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 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 해 설
구전가요 「부용산」은 슬픈 가사에 애조 띤 가락이 잘 어우러지는 노래다. 지난 시절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며, 전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입에서 입에서 전해지며 맥이 이어지고 있다. 80년대에 는 대학생들 사이에도 꽤 널리 퍼졌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노래는 해방 직후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 과 국어교사 박기동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요절한 여학생의 상여 나가는 소리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는 그보다 몇 해 전 박교사가 전남 벌교에서 그 역시 일찍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고자 쓴 것이다. 최근에 1절이 지어진지 52년만에 2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벌교인들의 마음속에 가슴절이며 애절하게 불리워졌고, 호남인들의 마음속 아름다운 전설 처럼 입에서 입으로 불리워 졌으며 "엄마야 누나야" 작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안성현씨가 가족을 데리고 월북 한뒤 부터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이 념이나 사상과 무관한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던 "부용산 오리길"로 시작된 부용산 노래가 벌교인 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왔습니다. 이 노래는 일본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박기동 시인이 꽃같이 사랑스럽고 짧은 생애를 마친 누이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애닯은 심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박기동선생 약력
▷ 1917년 10월 20일 여수군 돌산면 둔전리 517번지 출생.
▷ 1929년 초등학교 4학년때 돌산에서 벌교 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
▷ 1931년 벌교 보통학교 (현 벌교남초등학교) 6회 졸업.
벌교에서 초등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 대학을 일본에서 학업을 마침.
▷ 1943년 일본관서대학 영문학과 졸업후 벌교로 귀국.
▷ 1943년 10월 벌교남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 1943년 10월 ~1946년 1월 31일까지 3년 9개월동안 벌교남초등학교 재직.
▷ 1946년 2월 1일 광주 서석초등학교 발령.
▷ 1946년 2월 1일 ~ 1946년 11월 14일 광주 서석초등학교 재직.
▷ 1946년 11월 15일 벌교공립초급 중학교 발령 (현 벌교상업고등학교)
▷ 1946년 2월 1일 1947년 3월 31일 벌교공립 초급중학교 재직.
▷ 1947년 4월 1일 순천 사범학교 재직.
▷ 1948년 초 목포 항도여중 전근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 현재 호주 시드니에 거주.
부용산 사연의 주인공 故 박 영애
▷ 1923년 4월 30일 출생 (1941년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 감)
▷ 1947년 9월 6일 순천국립병원에서 사망, 벌교 부용산에 안장.
이 노래의 주인공 이름은 박영애 이며 벌교 선근교 부근에서 여산한약방을 운영하신 부친 박준태씨의 3남 3녀중 2녀였으며 나이 18세(1941)때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몸이 허약한 누이동생은 자식을 낳지 못한체 24세의 꽃같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순천도립병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박기동시인은 누이동생의 짧은생애가 애달퍼 벌교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오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는 누이동생이 안스러워 가슴을 저미며 이 시를 쓴 것이며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표현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낳지못하고 고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 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박기동 시인이 1948년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재직중, 문학도였던 제자 김정희(항도여중 3학년)양이 폐결핵으로 죽었다 합니다. 여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음악교사였던 안성현 선생께서 박기동선생이 써놓은 부용산 시를 보고 여기에 곡을 붙여 "부용산 노래가 완성되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