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을 들을 수 없는 근기(根機) 1
여기 경을 들을 수 없는 근기를 조금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다종다양 하고 또 그 성격이 각양 각색이구요.
불교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이해의 차이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고, 개인 개인마다 그 미묘한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여러 가지입니다.
또 사리불이여,
교만하고 게으르고 나라는 소견이 있는 이에게는 이 경전을 설하지 말라.
범부들은 소견이 얕아서 오욕(五慾)에만 탐착(貪着)하여
경전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니 그런 이들에게도 역시 설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여기 교만하고 게으르고 오욕에만 탐착한 나라는 소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대승경전의 가르침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것도 여기 오욕을 만족을 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보구요.
또 불교를 공부하는 모든 공부가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고,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자랑 하려고 하고
그저 입만 떼면 자기자랑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는
그런 소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또한 사실은 이런 대승경전을 이해할 그릇이 못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소견이라고 했지만 어지간한 사람치고 이 아견,
아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사람은 사실 드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나 그리고 너, 주관과 객관으로 이렇게 나뉘어졌기 때문에
객관은 결국 나라고 하는 주관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불교의 그런 깊은 이치는 결국은 나다 너다 하는 그런 차별상에서
최소한도 벗어나야 된다.
또 모든 존재가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에서도 일단 뛰어나야
불교가 조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법화경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믿지 않고 이 경전을 훼방하면
일체 세간의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끊고 말리라.
이것이 뒤에도 자주 나옵니다만 이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것은
참으로 사람으로서 사람의 삶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데
그런 그 가르침을 우리가 등졌을 때는 사람이지만 사람의 삶이 아니다.
이런 원칙 하에서 밑에 글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아주 좀 지나칠 정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전을 훼방한다든지,
비방 하고 ‘어찌 그런 말이 있겠는가? 그것은 자기의 소리지 부처님 뜻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이것은 부처님 종자를 끊고 만다.
그러니까 진리와 등지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 뜻인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혹은 얼굴을 찌푸리며 의혹을 품으리니
저 소리가 맞는가? 이렇게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의혹을 품고...
여러분들은 기존의 어떤 불교 상식을 가지고,
그 동안 법화경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데 혹 얼굴을 찌푸릴 일이 있거나
의혹을 품을 일이 없었을 줄 믿습니다.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끝까지 법화경 공부를 반복해서 잘 해보시면
또 의혹은 풀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화경 공부를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이 남았으면,
이러한 사람들이 받는 죄악의 과보를 들어보라 그랬습니다.
진리를 등진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받을 죄악의 과보를 들어 보라.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거나 열반하신 뒤에라도 이러한 좋은 경전을 비방하는 사람이나,
이 경전을 읽고 외우고 쓰고 지니는 사람을 보고 가벼이 여기거나
업신여기고 미워하며 질투하여 원수같이 생각하면
그 사람이 받는 죄의 과보(果報)를 그대는 지금 다시 들어 보라.
그랬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이 법화경 공부하는데 대해서
정말 마음으로부터 시기하고 질투하고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이렇게 한다면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기가 좀 어렵지요.
질투하여 원수같이 생각하면
그 사람이 받는 죄의 과보(果報)를 그대는 지금 다시 들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