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총림 송광사 사시예불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불공과 법회의식은 둘이어야 할까?
‘명종(5회), 개회, 삼귀의, 찬불가, 예불 및 반야심경, 송경, 청법가, 입정, 설법 정근, 발원문 봉독, 보현행원의 노래, 사홍서원’(<통일법요집> 699쪽)으로 진행되는 ‘현행’ 법회의식이 언제부터 이와 같이 사용되었을까? 법회를 ‘설법회’의 약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가르침을 널리 펴는 불사(佛事), 도량(道場) 등의 의미로 통용되었다고 보인다. 고래의 의궤에서는 현재와 같은 유사한 편제로 나타나는 것조차 찾아보기 어렵고, <석문의범> 모본인 <불자필람>(1931)의 ‘강연의식’에 뿌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 이와 같은 편제로 학생.청년법회와 거사법회 등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의례집의 목차에서 ‘법회편’이 간헐적으로 등장하다가 1990년대 이후가 되면, ‘예경편’ ‘불공편’과 같이 ‘법회편’ 편제가 보편화 된다.
현행 신행체계 중심은 보살행
공양과 설법 실천 뗄 수 없어
‘보궐진원’ 전 법문으로 일원화
불공의식에 재공양과 법공양, 송주의식과 설법의식이 다 담겨 있었지만 이 두 의식이 마치 공양하는 의식, 설법하는 의식으로 분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재(財)공양이 끝나면 ‘삼귀의’로 법회의식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 결과 불공이 끝나면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자리를 뜨고, 법회 참석이 목적인 이들은 불공이 끝난 시간에 동참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의식은 어떻게 시설되어 있으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흔히 영산재의식이 상주권공으로, 상주권공이 삼보통청으로 축소되었다고 이해하는 경우도(심상현) 있는데 일편 일리는 있지만 상주권공의 순차가 불공과 설법이라는 두 축의 관계에서 설법이 선행되므로, 불공의식 이후 설법의식이 진행되고 현실상 적합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불공과 설법이 2원화된 현행의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여 결국 둘이 아닌 한 의식으로 통합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이는 불공에, 어떤 이는 설법을 들으러 절에 올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믿고 실천하는 신행체계는 대승불교, 특히 보살행 실천을 수행의 목적으로 하고 있는 화엄사상을 근저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승보살의 큰 원은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원과 다를 수 없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을 듣고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또 불공의식은, 사전에 ‘엄정(나와 도량을 청정하게 하고)’을 하고, ‘소청(공양 올릴 분들을 청하고)’, ‘헌좌(그분들께 자리를 권해 드리고)’, ‘권공(공양을 가지하여 권해드리고)’, ‘풍경(경전을 읊고 외우며)’, ‘표백(재자의 소원을 빌고)’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공양을 올리는 ‘권공’과 경전을 외우는 (법공양, 법시) ‘풍경’이 한 의식이었다. 또 시식의 경우도 무외시.재시.법시가 정연하게 베풀어졌다. 시식에서는 법시에 사용되는 경구(經句)가 종파에 따라 <법화경> 또는 반야경전의 게송이 채택되었다. 불공의식의 보궐진언은 <오종범음집>(지선편, 1661)에 따르면, 법시(공양)로 올려지는 경전을 완전히 읽지 못했을 때 염송하는 진언이다. 따라서 보궐진언에 앞서 법문을 하면 공양과 설법이 일원화 될 수 있다.
삼귀의의 역할은 무엇일까?
법회의식 서두 ‘삼귀의’의 역할을 살펴보자. ‘삼귀의’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며 절하는 의식이라는 것쯤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삼귀의가 여타의 불교의식에서는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또 불교의궤에 삼귀의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의궤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되면 불교의례에서 ‘삼귀의’의 의미와 역할이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법시.법공양보다 봉송 뜻 강해
중단예경 행법으로 안 어울려
중단 반야심경 염송 재고돼야
첫째, 여타 불교의식에서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귀의불양족존), 삼귀의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의식으로 ‘시식의식(施食儀式)’을 들 수 있다. 영가에게 음식을 베푸는 시식의식에서 삼귀의가 등장하는 곳은 초청영가들로 하여금 귀의삼보를 하게 할 때 쓰인다. 법사 스님이 ‘귀의불법승’을 하면 영가를 대신해서 대중이 ‘귀의불양족존~귀의승중중존’을 한다. 불법승 삼보를 모르는 영가에게 삼귀계를 주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몽산덕이(蒙山德異) 스님이 수주(修註)한 <증수선교시식의문(增修禪敎施食儀文)>(16세기 자료)이나 <석문의범>의 ‘전(奠)시식’에는 부른 영가의 삼귀의계 수계의식이 재시(財施) 이전에 축조된 데 비해 현재 천도의식으로 널리 쓰이는 ‘관음시식’에는 봉송의식의 전별편에서 행해지고 있다. 삼귀의계를 받고 영가의 장애를 해소한 이후 공양을 받고 법공양을 얻은 후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구조의 시식의식에서 말미에 삼귀의를 행하는 것은 전후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둘째, 그렇다면 법회 서두에 하는 삼귀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삼귀의’를 노래로 봉행할 때는 편의상 반배를 하지만 화음으로 창할 때는 큰 절을 한다. 법당에 처음 들어갔을 때 삼보님께 절하는 의식이 삼귀의례다. 의례문을 보면 ‘지심신례불타야양족존(至心信禮佛陀耶兩足尊), ~달마야이욕존, 승가야중중존’(서산대사 찬 <운수단가사(雲水壇詞)>)이나 ‘지심귀명례 시방상주 일체 불타야중’(<불자필람>의 설교의식)인데 ‘부처님께 일심으로 절합니다’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운수단가사(雲水壇詞)>의 의례문에 따르면,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면 지옥의 고통을 소멸하게 되고, 달마야중에 귀의하면 아귀의 고통을, 승가야중에 귀의하면 축생의 고통을 소멸하게 된다고 하고 있다.
이 두 가지로 볼 때 삼귀의는 수계할 때의 의문(儀文)이며, 삼귀의례는 삼보님께 행하는 예경문이다. 곧 삼귀의례는 삼불법승에 귀의하며 칭명하여 그 가피에 의지하여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소멸하고자 하는 예경발원이다. 현행 삼귀의는 아직 삼보에 귀의하지 않은 동참 대중에게 삼보에 귀의하게 한 후 부처님의 법을 들려주는 강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삼보에 귀의한 불제자들에 의해 봉행되는 일상 법회의 삼귀의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삼귀의례 혹은 삼정례의 삼귀의를 봉행하는 것이 여법하다고 보인다. 혹자는 부처님께 자주 귀의하면 나쁠 게 없지 않나 하는데, 부처님께 귀의한 후 사도를 믿었다가 다시 발심하는 경우가 아니지 않는 한 부처님을 믿겠다는 서원은 한번 약속으로 끝난 것이고 늘 삼보께 예경하는 의식이 옳다고 생각한다.
반야심경은 왜 읽을까?
법회 때 삼귀의를 하고 찬불을 한 후 행하는 <반야심경>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불 때 신중단을 향해 <반야심경>을 염송하는데 왜 할까? 또 불공이나 재공의 회향으로 <반야심경>을 염송하는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현행 <반야심경> 독송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지, 전통의례와 비교하며 살펴보자.
찬불 다음에 이어지는 심경은, <불자필람>(1931, 안진호 편)의 부록 설교의식과 강연의식의 차례를 비교해 보면 ‘송주(誦呪)’의 의미로 염송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묘장구다라니의 기능을 하는 현교용(顯敎用) 송주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통일법요집>(1998)의 일반법회 순서에는 ‘송경(소의경전 등을 약 5분 분량 정도 다 함께 봉독)’을 시설하고 있다.
다음은 신중단에서 행해지는 <반야심경> 염송이다. ‘중단에 수행인이 절을 하면 신장들이 감복한다’(월운스님, <일용의식수문기(日用儀式隨聞記)>)는 이유로 정화 이후 신중단 예경은 하지 않고 <반야심경>을 염송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럴까?
첫째, 제위신중께 법공양이나 법시로 염송하는 것이라면 제위신중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신중불공 헌좌게 “원멸진로망상심(願滅塵勞妄想心) 속원해탈보리과(速圓解脫菩提果)”의 인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39위 신중의 상단은 제석천왕과 4천왕들이고 하단은 불법을 옹호하고자 서원한 신중이다. 109위 신중의 상단은 석가화현 예적금강성자이다. 다시 말해 불격(佛格)이다. 신중청 청사에는 ‘예적금강 천부공계 산하지기’라 하여 불격(佛格)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과연 미계(迷界)에 있는 우리들의 법시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둘째, 회향의 봉송(奉送)과 안위(安位)의 보내는 의미를 담고 있는 염송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륙재의 경우 재가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떠난 사직사자(四直使者)를 봉송할 때(인광찬 <수륙의궤회본>(굉원출판사, 중화민국 94年, 74쪽)와 공양을 위해 자리에 앉도록 할 때(죽암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반야심경을 염송하고 있다. 또 법자리가 파했으니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진언으로 반야심경이 염송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자를 심부름 보내는 진언으로 공양의 자리로 옮겨가라는 의미로 반야주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심경 염송은 법시나 법공양이라기보다(백파스님은 영가시식 때 보공양, 보회향이 끝난 후 영가가 음식을 충분히 드시는 것을 관상할 때 반야심경을 송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고 있다. ‘작법귀감(作法龜鑑)’ (<한의총> 제삼집) 389下) 봉송의 의미가 있다. 때문에 중단 예경은 사직사자를 청해 사부(四部, 불계 천상계, 인간계, 유명계)로 보내는 경우가 아니므로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염송하는 것은 어울리는 행법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이 반야심경을 다 염송할 수 없을 때 반야주 혹은 ‘마하반야바라밀’의 염송으로 미계(迷界)에서 오계(悟界)의 피안(彼岸)으로 떠나겠다는 염원과 소청 불보살님을 봉송하는 의궤를 동시에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청만 있고 봉송이 없는 우리의 불공의식에, 사바교주 석가모니불을 삼칭하는 회향가지 앞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삼편 칭하는 것은 봉송의식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 104위의 신중단 예경과 39위 신중단 예경을 구별하여 3정례 예경으로 환원돼야 하며 중단 반야심경 염송은 재고돼야 할 것이다.
전통과 현실의 조화 속에
체계적이며 아름다운 우리말로
한국불교의례는 나라에 의해 공인되고 수용되면서 수행의 구체적 모습이 아닌, 양재구복의 대행자라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 축소와 변형을 겪어 본래 의미를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또 단절되거나 지리적 차이로 말미암아 다양한 형태의 의식으로 변화되고 분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역사 위에서 조계종단이 <통일법요집>을 만들고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것은 역사적 사명이자 당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역사와 현장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의례를 통일하고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더 이상 한문 일변도의 의식으로 현대의 불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 공양과 같은 ‘불공’이라는 신행이 없이 설법을 통한 교학의 이해에만 치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종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불공과 법회의식을 창출해야 한다. 전통을 수용하되 현실의식을 조화를 이루며, 깊이 있는 의례의 이해 아래 아름다운 우리말로 의례를 진행할 수 있는 법요집이 나와야 할 것이다.
첫댓글 얼마전 불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송년식에 갔었습니다.
근데 뜻도 이해하기 어렵고 우리말로 풀어 쓴 말도 아닌 얼치기 중국식 한자의 발음대로 반야심경을 합송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나이 어린 애들과 함께...
법회도 현실에 맞게.. 설법도 나이와 공부정도에 따라 가르치는 스님과 포교당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