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뜨거웠던 혁명의 열기에 얼었던 바다는 녹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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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 건너편에 전시된 세계 2차대전 당시 맹활약했던 C-56잠수함을 배경으로 러시아인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 잠수함은 독일 전함 여러 대를 격파한 '전쟁 영웅'이다. |
세르게이, 당신과 했던 진한 악수의 기억은 아직도 욱신거린 통증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신은 친구와 보드카를 병째 마셨죠. 벨기에 맥주를 주문해 먹던 우리 테이블에서 당신이 살짝 취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친구가 가고 나자 우리 테이블로 왔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했죠. 당신은 세르게이. 러시아 청년. 중국인이냐며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물었지요. 블라디미르 비쇼스키의 노래 '야생마'를 흥얼거립니다. '극동의 유럽' 블라디보스토크, 이제 그립네요.
■동해에서 해가 지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러시아를 향해 떠났다. 러시아~한국~일본을 오가는 여객선 DBS 페리 이스턴드림 호에서 일몰을 보았다. 동해에서 석양을 보다니. 기이한 체험에 흥이 났다. 2009년 취항한 이 배는 길이 140m의 1만 3천t급 여객선으로 530명이 탈 수 있다. 여행 내내 갑판은 개방돼 있다. 바다의 밤하늘을 맑아 별이 쏟아질 듯 많다. 낮에는 고래라도 만날까 봐 한동안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러시아 유일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
거리 가로수 파릇파릇한 기운 가득
광장엔 2차 세계대전 활약 잠수함이
9천288㎞ 시베리아 횡단 열차 체험에
일제강점기 항일 고려인의 흔적도
부산 출신의 이스턴드림 호 정동화 선장이 "더러 고래가 배를 따라오며 놀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몰처럼 승객에게 방송으로 알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고래는 금방 사라져버릴 수도 있기에. 선장의 속내는 고래를 보려고 한꺼번에 승객이 몰려 생길 수 있는 안전사고를 우려해서다.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동해를 떠난 지 23시간 만에 도착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예상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뒤집힌 알파벳 같은 독특한 러시아 문자가 먼저 반겼다.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눌러앉아 러시아인과 결혼한 이현창·유승호 씨. 12년째 이곳에서 산다는 이 씨에게 부러워서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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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 뒤로 보이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 |
"러시아 여성은 다 미인이라던데 부럽네요." "막상 살아보면 안 그래요. 한국 여자가 더 좋아요."
러시아의 5월은 봄이 오는 시기. 환절기라 날씨는 들쑥날쑥 하지만, 긴 겨울이 끝나면서 산천과 초목이 푸르게 살아난다. 가로수는 막 싹을 틔웠고, 자작나무는 여린 잎을 나풀거린다.
시간이 남아 독수리전망대로 갔다. 항이 한눈에 보인다는 곳이다. 이곳 기념품 가게는 물건이 많고 가격도 싸기로 유명하단다. 모자 수집이 취미인 코레일 매거진 장성용 기자는 러시아 철모를 사고 '득템했다'며 좋아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만났던 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가까운 혁명광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휴일에만 장이 선다. 그런데 월요일인데도 장이 열렸다. 가이드 유 씨는 "5월 9일이 러시아 전승기념일이자 토요일로 휴일이 겹쳐 월요일이 대휴로 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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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 |
가정에서 만든 햄과 야생에서 채취한 벌꿀, 당근과 감자, 오이와 토마토, 생선과 꽃나무 그리고 김치까지 없는 게 없었다. 방울토마토 1㎏이 고작 100루블(한국 돈 2천200원 정도)이라 냉큼 샀다.
이곳 벌꿀은 가짜가 없다고 한다. 왜냐고? 설탕값이 더 비싸기에. 얼른 작은 꿀도 한 통 샀다. 같이 관광을 나선 한국 어르신들은 각각 꿀 10개씩을 사며 싹쓸이를 했다. 무뚝뚝한 러시아 상인도 주문이 폭주하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혁명광장 건너편에는 2차 세계대전 때 맹활약했던 잠수함이 전시돼 있다. 주변 일대가 개선문과 무명용사의 묘가 몰려있는 공원. 잠수함은 내부 관람도 가능하다.
막 신록이 시작되는 공원 곳곳에는 과감한 애정표현을 하는 커플이 많았다. 가이드 이 씨는 저렇게 진한 사랑을 하고, 결혼하지만 이혼율이 90%에 육박한다고 했다.
한 동상 앞에서 러시아 미녀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 자연스레 눈이 갔다. 러시아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국민가수 블라디미르 비쇼스키의 동상 앞. 비쇼스키는 마흔을 갓 넘기고 요절했다.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동상 주변의 스피커에서는 비쇼스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야생마. 드라마 미생의 오 차장이 불러 더 알려진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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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에 있는 이상설 선생 추모비를 찾은 한국 관광객. |
'이 약한 내 영혼과 내 가슴을~ 누구도 동정하지 마라 운명을 바꿀 테니~.'
구소련 체제의 저항 가수였던 비쇼스키의 기일이면 동상 주변 작은 광장은 붉은 장미로 뒤덮인다고 했다.
■최재형을 알고 오다 "9288을 아세요?" 가이드 유 씨가 질문했다. '9288'은 92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거리이다. 총 9,288㎞로 꼬박 열흘이 걸린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역의 시계가 고장난 것처럼 좀 이상했다. 한국과 시차가 한시간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시간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통과하는 모든 역의 표준시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시차가 7시간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조금이라도 체험하고자 우골나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진행 방향 왼편에 앉으면 아무르만을 볼 수 있어 좋다. 우골나야역에서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우수리스크. 특히 고려인이 많이 사는 이곳은 연해주의 고려인에게 뜻깊은 지역이다. 상해 임시정부보다 더 빨리 설치된 임시정부로 평가받는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 이 '임시정부' 자리는 예전에도 학교였다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학교다. 아이들이 뛰어가기에 사진을 찍자 휙 돌아서며 포즈를 취해 준다.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됐다가 돌아와 지병으로 숨진 이상설 선생의 비가 들판 한가운데 있다.
함경도 출신으로 연해주에 최초로 이주한 조선인 1세대 최재형 선생은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이다 1920년 4월 학살 때 일제에 의해 희생되었다. 사재를 털어 무장독립군을 지원하고, 항일조직인 동의회를 결성, 대동회보 등 언론 활동도 활발했다.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한 단면이다.
연해주 한국인의 거주지였던 신한촌 터에는 기념탑만 덩그랗다. 한쪽 작은 관리실에 사람이 있었다. 한인회 회장을 지낸 리바쳬슬라브 씨다. 리 씨는 중풍을 앓아 몸이 불편하지만 매일 나와 기념탑을 지킨다.
방명록에는 '한국인이어서 자랑스럽다'고 쓰여 있다. 일제의 학살, 소련의 강제이주를 견뎌낸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심장은 여전히 뜨거웠다.
블라디보스토크=글·사진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여행 팁
부산에서 '극동의 유럽'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길은 만만찮다. 강원도 동해시 동해항에서 크루즈 페리를 타고 가기에 시간이 다소 많이 걸린다. 하지만, 선상 여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한 번의 여행으로 두 가지 유형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일정이 '크루즈로 가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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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턴드림호 선상의 일몰. |
동해항~블라디보스토크 항은 꼬박 24시간 정도가 걸리는 긴 여행이다. 여객선 안에서도 얼마든지 음료와 주류를 살 수 있지만, 사전에 약간의 음식을 준비해간다면 선실은 훌륭한 카페가 된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이스턴드림 호는 갑판이 내내 개방될 뿐만 아니라 꽤 넓어 가볍게 산책을 하기에도 좋아 전혀 갑갑하지 않다.
극동의 연해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의 영역. 그래서 동방에서 유럽을 만끽할 수 있는 독톡한 곳이다. 시베리아 열차로 배송된 유럽 각국의 맥주는 물론, 블라디보스토크 특산물인 대게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시베리아 들판에 지천으로 깔린 명이나물과 고사리는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이긴 나라답게 러시아는 무기 역사를 전시해 놓은 요새박물관과 각종 전승 기념물이 크고 웅장해 볼거리가 많다.
코레일관광개발은 부산에서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항일 유적지 우스리스크를 돌아보는 5일짜리 DBS 크루즈 페리 여행을 판매 중이다. 매주 일요일 출발하며 5~6월은 64만 9천 원. 성수기인 7~8월은 69만 9천 원이다. 부산에서 동해항까지는 전세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돌아올 때 묵호항 자유관광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코레일관광개발 홈페이지 :www.korailtravel.com. 051-466-8120~2.
이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