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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해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 가운데에서(부활 제4주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신앙인 각자가 생각해 보도록 초대한다. 일상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분을 더 잘 따르고자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유로이 투신하는 삶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그분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분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고, 또한 부르심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그 부르심에 따르지 않고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행복이 가능한 것일까?
성소, 부르심의 의미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성소’(聖召, vocatio, Beruf)와 ‘부르심’(call)이라는 말은 같은 듯하면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성소는 성사적 신분으로의 초대로, 부르심은 일상에서의 내적 자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어부나 세리였던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성소의 원형으로 생각하여 이를 통해 열두 제자로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곧 오늘날 교회의 직분인 사제나 부제로 서품되는 의미로 성소를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부르심이라면 그분의 위대함 때문에 모두가 거룩하고 완전하여 ‘거룩한 부르심’(성소)이 된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1서 등에서 부르심(Klesis)을 이야기할 때, ‘부르심’이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해당하며 신앙으로 초대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성소’(vocatio)는 고대 교회에서 특별히 ‘수도승으로의 부르심’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오늘날에도 수도 성소는 그런 의미의 유효한 표현으로 복음적 삶의 모범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소’라는 단어가 한편으로 수도자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면서도 다른 한편, 세상의 모든 신분이 창조주로부터 받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는 신학적 성찰이 시작되면서 세상의 일(직업) 모두가 각기 존귀하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루터는 일반 그리스도인(평신도)보다 우월한 지위로 대접받는 수도자의 성소를 오히려 비판하였고, 모든 신분과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실천 속에서 ‘성소’라는 종교적 의미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점차 세속적인 직업, 일 모두를 ‘성소’(Beruf, vocation)로 불렀다.
오늘날 영어의 ‘vocation’이나 독일어의 ‘Beruf’는 직업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우리나라와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부르심’과 같은 의미로 ‘천명’(天命)이나 ‘하늘의 뜻’을 사용한다. 「중용」에서는 천명, “하늘이 하명하여 부여한 것을 본성”(天命之謂性)이라 한다. 여기서 본성은 현대어로 ‘양심’에 해당할 것이다.
정약용은 천명은 ‘본성’뿐 아니라 순간순간 ‘경고’로서도 주어진다고 가르쳤으며, 하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면 천 · 상제와의 인격적 관계가 관건이라 생각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마침내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도 ‘천명’을 따랐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인간은 이를 알아듣고 그분의 뜻을 따른다. 자연 종교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본성’ 안에 담아서 주었다고 말을 하든, 계시 종교에서처럼 특별한 계기에 은밀한 부르심이 있다고 말을 하든, 부르심은 하느님에게서 연유한다.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대는 우리 삶 속에 가득하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알아차리느냐에 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언제나 하느님께서 나보다 먼저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 내가 그분을 까맣게 잊고 있어도 그분은 내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신다. 내가 그분의 부르심, 문 두드림을 알아차리고 문을 연다면 그분은 내 운명에 들어와 삶의 모든 진실과 참행복을 나누어 주신다.
부르심에 잘 응답하려면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아차리려면 무엇보다 세 가지 요소, 곧 기도, 일상에 대한 성찰, 그리고 자유가 중요하다.
첫째, 기도란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과 친교를 이루는 행위이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인격을 깊이 듣고 느끼며 응답하는 가운데 그분과 친교와 사랑이 생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둘째, 성찰이 부르심을 알아듣는 데 왜 중요한가? 우리가 사는 사회, 공동체, 세계 속에서 일상의 많은 사건과 경험들을 겪게 되는데 이런 사건과 체험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고 관찰한다. 우리 삶을 성찰하는 방법을 예수님은 기도로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0-13).
우리 삶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뜻은 바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드러난다.
셋째, 자유가 부르심을 알아듣는 데 중요하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을수록 그분의 목소리를 더 잘 듣게 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다만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루카 12,22 이하 참조).
진리와 진실,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직업, 성공, 업적을 부수적으로 돌릴 줄 알면 자유로운 사람이다.
부르심은 신분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
위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세속적 욕망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진리), 또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서 삶의 현장, 곧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는 행위’를 식별이라 말한다면, 이를 하느님 관점에서는 ‘부르심’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이 성직이든, 수도 생활이든, 평신도의 길이든 신분에 따라 ‘부르심’, ‘성소’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신앙 행위)의 질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
문을 두드림과 문을 엶, 부르심과 알아차림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발적 투신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사제나 주교, 수도자가 자신의 신분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예’ 하는 순명이 없다면 성소의 삶이 아니다. 평신도로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세상의 ‘장터’에 살지만 장터 한가운데서 하느님과 일치하며 한계 속에서도 카이사르의 것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해 가는 길이면 이것이 성소의 길이다.
신앙적 진리를 증언하다 처형당한 순교자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생명을 내어 준다.)의 모범을 보인 안중근, 로레토 수녀로서 안정된 교사생활을 떠나 캘커타의 가난한 이들 속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고 ‘빈자들의 어머니’가 된 마더 데레사, 식민지 · 민주화 · 산업화 시대 등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정치 사회 운동과 농민 운동과 한살림 생명 운동으로 사회를 변혁시킨 장일순처럼, 이들이 세상 끝날까지 살아 계시며 세상을 완성하시고자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응답한 이들이다.
이들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이가 걸었던 세상의 욕망을 추종하지 않고 이기적 삶을 거슬러 진리와 세상을 위해 생명을 바치거나 일생을 봉헌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동시대의 사람과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영웅적 삶이 아니라도 좋다.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에 따라 자신의 재능과 생명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한 사람들은 모두 ‘부르심’에 충실하고 ‘믿음의 싸움’을 잘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부르신다
세상의 어떤 직분이나 어떤 직업의 사람도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부르심을 받고 사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저 세상의 유행이나 관행 속에 살면서 형식적으로 신자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어렴풋이 부르심을 들을 수 있을지라도 부르심에 응답한 삶으로 가기는 어렵다.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질 줄 알았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지만, 그분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자신이 소유한 재산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17-22 참조). 그는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부르심의 삶은 안정된 정서와 숙달된 일, 습관화된 제도에 놓여있지 않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포기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영혼 깊은 곳에서 살짝 터져 나온다. 자신이 내외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노예였음을 일순간 한 줄기 빛으로 조명받으면서 해방되고 새로운 비전을 얻게 된다. 그 변화는 갑작스러운 선물로 찾아오기에 은총이다. 은총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다. 나만의 ‘탈출기’ 사건이고 미래의 ‘가나안’으로 떠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 인생 전체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하느님 부르심의 연속이다.
[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부르시는 주님과 응답하는 인간
성경 이야기는 대부분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에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온다.성경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은 당신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도록 누군가에게 소명을 맡기시는 대화로 시작된다. 그런데 부르심을 받은 성경 속 인물들의 유형을 보면 놀랍게도 특출하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처럼 평범한 이들일 경우가 훨씬 많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방법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더우기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분께서 한 번만 부르시고 끝나 버리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부르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지도자나, 당시 시대를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로 부르셨다. 정든 곳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약속의 땅으로 떠나라고 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려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부르셨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자, 주님은 이들을 미디안족에게 넘겨 곤궁에 빠트리시고, 그들이 다시 주님께 부르짖자 이스라엘을 다시 미디안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라며 기드온을 부르셨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도록 쓴소리를 담당한 요나를,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부른 사무엘을, 정치, 사회, 종교 등 모든 분야가 부패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시기에 이들에게 멸망을 경고하라고 예레미야를 선택하여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쓰시고자 부르시는 시기와 방법은 저마다 다양하다. 이집트 궁중에서 40여 년, 미디안 땅에서 40여 년을 산 나이 여든이 다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라는 사명을 주시기도 하셨다.
부르심의 공통적 특성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에 참여하도록 협력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공통된 특성이 나타난다.
먼저, 예수님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머물고 그를 부르시면, 무명의 한 인간이 고유한 이름과 얼굴을 지닌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우뚝 선다.
두 번째 특성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당신의 협력자로 부르실 때는 많은 경우, 그가 살아가는 일상 삶의 터전 안으로 들어가시어 부르신다.
세 번째 특성은, 이 부르심이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들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성들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구체적인 일상 삶의 상황 안으로 들어가시어 무명의 누군가를 바라보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는 그늘에 가려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인물에게 인격적 권리와 사명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주체적인 인격체로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어떤 특정한 시대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현재 삶의 자리에서 깨어있음으로써 각자를 고유하게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쇠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응답하는 인간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구약 성경의 이사야와 아모스와 아브라함에게서 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여러 사람을 부르시는데, 그 과정에서 하느님은 말씀만 하실 뿐만 아니라 부름 받는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무언가를 보여 주시거나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불러내실 때 그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음을 처음부터 알려 주신다. 그와 더불어 두려워하지 마라며 함께하시며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사무엘처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 3,10) 하고 바로 수긍하기도 하지만, 모세는 몇 번이나 핑계를 댄다. ‘사람들이 저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입이 안 떨어져 말을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몇 번이나 부르심에 대해 못하겠다는 핑계를 댄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할 대답과 표징을 주시고,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워 결국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완수하신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자인 동시에 충실함과 불충실함의 양면성을 지닌 인물로 드러난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단순하게 곧바로 응답하기도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일관되지 못한 행동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배반하는 비겁함에 빠지지만, 곧바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맑은 양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정 안에서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더디게 걸어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는 실패의 체험을 통해 진정한 내적 변화를 이루어 온 존재로 주님을 따른 참제자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약함을 당신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며 당신이 선택한 이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다시 부르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보는 부르심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가셔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첫 네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마태 4,18-22)는 예수님의 이 핵심적인 선포 말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회개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필수적인 조건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짓는 출발점이다. 지금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각자의 삶의 방식 안에서 당신을 충실히 따르라는 초대이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는 네 어부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함께 무명의 네 어부는 시몬,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라는 고유한 이름과 얼굴을 지닌 주체로 모습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결정적인 응답을 드리는 능동적인 인물로 소개된다.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은 장소가 그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래아 호수로 분명히 제시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일상 안으로 들어가시어 매우 명료하고 단순한 말씀으로 그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따라야 할 대상이 예수님 자신이심을 명료하게 밝히신다. 이 말씀에 부르심의 내용과 목적이 담겨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아기 예수님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셔야만 했던 지난날의 역사(마태 2,13-15 참조)가 암시해 주듯이, 세상의 권력에서 거부된 한 사람을 따르는 것임을 시사한다.
부르심을 받은 이가 모든 것을 ‘버리고’(4,20.22)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이유 없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겪어야 할 고통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운명에 참여함으로써 은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가 가야 할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어 주신 주님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를 직접 일러 주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지난날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상황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경 인물들의 삶의 변화를 통해, ‘내가 진정한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 근본 조건은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배운다.
주님의 부르심은 무엇보다도 당신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으로서 내 삶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환히 밝혀 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나의 응답은 전 생애 동안 온 존재로 지속해서 드리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 사랑에로 부르심
스무 살이 되던 해, 필자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수도자요, 사제로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부르심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
나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성소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임을 가슴 깊이 느꼈다. 수도 성소, 사제 성소, 평신도 성소는 직무적인 성소로서 외적으로 구별되는 것일 뿐, 결국 우리 모두는 날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부르심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필자는 8년 가까이 우리 수도원의 성소 담당자였다. 성소 주일마다 강론과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당시 나는 수도 성소가 다른 성소보다 우월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교구 사제 성소, 평신도 성소 등 세상의 그 어떤 성소보다 수도 성소가 더 고귀하고 거룩하다고 여겼다. 물론 자신의 성소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성소를 차등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영적인 교만이었다.
흔히들 ‘성소’라고 하면 사제 성소, 수도 성소, 결혼 성소를 떠올린다. 이렇게 분류하면 “그럼 결혼하지 않고 수도자도, 사제도 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무슨 성소입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듯싶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주 교회 안팎에서 어떤 범주에 우리를 가두는지 반성하게 된다.
성소를 어떤 신분이나 제도 안에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성소를 틀에 가둘 때, 예컨대 수녀님은 일반인과는 달리 티 없이 착하며 순결한 사람이어야 하고, 신부님은 성스럽고 고귀한 사람이며, 결혼 성소를 택한 사람들은 이보다 조금 덜 거룩하지만 성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 또한 혼자 사는 사람은 부르심에 아무 응답도 못하고 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미국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토마스 머튼 신부가 성소에 대해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과정은 보편적인 성소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모든 성소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됨을 깨닫다
1941년 머튼은 엄격한 수도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며, 수도 성소가 다른 어떤 성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수도승은 특별히 ‘관상’ 생활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느님과 더 가까이에서 사는 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는 아직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이었으므로 교회와 세상, 또는 영혼과 육신에 대한 구분이 더 뚜렷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 안에서 수도승들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더 영적인 삶으로 부름받은 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머튼은 관상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더 깊이 이루어 가면 갈수록 이러한 생각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이 자신 안에 스며들수록 수도원 봉쇄 구역의 높은 담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생기던 즈음, 1958년 3월 18일 그는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루이빌’에서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의 영성에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로 ‘포스 앤 월넛’ 길모퉁이에서의 체험이다.
“루이빌, 포스 앤 월넛 길모퉁이에서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나를 압도하는 듯했고, 내가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 그것은 마치 금욕과 거룩함으로 여겨지는 세상(수도원), 특별한 이 수도원 안에서 차별과 거짓된 자기 위안의 꿈으로부터 빠져나와 이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으며, …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의 개념은 완벽한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수도 서원을 함으로써 수도승들은 다른 존재, 천사들과 같은 이들, ‘영적인 사람들,’ 내적인 삶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은 나의 망상이었다. … 내가 단지 사람들 가운데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 내가 홀로 있는 것이 그들의 덕분인 것은 내가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이며, 내가 홀로 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낯선 이들은 더 이상 없다!”(「토마스 머튼의 단상」)
머튼은 그들과의 신비로운 일치를 체험하며,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체험을 통하여 모든 인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그는 ‘차별의 꿈’에서 깨어났고, 자신이 ‘인류의 구성원 가운데 한 명’임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과 동등해졌으며, 모든 성소도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성소’로 하나가 되었다. 더는 수도 성소가 다른 성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모든 이가 관상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보편적 사랑 안에 모든 성소의 뿌리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이 완성되려면
교회에서는 성소를 직무적 성소와 보편적 성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물론 직무적 성소는 그 자체로 고귀한 소명이다. 하지만 보편적 성소와 이에 대한 응답의 중요성을 간과하면 직무적 성소는 알맹이 잃은 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모든 고등 종교에는 제도와 사제, 평신도 같은 신분의 구별이 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닌 그 본뜻을 되찾는 것이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무수히 하신 말씀도 바로 이것이었다. 성소의 본디 의미를 이해하고 체험하며 살아갈 때 수도자와 사제, 평신도, 그리고 비신자의 구별과 차별을 넘어 진정한 거룩함의 삶, 하느님께 응답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성소의 본뜻은 무엇일까? 먼저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당신과 함께하는 ‘사랑의 삶에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듯이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람 가운데 몇몇 사람을 뽑아 예언자로 삼으셨고, 세상의 무수한 여인 가운데 마리아를 택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열두 사도를 뽑아 당신 제자로 삼으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들을 부르시고 뽑으셨을까? 바로 당신의 뜻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당신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시고자, 다시 말해 이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협조자를 택하신 것이다. 그 협조자들은 하느님의 도구일 뿐이다.
하느님의 협조자는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나 이사야, 베드로, 바오로 성인과 같은 유명한 분들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모든 이가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해 우리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의 ‘자비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자비의 부르심에 용서로써 응답할 때, 그 부르심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부르심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마다 사랑의 응답이 모여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식별의 은총
이러한 사랑과 자비에로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하며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나름대로 응답하며 산다고 할 수 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살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살든, 또는 혼자나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더라도 말이다. 부모님이 불교 신자라 자연스럽게 불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또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침묵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 때 그분의 ‘사랑의 힘’과 ‘용서의 힘’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되고, ‘나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식별의 은총’도 받게 되는 것이다.
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에서는 ‘성소 식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소) 식별은 우리 혼자 힘으로 개발할 수 있는 어떤 기술이 아니다. 식별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신중하고 현명하게 수련하면서 길러 나가야 하는 은총이다”(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5차 정기 총회 의안집: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82항).
우리가 자신을 비우며 날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식별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 열매를 맺게 된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신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로 부르심에 “예.”라고 곧바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먼저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라고 응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날마다 들려주시는 사랑의 목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며 그 ‘사랑의 마음’과 하나되어 ‘그분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때, 이것이 바로 그분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온전한 ‘사랑의 응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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