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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 : 13. 멸망의 문 14. 생명의 문
3. 좁은 문 ( 7 : 13 – 14. 눅 13: 24 )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문’은 구원의 방법을 가리키며, ‘길’은 구원받은 자의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믿어야 함을 말한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 6). 그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요 영생이시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언하였다(딤전 2: 5).
마 7 : 13. 멸망의 문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증언했다(행 4: 12).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인생길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이 있다고 하셨다.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대로 방종스럽게 살 수 있는 넓은 길과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 있는 생활의 길을 대립시킨다.
좁은 길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낙이 없고 고통만 있다 함은 불가하다. 좁은 길에는 감춰진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다.
이것은 자력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비유가 포함한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가는 길이 함부로 죄를 범하는 생활에 비해서는 제한이 있고 절제가 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길이니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길을 다 간 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는다.
2]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구원과 영생의 길은 그 문이 좁고 그 길이 좁으나, 멸망의 길은 그 문이 넓고 그 길이 넓다. 그래서 구원받는 자들은 적고 멸망의 길을 걷는 자들은 많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그 길이 넓은 것은 구원의 진리 외의 모든 사상들, 각종 삶의 방식들이 여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방 종교들, 철학들, 그리고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모든 이단 종파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천부교 등 각종 이단 종파들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 문과 그 길은 매우 넓다. 포용주의는 이 길들의 대체적인 특징이다.
마 7 : 14. 생명의 문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우리는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성경 교훈만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6: 24-25).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예상된다. 그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심지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가족보다, 우리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따라야 한다.
1]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영생의 문은 좁고 길도 협착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문이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 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 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만 구원의 문이요 구원의 길이다.
이 문과 이 길 외에 다른 문, 다른 길은 없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증언하였다. (행 4: 12).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 하였다(딤전 2: 5).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 구원의 길, 구원하실 이름, 구원하실 중보자이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문, 다른 길, 다른 이름, 다른 중보자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가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음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 유일한 구주 되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문에 들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문은 신앙 고백을 의미하고 길은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도 죄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 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일이다.
많은 교회와 목사들과 교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전통 신앙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게 보이는 외로운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가는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아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다. 우리에게는 죄를 향하고 세상의 것을 향하는 습성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라 살 수 없고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없다.
자기 부정은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갖추어야 할 과정이요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2] 좁은 길과 넓은 길 ( 마 7: 13-14 )
(1) 두 갈래 길
① 선택은 자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하셨다.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자유이다. 이러한 선택권은 매일매일 그리고 매시간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잡다한 여러 가지 일들을 그때마다 선택해야 한다. 거기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도 있을 것이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선택해야 할 사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최고의 선택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② 선택은 책임이 따른다.
선택은 우리가 자유로이 할 수 있지만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자유로이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책임이 바로 우리 인류가 걸머진 원죄다.
이러한 원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므로 해결되었다. 서로 선택하여 결혼한 두 남녀는 남편으로, 혹은 아내로 최선의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듯 선택과 책임은 과정과 결과로서 언제나 함께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놓여 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다. 우리는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 중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한쪽은 영생의 축복이요 다른 한쪽은 형벌의 저주다.
(2) 좁은 길과 생명의 문
① 좁은 길을 걸어야 생명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
생명의 문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은 넓은 길에 비해 걸어가기가 불편하며 힘이 든다. 생명의 문으로 이르는 진리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고통의 길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골고다의 길이며 가시밭길이었다. 제자들도 신앙을 보수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좁은 길은 생명의 문과 연결되어 있다. 영광과 승리가 보장된 길이다.
② 좁은 길을 찾는 사람이 적다.
생명의 문과 연결된 좁은 길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다. 그 이유는 첫째 지니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명예나 권력, 물질 등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듯 많은 욕심 꾸러미를 들쳐 멘 사람은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의 생활은 늘 마음을 졸이며 마귀를 경계하는 삶이다. 성도는 항상 조심스러운 언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③ 성도는 좁은 길을 통하여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좁은 길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 좁은 길은 목표가 있는 길이다.
우리는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이 오직 에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만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한다.
* 빌 3: 13-14 –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성도의 생활은 인내하는 삶이다.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나를 이겨야!' 한다. 즉 자신의 욕망과 탐심과 유혹과 모든 죄성을 이겨야 한다. 그래야만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 생명의 문에 다다를 수 있다.
(3) 넓은 길과 멸망의 문
①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이다.
길이 넓다는 것은 다니기가 편하고 이용하기 쉽다. 그 길은 아무리 많은 죄악의 짐을 졌다고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모든 죄악은 우리가 범하기 쉬운 곳에 있다.
우리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의 손길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마귀의 손길에 쉽게 이끌리는 사람들은 넓은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편하고 쉽게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넓은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넓은 길은 결국 멸망의 문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② 넓은 길은 인생의 목적이 이 세상을 찾는 사람들이다.
멸망의 문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즐겨 다닌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삶은 목적도 목표도 없는 무의미한 삶이다.
그들은 왜 사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답을 못 한다. 그저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간다는 대답이 고작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멸망의 문은 입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생명의 길인가? 멸망의 길인가? 영생의 길인가? 영벌의 길인가? 잠시 서서 뒤돌아보자.
그리고 좁은 길이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걸어 생명의 문에 도달해야 한다. 넓은 길이라면 얼른 돌이켜 좁은 길로 돌아서서 함께 영생의 문으로 돌진해야 하겠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 7: 13-14 )
천국은 참 신기하다. 들어가는 문은 좁지만 그 안은 온 인류가 다 들어가고도 남는 넓은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만큼 천국은 크고 넓은 곳이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가는 것 아니다. 천국도 가는 길이 있다.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넓은 길이고 하나는 좁은 길이다. 넓은 길은 세상 길이나 사망의 길이고, 좁은 길은 믿음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잘 선택해서 가야 한다.
한 번의 선택이나 영원을 결정하는 것이니 정말 심중히 선택해야 한다. 길을 다 간 뒤에 되돌아와서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길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느냐?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지느냐? 둘 중의 하나를 여러분이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옥을 선택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가르쳤다.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님께서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당시 성문을 소개할까 한다. 옛날에는 외적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을 쌓고 살았다. 성벽에는 여러 출입구가 있지만 가운데 있는 문이 제일 컸고 길도 넓었다.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으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군들을 손뼉 치며 환영했다.
그런데 성벽의 후미진 곳에 작은 문이 하나 있다. 바늘귀처럼 좁은 문이었다. 다른 문이 다 닫히고 난 뒤에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문을 통해서 출입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으로 이런 문을 만든 것은 만에 하나라도 적군이 그 속으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안 되니까 문도 좁고 길도 좁고 협착했다. 이곳은 아무도 박수를 쳐주는 사람도 없고 외롭고 험악했다. 이 광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란다.
예수님이 말하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의를 으스대면서 뽐내었다. 마치 자기들이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영광을 자기들이 다 받으려고 했다.
반면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인간적인 의를 내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겸손히 고개를 수그리고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갈 뿐이다.
(1) 오직 예수만 믿는 길이다.
예수님은 요 10: 9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유일한 문이다. 그래서 요 14: 6에 “예수께서 이르시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다.
* 행 4: 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다. 그러기에 그 문은 좁은 문이요, 이 길은 좁은 길이 될 수밖에 없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총회가 2013년에 부산에서 개최되었다. 일부 교단에서는 환영하지만 대부분의 보수교단들은 반대하였다. W.C.C에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포함시켜 진행하다 보니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이념도 바꾸어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그야말로 잡탕 협의회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것은 멸망의 넓은 길이다.
(2)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은 제멋대로 산다. 그러나 성도는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
* 히 13: 10-13 –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주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해결하신 부분이 있는가 하면 우리들도 동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는 겸손히 죽어지고 내 의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적당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따라가야 한다. 신앙 때문에 핍박도 받고 사명 때문에 고난도 받고 수고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 길이 영생의 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좁은 문 좁은 길 같지만, 이 길이 영생의 길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넓은 길을 버리고 영생의 좁은 길, 신앙의 길을 택하여 조금도 후회 없는 영생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4] 두개의 문과 두개의 길 ( 마 7: 13-14 )
우리 주님은 끊임없이 그의 백성들에게 친숙한 잠언과 격언들을 사용하셨다. 주님은 그 잠언 및 격언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셨다. 여기서 사용한 비유는 주님 당시에 아주 친숙한 내용이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 영감을 추가하셔서 그동안 오랫동안 참아오신 경고를 말씀하셨다.
성도는 언제나 경고와 위협을 구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백성을 위협하지 않으신다. 사탄은 절대로 경고하지 않는다. 경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위대한 진술이다. 경고는 마태복음 23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말씀 중에 강한 빛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 마 23: 29-36 –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이 내용에는 개인적인 앙갚음의 요소가 없다. 당신이 주님의 강력한 경고를 읽을 때 당신이 어떻게 주님을 그리게 되는지 주의하기를 바란다. 당신의 마음속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들을 기억해 보라.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인내를 보게 된다.
* 잠 13: 13-15 – 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14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당신의 마음에서 이 말씀의 숨은 저의를 잘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온유하셔서 궤사 한 자의 길을 쉽지 않게 하셨다. 곧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그 길을 험하게 만드셨다. 특히 주님의 자녀들을 위하여는 더욱 그렇게 하신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에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곧 넓은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멸망밖에 없다. 에라스머스(Erasmus)는 말하길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리까지 가는 데는 칼로 도려내는 슬픔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가슴이 찢어지는 사건과 많은 깨달음을 지나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말하길,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그 자리에 드디어 도착하였을 때 드디어 나는 내가 지났던 길들을 다시 지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실현해 보겠다는 길은 넓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의 인격적인 지식을 깨닫는 유일한 길은 좁고 협착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 요 14: 5-7 –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구원과 제자도는 다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인격적으로 헌신하는 일이다. 그들의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을 것이다.
* 고전 3: 9-15 –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고 (마 28: 1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망만 안겨줄 뿐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선생으로만 오셨다면 그분은 이 땅에 오시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만일 사람에게 불가능한 존재가 되라고 하면 그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까? -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라고 하고, 의무 이상의 일들을 하라고 하며, 세상에서는 관심을 완전히 끊으라고 하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헌신하라는 것등….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만 오셨다면 그는 헛된 이상을 인류에게 제시함으로 인류를 가장 조롱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근본적이고 주된 이유는 우리를 중생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은 주님을 주관하셨던 그 성향을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 사람에게 그 성향이 주어지게 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기가 가능하게 된다. 곧 주께서 주신 모든 교훈은 주님의 성향을 근거로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답변이 만족스러울 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주시하시오. 그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하여 절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질문들은 절대로 독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에는 이미 그들을 사로잡은 생각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논리적인 대답만을 원할 뿐이다.
* 눅 13: 23-24 –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곧 당신의 발이 바른길에 서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주님의 대답은 처음에는 원래 질문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질문을 한 의도를 보시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얄팍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그들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의식적인 필요들을 다루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 가운데 발생한 독창적인 질문을 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그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다.
(2) 모든 고결한 것들은 어렵다.
우리 주님은 제자의 경건한 삶은 꿈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제자 훈련을 받을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결단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은 선물이다. 결단이 필요한 때는 우리가 받은 새 생명이 그리스도의 표준에 맞게 역사할 수 있도록 하는 때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혼동하는 위험에 빠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거룩하게 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에게 성령을 줄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하려고 할 때도 혼동이 오지만 또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데서 혼동이 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 가운데로 걷게 만드시으리라 생각한다. 빛 가운데로 걸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능력과 생명을 넣어 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러나 그 생명과 능력이 현실 속에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우리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였다.
* 빌 2: 12-14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당신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을 나타내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제자의 고결한 삶이 어렵지만, 영광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제자의 삶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실망을 주고 낙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일으켜 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고결한 생애가 되려면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필요한 요구 사항들을 면제시켜 주는 일이 없다. 가치 있는 일들을 하기는 전혀 쉽지 않다.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 아들의 생명이 우리 인간의 인성 속에 형성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에 따라 자라가도록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 인내로 당신의 영혼을 얻어라.
* 눅 21: 15-19 –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영혼이란 내 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격적인 영으로서 이치를 따지고 생각하고 사물들을 본다. 예수님은 내 영혼을 얻기 위하여 내 영혼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구속의 엄청난 위대한 면들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속죄를 통하여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현실적 삶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께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12-14)고 하셨다. 따라서 주님을 위하여 당신의 삶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당신의 생명을 실제로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당신의 삶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으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삶은 고결한 삶으로서 어려운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오직 우리의 할 일은 “순종”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속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해 놓으신 고결한 행위에 근거하여 우리가 행하기 때문이다.
(3) 주님께 나의 최선을
하나님은 우리가 주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것을 최선을 다하여 밖으로 드러내길 요구하신다. 우리는 구속에 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구속에 근거하여 현실적 삶 속에서 그 구속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로 다 완성되었으며 우리가 더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주께서 내 안에 이루신 주님의 구원을 현실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제자로서의 훈련이 필요하다.
* 요 13: 3-8 –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제자 훈련은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평범하고 천한 일들을 올바르게 행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현실적인 평범한 삶 가운데서 수건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제자 훈련이란 구속이 현실 경험 속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의 기적 때문에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
* 요 14: 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제자를 시험하신다. 생명의 문에서 우리에게 해당하는 쪽에 좌우명이 있다. 그 좌우명은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나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주의 제자로서 우리의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최선에 감사하는 것이다. 절대로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의 구원은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그 구원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은 거룩한 과정이며 어려운 과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
* 히 2: 10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필요한 훈련을 절대로 면제하여 주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어떤 때에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악한 일들을 다 해 보아라.” (역자 주 - 하나님 자녀들의 훈련을 위하여 악역을 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 4)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안일하고 호화로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라고 주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강한 식구들이 되라고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것을 감사하자!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그 은혜를 표현할 상황이 없으면 터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 1)라고 증언하였다. 여러분도 당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립시다.
(4) 언덕을 오르는 강한 마음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한 삶이다. 거룩(hoyl)이라는 단어를 행복(happy)이라는 단어로 대치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명히 거룩한 삶의 결과로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교회 가운데 퍼져나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행복하고 밝아야 한다.”라는 개념과 “언제나 웃읍시다”라는 운동을 조심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단지 기질의 복음(the gospel of temperament)을 외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인의 삶의 근본을 행복을 위한 것으로 결정하는 순간 당신의 행복은 당신을 떠날 것이다. 행복이란 원인이 아니라, 추구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우리 주님은 한 가지만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바로 우리의 눈을 협착하고 어려운 길에 두는 것이며 바로 이 길은 순결하고 거룩한 삶의 길이다.
* 마 11: 28-30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은 너무나 어려울 것 같지만 일단 우리가 그 멍에를 메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기에는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정도에서 벗어나기 쉽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는 때에 우리는 결국 가장 쉬운 길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기쁨이 우리의 목적이 아님에도 따라온다. 우리의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동안 수백배의 복을 부어주실 것이다.
인생이라는 가파른 언덕길에서 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 요 14: 1-3 –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은 명령이다. 따라서 근심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들이 느끼기에 가파르다고 생각되는 일상적인 어려움이다. 특별히 음식과 옷과 집과 관련된 어려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막 4: 19)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작은 삶의 염려가 하나님의 말씀을 막았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우리 영혼은 너무나 약해졌다. 결국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았던 때보다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고 미안하게 된다.
우리 안에는 죄의 유혹을 저항하는 어떤 힘이 있다. 그러나 삶의 염려를 만났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에게는 별로 해 줄 것이 없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여러분 당신도 승리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관계를 의지한다면 당신은 매번 이길 것이다. 단지 영적인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우리는 다른 길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아버지께 갈 수 있다. 우리가 성도의 삶에 이르는 것도 오직 같은 길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가능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처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만 믿고 성경 교훈대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신복음주의, 은사주의로 가지 말아야 하고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 말씀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성과 연약성을 극복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인내하고 절제하며 영광의 천국만 바라보아야 한다.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치 말고 신구약 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영생의 길이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말하였다(행 14: 22).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다. (빌 1: 29)
디모데후서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말했다(딤후 3: 12).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믿어야 하고 성경의 교훈만 따르고 어려운 희생과 고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이며, 모든 철학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포용하는 상대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세상 사랑,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도 포용한다. 그것은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다. 천주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방 종교들과 세상의 풍습들을 포용하였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도 그런 경향을 가진다.
거기에는 오직 관용이라는 한 가지의 덕만 있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같은 배타주의는 악으로 간주되고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그 넓은 문과 그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사상은 마귀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된다. 그것은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치 못하게 만들며 그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든다.
* 계 18: 2 - 힘센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정신]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세상은 각종 더러운 정신들의 집결지이다. 교회들도 배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 심지어 많은 종교인이 그리로 가고 있고 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도 그리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참된 신자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힘들어서 찾는 이들이 적다. 역사적,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천국 가는 길이시며 인생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 요 14: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보다, 또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 마 10: 37-38 –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 막 16: 16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주지 않으셨다.
* 행 4: 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 딤전 2: 5 -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며 성경만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도 죄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전통적, 정통적 교리들을 저버린 자들이 많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옛길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거나 극단적이게 보이는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이 어렵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만이 영생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문을 찾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말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 18, 22-24).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를 것이며 또 성경 교훈대로 바르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