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중엽 영남도(嶺南圖) 동래부의 지도에서는 해운대와 장산을 어떻게 다루어왔을까? 지도는 무엇을 설명했나....
해운대는 동래부 관할의 동면에 속하면서 동래 12臺중의 하나인 海雲臺로 관리되어왔으며, 장산은 상산으로 관리되어 온 것이다.
萇山은 오직 國基로서 구邑城基, 동평縣基와는 다른 군사적 지리 기점에 해당하며 오늘날 민락동 백산 첨이대 위치가 白鹿臺로 이 지점을 萇山國基에서 15리라고 영남지도 동래부에 주기되어 있다. 당시 동래부에서의 장산 공식 지명은 상산선제봉산이었다.
장산으로의 이름은 경상좌수영에서 군사적 목적에서 사용하던 것을 대한제국 군제개혁시 산림통제 목적을 더해 변경한듯 하다.
한편 봉대는 간비오좌도좌변초기봉대를 기점으로 5개봉대를 좌수영에서 관리했으며 봉군(烽軍)이 519명이나 되었다. 발군(撥軍 : 파발군의 준말)의 정원은 45명에 불과했으나, 9곳의 진에 전선(11척)과 병선(11척), 사후선(22척)현황이 지도상에 기록돼 있다.
별도로 좌수영 본영에는 전선4척,병선4척,사후선8척이 있었고, 속 군인이 3,402명이었다. 감영에는 원회미 8.376석을 보관하였으나, 지금의 예비군과 같은 속오군이 1,703명이 현황으로 나와있어 당시 변방 동래감영에는 특별한 다른 군대는 없었던것 같다.
지도에서 해운대는 오로지 군사요충지인 국기,선제봉산, 봉대가 있어 통제영, 좌수영, 감영의 통제가 심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곡식의 보관. 운반과 군선의 유지보수를 위한 선제봉산의 소나무관리는 아주 중요하여 부역이 추가 되었음도 짐작하게 합니다.
이 지도에 해운대 우현지경참의 역참이 보이지 않고 동백섬의 표기도 없어 아쉽다. 더구나 바다 방어의 핵심 浦와 船所는 보이지 않고 9곳의 鎭만 표시되어 있다. 지도상 개운포,두모포,포이포,서평포 등 4개포 곡식 내용의 기록은 보이나, 재송포와 해운포는 내용이 보이지 않아 이때 포와 선소가 폐지 또는 이전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해운대구의 역사는 수정되어야 한다.
나는 이 고지도의 작성시기를 1783년12월로 본다. → 己卯民戶 六千六百五十三戶(남12,287명,여13,466명)의 통계에서
●정조 7년 12월 3일 경신
경상도 관찰사 이병모가 곡식 옮기는 배가 출발하였다고 치계하니 하교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가 곡식 옮기는 배가 출발하였다고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날씨가 맑고 따뜻한 때에 선척(船隻)들이 인차(麟次)로 도착하고 있어
민생들의 일이 천만 다행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풍파(風波)를 잘 살피어 호송(護送)해야 한다는 것으로
경상 감사(慶尙監司)와 독운 어사(督運御史)에게 준엄하게 신칙해야 한다.
조가(朝家)에서 영남(嶺南) 곡식의 관동(關東) 운반에 있어서
낮이나 밤이나 마음이 쓰이어 거의 침식(寢食)을 잊고 있다.
이미 도박(到泊)한 것이 거의 1만의 수량에 가깝고
이미 장재(裝載)한 것이 또한 절반이 넘게 되었지마는,
그래도 운반하지 못하고 있는 나머지 곡식의 수송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계속해서 장문(狀聞)하라는 뜻으로 원춘 감사(原春監司)에게 분부하라."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정조) - 정조 7년 12월|작성자 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