 제국의 꿈은 우리 한국과 중국을 더욱 더 크게 끌어안고 ‘대동아연방’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인가? 아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한국과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일본만의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인가? 전자는 일본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실현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우리 한국과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 속에서 절대로 실현 가능하지가 않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대로 미국은 유럽의 일부분이며 유럽인들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가 있지만, 얼굴이 누런 일본인과는 그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결코 한솥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명심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는 극단적인 배타주의----탈아시아주의와 이민족들에 대한 배타주의----에 기반을 둔 특수한 예에 속하고, 그처럼 편협하고 속좁은 사상으로는 영원한 제국은 커녕, ‘세계화 시대’의 낙오자가 되기가 십상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본정신과 일본문화의 장점은 우연이나 행운을 바라기보다는 무서운 성실성에 기초를 둔 장인들을 탄생시켰고, 다른 한편, 한 푼을 모으고 두 푼을 모아서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을 탄생시켰다. 일본인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상호간의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하고, 그리고 ‘먼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만큼 청결한 민족이다. 성실한 인간은 정직한 인간이며, 성실한 인간은 절대로 좀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성실한 인간은 ‘국물 한 가지와 나물 한 가지’로 만족하는 인간이며, 성실한 인간은 언제, 어느 때나 ‘먼지와의 전쟁’을 하고 있을 만큼 청결한----기초생활질서를 잘 지키는----인간이다. 그리고, 또, 성실한 인간은
‘서양에서는 육체적 용기와 도덕적 용기를 구분하였는데,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무사 가문에서 태어난 이라면 어릴 적부터 ‘대용(大勇)’과 ‘필부지용(匹夫之勇)’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이가 없었다.용기와 인내, 당참과 느긋함, 그리고 용맹스러움 같은 심성은 소년 무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으며, 실제적인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 어릴 적부터 훈련되고 지침이 된, 이를테면 가장 인기 있는 덕성이었다. 소년 무사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던 유아시절부터 전쟁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다. 혹시 힘든 일로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하면 “그 정도도 못 참다니, 그러다가 전쟁에 나가 팔이라도 부러지면 어쩔테냐? 할복하라는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어쩔 셈이야?”라고 꾸지람을 들으며 용기를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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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사의 어린 자식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곳까지 심부름을 간다든지, 엄동설한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로 서당까지 걸어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두 번, 덴만구(天滿宮--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 축제가 있는 날이면 소년 몇 명이 모여 차례로 책을 낭독하며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사형장이나 무덤가, 흉가처럼 으스스하고 살벌한 장소에 가는 것도 소년들이 즐겨하던 놀이였다. 참수형이 있는 날이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소름끼치는 광경을 보고 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밤에 혼자 형장에 가서 잘린 목에 흔적을 남기고 돌아오게 하기도 했다.”
----니토베 이나조, 사무라이, 40-41면
라는 니토베 이나조의 말처럼, 사무라이식의 용기와 인내로 무장한 인간이며, 재앙에 익숙하고 재앙을 다스릴 줄 아는 인간이다. 자원빈국인 일본에서의 사치와 낭비는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하고, 수없이 되풀이 되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의 부실공사는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한다. 또한 영원한 제국의 길로 들어선 일본 사회에서의 부정부패 역시도 일본인들의 공멸을 뜻하고, 저 천박한 전여옥이, 예컨대,
“인간은 저항하고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체이다. 성수대교 사건에서 울부짖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약 고베지진을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성수대교 붕괴는 인재이고, 지진은 천재이니까 우리도 일본인처럼 얌전히 숙명처럼 받아들였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수대교 사건 때 정부를 맹공격하고 비난했듯이 천재를 내린 하늘에 대해 저항하고 항의하고 원망을 퍼부었을 것이다. 살려내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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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일본의 화산지대인 운젠후겐다케에서 화산이 폭발해 약 50명 가까운 이들이 숨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나는 아주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숨진 이들의 시체가 모두 한 중학교 강당에 안치되었다. 하얀 보자기가 덮인 관들이 50구 정도 나란히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완벽한 침묵이었다. 시체가 담긴 관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관을 붙잡고 통곡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저 관 앞에서 슬픔을 참고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듯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물론 일본의 문화는 다른 사람 앞에서 크게 울거나 웃거나 하는 것을 품위 없는 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죽음 앞에서 그 슬픔조차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억눌러야만 하는 문화와 그 문화에 완전히 함몰된 일본인들에게 나는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전여옥, 「저항하지 말자」, 일본은 없다 41면
라고, 일본정신과 일본문화를 몰이해했던 것처럼, 그 자연의 재앙 앞에서 마냥 주저 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것 역시도 고귀하고 굳센 ‘사무라이 정신’의 공멸을 뜻한다. 따라서 사무라이식의 용기와 인내로 무장한 인간은 할복자살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울어서는 안 되며, 그 어떠한 천재지변마저도 두 눈을 부릅뜨고 단 칼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온몸이 갈갈이 찢겨지고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인은 어디까지나 사무라이 민족이고, 오히려, 거꾸로, 두 번 다시 기사회생할 수 없는 패배를 기록하게 되더라도 그 처절한 패배를 완성함으로써, 마침내, 끝끝내 승리를 쟁취해내고 마는 것이 오늘날의 일본인인 것이다.
성실한 민족은 재앙을 다스리는 민족이며, 성실하지 못한 민족은 재앙을 다스리지 못하는 민족이다. 전자는 백전백승의 민족이며, 후자는 백전백패의 민족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더럽고 추한 민족이며, 이 세계에서 가장 성실하지 못한 민족이고, 그 어떠한 재난(외국)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의 학교, 군대, 병원, 회사, 국회, 정부, 법원 등은 부정부패의 잔치판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고, 날이면 날마다 ‘가음난무’로 그들의 건강과 국력을 탕진하게 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대학원에서부터 국회까지, 그리고 모든 장관들과 대통령까지 속속들이 썩어버린 인간들 뿐이고, 한국정신과 한국문화는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기는 커녕, 좀도둑들의 양성소로 그 명성을 떨쳐가고 있다. 부실공사, 대형아파트, 대저택, 산해진미의 진수성찬, 600만 명의 신용불량자, 불법복제와 표절과 해적판, 쓰레기 더미와 거대한 공룡같은 서울공화국----.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이 한국정신과 한국문화의 본질이며, 이 한국정신과 한국문화가 뿌리깊게 번성하고 있는 한,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처럼, 영원한 제국으로 향한 ‘사기’를 치지는 못하고, 기껏해야 한탕주의에 물든 좀도둑들이나 탄생시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나의 이 말을 확인해보려면 속칭 평창동의 대저택가를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 대저택들의 웅장하고 화려함에 반하여, 골목,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꾀하다가, 끝끝내는 외국으로 도망을 가는 대재벌들의 행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성실하지 않은 민족이며, 눈 앞의 이익만을 쫓아가고 공동체 사회의 이익은 전혀 돌보지 않는 민족이다. 대영제국도 로마와 바이킹족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오늘날의 유럽도 로마와 바이킹족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도, 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대동아전쟁에의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날도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보호국)에 지나지 않는다. ‘미일안보조약’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에 지나지 않는다----도 외세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쟁에서의 패배가 兵家의 常事라면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역사는 그처럼 대수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요즈음의 한일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떼를 쓰고 있고, 마치 승자처럼, 일본의 역사를 제 멋대로 쓰려고 하는 서툰 짓을 되풀이 자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은 미래의 일본이며 나날이 새로워지지만,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패배주의로 물들어 있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온화한 기후가 우리 한국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우리 대한민국을 방풍림처럼 감싸고 있는 일본은 그들의 최악의 생존조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일본인들은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고 재앙에 익숙한 민족이고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때나 불성실하고 재앙 앞에서 울고만 있는 민족이다. 이처럼 어리석고 못 낫고 자그만 재앙 앞에서도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오늘에 살고 오늘에 죽는 우리 한국인들(하루살이들)이여! 그대들은 언제, 어느 때, 그 울음을 뚝 그치고 모든 인간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인가! 우리 한국인들이여, 지혜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만일, 나의 말대로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모든 인류가 우러러 보는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최악의 생존조건(기후, 풍토, 물, 토지 등)이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을 탄생시켰다면, 이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으로 끌어올린 자들도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유태인, 노르웨이인, 게르만인, 일본인, 영국인 등은 전자의 민족에 속하고,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니체, 쇼펜하우어, 알렉산더 대왕은 후자의 인간에 해당된다. 최악의 생존조건은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비옥한 토양이며, ‘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으로 몰아넣는 방법은 문화적 영웅 탄생의 제일급의 교수법에 해당된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것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제국의 꿈을 부여하고, 그 꿈을 위하여 오직 단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래, 너는 정말로 훌륭한 인간이야. 이 세상에서 너만이 영원한 제국을 건설해낼 수가 있어”라고, 끊임없이 자기 확신과 그 최면요법으로 그의 의지에 기름을 부어주고, 다른 한편, 그와는 정반대 방향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실패만을 되풀이 하고 있을 때에는, “이런 바보 같으니라구, 너는 훌륭한 인간이기는 커녕,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자격조차도 없어”라고, 자기 자신을 더욱 더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고, 그리고, 마침내, 끝끝내는 ‘실패의 여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만든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년경--기원전 480년경)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어두운 사람’, ‘수수께끼 같은 사람’, 혹은 ‘숨어 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에페소스를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그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그리고 에페소스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자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풀뿌리와 나무껍질만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르다. 또한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고, 어제의 나무는 오늘의 나무가 아니다. 그는 이처럼 ‘변화와 운동’을 이 세상의 근본법칙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역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 곳에서 바라보면 바다는 넓고 푸르지만, 그러나 그 바다에는 더러운 물과 맑은 물들 간의 싸움이 있고, 그 바다 밑에는 수많은 천적들과 천적들간의 숙명적인 싸움이 있다. 하지만 그 투쟁은 단지 무질서의 그것이 아니라, 그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금수강산도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고, 오늘날의 현대 문명사회도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이밖에도 필로소피아(Philosophia), 즉, ‘愛知’를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이었고, 그는 명실공히 최초의 철학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하여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0년경--기원전 450년경)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조국을 빼앗기고 이역 만리를 떠돌아 다니다가 엘레아에 정착한 포카이아인의 후손이었고, 그는 엘레아의 법을 만든 정치인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학문을 위해서 정치인의 길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철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변화와 운동’의 논리적 가능성까지도 부정한 유물론자이었고, 그 ‘만유불변의 법칙’ 속에다가 자기 자신의 신전을 지은 철학자이기도 했다. 있는 것은 영원히 있고, 없는 것은 영원히 없다. 물도 있는 것이고, 불도 있는 것이고, 사람도 있는 것이고, 동식물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無에서 有가 생겨날 수도 없고, 有에서 無로 소멸되어 갈 수도 없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사물은 형체만 바뀔 뿐, 그 에너지의 총량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최초의 에너지 보존법칙의 주창자이며,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의 스승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은 그의 ‘역설’을 통하여, 토끼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은 물론, 射手가 쏜 화살마저도 오늘날의 정지화면으로 바라보면 매순간 정지해 있기 때문에, ‘변화와 운동은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바가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운동의 법칙’을 통째로 부정하고, 그 만유불변의 법칙 속에다가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지은 철학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460년경--기원전 370년경)는 트라키아의 압데라에서 태어났고, 그는 매우 부잣집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처분해서 그 돈으로 세계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여행을 다녔고, 그 여행을 통하여 탈레스의 천문학, 동양의 자연철학, 이집트의 기하학, 피타고라스 학파와 엘레아 학파의 사상, 그리고 그밖의 예언술과 점성술까지도 배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달리, 일상생활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단 하나의 목표를 부여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혹하게 채찍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요컨대 그는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끊임없이 위험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정원 한 구석에 굴을 파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의눈을 피해 그곳에 숨기를 좋아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혼자만의 상상의 공간을 갖기 위해, 오랫동안 사막에서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공동묘지의 무덤 사이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서정욱, 만화서양철학사 1, 자음과 모음, 2003년, 235면에서 재인용)
니체는 그의 책 서광(도서출판 청하)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비범하고 선발되고 독창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역사의 전 과정 속에서 언제나 나쁘고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느껴지고,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느꼈다는 것에 의하여 얼마나 괴로워했는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풍습의 윤리의 지배 하에서는 어떤 종류의 독창성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꼈다”라고 말한 바가 있듯이, 진정으로 성실한 사람은 풍습의 윤리에 반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데모크리토스는 그 성실함의 결과, 최초의 원자론자가 될 수가 있었고, 그의 원자론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원자는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며, 그것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이 먼지와도 같은 입자들의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별(물질)들이 생성되고, 그 원자들의 흩어짐에 의하여 수없이 많은 별들이 소멸되어간다. 원자는 “변하지 않고 단단하며, 나누어질 수 없는 영원한 하나”라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영원한 하나’와도 같고, 다른 한편, 그 원자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서 다양한 별들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변화와 운동의 법칙)과도 같다. 이처럼 데모크리토스 역시도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하고 자기 자신을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원자론)을 지은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이라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왕위를 버리고, 파르메니데스가 정치인의 길을 버리고, 그리고 데모크리토스가 그의 전재산에 대한 소유 욕망을 버렸듯이, 자기 자신의 최선의 생존조건을 헌신짝처럼내다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자지 자신의 최선의 생존조건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릴 수 있는 사람은 호머가 그의 서사시를 완성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의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이 그의 교향곡을 완성했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이며, 모든 인류의 문화적 영웅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았던 출신성분에 의한 ‘최선의 생존조건’을 거절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최악의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그러나 그들의 은둔의 삶은 얼마나 성실했고,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삶이란 말인가? 그들은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행복)을 위하여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렸던 것이며, 오직 이 세상의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꼈던 사람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와 운동’이 이 세상의 근본법칙임을 밝혀내었고, 파르메니데스는 만유불변(萬有不變)의 법칙을,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상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이 세상의 근본물질이 원자임을 밝혀내게 되었던 것이다. 부의 척도도 성실함의 척도이며, 행복의 척도도 성실함의 척도이다. 성실함은 거꾸로 그 주체자에게 돈과 명예와 권력을 안겨다가 주고, 또한 성실함은 그가 비록 실패만을 되풀이 하여 알거지가 되었을지라도 성공보다도 더욱 더 빛나는 자긍심과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가 주게 된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김수영 시인 이후로, 일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또 그것을 온몸으로 실천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이 유용주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첫 시집, 가장 가벼운 짐은 그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짊어진 ‘가장 무거운 짐’이며, 그는 자기 자신의 사명감을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전문
이라고, 노래한 바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고 손마디가 부르트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일은 우리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생존수단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해 나가는 삶의 수단이다. 노동자나 농민들처럼 육체적인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본가들이나 지식인들처럼 지적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계급과 신분의 위계질서와 그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일 자체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돈 자체를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인간 관계와 도덕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된다. 유용주는 이러한 사실들을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일용잡급의 천역을 더없이 거룩한 순교자의 성역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막노동을 하고 싶다는 후배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를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움을 파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야
정당하게 품을 팔아야 바른 삶을 일구어나갈 것인데
폼부터 먼저 팔려고 드니 한심한 일 아닌가
먼저 정직하게 품을 팔 것
품파는 데 자신 없는 사람이
포옴을 먼저 팔려고 든다는 것을 명심하게
땀냄새가 얼마나 구수한 줄 아나
그 냄새를 진짜 맡을 때까지
치열하게 자신을 밀어붙일 것!
건투를 비네
유용주는 그 무엇보다도 “일은 한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품을 판다는 것인데/ 우스운 것은 품보다 포옴을 파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하고, 그렇지만 일은 “정당하게 품을 팔며” “땀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정직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용주가 역설하고 있는 품은 그 무엇보다도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첫째는 어떤 일에 드는 힘 또는 수고를 말하고, 둘째는 그 일에 대한 힘 또는 수고가 금전적인 댓가만이 아닌, 그 노동하는 사람의 인품(人品)을 파는 것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윤리설의 주창자로서 거짓말(사기)이 나쁜 것은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가 있고, 칸트는 법칙론적 윤리설의 주창자로서 거짓말(사기)이 나쁜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하지만 유용주는 그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이전에, 아니, 그것을 뛰어 넘어서서, 일 자체의 사랑을 역설하고, 돈 자체를 사랑하는 모든 기만적인 태도를 매도하게 된다. 포움(form)은 하나의 형식, 혹은 외양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일의 중요성이나 그 본질과는 동떨어진 사기꾼의 태도에 불과하다. 품(品)을 파는 사람은 지혜, 용기, 성실함으로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그 일의 목적에 비추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폼을 파는 사람은 주체성의 확립이나 일의 목적은 커녕, 돈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타인들의 눈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도 기만을 하게 된다. 일은 어느 특정 계급의 전유물만도 아니며, 그것의 과실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또한 일은 계층과 계급, 남녀노소, 출신성분,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생존수단이며, 그것의 과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같이 달콤하고, 또 달콤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싫어하는 데 그 문제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일의 성격과 그 산물(소득, 즉 경제적 이익) 때문에,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의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크고 작은 분쟁들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용주의 일 자체의 사랑은 그의 홀로서기를 통한 존재론적 모험의 결과이다. 이때의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은 “정직하게 품을 팔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간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라는 시구처럼, “우리 主 容珠”를 “그리스도”의 위치로 끌어 올리겠다는 것이 된다. 이미, 앞에서 전제한 바가 있듯이, ‘역도인과성의 세계’, 즉 미래의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가 그의 목표가 되고, 그 목표가 유용주의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이유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품을 팔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가겠다는 것은 이처럼 ‘주체성의 확립’(내재성의 확립)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와 동시에, “하루일당 사만 오천원에” 자기 자신의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고” 이 세상의 공사판을 “20년 가까이 떠돌아” 다녀야만 한다는 점에서,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 즉, 외재성의 확립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홀로서기는 이 내재성과 외재성, 즉 ‘밖으로부터 안으로의 운동’과 ‘안으로부터 밖으로의 운동’이 동시다발적이면서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론적 모험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험은 그야말로 우리 인간들의 생사의 문제가 걸린 것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모험을 통해서만이 청동보다도 더욱 더 강하고 튼튼한 영생불사의 인간이 될 수가 있다. 그 영생불사의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유혹, 질투, 시기, 장애, 불안, 공포 등과 맞서서----의 대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을 완성해낸 신성모독적인 싸움----‘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의 싸움이라는 점에서----의 대가이다. 이 안과 밖의 운동이 홀로서기이며, 그 존재론적 모험이다. 유용주는 그가 인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일 자체의 사랑이 육화되어 있는 시인이며, 이 시대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목수가 목수일 때는 돈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목수가 목수일 때는 모든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그 땀방울의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질 때까지 튼튼한 ‘사랑의 집’ 한 채를 짓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다. 하지만 그가 온몸으로 짓는 집 한 채, 혹은 시 한 편은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다같이 유용한 시-- 집이 된다. 어느 누가 그 시를 읽고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고, 또 그 지치고 힘든 몸을 편안히 뉘여도 상관이 없다. 유용주의 가장 가벼운 짐은 우리 인간들의 ‘가장 무거운 짐’이며,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목수의 금언이 오늘도 그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반경환, 「넓어지는 지평선」(행복의 깊이 1, 도서출판 애지 간) 에서
그렇다면 근면이 광기가 되고 성실함이 맹목이 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반하여, 어떻게 성실함을 연주하고, 또한 어떻게 그 성실함의 열매를 수확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성실한 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할 수 있는 삶의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분명한 목표를 구상하는 것은 지혜가 담당을 해야 하고, 그 목표를 향한 중단없는 정진은 용기가 담당을 해야 한다. 지혜와 용기를 가진 자는 목표와 수단을 얻은 자를 말하고, 이제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두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하기만 하면 된다. ‘만인 대 일인의 싸움’, 그 싸움을 연출해낼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이며, 만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해나갔던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고독을 모르고, 슬픔을 모르고, 불행을 모르고, 또한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향유해나갔던 사람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좌절하거나 우회하지 않는 사람이며, 또한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부모형제, 처와 자식,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와도 같은 사소한 인간 관계를 위하여, 그들의 분명한 목표를 탈색시켜버린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꿈(목표)의 인간이 되어야 하지, 타인들의 꿈(목표)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데모크리토스 등은 자기 자신의 꿈의 인간들이며, 그러나 그들의 성실함의 열매들----‘변화와 운동의 법칙’, ‘萬有不變의 법칙’, ‘원자론’----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체 인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더욱 더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빛을 발하고 있단 말인가? 대부분이 진정으로 성실했던 사람들은 ‘만인 대 일인의 싸움’의 주인공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이 현실적으로 패배(실패)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고독 속에서, 그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 이 세상을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며, 궁극적으로는 전체 인류의 문맹(어리석음)과 절대 빈곤으로부터 모든 인간들을 구원해냈던 문화적 영웅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도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의 사회성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시킨 자들에 불과하고, 진정으로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은 날이면 날마다 도덕과 관습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개인의 자유(독창성과 천재성)를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의 눈 앞의 사소한 이익을 버리고, 언제, 어느 때나 전체의 이익만을 돌보는 문화적 영웅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실함은 문화적 영웅의 모태이며, 게으름은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사기꾼들)의 모태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기꾼들의 양성소이며, 그들이 강조하는 근면은 광기가 되고, 또한 그들이 강조하는 성실함은 맹목이 된다. 성실한 자의 목표는 하늘의 태양이며, 그의 약속은 늘 푸른 소나무이다. 게으른 자(사기꾼)의 목표는 언제, 어느 때나 밤하늘의 먹구름이며, 그의 약속은 썩은 고사목(枯死木)의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여! 언제, 어느 때나 성실하게 생활을 하라! 근면이 광기가 되고, 성실이 맹목이 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가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면
십년 면벽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은 무엇이라 할까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
----천양희, 「알피니스트」 전문
천양희의 「그 사람의 손을 보면」은 ‘성자가 된 청소부’의 삶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구두를 닦는 사람’은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나게 만들고, ‘창문을 닦는 사람’은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나게 만든다. 또, 그리고, ‘청소하는 사람’은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나게 만들고, ‘마음을 닦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나게 만든다. 청소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청소부가 된다. 다시 말해서 그토록 간절하게 아름다운 천국을 희원하는 천양희의 예술가적 자질이 그 기적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닦고 또 닦는다는 것의 기적, 빛을 내고 또 빛을 낸다는 것의 기적, 나는 이 기적의 모태는 인간의 이상도 아니고, 예술가적인 자질도 아니고, 무서운 성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무서운 성실성이 없는 이상은 맹목적이고, 또 그것이 없는 예술가의 재능은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무서운 성실성은 금욕주의에 맞닿아 있고, 금욕주의는 그 어떠한 ‘정신의 암벽’도 극복할 수 있는 ‘알피니스트’, 즉, 성자의 출현의 모태가 되어준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법정에서 형이상학을 공개처형하고 비판철학의 시대를 활짝 열었던 칸트, 칸트의 흄적인 현상론을 비판하고 정신형상학을 구축했던 헤겔, 헤겔의 절대 정신을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역설했던 마르크스, 헤겔의 낙천주의를 비판하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의지마저도 부정하면서 염세주의를 옹호했던 쇼펜하우어, 칸트의 비판철학을 더욱 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밀고 나가면서 그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켰던 니체----,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최선의 생존조건을 마다하고 최악의 생존 조건 속으로 뛰어 들어갔던 사람들이며, 그 ‘만인 대 일인의 싸움’, 즉, 그 무서운 성실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들을 신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문화적 영웅들이었던 것이다. 종교는 최고급의 지혜의 저장소이며, 보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 즉, 미래의 인간에 대한 삶의 기록들로 집대성되어 있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부처, 예수, 마호메트, 시바, 제우스는 모두가 미래의 인간들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했던 철학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들의 영원한 제국(사상의 신전)을 위하여 무서운 성실성을 연주했고, 그 결과, 人神으로서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오,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철학예술가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사상의 신전을 건축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 더 강력한 적을 찾아서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펼치는 사람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날개를 돋아나게 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인간들, 자기 자신의 목숨을 하루살이나 파리처럼 가볍게 여기면서도 더욱 더 깊이 있게 사랑하는 대담한 뱃짱과 용기와 인내심의 영웅들, 하늘이 낮아지고 별들이 파아란 바다에서 몸을 씻고, 그리고, 마침내 사나운 파도마저도 잠들게 하는 영웅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어렵고 힘든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외롭고 고독한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아름답고 신명나는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그 싸움보다 더욱 더 성실한 자의 싸움은 없다.
이 세상에서 ‘만인 대 일인의 싸움’보다 더욱 더 극적인 역전의 드라마는 없다.
아아, 온몸이 갈갈이 찢어져 가면서도 더욱 더 행복한 영웅들이여!
아아,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혈의 핏빛으로 아침해를 떠오르게 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