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타인
장수진
얼굴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얼굴
빠른 크로키로 태어나 목이 비스듬히 꺾인 나는
바람에 뺨을 날리고
눈을 툭 떨구는
서쪽 바보 외
엉터리 몇 명
노동은 악몽과 함께 시작된다
모든 이의 공포를 다 매입한 투기꾼처럼
공포로 공포를 불리고
공포로 바다를 메워 공포의 도시를 만든다
헉헉거리는 주인공처럼
죽어도 살고 살아도 죽고
도망쳐도 안 되고
주렁주렁 나무에 매달린 머리통들이
제철 죽음의 싱그러운 즙을 떨구며
여보 여보 나를 부르고
잠들면 안 돼
겁먹은 얼굴 위로
타인의 얼굴이 수천 겹으로 쌓여갈 거야
가깝게 좀더 친밀하게
거대한 탑이 되어
아, 하면 아, 하고
표정을 삼키며 무너지는 얼굴들
껌벅껌벅
터질락 말락
인서트
퉁!
전속력으로 날아와 카페 통유리에 머리를 박고 떨어지는 새. 카페 입구에 놓인 [어서 오세요] 새는 어서 오 ‘세’ 위에 쓰러진다. 누군가 커피를 시키고 커피를 쏟는다. 다리를 덜덜 떨며 몸을 반쯤 일으킨 새의 머리가 훌러덩 넘어간다. 어머 이게 뭐야, 화들짝 뛰는 여자1의 구두. 새의 머리는 훌러덩, 발라당,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새는 날갯짓을 하며 제자리에서 핑글핑글 돈다. 어머 이게 뭐야, 화들짝 뛰는 여자2의 구두. 새는 창피하다. 부러진 목과 이런 죽음이.
새는 날아올랐다. 고개를 푹 떨군 채, 자신의 죽음을 끌고 아무도 없는 주차장까지 가더라.
질문들
죽음은 어떤 걸까
어제 밥을 짓던 한 여인이
오늘 수만의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선언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때 한 사람이
한 움큼의 태양을 손아귀에 쥔 채
군중 밖으로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어떤 걸까
폭염 속에서
뱅뱅
목이 돌아간 채
고꾸라진 고양이
뱅뱅
싸우다 죽었니
내가 너를 쐈던가
뱅뱅
죽은 눈이 나를 노려보네
내게 총을 쏘네
뱅뱅
나 너의 영혼 들어 올리네
떨구네
뱅뱅
골목에 나뒹구는 죽은 짐승의 영혼
푹푹 밟혀 짜부라지고
신은 졸고
뱅뱅
술 취한 패거리들 횃불처럼 붉은 목을 쳐든다
쳐라 전봇대여
오줌으로 따발총 쏘며 누군 죽고
누군 고자다 히죽대는
앳된 자취생들
골목에 쏟아낸 뽀얀 호프 거품에 자꾸 미끄러지던
그해 여름
나는 반정부 연극 몇 편
뇌과학 책 몇 권, 무화과빵
파시즘에 관한 일본 역사학자의 무미한 강의와
군밤장수 애인과의 밤샘 토론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8월 어느 날
복고풍 셔츠와 가짜 교련복을 입은 선후배들이
폭염 속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5월의 광주를 재현하며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그때 광주서 죽은 사람들
나중에 횃불 알바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일당 7, 경력자는 15
뉴스에선 떠들었다
폭염, 다들 화나 있습니다
한 선배는 천국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정도면 편하게 돈 버는 거지, 시히금치 쉬었네
그해 여름
나는 죽은 고양이를 자전거에 싣고
성북동 핀란드 대사관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장성익 선배
―명동 둘둘치킨에서
저자 탐정이냐
아니다 아닐 거다
그럼 앞잡이냐
아니다 알바생이다
맥주가 수상하다
혁명은 언제 오냐
더 뻔뻔하게 수진아
뭐요?
우리는 아무렇게나 막 죽는 인간 아니냐
너 예술 좋아하냐?
나를 선동해 내 가슴팍에 성냥을 팍 그엇
찍
불 싸질럿
맥주맛 안 이상하냐
여기요 사장님
수진아 사장님 아름답지 않냐
비극의 영웅들은 숨어 있다
어디에 둘둘에 극장에
선배 바바리코트 멋있어요, 의상이에요?
아 이거 형수가
야 눈보라가 갱장했어
경찰들이 막 쫘아악
나는 달렸지 고독하게
투두둑 뭐가
굴러오는 거야
보니까 애 얼굴 한쪽이 북
뜯긴 거야
노가린 손으로 뜯어야
맥주가 갔어
가자
여자 햄릿
나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있는
다이소 성북점 회원이다
가짜 꽃을 두 다발 샀다
회색에 보라가 애틋하게 섞인
뽀드득한 꽃잎을 주무르며
오백에 삼십 작업실로 걸었다
십수 년만에 만난 연극 선배가
팔뚝을 덥석 잡으며
바리톤의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후배
왜 이렇게 말랐어
이러면 안 되지
공연 보러 와
「함익」*이라고 여자 햄릿이야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연극을 했던
지금은 이러면 안 될 정도로 몸이 마른
인조 꽃을 든 사람이라는 것을
저 치킨집과 저 노가리집과
저저 국수집 사장까지 다 알아버렸을까?
규율 부장이었던 선배는 학교 때부터 늘 목소리가 컸다
그래, 후배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어?
시 써요
시?
그래, 우리는 한때 다 시인이었지
아니 그런 시 말고요
비닐 속에서 다이소 꽃잎이 부스럭거렸다
쇠에
쇠에
쇠냄새를 풍기며
꽃이 웃었다
싸구려 쇠끼들……
그래, 나는 한 시절 배우였지
우리 모두는 한때 시인이었고
함익, 멋지네 그 이름
필명으로 좋겠네
나는 목을 베듯
꽃 머리를 꺾어 마당 감나무 아래 뿌렸다
햄릿처럼
광인처럼
* 김은성 작, 연극 「함익」
두시의 신비로운 능력
회색 두부에
꼿꼿한 혀 한 장, 박혀 있다
부러진 커터 칼날처럼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푸른 베일을 쓴 채
한쪽 발로
초승달의 목을 밟고 있다, 파르르
파르르
달은 숨이 할딱거린다
파랗게 점점 파랗게 미미한 파도처럼
살짝
살짝 치 떨던 달은
차갑게 식는다
모든 낭만의 밤은 끝났다
고양이의 작은 발 주먹 아래서
두시의 등 뒤로 가끔 해변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 없는 밤이 지속되었다
혀 없는 고양이 두시는
버려진 괘종시계에서
두 시를 물어뜯었다
아무도 모른다
두 시가 없는 시계
두 시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끝나지 않는 라디오를
영원히 들으며
오래된 영화 음악 속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두 시의 연인
두 시의 오해
두 시의 자살
같은 것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두 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두시 속에서
지겹게 곰팡이를 피우며
착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갈
두 시의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봉지 언니의 스피드
한 아이가 나뭇가지를 세우고 있다
얘야, 너의 인생이 반짝반짝 작살날 거야 언니를 믿어봐
아저씨 오라이! 차가 후진한다
아이가 뒷바퀴에 끼인 채 교보생명 아저씨의 출근길에 동행한다
나뭇가지가 텅 빈 골목 한가운데 서 있다
비닐봉지가 나뭇가지 위로 떴다 사라진다
이것은 현대미술이오니 아이의 불행을 현대자동차가 응원합니다
301호 김 할머니가 문을 연 채 현관에 놓인 손주 신발을 뭉개고 앉아 있다
할머니, 할머니의 말년엔 명예운이 있어요 나와요 골방에서, 자연스럽게 걸어가요
할머니 걷는다
나, 5층에서 할머니를 향해 흑백의 개를 집어 던진다
여든셋이랬나, 고생하셨어요
자타살 협동조합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빈 봉지’고요, 보통 봉지 언니라고 불러요
어디든 달려갑니다, 원하시는 모든 걸 담아, 슥
콰이
콰이는 누웠다
달과 커피나무 아래
인간이 아는 달과
인간이 모르는 염소 곁에
뱀파이어는 인간의 잠을 먹는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은
죄다 울음을 터트리고
그는 가만히 누워 눈을 맞춘다
너무 아름다운 노을 속에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콰이는 내 목을 빨며
사랑해,
말하지 않았다
달로
밝고 명랑한 단순한 사람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골목을 따라 길게 구부러진 목의 이름
다롤
구름이 목을 베며 지나간다
별일 아니라는 듯
머리 없이 사는 하루 이틀
한평생
종로 큰 집 드나드는 무학 식모가
종로 스콘 전문점을 지나듯
몰라
난 행복해
나는 행복한 거야
스콘?
잠 못 드는 소년이 말한다
불행이라는 게 있다죠
산다는 건 뭘까요
아반 자요, 엄만 요가
나는 먹고살 만하지만
밝아오는 아침은 이토록 끔찍한걸요
여러 가지 생각하다
몇 개의 알약을 삼키려 목을 젖히다
태양이 쿵
아침이 떡
활기찬 서울이 왔다
6 · 25를 지나
총에 맞아 등이 터진 언니와
비쩍 곯은 엄마의 시체를 넘고 넘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 딸에게
글자는 몰라도 돼
밥만 먹여주면 돼 밥만
온 가족이 멸족한 소녀의 배달 가방에서
훼미리주스와 함께 넘실거리는 한세상
밥 몇 그릇 먹고 나니 팔순 노인이다
별일 아니라는 듯
전쟁이 끝나고
민주주의라는 것이 왔다
* 이 시는 1941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이애순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은 우르르 꿀꿀』, 문학과지성사, 2017.