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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상)
역사와 영성
1209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세상 곳곳에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설립했다. 「작음」 「형제애」 「공동체정신」이라는 가난과 나눔의 영성을 실천했던 이 수도회는 당시 이탈리아와 유럽뿐 아니라 이슬람, 아프리카와 동방까지 빠른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수도회는 1517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에 따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와 작은형제회로 갈라지고, 작은형제회에서 다시 카푸친 수도회가 갈라져나와 현재 세 개의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존재한다.
이같은 분리 속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또 다른 형식으로 프란스치스칸의 영성을 실천해나가는 수도회로 장구한 역사를 이어가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공동, 집합이라는 라틴어로 함께 모여사는 공동체를 뜻하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명성과 수도회원들의 삶에 이끌린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날로 번창했다. 수도회 부흥과 쇄신의 시기였던 17, 8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 아드리아노플, 로도스토 등 동유럽지역과 러시아, 리투아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에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도회의 번영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했고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도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시대, 그리고 19세기 종교억압정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시대의 필요에 따라 수도회원들은 늘어났고 현재 전세계로 퍼져 36개 관구 5000여명의 회원들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영성의 근본은 창설자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즉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했던 그의 영성은 한없이 「작아짐」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은 한없이 빛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형제들을 일컬을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또한 「작음」이란 말은 영성적인 겸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형제들에게는 사회에서 「소외받은」 모든 이와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커다란 영성적 힘으로서 가난하고 힘없는 하느님의 백성들, 곧 성서에서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기를 바랬다. 이같은 가난의 영성과 모든 피조물까지 사랑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우주적인 사랑은 오늘날 물질주의와 권력, 자연파괴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데 커다란 정신적인 지표가 되고 있다.
「꼰벤뚜알 정신」(공동체정신)과 「형제애」의 영성 또한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현 시대에 중요한 표지가 되고 있다. 이 영성은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형제이며 우리는 한 공동체이고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삶으로서 알리고 보여주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형제적 삶의 태도는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닌,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하며 꼰벤뚜알 수도회원들은 이같은 정신을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로 실천하고 있다.
형제애에서 흘러나온 「꼰벤뚜알 정신」은 사람에게 봉사하도록 이끌며, 교회와 함께 걷고자하는 자세, 역사와 함께 하면서 현대에 열린 태도,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알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정신, 문화와 대화하며 정의평화를 위해 선구자적인 열린 자세를 갖게 한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의 「작음의 영성」에서 흘러나온 가난, 형제애, 공동체정신, 피조물에 대한 사랑,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의 영성적인 가치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꼰벤뚜알 프란스치스코 수도자들의 소명과 삶을 지탱해주는 고유한 영성이 되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하)
한국진출과 사도직 활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한국진출은 1958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빠도바관구 프란치스코 팔다니 수사와 로마에서 거주하던 한국인 허안드레아 신부가 만나면서 시작됐다. 중국공산화로 선교활동이 불가피하게됐던 팔다니 수사와 허신부는 한국선교에 대해 논의했고 결국 빠도바 관구에서 두 사람을 파견하게 됐다.
이에 따라 58년 10월 6일 부산 범일동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으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한국에서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대 이탈리아 출신 수사들이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부산을 비롯 대구, 서울, 인천, 수원으로 본당사목 및 봉사활동을 넓혀나갔다.
본당사목과 사회복지활동, 피정의 집, 재속회 영성지도, 성모기사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통한 계속적인 성장에 힘입은 수도회의 한국지부는 1975년 12월 1일 막시밀리아노 콜베 준관구로 승격됐다. 이어 내실있는 공동체로 성장을 거듭해온 수도회는 지난해 2월 관구로 승격됐다. 수도회는 세계 곳곳에서 본당사목, 선교활동, 사회복지사업, 피정지도, 영성지도, 교육 등을 통해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매우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58년 본당사목으로 활동을 시작한 수도회는 당시 어려운 시대에 놓여있던 한국에서 신자든 비신자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부산을 시작으로 이듬해 대구 범어동본당, 64년 부산 대연동본당이 꼰벤뚜알 수도회 본당으로 인가돼 본당사목을 이어갔고, 72년에는 서울 외국인본당과 77년 인천 갈산동본당을 지으면서 전국의 외진 곳으로 본당사목활동을 넓혀갔다. 96년 대구대교구의 요청으로 범어동본당을 교구로 돌려주고 월배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 수도회는 현재 부산 기장본당을 비롯해 5개 본당과 일광의 1개의 준본당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른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소외된 지역의 본당사목뿐 아니라 작은자가 돼 장애인 및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시설을 운영해온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62년 2월 나환우들의 자녀 27명을 부산 대연동 난민주택에서 키우기 시작하면서 보육원을 시작했다. 68년 3월에 부산 시청에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허가를 받아 지금껏 많은 미감아 학생들을 사회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오늘에는 사회적으로 미감아들의 수효가 줄어들자 수도회는 보육원 대신 장애인 재활원으로 운영하기로 했고 정부의 허락을 받아 지체장애아뿐 아니라 중복장애 등의 장애아동을 돌보며 생활하고 있다.
김포에서도 장애인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집」을 운영하고 있는 수도회는 87년 무의탁 노인 30여명이 함께 생활하는 양로원 「요셉의 집」도 함께 꾸려가고 있다.
가난하고 병약한 이들을 위한 봉사와 아울러 현대인들의 영성지도를 위해 수도회는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콜베신부에 의해 시작된 성모기사회 활동도 함께하고 있다. 경기도 양평 정하상 바오로 수도원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성모기사회는 강의 및 피정지도, 출판사업 등을 통해 성모신심을 고양시키고 있다.
이외에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에 따라 복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모임인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위해 영적보조활동을 하고 있으며, 개인 영적지도 및 상담활동에 봉사하고 있고, 미국 LA에서 한인들을 위한 본당사목과 이탈리아,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본당사목, 교육, 출판, 사회복지, 선교활동 등 다양한 사도직활동을 펼치고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현재 9개 수도원에서 69명의 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정신을 살아가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 (상)
창설자와 역사
1538년 1월 어느날 스페인의 그라나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명한 설교가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회심시켰던 아빌라의 요한은 장차 가난한 병자들의 수호자로 나설 한 사람의 평신도를 움직였다.
강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혼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놓은 종교적 회심의 효과는 놀라웠다. 거의 미쳤다 할 만큼 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그 영혼의 충격은 급기야 천주의 성 요한으로 하여금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만든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과 학대로 시작된 치료가 끝난 후 40대 중반의 그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그것은 훗날 병자들의 수호자,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된 천주의 성 요한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소명을 이루기 시작한 첫 걸음이었다.
1495년 3월8일 포르투갈의 몬테모로-노보라는 곳에서 태어난 요한 시데나. 그는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약 13년 동안 가난한 사람, 정신질환자, 박해 받는 이들, 노인, 고아, 과부 등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봄으로써 '천주의 요한'이라 불리웠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를 들고 참된 신앙을 위해 전장으로 나서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 가톨릭 교회는 혼돈에 휩싸여 있었고 이슬람교도들이 서방을 공격해왔다. 8살 때 이름없는 순례자를 따라 집을 나서 목동, 군인, 노동자, 책장사를 전전하며 삶의 의미와 자신의 소명을 찾아 헤맸던 그는 그러나 무기를 들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주목했다.
당시 병원이라는 것은 병자들을 치유해 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빨리 죽도록 해 고통을 덜어주고 건강한 시민들로부터 병자들을 격리시키는 것이 임무인 듯 보일 정도였다. 천주의 성 요한은 당시 병원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거지들에 대한 따뜻한 말과 선행들이었다. 자유롭고 개방된 사랑의 정신에 바탕을 둔 따뜻한 '환대' 바로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1539년 가을에 집을 빌려 아무런 조건 없이, 한 마디 물음도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치료하기 시작했다. 공원에 버려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혹은 사설 수용소에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등에 업어 나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와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요한을 돕기 시작했고 1550년 3월 8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동료가 다섯이 됐고 후에 그들에 의해 수도회가 탄생해 오늘도 그와 같은 정신으로 하느님의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은 그후 1630년 9월 21일에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690년 10월 16일에 교황 알렉산데르 8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됐다.
창립자가 세상을 떠난 후 20년 뒤 교황 비오 5세는 1572년 1월 1일 정식 수도회로 인준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오늘날 47개국에서 43개의 종합병원과 26개의 정신병원, 14개의 간호 진료소, 26개의 노인 요양원, 6개의 만성질환자 병원, 신체 장애인과 정신지체인을 위한 16개의 서비스 센터, 정신 장애인을 위한 32개의 센터와 서비스 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1958년 아일랜드에서 5명의 수도자가 광주에 진출해 1960년부터 이동 진료 및 가정 방문을 시작해 현재는 광주에서 정신과 병원, 일반의원, 알콜상담치료센터, 호스피스 병동, 가정방문 활동, 광주 공원 노인복지회관을 운영하며 춘천 시림 복지원과 서울의 사회복지법인 늘푸른나무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26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하)
영성과 사도직 활동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께 봉헌돼 정결하고 가난하며 순종하며 환대의 약속으로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른다. 이런 삶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복음서의 내용대로 모든 이에게 선익을 베풀고 온갖 종류의 질병을 치유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 동정심이 가득하고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나라는 50개국. 43개의 종합병원과 26개의 정신병원 및 서비스 시설, 14개의 간호진료소, 26개의 노인 요양원, 6개의 만성 질환자를 위한 병원, 신체 장애인과 학습 장애인(정신지체인)을 위한 16개의 서비스센터, 정신 장애인을 위한 32개의 센터와 서비스 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현재 총 1440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종신서원수사 20명, 유기서원수사 4명, 수련자 1명이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8년. 아일랜드에서 파견된 5명의 수도자가 광주에 진출해 1960년부터 이동진료 및 가정방문을 시작했으며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을 개원해 본격적인 의료 및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
천주의 성 요한 정신병원은 지난 1973년3월 정신과 진료실을 개설한 이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방적인 병원 운영과 정신보건전문 요원에 대한 전문교육, 환자의 상태에 따른 다양한 단계의 치료적 환경과 프로그램으로 선진 치료 기법을 도입했으며 가정적인 치료 환경 조성을 통해 정신질환자의 치료 및 재활에 기여해왔다.
천주의 성 요한 의원은 1차 외래진료기관으로서 전문의로 구성된 내과, 피부과, 소아과, 방사선과 등의 진료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첨단 진료 지원 부서를 갖춘 중앙 치료 센터와 임상병리실, 건강검진실, 초음파실, 위 내시경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호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1997년 5월 호스피스 입원 병동을 개설한 천주의 성 요한 호스피스 센터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입원실, 주간이용, 가정방문 서비스의 3단계 호스피스 서비스 프로그램을 시작해 모범적인 호스피스 활동을 펼치고 있다.
노인복지활동과 관련해 성 베네딕도 메디 노인센터는 2000년 개관해 노인 치매 병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으며 치매 노인들의 수용 보호 및 치료를 위한 입원실과 경증 치매 노인들이 낮 동안 치료를 받는 주간이용시설, 일시적으로 치매노인을 돌보는 단기보호시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 광주 공원 노인복지관은 노인 복지서비스 기관으로 노인들의 건강 증진과 사회 교육, 후생복지, 상담, 재가 복지 및 고령자 취업 알선과 경로당 활성화 사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담양 대건센터는 노인 주간 및 단기 보호사업으로 혼자 일상 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노인에 대해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사랑의 식당에서는 광주 공원을 찾거나 노인복지회관을 이용하는 노인들에게 매일 무료로 점심을 제공해 주고 있다.
춘천 시립복지원은 일정한 주거가 없는 부랑인에 대해 시설에 일시 보호, 선도 귀가 조치 및 수용 보호함으로써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법인으로 늘푸른나무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앞으로 수도회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말기질환 환자들을 돌볼 예정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연길에 중국 제2인민병원과 합작으로 25병상 입원시설과 낮병원을 운영하는 국제합작 호스피스병원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데 각종 허가를 기다리며 건축 설계에 들어갔다. 또 미래 계획으로 가난한 노인들이나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삶의 질 향상과 건강을 돌보기 위한 요양 시설 및 장애인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회 (상)
창설자와 발전
성자 샤미나드 신부의 생애
마리아니스트라고도 불리우는 마리아회는 1817년 샤미나드(Guillaume Joseph Chaminade, 1761-1850) 신부가 개인의 성화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프랑스 보르도에서 설립한 수도회로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1761년 4월 8일 보르도 동북쪽 70마일 거리에 있는 소도시 페리구(Perigeux)에서 태어난 마리아의 위대한 사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신부는 15명의 자녀 가운데 열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아기를 거쳐 성장한 아이는 그 중 불과 여섯명, 그 여섯 중에 4명이 사제가 될 정도로 신심이 두터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맏형은 예수회, 동생 한명은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샤미나드신부는 다른 또 한 명의 형제와 함께 교구 사제가 됐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프랑스 교회는 모두 국유화됐고 정부는 모든 성직자들이 「성직자 공민헌장」에 따라 교황청과 분리되어 국가적 기반위에 새롭게 구성되는 교회에 속하도록 선서를 요구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비선서 성직자」로 남아 땜장이로 변장해 지하에서 성무활동을 계속하다가 1797년 스페인의 사라고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며 마리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마리아 신심회와 남녀 수도회 설립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180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샤미나드신부는 1802년까지 바자 교구의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다가 사라고사에서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겨 그해 12월 8일 마리아 신심회를 조직했다.
마리아 신심회는 이전과는 달리 신분,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교육, 자선사업, 불우청소년 돕기, 양서 보급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후 신심회원들 중에서는 수도생활을 희망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리아의 사도를 세상에 파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던 샤미나드 신부는 마침내 남녀 수도회의 설립을 추진해 1816년 5월 25일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를 아장(Agen)에서 설립했고 이듬해 10월12일에는 보르도에서 마리아회를 설립했다.
마리아회의 발전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초창기, 어떤 활동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확고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수도회가 그릇된 출발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목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혁명 후 프랑스에서는 교육문제가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 아장에 무료학교를 개설하는 것으로 시작한 샤미나드 신부는 교사를 사도적인 교육자로 양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교방법이라고 생각해 마리아니스트가 있는 곳에서 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39년 마리아회는 스위스에 첫 진출하고 1849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도 진출해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는 19세기 말엽부터 진출하기 시작해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진출, 전국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해 관심을 불러왔다.
1850년 1월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병석에 누워 거룩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아회는 1865년 8월11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공식적인 승인을 받고 1891년 7월2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오늘날 마리아회는 한국을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일본, 인도, 아르헨티나, 칠레, 스위스 등 전세계 32개국에서 2000여명의 수도자들이 믿음과 마음의 가난, 그리고 주님께 귀 기울이신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사도직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16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회 (하)
영성과 사도직 활동
『무엇이든지 그 분이 시키는대로 하여라』(요한 2, 5)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 성서 구절을 모토로 삼고 있는 마리아회는 『우리의 목적은 그분과 똑같이 닮고 그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데 있다』(생활 규칙 1장 2조)고 명시한 설립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창립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사회의 모든 악이 인간의 영혼을 마비시켜 무감각한 이기심을 갖게 하며 윤리적인 타락 상태로 몰고가는 「종교적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이에 따라 회원들은 「마리아의 선교사」로서 살아간다.
창립자의 정신 안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정배이며 우리의 어머니이고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에 동참하신 분이다. 따라서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회원들은 마리아의 겸손과 믿음, 청빈과 단순성, 신중성을 본받아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영성생활 측면에서는 창립자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묵상 기도 및 정화의 덕, 완성의 덕, 대신덕을 생활화하고 있다.
마리아회의 한국 진출은 1950년 광주대교구 헨리주교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이에 앞서 1908년 조선대목구장 뮈텔주교가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교육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마리아를 초청하고 1923년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도 초청의사를 보였으나 자체 회원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었다.
1960년 9월17일 마리아회 태평양 관구 소속 3명의 수도자가 입국해 광주 주교관과 대건신학교(현 광주 가톨릭대학교)에서 거처하게 됐고 1963년 2월 목포에 수도회를 마련했고 이어 1970년 서울에도 수도원을 설립했다. 1984년에는 인천 산곡동에 「샤미나드 피정의 집」을 완공했고 1991년 11월에는 서울 망원동에 「마리아 가족회관」을 건립했다. 1973년 12월1일 지부로 승격된 마리아회는 1994년에는 지구로 승격돼 현재에 이른다.
한편 1988년 구성된 마리아니스트 평신도공동체는 1989년부터 공식적으로 봉헌생활을 시작해 현재 서울과 인천의 마리아니스트 평의회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마리아회의 영성에 따라 생활하면서 소외 계층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마리아회의 사도직활동에서는 우선 1966년 학교 법인 목포 마리아회의 설립 인가와 1967년 9월 목포 마리아회 중학교의 설립 인가를 거쳐 1968년에 목포시에 마리아회 중학교를 개교했으나 이후 없어졌고 1975년 3월 목포 마리아회 고등학교를 설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2년에는 서울 망원동에 효성중등학원을 개원해 불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과 교리교육, 직장 알선까지 담당해 활발한 무료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생활 여건이 나아짐에 따라 입학자가 줄어들어 1985년 문을 닫았다.
1983년 2월에는 인천교구로부터 인천 대건고등학교의 운영권을 넘겨받아 운영하고 있다. 1988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현재 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으며 1998년에는 인천 연수동에 신축교사를 마련해 학교 부지를 이전했다.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참된 인간성 형성을 위해 1993년 망원동 마리아 가족 회관 내에 문을 연 「가톨릭 교육 문화원」은 학생들은 물론 교사와 학부모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각종 정보 제공 및 상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마리아회는 지난 2000년 10월 망원동 마리아 가족회관 내에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마리아 전문 도서관을 설립한데 이어 지난 5월18일에는 마리아학 관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한국 마리아학회」를 창립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바오로 딸 수녀회 (상)
창설자와 역사
성 바오로 딸 수도회는 알베리오네(Giacomo Alberione, 1884-1971) 신부가 사회 홍보 수단을 이용한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1915년 6월 15일 테클라 메를로(T. Merlo, 1894-1964) 수녀와 협력해 이탈리아 알바시에 설립한 활동 수녀회이다.
1884년 4월 4일 이탈리아 구네오주 포싸노의 성 로렌조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알베리오네 신부는 어려서부터 사제의 길을 꿈꿔오다가 1890년 브라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는 그는 별로 나쁜 것이라는 생각 없이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은 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학교를 중단하게 된다. 그로부터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회 홍보 수단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됐다.
그후 알바의 신학교에 다시 입학한 그는 1900년 12월 31일 4시간의 성체 조배를 통해 큰 빛을 얻고 『주님과 새로운 세기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를 절감한다.
당시 시대는 새로운 홍보수단으로서의 인쇄매체를 통해 교회 정신을 거스르는 경향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에 알베리오네 신부는 자신의 체험과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해 대중 속에 홍보 매체를 통해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감을 갖게 된다.
1907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알바신학교에서 영적 지도와 교수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1913년 알바 교구의 주간지인 「가제타 알바」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인식한 그는 다음해인 1914년 8월 20일 성 바오로 수도회의 전신인 「작은 노동자」인쇄 학교를 설립했다.
교회 내 여성들의 사도직 참여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하던 그는 이어 1915년 6월 15일 인쇄 학교 인근에 「여성 작업실」을 마련했다.
바로 이때 알베리오네 신부는 당시 21세의 재봉 교사이자 교리 교사였던 데레사 메를로를 만나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데레사 메를로는 1894년 2월 20일 이탈리아 북부에서 탄생했다.
그녀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려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뜻을 가장 깊이 꿰뚫은 최초의 여성으로 뜨거운 사명감으로 사회 홍보 수단을 통한 복음 선포에 평생을 바치고 1964년 2월 5일 선종했다.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던 데레사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 이곳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재봉 기술과 교리를 가르치고 서원을 개원해 인쇄학교에서 제작된 책을 보급하고 성물들을 판매했다.
이어 1918년 12월 이탈리아 토리노로 진출해 교구 주간지를 발행함으로써 고유의 사도직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공동체를 부르는 명칭이 따로 없었으나 주위 사람들이 성 바오로 사도에 대한 신심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 「바오로 딸」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2년 7월 22일 9명의 회원이 첫 종신서원을 했고 데레사 메를로는 테클라라는 수도명으로 초대 총장으로 임명됐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이제 바오로 딸 수도회가 독립된 수도회로서의 면모를 갖췄음을 파악하고 1924년 2월 같은 영성 안에서 기도생활로써 사회 홍보를 위한 사도직을 돕는 관상 수도회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회」를 설립했고 1938년 10월에는 본당 사목을 돕는 「선학 목자 예수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 후에도 주간지, 라디오, 영화 등 새롭게 나타나는 첨단 매체들을 이용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력했던 알베리오네 신부는 여러 수도회를 창립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했으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71년 11월26일 선종한 그는 현재 시복 조사 중이다. [가톨릭신문, 2002년 6월 30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바오로 딸 수녀회 (하)
영성과 사도직 활동
바오로딸 수도회의 고유한 정신은 한마디로 「바오로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끊임없는 복음 선포의 길을 걸었던 바오로 사도와 같이 바오로 딸의 회원들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바오로딸은 사도 성 바오로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스승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살며, 그 복음 서적·음반·영화·방송 그리고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명의 총아인 사회 홍보수단을 통해 전한다.
왕성한 집필가이며 설교가였던 사도 성 바오로의 영성적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 20)는 것이며 이 그리스도란 「길·진리·생명이신 스승 예수 그리스도」(요한 14, 6)이시다. 이 영성을 성 바오로의 사목적, 보편적, 사도직 정신에 따른 미사와 묵상, 성체방문 등을 통해 믿어야 할 진리, 따라야 할 길, 살아야 할 생명이신 예수를 만나고 배우며 전한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며 세상에 그리스도를 주신 첫 사도로서, 모든 사도들의 인도자이신 사도의 모후 분위기 안에서 성장해 나간다.
바오로딸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60년 당시 명수대본당(현 흑석동본당) 주임 이경재 신부의 요청에서 비롯된다. 이신부는 사회홍보수단을 통한 복음 선포라는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테클라 수녀에게 수 차례 한국 진출을 요청했으나, 당시로서는 회원이 부족해 일본 관구가 성장할 때까지 파견이 보류됐다. 1960년 12월 12일 비로소 일본 관구에서 3명의 수녀가 파견됐고, 2년 후 명수대본당에서 현재의 서울 강북구 미아9동으로 수녀원을 이전했다. 이에 앞서 1961년 충무로에 성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1962년 3월에는 「성바오로 출판사」를 성바오로 수도회와 공동으로 등록하고 최초로 「가정의 복음서」(현 합본 복음서)를 출간했다.
12월 미아리로 이전 후 종로 성바오로 서원을 개원하고 2년 후인 1964년에는 일본에서 제본(製本) 기술자 수녀가 임시로 파견되면서 출판 사도직이 활기를 띠게 된다.
초창기 연 3종 가량 출간에 그쳤던 성바오로 출판사는 이내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활발하게 간행하기 시작했고 서원들이 전국에 속속 들어서면서 교회의 출판문화가 활성화되는데 크게 기여한다.
1967년부터는 서원뿐만 아니라 타 서점을 통해서도 책을 보급하기 시작했다.1969년 처음으로 레코드 「엄마께 드리자」를 제작한데 이어 1974년 12월에는 본원 내에 「시청각 교리교재 연구소」를 설립해 첫 카세트 테이프 「세상에 외치고 싶어」를 제작했다. 이어 영화필름(1975), 슬라이드(1979), 비디오 테이프(1984) 그리고 CD(1990)를 제작 보급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시청각 통신성서 교육부」를 설치해 「신구약 성서 입문과정」(1979), 「바오로 영성 사상 과정」(1984), 「신구약 성서 중급과정」(1985)을 차례로 개설했고, 각 교구 홍보국에 회원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방송 사도직에도 활발하게 참여해 1981년 2월에는 필리핀 라디오 베리따스 한국어 방송(1991년 1월 중단)에 2명의 수녀를 파견한데 이어 1989년 평화방송 라디오국, 1994년 12월 CATV에도 회원을 파견했고 1995년 3월 자체 TV 제작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1994년 3월에는 성서 묵상 월간지인 「야곱의 우물」을 창간했고, 같은 달 31일에는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분리 · 독립해 「바오로딸」로 출판사 등록을 했으며, 1996년에는 대중 문서 선교 강화를 위해 「열린」 출판사로 새로 등록했다.
사회 홍보수단의 발전과 함께 컴퓨터 통신이 새로운 선교 수단으로 부각되자 1993년 BBS(사설전자게시판)을 구축해 컴퓨터 통신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고, 인터넷의 발전에 따라 홈페이지를 개설해 하이텔에 「가톨릭 정보」를 제공했다.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든 바오로딸은 정보의 보고로서 인터넷과 사이버 세계를 복음화하는데 큰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 최초로 2명을 이탈리아로 파견한 바오로딸은 1981년 11월 1일 관구 승격 후 회원수가 더욱 증가해 10여년만인 1992년 파키스탄에 1명, 대만에 2명, 그리고 이듬해에는 러시아에도 1명을 파견했다. 테클라 수녀의 탄생 100주년인 1994년 1월 「선교 계획」을 발표한 바오로딸은 그 해 마카오에 2명, 1996년 3월에는 중국 연길에 3명을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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